[장애우와 직업] 손끝에 베어있는 13년간의 땀방울
본문
<끝까지 남은 사람은 단 한사람>
김용기씨는 오늘도 그의 작업실 겸 침실로 사용하고 있는 그의 화실의 전기장판에서 아침을 맞는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밤늦게 까지 작업을 했던 화실을 대강 치우고, 그림을 배우기 위해 그의 문하생으로 있는 한 여학생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리고 오늘 그가 그려야 할 그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김용기씨가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13년 전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였다. 그는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지체장애인으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다. 그는 최종학력이 중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을 뿐이다. 그 후 그는 어느 영세한 공장에서 2년 간 일했고 그 즈음에, 동양화가로서 운봉(雲峰) 이규완 화백(畵伯)을 만나 그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규완 화백의 문화로 들어가 민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는 크리스챤으로서 종교적인 어려움을 겪었다한다. 그것은 민화가 불교적이고 또한 그림자체가 처음대하는 사람에게는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민화를 그림 그 자체로서만 이해하기로 하고 종교적 문제를 떠나서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규완 화백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는 6∼7년 간 철저히 그의 문하에서 그림 수업을 했다. 민화를 처음 배우기 위해 문하생으로 들어가면 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붓으로 선긋기, 카피작업 -밑 본을 놓고 연필로 따라 그리는 것- 등을 거치게된다고 한다. 그가 문하생으로 있던 6∼7년의 기간에 90명 정도의 그림을 배우기를 원하는 문하생들이 이규완 화백 밑으로 찾아들었으나 그 중에서 끝까지 남아 김용기씨처럼 독립한 사람은 김용기씨 단 한사람 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한다. 이처럼 민화를 배우기 위해서는 남다른 인내가 필요했다.
<손끝에 배어있는 13년 간의 땀방울>
성남에 있는 이규완 화백의 집에서 6∼7년 간의 그림 수업을 마친 후 그가 처음으로 독립해서 그의 화실을 차린 곳은 북아현동의 어느 조그마한 사글세방이었다. 그곳에서의 그의 경제적 어려움은 말이 아니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그는 밥을 지어먹을 쌀이 없어서 김장김치로 끊인 김칫국으로 일주일간이나 끼니를 이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림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가 어디서 다른 무엇을 하고 있을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다는 그의 말처럼 민화에 대한 그의 정열은 남다르다. 그는 혼신의 힘을 바쳐 경제적인 많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민화를 그려왔다. 그러나 그의 경제적 어려움은 뚜렷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비록 어느 추운 겨울날의 김칫국으로 끼니를 잇던 극빈함은 벗어났지만, 기자가 찾아간 그의 화실인 남영동의 50만원에 8만 원짜리 사글세방은 그렇게 그의 생활이 풍족하다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는 그 작업실을 화실, 침실, 주방 등으로 동시에 겸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김용기씨의 말을 들어보면 직업인으로서 민화를 그려 성공한 사람도 꽤 많다. 예를 들어 그의 민화를 그리는 친구들 중에는 민화를 그려 집을 장만한 친구들도 있다한다. 그리고 김용기씨 또한 경제적으로 한 달에 일백 오십 만원 정도의 수입을 챙길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용기씨는 그의 그림은 화폐로 계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13년 간 그가 땀흘린 노력의 결정(結晶)은 그의 손, 손끝 마디마디에 배어있는 그림에 대한 감각과 애정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겨레의 그림 민화>
기자가 김용기씨에게 민화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단 한마디로 겨레의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몇 년 전까지 동양화라고 이름 지우던 우리의 그림을 이제는 민족의 개성을 살린 한국화라고 이름 지우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현상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전통적 그림을 한국화라고 칭(稱)했을 때, 진정 우리의 그림, 한국화가 될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민화일 수 있고 그래야만 우리 한국화가 진정 우리의 그림으로서 자리 매김 될 수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우리의 것을 망각한 채 외래(중국)의 것만이 뛰어나다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에 따라 외래의 그림에 반(反)해서 민화(民 )는 글자 그대로 우리 백성, 우리민중 우리민족의 삶의 애환과 민중의 통렬한 사회 비판의식을 담은 진정 우리겨레 대다수 민중의 공감을 자아내는 그림이다. 그러므로 민화가 한국화의 주류로서 위치를 확고히 할 때, 우리 한국화는 독창적이며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라고 그는 또한 말한다.
그는 또한 그 자신이 민화를 배우면서 우리의 것에 관심을 갖게되고 우리의 것에 애착이 가게 되었다고 얘기하면서 겨레의 그림인 민화를 그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우리의 것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민화쟁이 의봉 김용기씨>
기자는 솔직히 민화작업을 하고 있는 김용기씨를 과연 직업화가로 표현해야 하느냐 혹은 예술화가로 표현해야 하느냐 하는 고민 아닌 고민을 하게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작업에 대해 상업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이 결합되었다는 그의 말에서 조선시대 때의 환쟁이, 그림쟁이의 장인정신이 생각나게 되었다 즉, 상업적으로는 자신의 그림을 생활 영위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한편 예술적으로는 자아를 성취하던 조선시대 장인들의 장인정신, 그래서 기자는 김용기씨를 민화쟁이 김용기씨라고 부르고 싶다.
한편 김용기씨는 한국민화 연우회 (韓國民 硏友會)라는 민화동인에 동인으로 있으면서 매년 봄·가을 2회씩 정기 전시회를 갖는다. 그는 전시회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민화에 대해 관심을 표명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애로점은 현대에 맞게 어떻게 하면 민화를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애로점이라 한다.
위에 적은 바와 같이 민화를 그리고자 원하는 사람은 우리 겨레의 것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어야 하며, 오랜 배움의 기간을 견뎌낼 수 있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것을 한다는 자긍심이 있어야 한다.
민화쟁이 의봉(義峯 : 김용기씨의 호)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의 뇌리에는 모든 역경을 이겨낸 불굴의 장인정신이 오늘날의 의봉 김용기씨를 존재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용기씨가 말하는 민화쟁이 직업 안내기원 : 우리민족, 우리 겨레의 그림으로서 우리 민족이 존재할 때부터 있어 왔다고 할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 부터의 서민의 그림을 말하기도 한다.
민화가가 주로 그리는 소재 : 십장생도, 어각도, 쌍치도, 운용도, 까치, 호랑이 등
경제적 능력 : 처음 문하생으로 들어가면 10여 만원 정도씩 받는다. 그리고 독립해서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전망 : 전망은 대단히 밝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라는 말처럼 앞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다면 더 더욱 우리 것이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각 대학에 민화 과가 없지만 앞으로 생겨날 전망이다.
이 직업이 가능한 장애 : 한쪽 손을 사용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는 장애는 약간 어렵다. 대작(大作)을 할 경우 어렵기 때문이다. 시각장애, 정신박약, 뇌성마비는 불가하다.
민화를 배울 수 있는 곳 : 민화를 배우고자 원한다면 전시회나 개인화실을 찾아가 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 배울 수 있다.
수료기간 : 능력과 노력에 따라 다르지만 빠르면 3년 늦으면 5년 정도가 걸린다. 김용기씨는 굉장히 늦게 독립한 편에 속한다. 반면에 2년 정도 후에 독립하는 경우가 있으나 독립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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