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장애인 복지에 대한 소시민의 견해
본문
예를 들어 불편한 사람이 길 건너의 장소를 가고자 한다면 휠체어를 타고서 지하도로 건너갈 수 있겠는가. 아니면 육교를 올라갈 수 있겠는가. 또 한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이 도시의 한복판을 걷고 있을 때 어떻게 길을 건너며, 어떻게 턱이 있는 보도에서 건널목으로 건널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떤 건물을 지을 때도 또한 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장애인 전용의 시설들을 얼마만큼 생각하고 있는가 스스로 돌이켜 보자.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사람은 사랑의 진리를 알지요.
참사랑은 가난함도 부유함도 없어요.
괴로움도 즐거움도 우리 함께 나눠요.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은 주는 거예요.」
「한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성서 귀절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생명의 소중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다.
우리 생이 있음으로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아낄 수 있으며 그러기에 나에게 주어진 한 생명을 우리는 언제나 아끼고 귀중하게 나누어야 됨은 우리가 자신을 쉽게 버릴 수 없음이라.
신이 한 인간에게 생명의 탄생을 부여하였을 때는 그 생명력의 활기와 함께 인격체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함께 받았음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가 표현하는 지켜야될 의무를 외면하고 또한 많은 권리를 찾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회는 점차 빈곤에서 벗어나 풍요로와 지고 있으나. 얻는 것들 못지 않게 잃어버리는 것들 또한 얼마나 많은 지를 우리는 때로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결코 홀로는 살 수 없다.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함께 나누고 지켜나아가야 될 우리들의 울타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함께 하지 못하는 사회,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자기만을 고집하고 취하려는 풍토가 점점 우리주위에 번져갈 때, 우리들은 어느 틈엔가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거나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자기의 목적만을 위해서 매진하는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란 무척이나 나약하고 여린 탓에 자기 마음속에 색안경을 끼고서 세상을 바라다 본다.
때로는 검은 마음의 안경을 끼고서 어둡고 긴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듯 철저히 외면해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새빨간 안경을 끼고 서서 음흉하고 사악한 눈으로 세상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자기 것만을 고집하고 채우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위선의 하얀 안경을 끼고서 전혀 자신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내숭을 떨면서 남보다 자신을 위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은가.
불과 수십년 전, 너와 나 사이에 담하나 조차 없이 지내던 인간관계는 언제부터인가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잘못 자리잡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마음속에 높은 울타리를 쌓고서 남을 경계하고 불신하는 풍토로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 모두가 각기 자신의 인생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따라 성공과 결실을 얻기 위해 부단한 경주를 한다.
자신의 부를 위해 또한 명예나 지위를 얻기 위해서 제각기 다른 목표를 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 이르러 남는 것이라고는 우리가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본연의 빈 껍데기뿐인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뛰어야만 하고 달려가야만 하는가? 하는 어리석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해 보면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쓴 웃음을 지을 뿐이다.
2. 본론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 또한 다양하다.
머리가 유난히 좋은 사람, 손재주가 남들보다 월등히 나은 사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시나 글을 잘 짓는 사람 등 각자마다의 소질과 능력은 저마다 다르다. 물론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한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은 우리가 쉽게 판단도 결론도 내릴 수 없는 것임에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결론을 내리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어두운 곳에서 고통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들인 것이다. 어제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건마는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느냐는 것처럼 나누고 함께하기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만의 우리 국가를 다시 되찾았을 때, 우리는 피땀 흘려 일하면서 잘 살 수 있는 그 날을 꿈꾸었다. 그러던 것이 6.25동란으로 인해 다시 국토는 황폐되고 우리들의 생활은 너무나도 궁핍하게 되고 말았다.
생활의 곤란과 함께 전쟁 중에 부모와 가족을 잃어버린 많은 전쟁고아가 쏟아졌으며, 많은 상해자들이 발생되었다.
국가의 경제는 바닥에서 헤매고 또한 저마다 자신의 생계만이 모든 것을 쏟을 수밖에 없는 탓에, 자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던 실정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사회사업은, 국가로부터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도 남을 돕겠다는 뜻 있는 몇 사람의 노력으로 사회로부터 버려지고 설움을 당하고 있던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과 희생도 경제적인 고충으로 인하여 결국 소수의 인원만이 혜택의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을 뿐, 상해를 당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에겐 그러한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해방 후부터 1960년도까지도 외면시 되왔던 사회복지정책들이 1961년에 이르러서야 생활보호법이 제정되고 1963년 산업재해 보상보호법, 그리고 특수직업 및 공무원, 군인 보상법 등이 만들어지면서 겨우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대책이 세워졌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실제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은 일반인과 적은 인원 뿐이었다.
이렇듯 형식성을 벗어나지 못한 정책들은 오늘날 경제 성장과 더불어 생활수준 향상의 풍요로움 속에서도 사회복지의 낙후성을 벗어나고 있지 못한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사회가 점차로 산업화·도시화·공업화되면서 이와 함께 생활수준의 향상과 의학 및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지만, 그 반면 산업재해 및 교통사고 등 각종 사고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현재의 사회 구조는 매우 이상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그 옛날 병이 나거나 다치면 치료를 했던 치료의학의 발달로부터 점차 병을 예방하고 지키려는 예방의학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그 치료와 예방으로 막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내지 재해로부터 재활하려는 재활의학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얼마 전 기획원에서 발표한 통계를 인용해 보면 현재 전국에는 약 100만명 정도의 장애인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고되어 밝혀진 수치일 뿐...
이제는 병이나 사고로 인해 상해를 입었다든지 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는 그 때부터의 삶이란 사회의 울타리 속에서 같이 할 수 없는 제약된 생을 고통과 좌절 가운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들고 함께 나눌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사회적인 인식의 점차로 그들에게도 무엇인가를 인정해주며, 그들 나름대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터전과 기회를 부여해야 된다는 분위기가 일면서, 비록 많이 늦었지마는 1981년 심신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법의 제정은 단순히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그들이 인정하고 수용할 충분한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 법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야말로 기막히게 멋진 것이라고 혹 자만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복용하는 본인이 좋아야됨은 물론이고 또 어찌 아파보지도 괴로워 보지도 못한 사람이 아프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심정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문화생활이 높고 GNP가 몇 천불이 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득이 불공평한 분배, 도시와 농촌의 극심한 격차, 그리고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과 받고 있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우리 모두가 원하는 그런 사회복지 국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전 기획원에서 발표한 통계를 인용해 보면 현재 전국에는 약 100만명 정도의 장애인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고되어 밝혀진 수치일 뿐, 우리의 주위에는 알게 모르게 고통과 불편함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진정 우리 모두가 사랑을 나누고 같이 하고자 원한다면 그들이 지닌 아픔을 이해하고 노력하여야 될 것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정당한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학과나 학교를 선택할 수도 없음은 고사하고, 이들이 원하는 곳으로부터 거절당한 채 가슴만 움켜쥐고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과, 기술이 있어도 회사나 기업체로부터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당한 이들, 그리고 무엇인가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들이 많건만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배워야 하는 것인지 몰라서 애를 태우고 있는 이들의 진정한 바램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려고도 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모두가 잘 사는 사회는 분명 이처럼 외면되어진 그늘이 많은 사회는 아닐 것이다. 이들이 평범한 생을 영위하는데 불편과 불평등을 느끼며 지낸다면 우리의 사회복지 정책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3. 결론
날로 도시는 빌딩의 숲을 이루며, 각종 시설과 설비는 첨단의 것으로 발전하고 또한 우리들이 그 모든 것을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불편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불편한 사람이 길 건너의 장소를 가고자 한다면 휠체어를 타고서 지하도로 건너갈 수 있겠는가. 아니면 육교를 올라갈 수 있겠는가. 또 한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이 도시의 한복판을 걷고 있을 때 어떻게 길을 건너며, 어떻게 턱이 있는 보도에서 건널목으로 건널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떤 건물을 지을 때도 또한 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장애인 전용의 시설들을 얼마만큼 생각하고 있는가 스스로 돌이켜 보자.
모든 게 한결같이 정상인들 중심으로 계획되고 만들어진 것들뿐이다. 우리는 좀더 많은 풍요를 누리기 원한다. 하나 몸이 불편한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생활의 풍요보다 정상인들과 격차 없는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며,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풍토가 아닌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람과 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리라.
우리 동네에 고아원이나 재활원 등이 생기면 집 값이며 인식이 안 좋아진다고 시나 정부에 탄원하는 일부 그릇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과, 이른 아침에 장애인을 만나거나 같이 할 경우 괜히 무슨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멀리하는 사람들,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택시나 버스를 타려고 거리에 서있노라면 귀찮고 성가신 듯 꽁무니를 빼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부 기사들의 잘못된 인식들이 이들의 마음속 깊이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아직 전국적으로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정확한 통계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국가 차원에서의 사회복지에 대한 그릇된 정책은 뒤로 제처두고라도, 일반 우리 국민들의 장애인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하루속히 없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시급한 일중에 하나이다.
모든 것이 밑이 있어야 위도 있는 것처럼 우리 국민 각자가 주위에 있는 장애인들도 우리 울타리 속에 끌어들여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는 가운데 우리가 꿈꾸며 그리고 있는 사회복지 국가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힘써야 될 것이다.
(現 은평복지학교 물리치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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