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검찰수사와 세월호 인양 그리고 장애인의 삶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박근혜 검찰수사와 세월호 인양 그리고 장애인의 삶

인권이 던진 질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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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한 박근혜 씨가 피의자 조사를 받으러 서울 중앙지검찰청에 머물다 갔다. 21시간 조사라고 언론들은 요란을 떨었지만 조사는 자정 전에 끝났고 침대까지 마련되고 변호사들도 대동했으니 사실 그만한 시간을 조사받지는 않았다. 박근혜가 돌아간 날, 나도 요란스런 보도의 장소인 중앙지검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 봤다. 피의자 신분이 아니라 고소인 자격이다. 경찰이 300명 미만이라며 도로행진을 방해해서 직권남용으로 고소했다. 고소인임에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조사를 받았다. 검찰청 여기저기에 박근혜 씨가 들린 흔적과 말들을 접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내 마음을 특히 착잡하게 한 것은 세월호 인양 소식이었다. 고소인 조사인데다 변호사가 조력자로 함께해서 검사 사무실에 틀어놓은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세월호 인양소식과 박근혜 검찰조사를 번갈아 보도하고 있었다. 묘했다. 광장에서 외쳤던 “박근혜 가고 세월호 올라와라!” 는 구호가 현실이 된 것도 그렇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인양을 박근혜가 막았다는 게 상징적으로 드러난 현실이 생생한 아픔으로 돋아났다.

 

예우와 예의

박근혜 씨에 대한 검찰 조사에서 그는 대통령님이라고 불렸을 뿐 아니라 영상녹화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검찰의 ‘과잉예우’가 논란이 됐다. 형사소송법 제244조2에는 영상녹화를 할 수 있으며 피의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게 아니라 검찰의 판단으로 하게 돼있다. 그러나 검찰은 박근혜의 변호인에게 물었다. 묻지 않아도 되는데 물었으니 변호인단은 옳다구나 반대했을 게다. 권한 없는 피의자에게 선택권을 준 셈이다. 선택권이 없는 자에게 선택권을 줬으므로 특혜다. 형사소송법에 영상녹화 제도가 도입된 게 2007년도라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 조사 당시에도 영상녹화를 했다.

그렇다면 검찰은 왜 박근혜 씨에게 과하게 예우를 다했을까? 검찰에게 박근혜 씨는 아직 피의자이라기보다 권력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언제든 자신의 출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자. 아직도 박근혜 씨를 종교처럼 따르는 무리 때문이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게는 아량이 넓었던 검찰의 태도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집회 참석 몇 번했다고 벌금을 날리거나 기소를 수시로 하는 검찰이기에 형평성은 애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했다. 최소한 검찰이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수사절차들은 지킬 줄 알았으나 예상 밖이었다.

방송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예우란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를 넘었다는 표현이 ‘과잉예우’이니 그냥 예우는 괜찮다는 말이 아닌가. 사전을 찾아봤다. 예우는 ‘예의를 지키어 정중하게 대우함’이라는 뜻이니 정중하게 대우하되 예의를 지킨다는 뜻이다. 예의가 무슨 뜻인지 다시 확인했다. 예의는 ‘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과 의리’다. 예우는 보통 신분이 높은 사람, 혹은 공직에 있던 사람들에게 많이 쓰인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에게 예우를 다한다고 표현한다. 아무튼 단어 뜻 그대로 사람에게 정중하게 대우하는 건 잘못된 건 아니다. 문제는 정중한 대우의 속내용이 사회적으로는 전․현직 고위공직자에게 특혜를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전관예우라는 나쁜 의미의 단어에도 붙여 쓴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국가기관에 예우를 받을 일이 별로 없다. 그래도 최소한 예의라도 지켜줬으면 할 때가 많다. 예의란 낱말풀이에는 사람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과 의리란 뭘까. 아마도 사람으로서 상대를 존중한다는 게 아닐까. 상대를 같은 인간으로서 물건 취급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대우하는 것, 사람이니 겪을 마음과 몸의 상태, 관계를 고려해주는 것이 예의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사람간의 연결, 연대가 아닐까.

그러면 국가는 세월호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예의를 다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게다. 게다가 현 정부의 책임을 묻는 유가족들에게 그의 지지자들은 ‘시체장사’니 ‘교통사고’니 하며 모욕했다. 아니 지지자라기보다 정부의 돈을 받은 세력이란 표현이 정확할 게다. 어버이연합이 돈을 받고 관제대모를 한 것 중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많았다.

국가가 예의를 다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을 위로했을 뿐 아니라 세월호가 왜 침몰했고 왜 구조가 안 됐는지, 남김없이 밝히려고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살아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삶의 끝을 아는 것은 망자를 애도할 때 큰 힘이 된다. 애도는 그냥 슬퍼하는 일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어갔는지, 희생자의 고통은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 나중에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망자에게 할 말을 만들어주는 것이 유가족들에게 예의를 다하는 일일 게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시신을 찾지 못한 미수습자가 9명이나 있지만 인양을 하지 않았다. 박근혜 탄핵에 반대했던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원형보존 인양은 어렵다, 비용이 많이 든다, 인양하다 사람이 희생될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지금 세월호가 올라오고 있다.

어떤 이는 시간이 흘러 시신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텐데 뭐 하러 세금을 들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있다’는 미수습자가족의 말을 되새겨야 한다. 망자도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가족에게는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서 장례를 치르는 일은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그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시간이다. 한 조각 남은 몸이라도 잘 거뒀으니 이제 저 세상으로 잘 가라며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 살아남은 자가 망자와 교류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곳에 너무 오래 있게 해서 엄마가 너무 미안하다.”

배가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수습자 가족의 말이다. 세월호가 1073일 만에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3년 전의 아픔이 다시 살아나 아리다. 사람부터 찾아야한다고 흐느끼며 내뱉은 말은 거꾸로 정부가 지난 시간 사람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준다. 이제야 겨우 세월호 유가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고 있다. 예의가 구시대적인 양식을 그저 따르는 예의범절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예의는 인간(사회)에 대한 공통감각에 기반한 상대에 대한 존중의 다른 말일 것이다. 이웃동료의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 아픔, 고통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공통감각. 세월호 참사는 그런 공통감각을 우리에게 만들어줬다. 공지영 소설의 제목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세월호 참사를 통해 조금씩 익히고 있다.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것,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동시대와 후세대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으로 ‘저항했던 일’이 인간에 대한 예의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도 예의라고.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인간에 대한 예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통 받는 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아픔에 연대하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뜻은 바로 공감과 연대이다.

 

예의에 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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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종종 예의를 착각하곤 한다. 공식 일정을 어긋나게 하거나 일상적인 화법을 쓰지 않을 때 예의가 없다곤 한다. 현상에 집착하거나 현상 때문에 오해되기도 한다. 인권활동을 하는 나로서는 정부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국가기관의 공식행사에 가서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거나 구호를 외치는 경우가 많다. 또는 기업의 인권침해를 알리려고 회사 건물 앞에 집회를 한다. 그럴 때 가끔 곁을 지나는 일부 시민들이 예의가 없다며 혀를 차거나 항의를 하곤 한다. 정말 인권운동은 예의가 없나 싶을 때도 많다. 나는 왜 큰 소리로 외치고 경찰에게 고함을 지르는지, 좀 우아하게 싸울 순 없는지 ….

그런데 무례한 것으로 오해되는 항의행동에 연대로 답한 사람들이 있다. 지난 해 장애인권활동가들이 세계사회복지대회 개회식에 온 정진엽 복지부 장관에게 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관련 면담을 요구하려고 기습시위를 벌였다. 피켓을 들고 연단에 올랐던 여성장애인이 짐짝처럼 경호원들에게 사지가 들려 끌려나왔다. 너무 치욕스러워 울부짖었다. 사람한테 어찌 이럴 수 있냐고. 그걸 본 외국인 참석자들은 매우 놀랐다. 어떻게 사람에게 저럴 수 있는가 하고. 사회복지연맹 회장을 비롯한 외국인참가자들이 정부 대응을 규탄하는 항의행동에 연대했다. 복지부장관이 당사자들과 대화하지 않고 폭력으로 거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사회복지란 인간존엄에 바탕을 둔 것인데 그런 가치를 둔 대회에서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분개했다. 노르웨이의 한 기자는 “노르웨이에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생 처음 본 시위가 절박함 때문이란 걸 알았다고 했다.

그렇다. ‘이렇게까지’라고 표현 할 수밖에 없는 시위는 한국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고, 그만큼 인권 현실이 참혹하기 때문이다. 행사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고 예의 없다고 하기에는 장애인들의 삶이 ‘사람으로서’ 삶이 아니다. 장애인들은 ‘사람으로서’ 장관에게 의사를 전달하려고 했으나 워낙 높은 분이라 만나기가 어렵지 않은가.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게 예의 없는 일이다. 공식 행사장에 행사 게스트도 아닌 사람이 연단에 섰다고 사지를 들어 끌어내리는 행위가 ‘예의 없음’이다. 대화를 거부하는 태도가 바로 ‘예의 없음’이다. 장애인을 인간으로 봤다면, 대화상대로 여겼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관에 대한 예우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는 사회면 좋겠다.

얼마 전 <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폐지 광화문 공동행동> 활동가 30여 명이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를 점거하고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15분간 있었다. 휠체어 장애인들이 많아 경찰력을 많이 동원해야 정리할 수 있었다. 불편하다고 빵빵거리는 운전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것은 노란 리본을 달고 세월호 추모를 하던 시민이 ‘뭐 하러 도로까지 저렇게 잡냐’고 했을 때다. 세월호의 아픔에 공감하지만 장애인의 행동은 불편했던 것이다.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않을 때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목소리가 가닿지 않기에 그렇게까지 하는 것인데 아직 마음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탓이다.

항의 행동의 행태만을 보지 말고 사회적 소수자들이 놓인 삶을 봐줬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때로는 집회 때문에 약속시간에 늦어 불편하고 피곤이 몰려오더라도, 기습기자회견으로 공식 행사를 망쳤다고 불쾌해하지 말고 그/녀들이 왜 저렇게까지 했는지 잠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사람의 입장에서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현상을 접하고 들었던 감정들이 조금은 누그러질 것이다. 장애인도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동의한다면 장애인들의 투쟁이 왜 처절할 수밖에 없는 지 조금은 알아채지 않을까.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왜 단식까지 하고 삭발까지 하냐고, 무리수를 두냐며 비난하지 않았던 이유도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공통감각이 우리사회에 널리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작성자글.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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