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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의 이성교제, 결혼이 희박한 이유

한국의 정신장애인들은 ‘우생학’을 지지하는 듯하다. 당사자 동료들이 우생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음에도 그렇다. 몇 년 전만 해도 나 역시 알지 못했다. 2011년 ‘장애인청년학교(서울DPI)’에 가서야 그 용어를 처음 접했다. 일반상식을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당시 내 나이는 47세였다.

우생학이라는 말은 찰스 다윈(1809~ 1882)의 사촌인 프란시스 골튼 (1822~1911)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우생학은 두 가지 형이 있다. 극단적 형태의 우생학은 우수한 사람한테 출산을 의무화시키고 가난한 사람에겐 피임을, 부적격자에게는 불임 수술과 안락사를 의무화한다. 온전한 형태의 우생학은 강제적 수단을 쓰지 않고 정신적 신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타고난 사람들의 수를 줄여가는 방법을 연구한다.(중략) 우생학은 실제로 피임, 불임수술, 낙태, 안락사를 돕는 촉진제가 돼왔다. 어원은 그리스어 eugenes(잘 태어나다)이다. 출처: 가톨릭대사전

옛 독일의 <유태인 학살>, 근대 미국의 <건강한 가족>선정 및 시상, 60~70년대의 우리나라 <우량아 선발대회>등의 뿌리에 우생학이 자리하고 있다. 정신장애인은 동료 당사자를 좀처럼 이성교제·결혼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유는 우생학과 동일하다. 당사자들이 우월하고 우성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장애인의 도태를 부추기는 사회

정신장애인은 결혼률이 무척 낮다. 여러 장애유형과 비교해도 최하위에 속한다. 이성교제 또한 그렇다. 정신질환에서 많이 회복된 당사자라고 해도 별 차이가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것은 이성교제와 결혼에 대해서 바라보는 당사자의 시각과 추구하는 방향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돈, 권력, 학력, 외모, 능력 등을 지나치게 추앙한다. 그러다보니 이런 조건들이 이성교제·결혼 대상자 선택에도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대개 우선순위는 자신보다 좋은 환경을 갖춘 사람이다. 그 다음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활하는 사람이며,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만 한다.

사람이 정신질환에 걸리면 몇 년은 우습게 까먹는다. 또래들이 사회경험을 쌓는 기간을 당사자는 병마로 시달리면서 보내게 된다. 사회에서 뒤처지기 딱 좋은 상태에 놓인다. 비당사자와 견줘도 손색없는 당사자에게도 정신장애・질환은 엄청난 핸디캡으로 작용한다. 결혼은 더욱 그렇다. 비당사자는 정신장애인을 이성교제를 비롯한 결혼대상자로 여기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정신장애인도 비당사자가 추구하는 조건과 유사한 조건을 추구하므로 동료당사자를 이성으로 상정하지는 않는 편이다.

 

비당사자를 원하는 가족들

당사자가 동료를 선택하는 것을 대부분 가족들은 반대한다. 이성교제·결혼의 대상이 비당사자가 아닐 바엔 차라리 혼자 살 것을 종용한다. 새로운 가족으로서 당사자는 가족들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신장애인 배우자는 가족인 당사자를 더욱 불행하게 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내포돼 있다. 당사자들은 실연당할 기회조차 별로 안 생긴다.

자녀를 위한다면서 부모가 비당사자를 찾아 혼례를 맺어 준 경우를 네 번 정도 봤다. 다음이 그런 예이다. 당사자 여성 둘은 무시당하며 살다가 이혼 당했다. 어떤 여성은 정신장애인 남편을 버리고 잠적했다. 한 동료 남성은 가정에서 발언권이 전혀 없다. 아이에겐 아빠로서 위상을 잃은 지 오래다.

결혼 이후에 정신장애를 갖게 된 동료는 그나마 배우자의 배려를 받으며 사는 경우가 있었다. 때때로 장기입원을 당하더라도 말이다. 비당사자들의 결혼은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외형적인 가정은 유지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반면 앞의 예처럼 애정과 신뢰가 빠진 채 출발한 비당사자와 정신장애인의 결혼생활은 유지가 거의 불가능하다.

 

동료를 원하지 않는 당사자들

정신장애인들은 어떤 이성을 선호할까? 우선순위는 대체로 비당사자다. 그 다음은 자신보다 회복이 잘된 것으로 보이는 당사자이다. 옵션으로 경제적 여건과 함께 잘생겼거나 예뻐야 할 것을 기대한다.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당사자들이 요구하는 조건이다. 이런 동료들은 주변에서 기능이 좋다는 평을 듣는다. 또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비당사자들과 의사소통을 잘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주변의 비당사자들이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맞춰주는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치료와 재활과정에서 만나는 주변인들인 것이다.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므로 당사자 개인에게 맞는 대화를 구사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종사자들은 듣는 자세가 다르다. 가족이나 사회일반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내 말이 어눌해도 상대방이 말을 잘 받아주면, 나 자신은 대화를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실제로 말을 잘 한다고 해도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런 점을 간과하고 비당사자와 잘 통한다고 느끼는 정신장애인들은 더욱 비당사자를 이성으로 상정한다. 그 외의 동료들도 대개 이성은 비당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사자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들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지만 그들 중 누군가와 맺어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좋게 느꼈던 그런 이미지를 갖춘 비당사자와 만나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동료들의 여가활동 관련 설문을 보면 TV시청이 제일 많다. 사실 당사자들은 TV를 잘 안 본다. 여가활동을 굳이 꼽자면 그 중에 TV라는 뜻이다. 동료들 중에는 노래듣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동료들의 노래 선택에 TV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비주얼이 좋아 보이도록 포장된 스타들을 방송에서 보고 그들의 노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상형의 외모에 대한 눈높이가 정해진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사람에게 필요한 극히 최소한의 것을 뺀 나머지 것들은 신경 쓰기어렵단 뜻이기도 하다. 외모를 잘 갖추는 것 또한 당사자에겐 힘들다. 스스로 외모를 가꾸는 당사자가 있다면 어떨까? 우리들이 말하는 증상이 무척 좋아진 것이다. 이건 단순히 증상이 없어졌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약물 부작용 때문에 만사가 힘들고 귀찮다고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외모를 깔끔하게 유지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금전 여유가 없으면 옷차림이 후줄근하게 된다. 그러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당사자 대부분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일자리도 턱없이 부족하다. 옷을 살 돈도 없거니와 일자리도 없다. 고유의 외모는 차치하고 그것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맵시 있는 옷차림을 하도록 지원하는 가정은 많지 않다. 금전 여유도 없거니와 정신장애인에게 복장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족이 더 많다. 당사자는 운동 부족으로 몸매가 안 좋을 수도 있다. 치료 과정에서 살찌는 부작용이 있는 약을 쓰기도 한다.

한 마디로 좋아 보이는 외모의 당사자는 드물다. 간혹 외모가 좋은 당사자가 있을 때, 그가 찾는 사람은 비당사자이거나 자신보다 더 나아보이는 당사자이다. 정신장애인 대다수는 외모를 중심으로 이성을 선택한다. 당연히 또 다른 요구사항도 가지고 있다.

 

결혼한 당사자 커플들

약 8년 전부터 지금까지 당사자 커플 10쌍의 결혼을 봤다. 그 중 두 커플은 결별했다. 나머지 여덟 커플은 잘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집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그래서 가족과 등지는 심정으로 시작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결혼 후 일정기간 그럭저럭 자신들이 앞가림하며 살았더니 가족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도 한다. 그 중엔 양가와 발을 끊은 경우도 있었다. 당사자 간 결혼에서 아이를 둔 커플은 아직 못 봤다.

비당사자 또는 자신보다 회복이 잘 된 동료(잘 생겨야 함)를 왜 선호할까? 그들이 정신적으로 자신을 잘 이끌어(보살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남·녀 당사자들의 표준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대단히 합리적이다. 상대방이라도 온전했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당사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가격대비 질을 따지는데, 반려자 부분은 오죽할까? 대부분 당사자들은 이런 현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성교제와 결혼을 체념하고 산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비당사자라도 외모가 평균이하? 라면 동료들은 관심이 없다. 회복이 잘 된 동료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외모가 별로라면 사귀고 싶은 대상이 아닌 것이다. 마치 동료들의 시선은 상향으로 평준화된 듯하다. 모두들 위를 보느라 옆이나 아래에 있는 보석을 보지 못한다. 동료는 나 자신을 다듬어내는 보석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데도 그렇다.

 

결혼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회복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을 하면 회복이 따라온다. 나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을 선망하는 것과 열악해 보이는 사람을 챙겨주려는 것. 어느 쪽이 사랑에 가까울까? 정신장애로부터 회복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어떤 삶을 사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기보다 열악한 동료에게 관심을 가지고 돕는 당사자가 있다. 그는 인성이 회복된 것이다. 그것을 넘어 대상이 열악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한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사랑하는 당사자가 있다. 그 사람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결혼한 당사자 커플들>이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고 본다. 누군가를 선망한다면 대상자가 무엇인가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비장애, 재산, 학력, 능력, 외모, 마음씨 등일 수 있다. 보통 매력이라고 한다. 대상자에게서 매력을 느꼈던 점 또는 부분들이 없어져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비장애인도 나이가 든다. 나이가 많을수록 장애도 늘어난다. 그 전에 장애가 올 수 있다. 재산은 모으는 것보다 잃기가 쉽다. 대상자의 학력은 그 사람 것일 뿐이다. 사람의 능력은 점차 떨어진다. 곱고 멋있게 늙는 외모란 거의 없다. 마음씨에도 치매는 찾아온다. 앞서 열거한 것들은 사람에겐 배경과도 같다. 배경들을 하나씩 지워내고 모든 부분이 없어지면 진짜 그 사람만 남는다. 배경이 없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껍데기를 사랑한 것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대상자의 배경은 아무것도 아니다. 배경을 사랑할 게 아니라면 동료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성교제나 결혼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가 궁극의 숙제인 것이다.

작성자글. 김락우/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표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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