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간, 우리의 시간
본문
“나이 들면 왜 시간이 빨리 가는 줄 알아? 일처리 속도가 느려서야.”
얼마 전 가족 모임에서 만난 새언니가 건넨 말이다. 내가 요즘 일도 느리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서 힘들다고 푸념을 하자 위로하듯 나이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 건데 묘하게 안심된다. 남들도 겪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걱정으로 어두웠던 마음이 조금은 맑아진다. 한때 인권운동계의 강철체력이라고 불릴 만큼 건강도 좋았고 여러 일들을 한꺼번에 소화해냈는데 요즘은 하나를 해내기도 버거울 때가 많다. 시간은 내 몸의 나이만큼 느려지고 있다. 아니 내 몸은 이제 다른 속도의 시간에 접근하며 다른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다른 속도의 시간
생각해보면 시간은 항상 동일하지 않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도, 일상에서도 같지 않다. 재미없는 일을 할 때는 시간은 아틀라스가 세상을 진 것처럼 무겁고 느리게 돌아가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낼 때는 여울목의 물들이 떨어지듯 휘익 지나간다. 또한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이 동일하다고 착각한다.
<잠수종과 나비>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잡지 엘르의 편집장으로 살던 장 도미니크 보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전신마비 상태에서 쓴 글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몸 전체에서 쓸 수 있는 것이라곤 왼쪽 눈꺼풀밖에 없던 그는 몸이 달라져서도 자신이 하던 일인 글쓰기를 했다.
한쪽 눈을 깜박여 쓰다 보니 15개월이나 걸려서 책을 만들 수 있었다. 20만 번 눈을 깜빡여서 결과물을 냈다. 과거의 그라면 15개월이나 걸렸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더구나 생각을 글로 옮기는 글쓰기는 한 시간에 한 장도 못 쓰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은가. 그리고 비장애인이라고 모든 일을 빠른 속도로 하지는 못한다. 어떤 일은 처음 해봐서 느려지기도 하고 어떤 일은 하기 싫어서 느려지기도 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사람마다 시간이 같지 않다는 걸 아주 몰랐던 건 아니다. 인권활동을 하면서,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알고는 있었는데 실감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장애인권영화제에서 봤던 독립영화의 장면들을 기억해본다. 밖으로 외출하기 위해 3시간 넘게 준비해야 하는 장애인들의 일상이 그려졌다.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젊은 비장애인들이라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을 해나가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활동보조인이 있는 경우에는 좀 나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장애인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여장을 챙기는 것에 비해 시간이 걸린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신체리듬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니라도 장애인권활동가들과 자주 만나 기자회견도 하고 집회도 하다 보니 익히 알고 있었다. 아침에 하는 장애계의 기자회견은 늦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장애인콜택시와 같은 교통서비스가 열악한 탓도 있다. 장애인콜택시를 부른다고 바로 오는 게 아니다. 심할 때는 2시간을 기다릴 때도 있다.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제도가 있거나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나 장애인콜택시가 많다면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시간은 달라질 것이다. 시간은 몸의 차이에도 영향을 받지만 어떤 사회제도인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규격화된 시간 너머를 상상하기
이렇게 시간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사회제도에 따라 다르다. 시간의 속도를 규격화하려고 시도한 것이 산업화, 이른바 자본주의의 탄생이다. 업화로 기차와 같은 유통수단, 교통수단이 생겼다. 공간 개념도 달라지고 시간 개념도 빨라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전에 살아왔던 시간 관념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자연리듬에 따라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는 것이니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데도 중요한 일이었다. 근대 시계의 발명은 자연리듬이나 신체리듬에 따라 생활하던 사람들을 규격화된 시계(기계)에맞춰 생활하도록 했다. 날이 궂든 맑든 9시에는 출근해서 8시간(당시에는 12시간까지) 일해야 했다. 자본주의 발달로 지금은 시간당 생산량을 정하는 것까지 이르면서 노동자의 시간과 몸까지 통제하며 탈취하고 있다. 그리고 규격화된 시간에 따라오지 못하는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은 배제시켰다. 규격화된 시간에 맞출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기보다는 시간에 맞춰 살기 바빴다.
특히나 한국처럼 뭐든 빨리빨리를 강조하고 그에 익숙해진 문화에서는 어떻겠는가. 그런 점에서 ‘먹고사니즘(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치관에 매몰돼 있는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은 자본의 시간통제, 자본이 정해준 시간과 생애에 맞춰 살기에 급급했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규격화된 시간개념을 넘어서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장애와 비장애, 청소년과 비청소년, 노인과 비노인, 노동자와 비노동자들이 서로 교차하는, 우리의 시간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생산성을 높이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의 상상력이 기계를 만들고 시계를 만들었다면, 규격화된 시간이 아닌 저마다의 시간을 서로가 바라볼 수 있으려면 기존의 틀을 깨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먼저 가끔씩 규격화된 시간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을 만드는 실천을 각자 해보면 어떨까. 공장으로, 회사로 가던 일을 멈추고 멍하니 집에 있거나 산책을 하고 책을 읽으며, 기존과는 다르게 이른바 비생산적인 시간을 살아보자. 기업의 이익을 높이고 월급을 받으며 내 생존을 위한 시간이 아닌 타인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장애인 친구가 있다면 장애인 친구의 시간에 맞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부모가 늙었다면 늙은 부모의 시간에 맞춰 하루를 보내보자. 아마도 한 것도 없는 듯한데 금세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도 있고 마음의 평안을 교감의 시간을 느낄 수도 있다. 새로운 시간경험이 몸에 남으면 더 좋겠다. 가끔 나도 아픈 엄마와 하루를 보내면 한 것도 없는데 금세 하루가 지나는 걸 경험하곤 한다. 나쁘지 않았다. 다음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관찰하고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 뇌는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과 상상을 담당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상상력을 높일 때 기억력이 좋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니 과학적으로도 둘을 떼놓고 말할 수는 없다. 1903년 라이트형제가 사람을 태운 비행기 제작에 성공한 것도 꾸준한 관찰과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행기를 만드는 일에 도전했기에 가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도 비행기를 만드는 도전을 했지만 왜 실패했는지 꾸준히 관찰했고 그걸 바탕으로 상상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어떻게 공기를 가르는지,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는지, 사람을 태운 무거운 물체가 어떻게 하늘에 뜰 수 있는지 등을 보고 고민하고 방법을 찾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가 날 수 있다는 데 회의감을 품었지만 라이트형제는 그 문제를 풀 방법을 상상하고 실험했다.
장애인복지제도가 없던 시절, 장애인이 최소한 사람으로서 대우받으며 살 수 있는 방안을 골몰했기에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닐까. 물론 지금도 장애인차별이 심하지만. 다른 세상을 꿈꾸며 싸웠던 장애인권활동가들이 상상하고 꿈꾸고 싸웠기에 가능했다. 함께 연구하고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며 한발씩 내딛었다. 그렇다고 과거와 현재를 보지 않은 채 미래만을 본 것은 아니다. 장애인차별의 사회에서 죽어간 이들을 기억했다. 먼저 떠난 그/녀들이 어떤 사회였으면 죽지 않았을까 하고. ‘내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하고 상상하기보다는 ‘장애인이지만 잘 살 수 있는 사회는 어떨까’하고 상상했기에 조금씩 나아진 게 아닐까.
우리의 시간을 만들기
규격화를 넘는 다른 시간이나 우리의 시간을 만드는 일이 또 다른 단일한 시간을 생각하는 건 아닐 게다. 각자의 시간이 있으면서도 우리의 시간이 존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단지 시간체계를 일치시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시간은 종족마다 시대마다 환경마다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 있어도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지 않은가. 멀게는 2002년을 월드컵 응원의 시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과 장애인의 죽음에 맞선 장애인 이동권투쟁의 시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발전노조 파업과 노동자 탄압의 시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각각 있다. 가깝게는 대한문이라는 장소에 있던 사람들도 다른 시간을 살았다. 쌍용차정리해고와 맞선 연대의 시간을 산 사람들과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을 보는 관광객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2016년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면서 공동의 시간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의 함께 외치는 함성에 더 많은 목소리가 담기도록 한다면 우리의 시간은 그만큼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지금 광장에는 장애등급제폐지를 외치는 장애인들이, 불법파견과 노조파괴 중단을 외치는 노동자들이, 검열과 블랙리스트 규탄을 외치는 문화예술인들이,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외치는 유가족들이 함께하면서 공동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공동의 시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 중 얼마나 우리가 공동의 시간으로 기억할지, 개인에게 남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공동의 시간을 채우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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