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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님, 잠시 휴정을 요청드립니다!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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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활동하고 있는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는 염전노예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실제 이 사건이 일어났던 한 지역에서는 피해자가 ‘염전주에게 맞았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며 인근 파출소에 있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피해자를 염전주에게 다시 되돌려 보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건 직후 민간조사단을 통해 파악된 피해 장애인만 해도 63명에 이르렀고, 여기에 드러나지 않은 장애인들의 수와 장애가 없는 피해자들까지 합하면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장애가 있고 없고를 떠나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착취와 학대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에게 돌려보내는 일뿐이었을까? 이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연구소와 공익변호사단은 이번 소송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학대와 인권침해를 더욱 악화시키는 국가의 잘못된 관행이 없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신뢰관계인으로 법정에 서서

지난 9월, 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 소송에서 피해 당사자 증인심문을 위한 재판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장애인단체 상담활동가로 당사자와 함께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했다. ‘신뢰관계인’이란 말 그대로 증인심문을 하는 당사자와 신뢰가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는 당사자가 얘기를 잘할 수 있도록 정서적 지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부모, 형제, 이웃, 상담가 등 누구든지 동석이 가능하다. 사실 신뢰관계인은 법정 안에서는 어떠한 효력이나 권한도 없는 그림자 같은 인물이지만, 신뢰관계인이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증인심문을 잘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가지는 의의가 크다. 더욱이 재판장에 처음 가보는 지적장애인의 경우, 낯선 환경으로 인해 본인이 겪은 일들을 진솔하게 얘기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 신뢰관계인 동석을 꼭 요청하고 있다.

처음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하게 됐을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당사자에게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래서 사전에 당사자와 함께 재판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상을 보기도 하고, 법정에 있는 각각의 인물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지 미리 살펴보기도 했다. 그리고 재판이 있던 날, 당사자는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꿋꿋하게 잘 버텨줬고 나 또한 신뢰관계인으로서 최대한 당사자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살피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된 재판이 마무리돼 갈 때쯤, 판사님의 반복된 질문에 당사자는 기어코 참았던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당사자와 증인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던 나는 그 누구보다도 당사자가 느끼는 억울함을 가까이서 체감했고, 우리에게 잠시 동안의 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신뢰관계인으로서 재판장님께 당사자의 상태를 고려해 5분 정도의 휴정을 주실 것을 요청했다.

 

염전노예사건 소송의 의미

사실 당사자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참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이 날을 위해 1년이 넘도록 잊고 살았던 염전에서의 끔찍한 생활들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해내야 했고, 그래서인지 그는 증인심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입버릇처럼 ‘염전에 다신 안 갈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소송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그런 피해자를 증인으로 세운다는 것 자체가 매우 죄송한 일 같기도 했지만, 그럼으로써 이 소송에 의미는 더욱 확실해졌다. 비단 8명의 원고들의 삶을 제자리에 가져다놓는 것뿐만 아니라, 조사를 통해 밝혀진 63명의 장애인들과 드러나지 않은 비장애인들의 수, 그리고 동일한 연장선 안에서 함께 고통을 겪어왔을 이름 모를 피해자들, 지금도 언제 어디선가 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착취를 당하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이 소송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작성자글. 백지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 간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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