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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을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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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된 법안은 기존 정신보건법보다 조금 진보적이다. 정신보건법도 개정안도 정신질환 당사자로서 기본 입장은 반대한다. 나는 내가 입원하고 싶을 때 입원하고 퇴원하고 싶을 때 퇴원하고 싶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실재하지 않는다. 조현증과 관련해서 나는 베테랑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증상을 네 번이나 겪었으므로 증상이 심해지면 상시라도 입원할 생각이다.

증상이 심했을 때 노숙인처럼 몇 날 며칠을 길에서 방황하며 잠을 잔적은 있지만, 사회를 파괴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한 적도 없다. 단지 머릿속에 들려오는 환청의 내용들과 환시로 인해 내가 죽은 상태인지 혼란스러웠고 공포감에 떨었다.

네 번의 폐쇄병동 입원 경험을 보면, 증상이 완화되기까지 3일이면 충분했다. 추가로 쉼을 갖는 기간까지 고려하면 일주일, 열흘 정도 입원이 내게는 적당하다. 입원을 통한 증상완화의 효과는 자의입원이나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도 체험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한국은 3, 3+3, 6, ∞ 식의 입원 개월 수를 당사자 동의 없이 설정하고 있다. 그것도 법으로. 경찰에 의한 행정입원 강화? 무엇 때문에? 도대체 누구를 위한 치료방식인가.

 

삶의 질과 이웃 간 사랑은 비례한다.

현행 정신보건법보다 개정안이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은 복지지원이다. 복지에 해당하는 세부 내용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어떤 식으로 작동될지 아직 모른다. 당사자들이 퇴원 후 지역에서 삶을 뿌리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가 있고, 이 같은 방향성으로 디자인된다면 인권침해에 해당되는 강제입원・장기입원을 당사자들이 덜 겪게 될 것으로 본다. 지역에서 지내기에 적절한 환경이 마련되면, 아무래도 재발을 덜하게 될테니까 말이다. 개정법이 당사자의 복지 부분을 부양한다고 해서, 당사자 삶의 질이 동반 상승한다고 예측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정신보건법에 의한 영향을 거의 안 받거나 최소적용을 받는 상태로 지내 온 극소수 당사자들도 있다. 가정경제가 무척 넉넉하므로 병원이나 사회에서 인권침해를 받아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하는 동료들이다. 질환 치료를 대다수 동료들과는 다른 식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치료 효과가 좋아 컨디션이 괜찮아졌을 때, 그 당사자가 일을 하려고 하면 본인이 놓인 사회적 위치를 실감하게 된다. 정신질환자를 위한 일자리는 없다시피 하고, 정신질환자임을 밝히면 자기가 선호하는 대인관계는 거의 맺을 수 없다는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당사자의 배경이 부자이건 아니건 비당사자에게 정신질환자는 기피대상이다.

개정법이 전체 정신질환자의 환경을 조금 상향시킨다고 해서 사회적인 차별이 해제되는 것은 아니므로, 당사자의 상한선은 유복한 배경의 당사자들이 겪는 배제와 비슷하리라 본다. 게다가 정신질환자의 가족들은 당사자의 동료를 좋게 생각하지도 않으며, 허용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특히 결혼과 관련해서는 비당사자와 하든지 아니면 혼자 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그룹이 가족이다. 당사자들 또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태반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회복을 한 다음에 비당사자와 결혼해야지.”

당사자의 주변 사람들로서 일터의 비장애인도 있겠지만, 가족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은 종사자(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들이다. 좋은 의미로서 이들은 당사자의 회복과 사회적응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종사자가 성심껏 지원한다고 해도 대개 한계는 명확한 편이다. 종사자는 당사자와 친구가 되고 싶거나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그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당사자의 성장을 위한 일에 종사하는 입장이라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한편 동료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갖고 있지 않은 당사자들이 대부분이다. 당사자마다 선호하는 사람의 유형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주변에 그저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다. 삶이 좋아지려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 대상으로서 동료가 제외되면 그 상태를 사랑이라 부를 수 없고, 주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정도라면 무관심한 상태에 가깝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요구한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면 그건 사랑하는 것이기보다 좋아하는 마음의 이끌림이다.

오히려 ‘사랑’은 좋아하기에 껄끄럽고 어려운 사람에게로 쏟는 노력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다. 당사자 삶의 질과 회복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성을 가진다.

당사자가 증상 때문에 혹은 개인의 취향이라서 혼자 지낸다? 사랑을 실천할 대상이 없으므로 회복은 불가능하다. 주변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을 사랑하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없는 것과 같다. 당사자를 둘러 싼 외부환경이 당사자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구축한 환경이라면 사랑은 숨 쉬기 어렵다. ‘형제복지원’, ‘희망원’ 같은 곳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인정과 상관없이 내 삶의 만족도(질)는 대단히 높다. 그 원인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사회 통념상 시쳇말은 “사랑받을 만한 짓을 해야 사랑받지”다. 15년 전 증상이 심했을 때 노숙인처럼 길에서 방황하던 중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게 나눠줬다.

2004년 폐쇄병동 퇴원 후 지역에서 정신질환이 있는 동료들을 처음 만났다. 나를 도와준 분들의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동료들에게 잘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이 동료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모습’으로 여겨졌던 듯싶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지날수록 동료를 포함한 주변사람들의 관심과 사랑(그것이 종사자로서 사명감에 의한 것이라도)을 계속해서 받는 입장이 됐다.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야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사랑받을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신질환자를 포함해서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타인을 돕는 사람들을 직접 체험한 것, 그렇게 받은 도움을 어떻게 환원해야 할지 가르쳐준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김락우라는 사람을 선한 눈으로 바라보며 응원해 준 주변사람들, 죄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 덕분에 내가 살아왔던 것이다. 이 안에 사랑이 흘렀다.

 

개정법이 당사자 삶의 질을 부양할 수 있을까?

개정안의 목적은 “국민의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이바지 하는 것”으로 돼 있다. 국민의 정신건강이 증진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뭘까? 비리 없는 깨끗하고 투명하며 정이 넘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한국은 현재 195개 나라 중 부패국가 순위 9위다. 국민의 정신건강이 증진되려면 이런 X같은 환경을 서로 조장하는 대부분 국민들의 비뚤어진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개정안이 법적용 대상자로 상정하는 사람은 정신질환자 혹은 예비 정신질환자다. 그렇다면 이 법의 대상자가 아닌 사람들은 정신건강이 양호하다는 뜻이 된다. 이건 웃기는 얘기다. 정신질환자를 제외한 사람들의 정신건강이 양호하다면 한국사회가 헬조선이 된 건 왜인가? 우리사회의 일반적인 논리는 정신질환자는 루저고 논외 대상이다. 그만큼 존재감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신질환자는 사회가 바람직하게 좋아지거나 불합리하게 나빠지는 데 별달리 역할을 한 것이 없다. 그만큼 한국이 헬조선화 된 책임에서 당사자는 열외에 가깝다.

루저라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기 어렵다. 반면에 낙오자라서 사회에 악한 영향을 끼치는 힘 또한 부족하다. 정신질환자는 일반 국민이 욕망하는 것을 동일하게 욕망하지만(비당사자처럼 사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그걸 구현할 수 있는 힘이 미약한 존재에 가깝다. 게다가 차별과 배제, 억압, 약물부작용으로 능동적 삶을 추구하기도 어렵다.

우리사회는 구성원들이 정신적 성숙을 목표로 하기보다 성공과 출세 지향적인 것이 사실이다. 공부, 운동, 문화예술, 체육을 해도 그 끝에 돈, 지위, 권력이 수반되기를 바라고 있다. 구성원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생활할 때, 이 대열에서 뒤처지면 뒤처질수록 가정에서는 부정적인 소리를 듣게 된다. 학교에서는 왕따, 사회에서는 낙오자 취급을 받기 쉬워진다. 정신질환이 나타나기 쉬운 환경이다. 정신질환에 걸리면 이젠 걸렸다고 배제한다. 누군가 1등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1등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 바로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이다. 뒤처진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등 또한 없음에도 사회는 뒤처짐을 당할수록 냉대한다. 냉대 받는 대표주자는 정신질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낙오자는 나쁘거나 악한 사람들인가? 예를 들면 계속 학원을 전전하는 수험생들은 사회 통념상 낙오자가 맞다. 그렇지만 그들 덕분에 수험시장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먹고 산다. 학원주변의 식당들도 먹고 사는 주요인은 시험에 계속 낙방하는 사람들 덕인 것이다. 정신질환자는 어떨까? 개정법 10조 ‘실태조사’ 장을 보면 ‘정신질환으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손실’이란 표현이 나온다. 정신질환자가 과연 사회적・경제적 손실을 유발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제약사, 병원, 사회복지 등 정신질환자와 관계된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필수적인 기여자가 바로 정신질환자다. 당사자와 가족의 마이너스가 다른 사람에게 플러스로 작용하는 상황인 거다. 이 상황에서 사회경제 손실이란 용어는 어불성설이다. 한국에서 당사자들은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수익을 안겨주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세상을 연극무대라고 할 때, 한국 당사자는 주구장창 환자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출연료도 거의 받지 못하는 채로 말이다. 국민들은 무한경쟁에 가까운 생활모습을 띤 지 오래다. 무엇을 위해서 무한경쟁을 할까? 공부를 잘하면 뭐하려고? 돈을 많이 벌어서 뭐하려고?

국민들은 자신이나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돈 잘 버는 것을 지향하지만 결국 남보다 우위에 서는 것을 원하는데, 바로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오늘날 헬조선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질환자는 본의 아니게 이처럼 그릇된 무한경쟁 상태를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므로 실제로는 사회 안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중이다.

작성자글. 김락우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표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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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null님의 댓글

null 작성일

정신적 장애와 고통이 가르쳐주는 깊은 의미를 사회가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깊은 고통들일 것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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