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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과 대피, 불안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9·12지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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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황남동 지진 피해 지역 곳곳에 지붕과 외벽 수리 중인 모습이 보인다.

사진2. 지진으로 피해를 본 경로당 지붕과 외벽

지난 9월 12일 경주에서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강진이 발생했다. 1차 지진은 리히터 규모 5.1로 19시44분 경 발생했고, 2차 지진은 규모 5.8로 같은 날 20시32분 경에 발생했다. 이 날의 지진은 우리나라 곳곳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 한국의 지진 불감증에 경종을 울렸고, 정부의 무능한 대처 능력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는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잇따라 지진 대피 매뉴얼과 내진 설계 대책 등을 내놓고 있지만, 사후약방문 안에서도 재난약자인 장애인을 위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방바닥에서 꼼짝없이 죽는 기다”

경상북도 경주에 사는 60대 시각장애인 권금숙씨는 지난 9월 12일 진도 5.8의 지진이 일어나자 119에 전화를 걸었다. 지진인지 전쟁인지 분간할 수 없음에도 우선 집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집이 흔들리자 공포감에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119의 답변은 그저 공원 같은 데로 나가라는 지시였다. 다급해진 권 씨가 혼자 밖을 나갈 수 없다며 대피소 같은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하소연해도, 119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지진 발생 약 10분 뒤 권 씨의 핸드폰에 긴급 재난문자가 수신됐다. 권 씨는 결국 포기하고 스스로 살 방도를 찾아 나섰다.

권금숙 씨는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속이 미식거린다. 난 시각장애 1급 지체 장애 2급이지만, 현재 몇 달째 활동보조인을 구하지 못해 혼자 살고 있다. 행여나 활동보조인이 있었다고 해도, 저녁 8시 반이면 퇴근 할 무렵이라 역시나 혼자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에 사는 70대 지체장애인 윤정희 할머니도 주공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5.1지진에 놀라 겁에 질려 있는 할머니네 현관문을 열고 안부를 물었던 이는 같은 아파트 4층에 사는, 지체장애인 아내를 둔 김철희 할아버지였다. 지진이 멈췄는가 싶어 윤 할머니는 간신히 안정을 취했지만 이어 5.8 지진이 발생했다. 할머니는 방바닥에 앉아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한참 후 그 이웃이 다시 찾아왔고, 거동이 불편한 윤 할머니를 부축한 끝에 전동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집은 1층이어서 승강기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거리는 대피를 위해 나온 인파로 북적였다.

윤정희 할머니는 지진에 대해 속수무책이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처음에 5.1 지진이 있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4층에 사는 이웃이 찾아와 우에 됐노(어떻게 됐나?) 묻더라. 괜찮다고 대답하고 지진이 멈춘 줄 알았는데 더 큰 5.8지진이 찾아왔다. 집이 흔들리는데 몹시 놀라 나갈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아까 그 이가 찾아와 나가야 한다고 나를 이끌었다”며 할머니는 이웃에 대한 고마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장애인들은 큰 지진이 나면 집 안에서 당하지 나가지도 못한다. 재난이 일어나면 전력을 차단하는데 승강기를 이용할 수도 없다. 대책이 없다. 방바닥에서 꼼짝없이 죽는 기다(것이다)”고 탄식했다.

 

공포는 현재진행형,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장애인들

문제는 한 달이 지났지만 지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 12일 지진이 있고 한 달여가 지나던 10월 14일 오전 8시20분쯤에도 경북 경주시 남남서쪽 9km 지역에서 규모 2.3의 지진이 발생했다. 한 달여간 총 480회의 여진이 발생했다. 반복되는 여진은 장애인들에게 현재진행형의 공포로 체감된다. 정부에서 활동보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하루 12~14시간 이내라 5.8의 지진처럼 저녁 시간대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무방비 상태다. 서울 소방재난본부가 2010~2012년 소방공무원들이 접한 신고사례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장애인의 재난 대처 능력은 비장애인보다 2배 이상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농아협회 관계자는 “청각장애인은 지진이 발생했을 때 지진인지 다른 이유로 건물이 붕괴하는지 재난 발생 시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 게다가 재난 방송도 음성으로 안내를 하기 때문에 대피 등에 어려움이 따른다”며 “재난 시 안내문자 전송과 청각장애인이 거주하는 곳에 안내등, 복도 유도등이 필요하다. 난청인 분에게는 FM 송신시스템을 다중시설에 설치해 안내방송이 보청기에 연계된 수신기에 증폭돼서 잘 들릴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고, 농아인을 위해 안내등과 전광판이 누구나 이해될 수 있도록 고안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시각장애인 당사자인 우리동작자립센터 강윤택 소장은 “시각장애인은 일단 지진에 대한 훈련이 전혀 안 돼 있어 취약하다. 익숙한 실내는 머릿속에 구조가 지도처럼 자리 잡혀 있는데, 일단 지진이 발생하면 현관이 막힌다든다 하는 물리적인 변화가 있을 테니 위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강 소장은 “서울에 재난체험관이 있어 직접 체험해 봤으나 아쉬움이 있었다. 시각장애인의 몸에 익숙하게 하는 반복적인 대피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재난 발생 시 같은 공간에 있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 매뉴얼 강화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편의증진국 홍현근 국장은 “지진이 발생하면 5초, 10초가 긴박하다. 보행가능한 지체장애인이라면 비장애인과 같은 식으로 대피를 시도할 테지만, 휠체어나 목발 등 보조기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은 대피 전에 보조기를 찾는 과정까지 어려움이 가중된다. 와상장애인 등 최중증장애인에게 대피는 사실 까마득하다”고 지적하며 “재난약자 중 사각지대에 있는 지체장애인을 위한 지진예측시스템에 연구 및 투자가 활발히 이뤄져야 하고 내진설계를 의무화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렇게 지진의 공포는 재난 약자인 장애인에게 더 큰 두려움을 안긴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은 ‘재난 약자’ 중에서도 특히 취약 계층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지진과 대피의 이중고 중 하나의 짐이라도 덜어 줘야 할 정부는 아직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피상적인 접근과 무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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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마모토 지진 당시 임시로 마련된

장애인 대피소에 장애인과 보호자가 모여있다.

미국의 경우 장애인의 재난 대응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방재난관리청(FEMA)에 장애통합조정국을 마련했다. 지진이 빈번한 일본은 방재청에 고령자 복지과와 장애인 복지과를 마련해 두고 ‘장애인 재난매뉴얼’과 ‘고령자 재난매뉴얼’을 배포하고, 각 지역의 장애인・노인복지 협회와 연계해 재난 발생 시 장애인 및 고령자의 구조에 신속하게 대처한다. 이 밖에 장애인 전용 대피소도 각 지역에 마련하고, 시각장애인용 전등경보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7월, 장애인 등 재난 취약 계층의 안전할 권리를 명시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됐고, 2014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이 자연재해를 포함한 위급상황에 대비해 모든 유형의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형식으로 된 구체적인 전략이 없는”것에 우려를 표하며, 이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관측 사상 최고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8~9분 뒤인 오후 7시 53분이 돼서야 부산, 대구, 울산, 충북, 전북, 경북, 경남 등 지진발생지 인접 지역 주민에게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해 뭇매를 맞았다. 이후 정부는 잇따라 지진 대피 매뉴얼과 내진 설계 대책 등을 내놓고 있지만, 그 안에도 재난약자인 장애인에 위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지진 당시 접속이 폭주해 3시간이 넘도록 마비상태가 유지돼 빈축을 샀던 국민안전처 홈페이지에서는 현재 ‘지진 발생 시 국민행동요령’이란 배너가 눈에 띈다. 그러나 ‘지진으로 흔들리는 동안 탁자 아래로 들어가 몸을 보호하기’, ‘건물 밖으로 나갈 때에는 승강기 사용을 금지하고 계단을 이용해 신속하게 이동하기’ 등 기본적인 행동요령뿐이다. 비장애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이와 같은 대피 매뉴얼을 따라야 하는 휠체어 장애인은 지진이 발생하면 손 쓸 방도가 없다. 경주시청 장애인시설과 이윤희 주무관은 장애유형별 매뉴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장애인은 정보소외 현상이 심각하다. 재난 발생 시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화통역을 하는 방송은 거의 없다. 시각장애인이라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휠체어 장애인의 경우는 휠체어에 앉기까지가 난관이다. 장애유형별 매뉴얼이 시급하다”고 전했다.

시각장애가 있는 경주시장애인단체협의회 김헌덕 회장은 장애인을 위한 실질적인 대피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부질없는 탁상공론은 도움이 안 된다. 지진에 대한 매뉴얼이 있다고 하지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장애인들이 장애 유형별로 정확한 대피 요령을 습득하는 실질적인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

경주에서 만난 경북지체장애인협회 경주시지회 어르신들은 정부의 대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홍수나 태풍 등 타 재난에 비해 예측이 어려운 지진의 불확실성과, 5.8지진 발생 후 한 달 사이 여진이 480회나 발생했음에도 지지부진한 정부의 움직임 탓이다.

70대 지체장애인 김용근 할아버지는 “답답한 게 많지만 하소연을 다 할 수가 없다. 결국 본인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피상적인 접근과 무대책에 80대인 이상준 할아버지는 “뾰족한 수가 없다면 장애인 가정에 화이바(안전모)라도 하나씩 마련해주면 어떻겠나”라고 제안했다. 안전모는 무능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대책으로 보였다.

 

 

 

작성자글과 사진. 김은정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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