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빛이 낳은 것들 - 시선의 폭력과 사회구성원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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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그랬다. 서울 광화문역 지하에서 농성하고 있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에서 거리강연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우리는 함께 무언의 폭력, 시선의 폭력을 당해야 했다. 식당에 간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7명 정도 되고, 그렇지 않은 장애인-비장애인들이 15명 정도 됐다.
“이런 분들이 몇 명이나 오는 거예요.” 식당 주인인 듯한 사람이 물음에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넣는다. 주문을 받을 때도 “사람 수에 맞게 주문해야 해요”라고 말하는데 목소리 톤이 높다. 밥을 먹으며 비장애인인 활동가들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식당 주인처럼 보이는 그는 왜 우리를 밀어내려는 듯 거칠게 대하는 것일까? 그날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있으니 통로가 좁아져 다른 손님들이 오가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거리 강의를 지나는 시민들도 보게 하려고 부러 사람이 많은 퇴근 시간에 했기에 저녁을 먹으러 간 시간은 저녁 8시가 다 됐다. 손님들이 붐비는 때도 아니었다. 통로는 충분히 확보됐고 다른 손님들도 거의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단체손님이 매상을 많이 올려주니 잘해주는 게 보통의 모습일 게다. 그런데 오히려 귀찮다는 듯한 태도를 접하니 당황스럽다. 왜 그러는 것일까? 장사하는 데 어떤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납득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돈을 주고 밥을 먹는 입장에서 차별을 겪으니 부아가 치민다. 그러면서도 이런 경우가 이뿐이랴 싶다. 사람들이 장애인을 무시하는 태도는 특수하기보다는 흔하지 않은가.
시선의 폭력이 장애인에게 요구하는 것
이렇게 장애인을 거부하는 듯한 태도는 단지 기분 나쁨에 그치지 않는다. 감정이 상하고 마는 일이 아니다. 그들의 시선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게 하고, 장애인들의 행동을 규율하게 만든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위니콧은 <가족과 어머니의 거울역할>이라는 논문에서 아이는 어머니의 눈이라는 특별한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감정도 본다고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기분이 어떻게 변하는지, 자신이 어머니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본다고 했다. 우울하고 자신을 피하는 듯한 눈빛이 장애아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시선의 문제는 단지 아동기에만 해당하는 문제이거나 가족 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성인장애인도 스스로를 부정적인 존재로 내면화해 그/녀의 자존감은 떨어지고 위축된다. 일상적으로 겪는 비장애인들이 내뿜는 장애인을 거부하는 태도, 피하는 태도, 찡그린 표정에서 장애인들은 이 세상에서 불필요하거나 피해를 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백 마디 말로 장애인도 평등하게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 존엄한 존재라고 말한다고 경험이 새긴 위축감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게다가 식당이나 전철에서 겪는 시선의 폭력은 장애인들의 행동도 제한하게 만든다, ‘장애인들이 왜 나와서 돌아다니느냐, 그냥 집에 있지’ 하는 신호를 주기 때문이다. 부당함을 알더라도 더 이상 기분 나쁜 경험을 하고 싶지 않기에, 부당함에 맞서기보다는 그냥 피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접촉을 피하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비장애인인 나도 비슷하게 위축되는 때가 종종 있다. 부자가 아니라면 한 번쯤 백화점 수입매장 같은 데서 겪었을 일이다. 물건을 사줄 사람이 아니니 귀찮다는 정도가 아니라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곳을 기웃거리냐는 듯 날카로워진 판매원의 표정을 접해본 적이 있으리라. 물건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상품을 설명하러 온 것도 아니지만 그의 표정에서 당사자는 매우 낮은 사람이 된 듯해서 마음이 자꾸 쪼그라들게 된다. 허름하게 옷을 입고 간 날 식당 분위기는 좋지 않다.
물건이 닳는 것도 아닌데 판매자들이 차별을 하는 것은 왜일까. 상품을 이미지로 소비하도록 만드는 사회이기에, 누가 이 가게-매장을 이용하는가는 가게의 이미지를 고급스럽게 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른바 ‘물 관리’를 해야 가게 이미지가 좋아지고 판매도 오른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또는 차별과 무시를 판매자의 권리로 오인하며 ‘내 물건 내 맘대로 못 팔아’라는 것일 수도 있다.
인권이 소유(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착각이 만들어낸 차별이다. 내 물건을 내가 원하는 곳에 팔지 않을 수 있으나, 그 이유가 사회적 소수자를 멀리하고픈 것이라면 그것은 ‘특정 집단’을 배제한 차별이다. 그런데 소유가 권력을 가진 세상인지라 소유자의 폭력과 차별은 자율로 해석되곤 한다. 그나마 차별이 나쁘다는 도덕률은 있는 사회인지라 노골적으로 하지 못할 뿐이다. 내 경우야 가끔 있는 예외적 경험일 수 있으나, 장애인들은 일상적 경험이니 시선의 폭력이 주는 영향과 강도는 매우 클 것이다.
겹쳐지면서 포개지지 않는 폭력의 구조
비장애인이고 가난한 내가 겪은 경험과 장애인들이 겪은 경험의 차이는 일상적이지 않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가 낳는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신분의 위계’가 내 경험을 만든 삶의 조건이자 폭력적 세상의 구조라면, 장애인들의 삶의 조건은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구조’다. 두 폭력의 질서는 따로 있지 않으며 서로 얽혀 있다. 개인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양상이 복합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나 업주들은 때로는 차별을 판매 전략으로 삼기도 하고, 때로는 인권친화적 이미지를 판매 전략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만 팔면 되면 끝난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복잡한 차별의 구조와 맥락이 교차되는 현실을 간과하는 일이다. 왜 누구에게는 팔고 누구에게는 팔지 않는가, 왜 누구에게는 친절하지 않고 누구에게는 친절한가. 이는 ‘상품교환이나 판매’가 이뤄지는 우리 사회가 순수한 자본의 질서만으로 작동되지 않음을 말해준다. 반대로 순수한 비장애인 중심의 구조만이 장애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은 자본주의를 만나 서로를 굴절시킨다.
영화 <언터쳐블>은 삶과 정체성이 다른 두 사람, 백만장자인 백인 장애인과 활동보조인 흑인이 만나 인간적 교감을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영화에서는 장애인 차별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은 자세히 그리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인종 간의 차이도 있지만 인종 차별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영화는 줄곧 부자 장애인인 필립이 중심에 있다.(이게 영화의 약점인지도 모르겠다.
활동보조인인 드리스는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상위 1%에 해당하는 부자인 필립이 차별을 이겨내거나 자존감을 지키는 수단은 경제력이고 그에 조응하는 고상한 문화와 교양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장애인인 필립은 품위를 잃지 않는다. 품위란 빈곤의 반대말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빈곤한 자가 품위를 지키기에는 먹고 자고 생활하는 일조차 버겁다. 아니, 세상은 품위와 생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곤 한다. 먹고 자는 생활이 적절하지 않은데 품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일 수 있다. 돈이 없어 친구들과의 친목모임에 가는 걸 포기하는 것을 품위를 지킨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품위란 거품이다. 품위란 개인의 자존감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선의 폭력을 만들어낸 삶의 조건이 바뀌지 않으면 당사자는 꺾인 자존감을 붙들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다 보면 가난한 장애인은탈출구가 더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한국에서 장애인 2명 중 1명은 상대적 빈곤층, 3명 중 1명은 절대적 빈곤층에 속한다는 보고서가 나온 적이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의 상대적 빈곤율도 OECD 국가의 평균 22%보다 높은 48.4%이며, 월평균 가구소득이 200만 원 미만인 장애인가구가 전체 장애인가구의 절반이 넘을 정도로 절대 빈곤 상태다. 그렇다보니 장애인이 거리를 나서면 장애인이 뭘 제대로 먹겠어, 웬일로 장애인이 저런 걸 사지 하는 차별적 시선을 받게 된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삶의 방식
이렇듯 폭력, 차별은 구조와 떨어질 수 없으며, 그 구조가 만든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한 경험은 삶과 자존감과 관계마저 망가뜨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조를 바꾸는 일은 먼 일이라며 손을 놓으려 한다. 폭력의 구조가 만든 부당한 시선의 폭력도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풀 수 없다는 듯 방치한다. 그러나 그러한가. 제도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도 폭력의 영향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삶의 방식이 아닐까.
그날 집에 가면서 비장애인인 활동가들이 말했던 것을 넘어서 장애인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시선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의 몸을 옭아맸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들어줄 귀가 있어야 입을 열 수 있다. 귀와 입이 만나야 손이 만나고 발이 만나게 되고 몸이 변하고 생각이 변할 수 있다. 그래야 장애나 가난이 개인의 몫이 아닌 삶의 조건과 구조와 연관됐다는 점을 인식하고 폭력이 갉아먹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서로의 삶의 방식이 바뀔 수 있다. 자책도 차별의 시선도 사라질 수 있다. 나아가 시선의 폭력을 가했던 사람들조차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말할 공간과 시간을 만드는 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동료로서 취해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닐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스스로 자신의 태도를 돌볼 시간조차 없다. 계속 뛰라고 채찍질하는 자본의 요구에 생각은 사치가 되곤 한다. 그럴 시간을 만드느니 자신의 차별과 폭력의 시선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정리하는 게 효율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동료가 되는 일은 어렵다. 기꺼이 시간과 몸을 내어줘야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장애인의 인권을 지지한다는 말보다 말없이 귀를 내어주는 동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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