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문답’, ‘다른 결과’ 인정조사표가 빼앗은 시각장애인들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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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현재,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제도로 자리 잡은 ‘장애인활동지원 서비스(이하 활동지원)’. 2011년 정식으로 법률이 제정된 후 지금까지, 활동지원 제도와 장애인활동지원법은 장애계로부터 꾸준히 제도 개선 요구를 받아왔다. 무엇보다 장애인 당사자의 욕구에 맞는 충분한 서비스 시간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러한 지적이 이어지는 중, 시각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1월부터 실시된 활동지원서비스 재심사 결과, 타 유형에 비해 시각장애인들의 등급 하락이 눈에 띄게 많았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은 지난 7월, 무더위 속에서 결의대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전체 하락률 3.85%, 시각장애 2배수 하락
지난 7월 말,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는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이 모였다. ‘장애특성 반영한 인정조사표 개편하라’ 등의 플랜카드를 든 당사자들은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등급이 하락한 시각장애인들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활동지원 등급하락 문제는 비단 시각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이처럼 시각장애인들이 땡볕 아래로 나온 것은 2016년 상반기에 실시된 활동지원 등급 재심사 결과로 인한 피해가 유달리 시각장애인들에게서 두드러진 탓이다. 실제로 2016년 1월부터 5월까지 이뤄진 활동지원서비스 등급재심사 결과를 보면 전체 평균 하락률에 비해 시각장애인 등급 하락률은 2배에 육박했다. 전체 평균 하락률은 3.85%, 그 중 시각 유형 하락률은 7.53%로 선두에 섰다. 전국의 각 지역에 따라 시각장애인 등급 하락률을 살펴보면 전국 평균의 5배를 넘기는 하락률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지역은 대전으로 22.43%가 등급이 하락했다. 이어 전남(18.10%), 서울(10.37%) 등이 뒤를 이었다. 이런 사태에 대해 시각장애인 당사자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이하 한시련)는 적절치 않은 인정조사표를 원인으로 꼽았다.
장애 특성과 맞지 않는 인정조사표
인정조사표는 인정조사원이 활동지원서비스 등급 책정을 위해 수집하는 자료다. 활동지원서비스를 충분히 받기 위해서는 인정조사표를 기준으로 하는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이는 ‘신체, 정신 기능 평가’ 및 ‘생활환경 영역 및 서비스 욕구 등 조사’라는 명목으로 국민연금공단의 주도 하에 진행된다. 이 인정조사표를 자료로 심의위원회가 등급을 결정한다.
그런데 당사자 대신 심의위원회의 평가대에 오르는 인정조사표가 당사자의 욕구를 제대로 드러내주지 않는다는 것이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의 주장이다. 인정조사표는 크게 4개 영역으로 나뉜다. 일상생활 동작영역, 수단적 일상생활 수행능력 영역, 장애특성 고려영역, 사회환경 고려영역이다. 일상생활 동작영역의 조사항목은 ‘옷 갈아입기’, ‘목욕하기’, ‘식사하기’, ‘잠자리에서 자세 바꾸기’, ‘옮겨 앉기’ 등을 포함하고, 수단적 일상생활 수행능력 영역은 ‘전화 사용하기’, ‘물건 사기’, ‘집안일’, ‘약 챙겨 먹기’ 등을 포함한다. 장애특성 고려영역에서는 휠체어, 시각, 청각, 인지, 정신 기능을 조사하며 사회환경 고려영역은 ‘사회활동 참여’, ‘위험상황 대처능력’ 등을 조사한다. 각 영역에서 세부항목을 살펴보면 시각장애 유형에 맞는 질문이 적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시련 김훈 정책연구원은 활동지원인정조사표가 요양과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한다. “장애인 활동지원에 관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활동지원인정조사표의 구체적인 내용은 활동지원이 아닌 요양과 보호에 치우쳐 장애유형별 특성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했다. 시각장애의 경우, 습관화된 환경에서는 단순 신체기능이나 인지능력, 기능 장애가 발생하지 않지만 그 외 환경에서는 반대의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를 반영하지 못했다. 즉, 인정조사표는 활동지원서비스 제공과 서비스 이용 판정이 아니라 요양과 단순보호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 이용자들이 활동지원 서비스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부분은 ‘이동지원’이다. 김훈 정책연구원의 말과 같이, 시각장애인의 경우 익숙한 공간이자 동선 파악이 돼 있는 공간이 아니면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강윤택 소장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이동지원이 절실함에도 이를 평가할 내용이 인정조사표에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이 이동에 대한 지원이다. 중증 시각장애인은 자신의 집안에서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도, 현관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꼼짝도 못 한다. 그런데 인정조사표에는 이를 평가할 내용이 없다. 시각장애인들의 욕구와 인정조사표는 전혀 맞지 않다.”
활동지원서비스 이용자인 시각장애인 당사자 A씨는 “현재 사용되는 인정조사표가 최고점 모델로 삼는 것은 와상 장애인일 것이다. 시각장애 특성과는 전혀 다른 기준이다. 나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이 인정조사표 기준으로 충분한 시간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최대한 피력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의 수치스러움과 모욕감은 자존감을 떨어뜨린다”고 설명했다. 집에서는 가능하지만 낯선 공간에서 불가능한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각장애 특성에 전혀 맞지 않는 인정조사표는 2016년 상반기 등급 재심사에서 등급 하락이라는 결과를 받은 시각장애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강윤택 소장은 “시각장애인들이 이번 등급 하락에서 화가 난 부분은 제대로 된 지표도 없다는 점”이라며 “납득할만큼 장애 유형에 맞는 인정조사표로 등급 평가를 한다면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무너지는 시각장애인들의 일상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독거 중인 시각장애인 B씨는 얼마 전, 활동지원서비스 등급판정 결과에 이의신청을 했지만 기각됐다. 상반기 활동지원서비스 등급 재심사 결과, 1급이었던 등급이 2급으로 하락했다. 등급 하락으로 B씨의 활동지원 시간은 80시간 이상 줄어들었다. 2개의 직장을 병행해 다니면서 오전과 오후 일정이 다른 B씨의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다. B씨의 평일 일과는 직장생활로 바쁘다. 오전에는 동료상담가로, 오후에는 헬스키퍼로 활동한다.
오전 근무지와 오후 근무지가 가깝지 않기 때문에 이동량이 많다. 1급으로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았을 때는 필요한 이동지원을 받아 2개의 직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2급으로 등급이 하락돼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B씨는 2개 직장 중 헬스키퍼를 다음달부터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2개의 직장에 각각 출퇴근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동지원 없이 독립보행으로 이동하게 되면 출근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줄어든 시간으로 출퇴근 이동지원을 최대한 받으려고 해도 시간이 적기 때문에 활동지원인 매칭도 쉽지 않다. 적은 시간을 회피하는 활동지원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에 등급 하락 전에 함께 했던 활동지원인이 그만둔다고 해서 원망할 수도 없다. 독거이기 때문에 가사지원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등급 하락 이전에도 거기까지 기대하진 않았다. 머리, 다리를 부딪히면서 청소하는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직장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사 지원을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직장생활 조차도 유지할 수 없고, 주말에는 가족들이 동행해주지 않으면 집 근처 교회도 갈 수가 없게 됐다.”
B씨는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으며 자립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지난해 가족의 집을 떠나 독거를 시작했다. 독거를 시작했을 때는 의욕이 넘쳤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활동지원서비스의 부족으로 독거에 대한 자신감까지 하락한 상태다. 자립생활 자체에 닥쳐오는 위기감은 시각장애인은 B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거를 하고 있는 시각장애인들 중 B씨와 같이 등급이 하락한 이들은 모두 활동지원서비스의 부족으로 인해 독거 상태를 포기할 위기에 놓여있다. 등급하락은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각장애인들의 생활도 바꿔놨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시각장애인 C씨는 등급하락으로 인해 육아에 어려움이 많아졌다. 급격하게 줄어든 활동지원서비스에 맞춰 C씨는 모든 지원을 아이에게 맞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한시련에 도움을 요청해 유치원 등원 시 차량을 지원받고 있다. “예전에는 활동지원인과 함께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함께 집안일을 하고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유를 상상할 수가 없다. 최소한의 시간 안에 장을 봐야 하고 집안일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산책은 물론이고 한창 뛰어놀 나이인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도 갈 수가 없다. 이제는 주말이면 아이와 집에 갇혀만 있는다. 가장 불안한 부분은, 혹시라도 아이가 갑자기 다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편, 자녀가 모두 성장한 가족에 속하고 있는 D씨는 가족 내에서의 역할을 잃었다. D씨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족 내에서 주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활동지원서비스 등급이 하락하면서 모든 서비스 시간을 근무시간에 사용했다. 가사지원이 불가능해진 D씨는 혼자 가사를 시도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주방도구를 사용하고, 요리를 하는 과정에서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실수들이 발생했고 결국 가족들은 D씨가 가사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D씨는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지자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인정조사, 개인별 욕구 반영돼야
강윤택 소장은 활동지원서비스 인정조사가 단순히 장애만을 봐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장애 정도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이 처한 환경과 역할을 봐야 필요한 서비스의 총량을 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육아를 하고 있는지, 직장을 다니는지, 정기적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 있는지, 집 안에서의 가사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등이 반영돼야 한다. 지금과 같이 문답 형식으로 인정조사를 진행한다면 장애유형에 맞고 개인별 욕구가 반영될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 측에서의 장애유형별 인정조사표 개편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 담당자는 “시각장애인들 중 급여량이 급격하게 떨어진 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에 대한 대책으로 유형별 인정조사표가 아닌 급여량 완화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어 보건복지부 담당자는 “장애등급제 개편에 따라 인정조사가 개정, 보완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훈 정책연구원은 시각장애 유형에 맞는 조사항목에 대해 “수단적 일상생활 수행능력 영역의 내용과 항목이 보강돼야 한다”며 “해당 영역에 포함되는 활동을 좀 더 세분화하고 각각의 활동들에 대한 질문을 체크리스트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시각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해 이동, 일상생활, 정보접근, 문자생활 등의 영역으로 구분해 만들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질문, 같은 답, 다른 결과
활동지원서비스 등급하락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정조사 과정은 과거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똑같이 앉아서 문답만 했다. 문답 내용도 같았고 내 대답도 같았다. 내가 지내는 환경이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고, 일상생활 반경이 좁아진 것도 아니고, 시력이 좋아진 것도 아닌데 결과만 달라졌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의신청을 한 시각장애인 B씨를 다시 찾아온 인정조사원이 실시한 재조사 과정 또한 다를 것이 없었다.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B씨는 ‘이의신청 기각’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었다. B씨는 “똑같이 진행되는 인정조사에 다시 답하며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 의아했다. 결국 항의를 하니 잠시 달래놓는 것밖에 안 되는 과정이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이 원활하기 어려운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취지의 제도다. 제도의 취지에 맞게 서비스가 제공되기 위해서는 장애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장애인이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준이 재정비 돼야 한다. 기본적인 밥먹기, 옷입기 등을 지원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제도가 되기 위해서 활동지원제도는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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