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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그렇게 우리는 연루돼 살아간다

인권이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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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노순택

6일 동안 매일 8시간씩 걸을 수 있을까? 다친 다리가 괜찮을까? 그래도 제주도인데, 그렇게 갈등을 하며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체력 하나는 타고났는데 하는 마음으로 ‘2016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참여했다. 날씨는 덥고 발바닥에 물집은 잡히고 팔다리는 온통 모기에 뜯기고……. 그러나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선전하는 행진은 나를 편안하게 했다. 무엇보다 제주도민의 삶과 투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북촌리에 있는 너븐숭이 4・3기념관과 애기무덤은 가슴에 남는다. 1949년 1월 40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된 ‘북촌사건’의 흔적이 20여구의 돌무덤에 그대로 묻어났다. 어른들은 무덤에 묻혔으나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무덤조차 갖지 못한 아기들, 아이들의 영혼을 어떻게 달래지 싶었다. 어떤 죽음은 무덤과 이름을 갖지만 어떤 죽음은 무덤과 이름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신조차 죽음의 무게를 달 수 없음에도 우리는 관습적으로 죽음에 무게를 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이들을 한 명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관습과 편견이 무덤을 만들 생각조차 못하게 한 것은 아닐지. 씁쓸했다. 10대들이 많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와 닮아 보여 눈물이 났다. 참사는 모든 이에게 같게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배제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참사는 배제와 차별을 키운다. 일본 대지진 때 피해지역 장애인들은 연락을 취할 수도 몸을 피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듯이 말이다. 너븐숭이 기념관에 도착하자마자 북촌 주민 중 한 명이 사건의 개요를 말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과정을 설명해주셨다. 1949년 1월 17일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무장대가 토벌대와 싸우다 군인 2명이 죽었다. 마을 유지들은 시신은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시신을 들고 토벌대가 있는 본부로 찾아갔으나 경찰가족 1명을 빼고 8명 모두 사살됐다. 주검을 돌려주려는 선한 마음은 보복사살로 되돌아왔다.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북촌 초등학교로 모이라고 했다. 거기서 군인이나 경찰 가족을 나누더니 경찰이나 군인가족이 아닌 주민들 모두를 총살했다. 잔인한 부대로 소문난 2연대여서, 다음날 도착한 상급관의 명령이 떨어져서야 학살은 멈춰졌다. 그러나 주민들의 고통과 주민들에 대한 탄압이 멈춰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전쟁 중 사망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은 전통에 따라 빈 꽃상여를 들고 망자가 살아생전 있던 곳을 다녔다. 망자가 다니던 북촌 초등학교에 다다른 주민들은 4・3때 죽은 가족과 친지들이 떠올라 ‘아이고’ 하며 통곡을 했다. 그게 경찰에 보고돼 마을 이장은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눈물조차 죄가 되는 현실에서 마을 주민들은 더 이상 4・3학살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게 됐다. 슬퍼할 권리조차 빼앗긴 주민들. 국가권력은 그들의 애도와 추모를 단속하며 감시했다.

아……! 이것도 어찌 그리 세월호와 닮았는지……. 마침 넷째 날부터 평화행진에 참여한 세월호 유가족들도 함께 너븐숭이 기념관에서 자료도 보고 영상도 봤다. 나와 비슷한 마음이려나, 아니 다를까, 어떤 마음일까? 괜히 내 마음이 복잡해져 유가족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겨우 입을 뗀 유가족 한 분이 말한다. “우리도 몇십 년이 지나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이렇게 기록과 기억, 자료들을 모은 기념관을 만들 수 있겠지요. 4・3이 저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밝혀냈듯이 우리도 시간이 걸리겠죠.”

 

강정해군기지를 막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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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노순택

저녁에 체육관에 모인 평화행진 참여자들과 유가족들이 간담회를 했다. 행진 참여자가 사회를보며 강정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를 전했다. 특히 최근 세월호에 실렸던 철근 140톤이 강정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심정을 토로했다. “세월호가 복원력을 상실할 정도로 과적된 화물 중 대부분이 해군기지를 만들 철근이었다는 소식에 주민들과 강정지킴이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우리가 잘 싸워서 해군기지 건설을 막을 수 있었다면, 철근 실은 세월호가 무리하게 출발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고요. 우리가 잘 못 싸워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거 같아 미안하고 힘들어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들- 책임자들은 미안해하지 않고 함께 싸우고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이 미안해한다. 어쩌면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연루된 자들의 공감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미안함의 속살은 연루된 자들의 책임감이 아닐까. 그렇게 미안함과 책임감 속에 연대는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연대는 그러한 미래와 현재에 대한 책임감으로 만들어진다.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이 “연대는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 간의 동질성이나 대칭성을 함축할 필요가 없다. … 연대는 입장을 함께 하기로 한, 개별적이고 비슷하지 않은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라고 했던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나 강정, 밀양 등 ‘자기 일도 아닌데’ 라는 말을 들으며 싸우는 것이 아닐까.

 

포기하지 말아요

연루된 자들은 무엇이 싸우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살필 줄 아는 마음의 눈을 지녔다. 그 살핌은 주체와 떨어진 눈치보기와 다르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약을 발라주기도 하고 밴드를 붙여주기도 하는 일과 비슷하다. 마음 깊숙이 다가가는 일이다. 평화행진의 마지막 날,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이 보여준 연대의 메시지는 강정해군기지 싸움에 내려앉은 마음을 뜨겁게 위로했다. 문화제에서 25여 명의 할매들이 노래공연을 한 후 펼친 현수막에 나도 왈칵 눈물이 나왔다.

“포기하지 말아요. 평화가 이깁니다.” 이 짧은 두 문장에 밀양과 강정의 주민들의 절망과 아픔,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은 희망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그걸 헤아리는 공감이 오롯이 느껴졌다. 올해 강정에 해군기지가 건설되자 강정주민들과 지킴이들은 주변으로부터 이제 싸움은 끝난 거 아니냐는 말을 들으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누군가 해군기지 반대싸움은 기지가 건설되면 끝나는 것인지 물어올 때마다 무거움에 짓눌렸다고 했다. 그래도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색했다. 평화는 평화로 지켜야한다는 방향이 틀린 게 아니라면 해군기지가 건설돼도 싸움은 이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며 지금도 아침마다 해군기지 앞에서 백배도 드리고 피케팅도 한다. 밀양 송전탑 반대싸움도 그랬다. 2014년과 2015년 밀양 송전탑이 지어졌으니 싸움은 끝난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했던 밀양주민들이기에 강정주민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강정주민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평화가 이긴다고 북돋아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연대와 거래 그리고 혐오

이렇게 6일 동안의 행진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연루와 연대, 공감에 대해 느꼈던 시간이었다. 간혹 사람들이 자본가들이나 권력자들은 참 잘 뭉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자조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난 그것이 연대라기보다는 거래라고 본다. 손익계산서 속에서 흩어질 수 있는 거래. 거래는 그저 한 구역이 다른 구역에 무언가를 오가는 것으로 그치기에 만남 속에서 화학적 변화와 내부와 외부의 경계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부당거래’나 ‘내부자들’이라는 영화에서 보여줬듯이 그들이 돈과 권력으로 서로를 봐주고 밀어주는 일은 연대가 아니라 거래다. 그러나 연대나 거래도 아닌 혐오를 접할 때면 마음이 더 착잡하다. 아님에도 사회적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왜 그들은 연루되지 못할까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의 장애인시설에서 일어난 학살이 그렇다. 장애인 19명을 죽이고 26명에게 중상을 입힌 우에마쓰는 장애인시설에 3년 넘게 근무했던 사람으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컸다. 해고됐지만 그의 편견과 장애인 혐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중증장애인은 살아 있어도 쓸모가 없다”, “제 목표는 중증장애인이 가정과 사회에서의 생활이 극히 불가능한 경우,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안락사가 가능한 세계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가 살인 후에도 경찰호송 중에 미소 지었던 까닭이다. 그는 왜 장애인을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연루시키지 못했을까. 그는 중증장애인들의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 등의 처지는 생각했으나 중증장애인 당사자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건널 수 없는, 다른 종의 사람들처럼 여긴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장애가 있더라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지역사회에서 이웃과 친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갇힌 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았고 장애인의 미래와 현재는 그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아니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미래에 거추장스러운, 그래서 그저 처분해야할 대상으로만 여겼다. 장애인의 삶에 다가가지 않은 그는 장애인시설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있었으나 연루되지 못했다. 연루란 한 공간에 있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니까.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인정할 때, 그러한 입장을 견지할 때 우리는 서로 연루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가 ‘인간의 쓸모’를 중요한 삶의 가치로 두는 한, 장애인과 연루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한 존재라는 가치를 ‘쓸모’의 가치 아래에 두는 한, 언제나 사회적 소수자는 여러 이유로 존엄성을 훼손당하게 된다. 경제적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장애인, 청소년, 노인 등이 차별당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을 ‘존엄성의 자리’에서 밀어내려 할 때 우리는 서로 연루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연루되기를 기꺼이 하는 자들을 볼 때 반갑고 고맙다. 얼마 전 죽은 장애인들을 위로하는 추모제가 서울에서 열렸다. 시설에 갇힌 중증장애인에 연루되려는 사람들, 장애인혐오에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 서로 연루되고 있다.

 

작성자글.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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