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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장애인입장에서의 강남역 사건에 대한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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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강남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남성이 생면부지의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여성 증오범죄(혐오범죄로 불리기도 함, 혐오와 증오를 문맥에 따라 동일하게 사용함)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혐오는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추모운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 증오범죄를 추모하는 여성들을 비판하면서 폭행협박까지 했고, 더 나아가 남성의 피해를 강조하는 안티페미니스트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며칠이 지나 이 사건은 여성 증오범죄가 아니라 정신질환에 따른 범죄라고 밝혔다. 여성에 대해 피해망상을 갖고 있던 범인이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이에 따라 정신질환자 관리를 더욱 강화하고 행정력을 통한 강제입원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여성 증오범죄?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 장애인에게는 모두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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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여성 증오범죄로 보던,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보던, 장애인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우선 여성 증오범죄로 볼 경우 그 다음은 장애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여성 증오범죄는 여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애, 성적지향 등 사회적 차별을 심하게 받는 집단이 또 다른 증오범죄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증오범죄가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소수자에 대한 차별 인식이 상당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지금은 여성 증오범죄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애인 증오범죄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지울 수 없게 됐다.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볼 경우, 정신질환자 더 나아가 모든 장애인은 위험하니 국가가 잘 관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수용시설에 가두는 것도 정당하다는 논리가 만연해 질 수 있다. 실제로 강남역 사건 이후 중앙일보의 사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의학적으로 고위험군으로 판단되는 환자에 대해서는 집중 전담제도 등 더욱 촘촘하고 치밀한 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치료명령제를 더욱 엄격하고 실효성 있게 적용할 필요도 있다. ... 위험 행동의 가능성이 크거나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에는 당국이 더욱 과감하게 개입하는 쪽으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정신질환자들을 사회가 백안시하면 치료나 관리 받는 것을 꺼리게 되고 이럴 경우 증세가 더욱 악화돼 극단적인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사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껴안아야 더욱 안전한 사회가 이뤄질 수 있다.” 이처럼 사회가 정신장애인을 따뜻하게 껴안아야 하는 이유도 정신장애인들이 치료나 관리를 받지 않아 묻지마 범죄를 더 저지를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로 보게 되면 장애인, 특히 정신장애인은 이 세상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정신질환자에 대한 혐오는 더 커지게 된다.
결국 장애인입장에서 보면 장애인 증오범죄의 피해자가 되거나, 아니면 묻지마 범죄의 잠재적 가해자로 몰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잠재적 가해자가 되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이로 인해 다시 증오범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이래저래 장애인은 증오범죄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냥 세월이 흘러 이 불안감이 망각되기만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 여성 증오범죄임을 부정하고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는 것은 비슷한 또 다른 여성 증오범죄, 더 나아가 다른 소수자에 대한 증오범죄를 초래할 것이다. 또 정신질환자의 범죄를 개인적인 일탈로 바라보고 사회적 억압과 통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사회적 인식을 그냥 나두는 것도 장애인 증오범죄를 방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증오범죄는 왜 발생하는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 힘없고 배제된 사람들이 또 다른 힘없는 사람을 가해

경찰의 발표 이후에도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이 사건이 정신질환 범죄인 동시에 여성 증오범죄일 가능성이 높다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정신질환과 여성혐오를 배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로 보더라도 정신착란 등에 의한 무작위적 범행이 아니라 정확하게 여성을 대상으로 했고, 그 저변에는 일베와 소라넷 등으로 대변되는 비뚤어진 남성중심주의 하위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실제이건 망상이건 간에 여성에 대한 혐오가 범행의 원인이었음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이 힘없고 가진 것 없고 정신질환마저 갖고 있는 사람은 실제이건 망상이건 왜 여성을 혐오하게 됐을까? 이 사회에 내재돼 있는 여성혐오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여성혐오를 거부할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여성혐오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여성혐오를 그냥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성혐오를 만들어 냈는가?
상대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들은 자신들의 힘이 도전을 받게 되면 여러 방법을 동원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해 다른 약소한 힘을 가진 집단들을 배척하는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이후 이러한 여론은 하나의 집단 범죄 행위로 변화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사회를 보면 20·30대 여성들은 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회교육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와 성차별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같은 세대 남성들의 양성평등 인식은 남성들의 세대전승에 의해 앞 세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또한 여성들은 기존에 남성들이 하던 일에 진출한 반면 남성들은 돌봄과 같은 기존 여성들이 하던 일을 기피하면서 남성들의 경쟁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남성들의 분노와 열패감은 높아졌고, 이를 엉뚱하게 여성에게 전가하였다. 이에 따라 최근에 군 가산점 논쟁, 더 나아가 00녀와 같은 여성 비하 표현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됐다. 여성을 보호 대상으로 여겨 무시하고 차별하던 기존의 여성차별이, 공격과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 적대하고 경멸하는 여성혐오로 변질된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위계에 따라 보호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이 평등을 요구하고 실제로 일정 정도의 평등을 보장받게 되면 그와 동시에 평등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보호의 대상으로 배제하고 무시해도 됐던 사람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이게 되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것이다. 성별 위계에 균열이 생기고 여성의 진출이 가시화되면 이에 대한 반격이 생겨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에 대한 존중이 확산될수록, 즉 동성애가 합법화되고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전면에 드러나면 이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2014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는 1,017건으로 전체 증오범죄의 18.6%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사람들이 인터넷, 언론 등을 통해 이와 같은 여성혐오 문화에 노출되고 이를 거부할 힘조차 없다보니 실제로 여성 증오범죄를 범한다는 사실이다. 여성혐오 담론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행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남역 사건을 보면서 히죽거리고 뿌듯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혐오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배후 범죄자 아닌가? 어찌 보면 가해자는 배후조정 당해 반사회적 행동을 했을 뿐이다. 가해자는 여성혐오를 배척하거나 또는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힘도 없을 만큼 이 사회에서 배제돼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사회의 힘 있는 주류세력은 뒤에 숨은 채 사회에서 배제되고 힘없는 사람들이 또 다른 힘없는 사람들을 가해하는 것이다. 강남사건의 가해자도 정신질환자로서 이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됐던 사람임에도, 주류사회는 가해자를 철저히 나쁜 사람이란 프레임에 가둬놓고, 심지어 ‘나쁘고 위험한 사람=조현병이 있는 정신장애인’ 으로 규정하고, 또 다시 사회를 향해 정신장애인은 위험하므로, 사전에 격리해야 한다는 개념을 확산시키고 있다. 사회의 문제를 가해자의 개인적 특성으로 치환시키고, 이러한 사람들은 병원에 강제라도 입원시켜야 한다고 하고, 심지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양산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해자의 행동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됐다. 하지만 가해자 개인의 일탈로만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배후에 있는 거대한 문화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인구집단이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하면 그래서 일정 정도 평등해 지면 반대급부로 그 집단에 대한 증오범죄가 늘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차별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강할수록 이에 반대하는 반여성주의(anti feminism)의 물결도 거세졌다. 마찬가지로 장애차별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강할수록 이에 반대하는 차별주의의 물결도 강해질 것이다. 실제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저상버스 도입을 위해 시외버스 앞을 가로막는 시위를 본 사람들 중에는 장애인들이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교묘하게 장애차별주의(disablism)를 만들어내고 이를 전파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도 불평등한 사회에서 그냥 만족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평등을 얘기하다보면 역설적으로 부메랑이 되돌아 올 수 있으니 평등사회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평등사회를 포기할 수는 없다. 평등을 요구하는 운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한 삶을 위해서는 존엄성이 훼손된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를 두 세력 간의 대결, 즉 장애인과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 간의 대결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대결이라는 것은 누군가 이겨서 새로운 위계를 다시 만들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새로운 위계가 아닌 새로운 평등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평등의 지향에 의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고 짧은 시간에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보다 평등사회를 지향하도록 사회의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교육, 인권교육이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다. 또한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또 다른 약한 사람들을 향한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극심한 빈곤과 불평등, 일상화된 차별 등과 같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작성자이동석 사회복지학 박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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