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은 불운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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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8일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한 명의 젊은 노동자가 죽었다. 그는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다 죽었다. 매뉴얼에는 2인 1조로 작업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2월에 실습교육을 마치고 일한지 7개월째였다. 바로 열흘 전 강남역 근처 노래방에서 20대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연이은 두 명의 안타까운 죽음을 목도하면서 나는 묻는다. 정말 그/녀들은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것일까.
비정규 노동자라서
구의역에서 죽임을 당했던 노동자는 외주업체 은성PSD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사고가 나자 서울메트로가 처음 한 말은 ‘그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일이라고 했다. 수칙에 따르면 2인 1조로 일해야 하고, 열차 운행 중에는 일할 수 없게 돼 있다. 그가 도착한 사실을 알리고 2인 1조로 일했다면 그러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스크린도어의 열쇠는 서울메트로가 관리하므로 그가 도착한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자 서울메트로는 말을 정정했다. 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자 사과했다.
유지보수 담당자가 정규직 노동자였다면 가장 중요한 절차인 ‘해당 열차 주의운전 요청’을 종합관제실에 ‘직접’ 할 수 있었을 것이며, ‘반드시’ 2인 1조 점검이 지켜질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종합관제실과 ‘직접 소통하지 못한 채’보수작업을 하고 있다. 복잡한 절차를 거칠 수밖에 없는 하청노동자에게 안전수칙이란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작년에도 강남역과 성수역에서 스크린 도어 보수작업을 하던 하청노동자들이 죽었으나 달라진 것이 없다. 서울메트로(1~4호선)와 달리 서울도시철도(5~8호선)는 스크린도어 유지보수업무를 정규직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다. 스크린도어를 정비하고 수리하는 일은 안전 업무 중 하나지만 유지보수 관리 업무에 드는 예산을 줄이기 위해 외주업체에 맡긴다. 비용 때문에 노동자나 시민들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린다. 행정자치부의 공기업 경영평가표에는 ‘경영효율화’(15점) 항목이 ‘재난·안전관리’(8점)보다 배점이 높게 책정돼있어 공기업들은 경영평가를 잘 받기 위해 외주화를 선호한다. 그러니까 그의 죽음은 아주 체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려고 남긴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가 아니다”라고.
안전수칙도 매우 모순됐다. ‘2인 1조 수칙’ 아래는 ‘1시간 안에 도착’이라고 돼 있다. 인력이 얼마 안 되는 은성PSD에서 신고가 들어온 스크린도어 수리를 다 마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많은 작업량을 채우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그의 가방에는 사발면 하나가 유품으로 있었다. 지킬 수 없는 안전수칙은 안전수칙이 아니라 위험수칙이다.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중대재해 발생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난해 국내에서 산재사고로 숨진 전체 노동자 855명 가운데 하청 소속 노동자는 모두 345명(40.4%)이다. 산재사망 중 하청 노동자 비중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그야말로 ‘위험의 외주화’다. 그는 개인적으로 지독히 운이 없어서 죽은 게 아니다. 아니 그의 불운은 비정규 하청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여성이라서
5월 17일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젊은 여성이 낯선 남자에 의해 죽었다. 피해여성과 칼을 휘두른 남자는 서로 아는 관계가 아니었다. 범죄를 저지른 이유를 묻자 가해자는 "여자에게 무시당해서 죽였다"고 했다. 실제 그는 화장실에서 남자 6명이 오가는 동안 가만히 있었고 여성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범행을 저질렀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 살해는 일어난다. 혐오는 단지 한 개인이 혐오 감정을 가지고 있냐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면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학습되기에 때로는 동정으로, 때로는 혐오로, 때로는 적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혐오 표현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혐오 대상이 되는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확대, 재생산해 해당 집단의 인격을 사라지게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소수자가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여기지 못하게 한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는 남성으로서의 성적 주체화를 달성하기 위한 여성 멸시를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여성을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동등한 ‘인격체’를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여성을 남자의 생각과 감정대로 따라줘야 하는 대상,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가부장사회에서 여성혐오 발언과 행동은 지속된다. 여성 살해(femicide)는 여성(femi)과 살해(cide)의 합성어로, 다이애나 E.H. 러셀은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하는 행위’로 정의했다. 여성 살해는 여타의 살인사건과 달리 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성을 향한 증오․멸시․혐오를 기반으로 해 그녀들의 목숨까지 앗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범죄다.
한국 사회에서 최근 여성들은 무능하다거나 사치스럽다거나 남자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등의 언설로 여성을 혐오하고 무시하는 말들이 넘쳐나고 있다. 김치녀(한국여성을 비하하는 말), 된장녀(사치와 허례허식이 많은 여성), 오크녀(못생긴 여성) 등 온갖 ‘~녀’라는 말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을 무시하고 대상화하는지를 드러낸다. 심지어 살해돼서 트렁크에 담긴 끔찍한 피해여성을 ‘트렁크녀’라고 지칭하는 지경까지 갔다. 구조화된 여성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사람들에게 여성은 생명과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고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해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는 불운에 처할 수 있었다.
장애인이라서
정부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혐오범죄가 아니라 묻지마 범죄’라고 규정하며 범죄현장이 남녀공용화장실이란 사실을 짚으며 화장실 개선책을 내놓았다. 모든 건물에 화장실을 남녀 분리하도록 관리 감독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 후에는 조현병 환자들을 범죄자로 지목하며 정신장애인에 대한 낙인을 찍었다.) 정부의 대책은 얼마나 한심하고 모순적인가. 왜 정부는 공용화장실은 범죄가 발생한다고 보는가. 이 대책이야말로 모든 남성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게 아닌가. 아니 남성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많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모든 공간이 이용자 모두에게 평등하게 안전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지하철은 정규직 노동자가 일하기에는 안전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하기에는 안전하지 않게 운영된다. 마찬가지로 섬마을은 여교사에게는 안전하지 않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 한 어떤 공간도 안전할 수가 없다. 또한 지하철을 이용하는 비장애인은 안전할 수 있지만 장애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정부와 기업은 공간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는다. 사회적 소수자보다는 힘 있고 주류인 사람들을 고려해서 시설을 만들고 운영한다. 비용 때문에, 편견 때문에.
그래서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사망하거나 다치는 일은 많다. 2014년 9월 시각장애 1급의 남성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용산역 승강장에서 계단을 찾다가 선로로 떨어져 전동차에 치여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를 갖가 됐다. 승강장에 스크린도어와 ‘선형 점자 블록’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았지만 법원은 철도공사의 책임은 없다고 했다. 법원의 판단조차 비장애인의 편에 서 있다.
지하철만이 아니다. 김용익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복지부를 통해 제출받은 ‘전국 장애인거주시설 내 사망자 및 시설 신설·폐쇄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0년에서 2014년 9월까지 5년 동안 장애인거주시설 341개소에서 1,218명의 사망자가 있었다. 지역사회로부터 격리된 시설에서조차 사망자가 많다는 것은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이 받는 처우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인천 영흥에 있는 해바라기 장애인거주시설에서 2014년 12월에 온 몸에 피멍이 든 채 의식불명에 빠진 장애인이 목숨을 잃으면서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의 비참한 삶이 세상에 드러났다. 장애인들은 지역에서 살아도, 지역에서 격리돼도 목숨을 잃는 불운을 벗어날 수 없다.
불운을 낳는 불평등한 사회
최근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돌아보니 그/녀들의 죽음은 불운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평택과 부천에서 부모들이 때려서 죽은 아동․청소년들은 어떤가. 단지 어린 자녀라는 이유로 찬물 세례를 받고 화장실에 갇히고 7시간 동안 맞았다. 부모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자녀들을 동등한 인간으로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 내가 다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운이 좋아서’였다. 그/녀들은 비정규직이라서, 여성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아동이라서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비정규직이고 여성이고 장애인인 그/녀들이 개인적 불운으로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라고 여긴다면 죽음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불운을 낳은 건 불평등한 사회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한 남성교사가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는다.
“저는 남성이고 비청소년이고 이성애자이고 정규직이어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지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연이은 죽음에 무기력함을 느꼈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모색하는 일이 아닐까. ‘우연히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안도하며, 개인적으로 이 체제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인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정규직이 되고 이성애자가 되면 해결되는 일일까. 장애인이나 청소년이나 여성들에게 어쩔 수 없는 비운의 운명을 감수하라고 말하면 되는 일일까.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개인의 위치를 바꾸려는 개인적 노력’이 아니라 ‘개인들이 함께 연결돼서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행동’이 아닐까. 모두가 동등하게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서로 만나고 행동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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