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의 예외를 허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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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다 된 밤, 오랜만에 지방에서 올라온 활동가들과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골목에서 어떤 여성이 수갑을 등 뒤로 찬 채 두 명의 남자 경찰관에게 파출소로 끌려가고 있었다. 여자 경찰관이 아니었던 것이 눈에 거슬렸다. ‘그냥 갈까’ 망설이다 혹시나 해서 파출소를 들여다봤다. 스타킹도 신지 않은 짧은 치마를 입은 그녀의 허벅지를 남자 경찰관이 누른다. 그녀가 몸부림을 친다고 제압을 하는 모양이다.
‘항의할까, 말까’ 1초를 망설이다 들어갔다.
파출소로 들어가 그녀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성별이 다른 남성경찰관이 신체에 닿는 것은 성추행이 될 수 있다고 항의했다. 경찰관들에게 여성경찰관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아무리 그녀가 취했고 위법을 했을지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관으로 보이는 경찰관은 여경으로 대체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며 공무집행 방해라며 나가라고 했다. 함께 간 동료들 모두를 파출소 밖으로 밀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약간 걱정은 됐지만 경찰이 내쫓았으니 어쩔 수 없다며 나는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내가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을 아는 동료 한 명이 내 명함을 그녀에게 주고 오라고 했다. 혹시 그녀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 않냐며. 닫힌 파출소 문 앞에서 명함을 전달해달라고 경찰관에게 요구했으나 막무가내 공무집행 방해라며 명함을 전하는 것도 막았다.
같이 있는 친구가 뭐가 공무집행 방해냐며 핸드폰으로 사진 촬영을 하니 경찰은 그에게 욕을 한다. 남의 일에 끼지 말라며, 경찰에게 명령을 하지 말라며. 친구가 대거리를 하며 욕을 했더니 공무집행 방해에 모욕죄라며 가둔다.
그제야 경찰은 여경을 부르더니 취한 여성을 달래고 이야기를 하게 했다. 진작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면 됐을 일을…….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 변호사가 와서야 사태가 마무리됐다.
망설임의 이유
내가 그냥 갈까 말까 망설였던 까닭은 그녀를 알지 못하는 데다 그녀가 내 도움을 달갑게 여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경찰과 다투는 일이니 시끄러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경찰의 나라가 된 지 오래된 한국에서 경찰이 뭘 하든지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 게 상식이지 않은가. 시민들이 뭐라고 항의하면 공무집행 방해니 하며 겁박하는 뻔뻔한 태도에 욕이라도 하면 모욕죄로 기소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경찰에게 말해봤자 경찰이 태도를 바꿀 가능성도 높지 않으니 시간이 많이 걸릴 게다.
한마디로 내 시간과 감정, 노동을 보태는 게 밑져야 본전이니 망설였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시간과 감정을 내놓지 않고서 무언가를 바꾸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세상을 바뀌길 바란다면 더욱 그렇다. 사회는 여러 구성원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내팽개쳐 두더라도 결국 그 타인에 대한 사회-국가의 결정이 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사회구성원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실현하려면 당사자가 아닌 관련된 사회구성원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당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짊어지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뿐더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논의하고 행동하는 게 맞지 않은가.
위에서 말한 내 경험만 해도 그렇다. 취객이 경찰에게 어떤 일을 당하든 내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녀가 다음날 아침 자신이 겪은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남자경찰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친다면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말해왔던 인권은 무엇일까. 그 인권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유령이 될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 세상이 좀 더 인간적인,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로 바뀌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권운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표리부동한 사람, 그런 인권활동가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끼어듦의 이유
내가 끼어들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녀가 ‘취객’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보수정권은 주폭이란 말을 창조하면서까지 취객을 단속(?)했다. 경찰 24시 같은 프로그램에서 취객들이 소리를 지르고 거리에 널브러져 있으면 경찰들이 그를 파출소로 데려가 가둔다. 물론 경찰은 취객을 가두는 과정에서 경찰관직무집행법에 따르지 않지만 그런 행동은 모두 정당한 듯 그려진다. 현저하게 공중에게 위험을 가하지 않으면 작동될 수 없는 게 경찰력이지만 방송은 경찰의 모든 행동이 합법적인 양 그렸다. 누군가 취해서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경찰은 취객을 체포하고 벌금까지 매긴다. 무분별한 현행범인 체포를 막기 위해 형사소송법 214조(경미사건과 현행범인의
체포)는 50만 원 이하의 사건에 관해서는 현행범 체포를 제한하고 있지만, 경찰의 “연행해!” 한마디면 연행되는 현실이다.
항의하다가 경찰에게 욕이라도 하면 모욕죄로 현행범 체포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모욕죄의 법정형은 ‘1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취객의 난동보다 형량이 높으니 현행범 체포가 가능하다고 경찰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경찰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잘못된 현실을 나는 지나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생각, 취객은 치외법권대상이 돼 법적 권리도, 인권도 없다는 듯 취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해서다.
우리가 ‘인권의 예외’를 인정하는 순간 인권은 모두의 것에서 일부의 것으로 변할 수 있다. 인권을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드는 일은 그래서 무서운 일이다.
취객의 인권을 모두 인정할 수 없다는 발상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취객은 사리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니 그의 권리를 빼앗아도 된다는 생각, 또는 취객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니 모두를 위해서 그의 권리를 잠시 접어둬도 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가 소리 지르고 거리와 공간의 평온을 깨는 것은 기분 나쁘고 불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를 법적 근거 없이 가두거나 그에게 모욕을 줘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것도 경찰 권력으로 제압하는 일은 삼가야 마땅하지 않은가.
술이 약해 술에 취해본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취객이 싫다. 소리 지르고 괜히 시비 거는 취객이 내 평온을 깨는 게 불편하다. 그러나 그가 싫다고 그의 권리를 제한하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 이러저러하게 나를 또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경찰력으로 제압하거나 제한하도록 허용한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남아 있는 사람들도 경찰력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마음껏 자기표현도, 생활의 자유로움도 줄어들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
예외된 자들의 닮음
취객에 대한 경찰의 논리는 지적장애인이나 정신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닮아 있다. 그가 남들보다 지능이 낮으니 그의 의견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 정신장애인 한 명 때문에 우리의 평온한 생활을 시끄럽게 할 수 있으니 시설에 가둬도 된다는 생각 등이 그렇다. 이미 1971년에 만들어진 ‘정신지체인 권리 선언’에는 그가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분명하게 명시돼 있다. (지금은 정신지체인이라고 쓰지 않지만 번역본이 2007년 것이라 그대로 쓴다.)
“정신지체인은 착취, 학대 및 비인간적인 처우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만약 범죄행위로 인하여 기소된다면 그의 정신적 책임을 충분히 감안한 상태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6조), “정신지체인이 중증 장애로 인하여 그 모든 권리를 유용하게 행사할 수 없을 경우, 또는 그 권리의 일부나 전부가 제한되거나 배제되어야 필요가 생겼을 경우에 이를 적용하는 절차가 남용되지 않도록 적절한 보장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갖춘 전문가에 의한 정신지체인의 사회적 행위능력 평가에 기초하여야 하며 정기적인 심사와 상급기관에의 항소권을 전제하여야 한다.”(7조)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의료 남용이 만연한 사회에서 1992년 세계정신의학협회는 ‘하와이선언’을 발표해 정신과의사들이 정신장애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특히 7조의 “정신과 의사는 절대로 개인이나 단체의 인권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데 전문가적 가능성을 유용하여서는 아니 되며, 치료를 방해하는 부적절한 개인적 욕망, 감정, 선입견, 신념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는 내용은 인상 깊다. 의사라는 위치, 환자와의 관계에서 권력의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대한 자각을 했을 뿐 아니라 의사로서의 욕심, 욕망 때문에 환자를 대상화(의학적 진보라는 욕망을 포함)시키지 않을 근거가 명시됐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에 국제사회는 우리가 여러 이유로 쉽게 정신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의 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다.
시몬느 소스의 『시선의 폭력』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 이후, 인간평등 사상에 의해 장애인에 대한 시각도 달라졌다고 한다. 역사학자 마르셀 고세와 글레디스웨인의 연구로 자기 자신을 타인처럼 생각하고 타인을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존재로 생각하는 상호성의 관계가 주목받으면서 장애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 후 장애인도 사회집단의 일원이 될 수 있고 돌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달라 보이는 사람이 사실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평등사상은 차별과 편견을 깨는 첫 발임이 분명하다.
정말 뛰어난 자들의 결정이 옳은가
그럼에도 머리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질문은 정말 지능이 좋고 능력이 뛰어난 자들의 결정은 옳은가다. 지능이 좋은 사람의 결정, 유창한 언변으로 논리를 펼치는 사람의 결정이 옳거나 좋다는 생각도 우리의 편견이 아닐까?
공동체의 가치, 인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수많은 갑남을녀가 아니었던가. 뛰어난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한 결정을 한다는 가정을 깨지 않는 한, 자신의 인권을 뛰어난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다는 가정도 깨기 어렵지 않을까?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다고 자부하는 지배엘리트들의 결정이 과연 괜찮았는지 생각해 보라. 무엇보다 그렇게 내 삶을, 우리 삶을 다른 사람이 결정하게 내버려둬도 괜찮았는지, 뭔가 뒷머리를 붙들었던 감정에 휩싸이지 않았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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