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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높은 데 사네요

동정하기 전에 물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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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높은 데 사네요.”
“이런 곳에도 차가 다녀요?”
늦은 밤에 택시를 탈 때마다 듣는 이야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민망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저도 여기 살고서야 서울에 이런 산동네가 있는 걸 알았어요.”, “운전하기 힘드시죠?”하며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운전사들은 나은데 인상을 지으며 기름 값이  더 나온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냐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는 꼭대기에 사는 게 내 죄인가 싶기도 하고, 가난하면 택시도 타기도 어렵구나 싶어 속상하다.
그래도 이런 눈칫밥은 괜찮았다. 최근 지인이 쓰던 세탁기를 옮겨주느라 우리 집에 오게 된 친구가 집이 엄청 높은 데 있다며 꽤 놀라며 안타까워했다. 돈도 아낄 겸 운전할 이를 수소문하던 중에 운반을 해준 것이라 그의 반응을 그냥 넘겼다.
그런데 그 후에도 그는 친한 활동가들을 보면 내가 높은데 살아서 안됐다는 듯이 얘기를 하곤 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높은 데 산다고만, 그러니까 사실관계만 말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약간 나를 불쌍해하는 듯이 말한다. 내가 비록 가난하지만 그리 힘들지도 않고 동정 받을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눈길을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라 대거리를 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친한 친구인데다 내 생활을 걱정하느라 한 말이니 더 난처했다. 그래도 마음은 불편해서 내 처지를 돌아보며 내가 사는 동네를 떠올렸다. 사람이 가난할 수도 있지 왜 호들갑이냐 싶기도 하고,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라는 거냐는 생각도 들었다. 언덕 위에 사는 수많은 동네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동정의 효과
장애인들도 지인으로부터 동정어린 시선을 받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싶다. “쯔쯧.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니?” 같은 말들. 나쁜 의도는 아니지만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동정의 효과는 위축이 아닐까. 동정을 받는 사람은 무언가 부족하고, 뭔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시선에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고 더 이상 말하기도 힘들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왜 장애인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문제인지 말하기 쉽지 않다. 온전히 내 신체나 정신의 문제처럼 여기는 듯 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장애를 만드는 사회구조의 문제보다 개인의 문제(결핍, 결여)로 접근하게 만든다.
또한, 동정은 기울어진 관계를 넌지시 보여주는 게 아닐까. 동정 받는 사람과 동정하는 사람은 동등한 위치에 서있지 않은 듯 설정한다. 동등한 위치에 선 상대방을 향한 존중이라면, 동등한 위치에서 하는 공감이라면 당사자들이 처한 위치, 생각 등을 더 들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듣는다면 그가 겪는 어려움이 그의 장애 때문이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구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런 대화 속에서 같이 할 수 있는 마음들이 오가지 않을까. 말을 해야 연결의 끈들이 보인다. 그러나 동정은 그러한 듣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내가 친구에게 원했던 건 아마 왜 이렇게 높은 데 사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어봐주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평지에서 살기엔 전셋값이 너무 높고 월세를 감당하기에는 활동비로는 감당도 안 되고 모아놓은 돈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임대아파트가 얼마 없어서 신청했지만 들어가기 힘든 현실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푸념 섞인 사회비판을 나누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안됐다는 말을 하는 순간, 내 입은 막혔다. 순간 내 가난은 개인 문제이지 사회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변모되는구나.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이기에 경계선, 금이 그어지는 건가, 그이와는 더 이상은 얘기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속상했다.

동정을 기반으로 한 정책
정부의 장애인 정책이 권리가 아니라 동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다. 장애인도 동등한 사람으로서 생활하려면 필요한 것들, 자고 배우고 움직일 수 있는 자원과 수단이 주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는 일은 제쳐두거나 배우는 일은 아예 빼라고 한다. 저상버스 몇 대 있고, 활동보조시간 조금 주면 된다는 식이다. 예전에는 저상버스도 없었는데 생겼으니 그것만으로도 편해진 거 아니냐, 장애인들도 교육받을 수 있는 제도가 조금 생기지 않았냐는 식이다. 어떻게 비장애인하고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비슷하게 살 생각을 하느냐는 식이다. 인권의 가치는 애초 없었던 게다. 
그런 점 때문에 인권활동가들은 정부의 장애인 정책이 인권적이지 않고 동정적이라고 비판해왔다. 인권의 보편성이란 사람이면 ‘누구나, 언제든지, 어디서든’ 누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장애인의 처지에 맞게 필요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과 서비스가 주어져야 한다. 장애인접근권이 보장되는 대중교통, 교육, 작업장이 되지 않는다면 말뿐인 인권이 된다. 공부를 하러 학교에 나가려 해도, 직장에 나가려 해도, 직장에서 일을 하려 해도 활동보조서비스가 지원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청각장애인이나 언어장애인도 일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수화 같은 언어지원 서비스가 되는 나라에서는 일터에서 차별을 받는 일도 줄어든다. 세계인권선언과 헌법에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가 있고,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고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쓰여 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으면 권리는 공문구가 된다. 그런데도 장애인들이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를 요구하면 정부는 욕심이 과하다고 탓한다. 장애인이 동등한 인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동정을 기반으로 한 정책은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구조를 바꿀 의지가 없다. 차별적인 사회구조는 그대로 둔 채 적당히 동정적으로 장애인의 권리를 조금 보장해주면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부는 더 이상 예산도, 인력도, 정책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장애인도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세상은 헛된 욕망이라고 말한다. 욕심이 과하다고 한다. 그들은 장애는 장애인 ‘개인’의 문제이지 ‘비장애인중심의 사회구조’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개인의 문제이기에 동정할 수 있지만 인권은 아니란다. 동정은 가능하나 동등한 권리는 줄 수 없단다. 동정이 인권을 가두는 꼴이다.

과한 요구?
장애인은 사회생활이나 일상생활을 활동보조시간에만 하라는 요구가 과한 게 아닐까? 아니, 그들 말대로 과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랑시에르가 민주주의란 민의 권력을 확대하고 인간평등을 향해 한계를 끊임없는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인권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현행법이 제한하고 있는 권리의 내용들을 넘어서지 않으면 인권은 실현될 수 없다. 원래 법이 포괄하고 있지 못한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고 그 힘으로 법을 바꾸는 게 아닐까. 따라서 인권에 한계가 주어지는 순간, 인권은 행정이 되고 숨을 못 쉬게 된다.
이렇게 인권이 보편성을 잃고 주변화 된 소수의 요구로 치부되는 순간, 인권에 한계선이 그어지고 사회변화의 바탕이 되는 힘으로서 인권은 사그라진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따져야 한다. 어디까지는 인권보장책이고 어디까지는 특권책인지 누가 정하는가, 어떤 구조가 그걸 결정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이 허용하지 않는 인권의 한계선, 권력의 한계선을 볼 수 있다. 보편적 인권을 가로막는 사회질서의 핵을 볼 수 있다. 구조적 폭력이론을 연구한 갈퉁의 지적은 인권의 구조적 폭력과 잘 들어맞는다.
“인권선언들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규범을 제창하지만 구조가 아닌 개인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계가 있다. 인권은 자원의 평등한 분포를 말할 뿐 자원의 분포를 결정하는 권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인권은 가진 자들의 온정주의와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인권이 이와 같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면 권력을 가진 기득권 세력은 궁극적인 권력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기꺼이 내줄 용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권력구조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외견상의 평등만이 이루어질 뿐이다.(Galtung 1969.)”-조효제, 『인권의 지평』에서 재인용

동정적 정책마저 후퇴될 때 흔들리는 나
그러나 동정을 거부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불안하다. 거부하다가 동정적인 정책마저 철회될 수도 있다는 위험 때문이다. 그나마 사회의 ‘따뜻한 동정’에 기대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그나마 없어진다면……. 그래서 장애인권운동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운동은 항상 줄타기를 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겨질 때면 축소되는 항목은 사회적 소수자와 관련된 것이다. 왜 경제가 어려우면 가난하거나 장애인이거나 어려운 사람을 위한 예산이 먼저 축소되는가? 다른 예산과 장애인복지예산은 동일한 예산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동등한 권리보장책이 아니라 비장애인 복지정책 옆에 붙은 장식용 정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방송통신위는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를  개정해 장애인의 방송접근권을 뒤로 돌리는 근거를 마련했다. 경영상 어려움이 있는 방송사업자에게 장애인방송 편성 의무를 줄이거나 유예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방통위는 어려운 방송사를 지원해 장애인방송이 편성되도록 하겠다고 하지만 정부가 지원할 수 있다면 굳이 의무 편성을 줄이는 근거조항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2007년에도 복지부가 건강보험 예산이 많이 든다며, 의료급여수급자에게 배정된 예산을 줄이는 정책을 도입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동정적 정책마저 사라질 때 너무 과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닐까,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흔들리는 자신을 탓하기 전에 흔들림의 근원에 대해 놓치지 말고 생각하자. 흔들림을 낳는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가난한데 복지가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삶이 힘드니까 회의 섞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지, 개인의 사상이 불철저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흔들렸다가도 인권의 추로 돌아오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이해할 때 인권의 가치를 생생하게 부여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인권의 가치를 두레박의 줄로 삼아 인권에 기반을 둔 정책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바탕으로 밥은 줄 테니 공부는 하지 말라는 요구, 움직이게 해줄 테니 영화나 방송은 보지 말라는 요구의 폭력에 대해 말하자. 동정의 시선으로는, 동정적 정책으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는 게 인권이라고 외치자. 그래야 동정적 정책의 경계가 무너진다. 인권의 가치를 만들어왔던 것은 몫 없는 자들이 보편을 향해 끊임없이 경계를 무너뜨린 외침이었듯이. 그렇게 인권의 가치에 살이 붙고 튼튼해질 것이다.

 

작성자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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