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장애인도 천만 관객이 되고 싶다
본문
주말에 가족, 연인, 친구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문화생활은 무엇일까요? 저는 제일 먼저 영화 관람이 떠오릅니다. 작년 한해 극장 입장권 매출액은 1조 7,154억 원이고, 관객 수는 2억 1,729만 명으로, 1인당 연간 관람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인 4.22회에 달했습니다.
5년 전 ‘도가니’라는 영화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청각장애 학생을 상대로 청각장애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이 성폭력과 학대를 저지른 끔찍한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 형사재판 초기 피해자를 포함한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지만 수화통역사가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헌법에 따라 공개재판이 원칙인데, 수화통역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청각장애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재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도가니’가 46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지만, 막상 청각장애인들은 그 영화를 보기 어려웠습니다. 당시(2011년 1월 기준) 도가니를 상영하는 전국 상영관 640곳 중에 자막을 제공하는 상영관은 고작 22곳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사단법인 두루와 장애인법연구회에서 작년에 공동체 상영회를 열었습니다. 그날 같이 본 영화는 청각장애인 가족 이야기를 담은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였고, 배리어프리버전이었습니다. 영화 관람이 끝나고 청각장애가 있는 동료가 “참 재밌었다”고 답장을 보내주었고, 시각장애가 있는 김재왕 변호사 부부는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는 소감을 남겨줬습니다.
이처럼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도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청각장애인에게 자막(영화에서 나오는 대사, 효과음 등을 한글로 표시해주는 것)이, 시각장애인에게 화면해설(화면의 장면, 자막 등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것)이 적절하게 제공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편의제공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한 요구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법에 부합합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는 용역 제공 및 문화ㆍ예술 활동의 차별금지와 정보제공에서의 정당한 편의제공의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무려 8년 전부터 그래왔습니다.
특히 2015년 4월 11일부터는 ‘스크린 기준 300석 이상 영화상영관’을 보유한 사업자의 경우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자막 등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잠깐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5조 제1항에서는 “재화ㆍ용역 등의 제공자는 장애인에 대해 장애를 이유로 장애인 아닌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과 실질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수준의 편익을 가져다주는 물건, 서비스, 이익, 편의 등을 제공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4조 제1항에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및 문화·예술사업자는 장애인이 문화ㆍ예술 활동에 참여함에 있어서 장애인의 의사에 반해 특정한 행동을 강요해서는 아니 되며” 차별행위를 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말이 좀 어렵나요? 용역은 서비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영화 상영도 일종의 서비스 제공이기 때문에 상영관 운영자는 용역 제공자에 해당합니다. 영화를 상영하면서 화면해설과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수준의 편익(편리와 이익)을 가져다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되므로 법위반입니다.
그리고 상영관 운영자도 문화·예술사업자에 포함되기 때문에 차별행위를 하면 안 되는데, 차별행위에는 “시ㆍ청각장애인은 상영관에 들어올 수 없다”고 대놓고 차별(배제,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차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즉, 겉으로는 배제, 거부하지 않지만, 정당한 사유 없이 화면해설과 자막을 제공하지 않은 채 영화를 상영하여 실질적으로 시ㆍ청각장애인이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간접차별행위에 해당합니다.
더구나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그 시행령에서는 “차별하지 말라”고만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막, 보청기 제공 등과 같이 정당한 편의를 제공할 의무까지 명시하고 있습니다. 문화ㆍ예술사업자 중에서 스크린 기준 300석 이상 규모의 영화상영관 운영자는 장애인의 영화 관람을 보조하기 위한 휠체어, 점자안내책자, 보청기 등 장비 및 기기를 제공해야 하고, 장애인을 위한 영화 관람 관련 정보도 제공해야 합니다(장애인차별금지법 제24조 제2항, 동법 시행령 제15조, 별표 4).
또한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르면 생산 또는 배포하는 정보에 대하여 개인형 보청기기, 자막 등 정당한 편의제공의무도 규정하고 있는데, 우리가 관람하는 영화도 상영관이 배포하는 정보에 해당하기 때문에 위 규정을 근거로 정당한 편의제공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장애인차별금지법 제21조, 동법 시행령 제14조).
요즘 큰 상영관에서는 ‘장애인 영화관람데이’라는 이벤트를 합니다. 정기적으로 영화 한편을 정해, 일정한 시간대에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과 자막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르면 상영관 운영자는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시스템으로는 장애인에게 영화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원하는 시간대에 영화를 볼 수도 없습니다. 장애인복지카드로 장애인임을 증명하고 예매를 해야 영화를 볼 수 있으니, 비장애인 친구들과 같이 영화를 볼 수도 없고, 장애 등급을 받지 않은 사람은 위 이벤트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장애인 영화관람데이를 운영한다고 해서 법에서 정한 상영관 운영자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관람을 원하는 시ㆍ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상영관 운영자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습니다. 우리 원고 4명 중 2명은 시각장애가 있고, 2명은 청각장애가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중 한 명은 전맹이고, 한 명은 저시력 장애인입니다. 청각장애인 중 한명은 전혀 소리를 들을 수 없고, 한 명은 보청기가 있으면 어느 정도 들을 수 있는 난청인 입니다.
상영관 운영자를 상대로 한 우리의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각장애가 있는 원고들에게는 화면해설을, 청각장애가 있는 원고들에게는 자막과 특히 난청인 원고에게는 FM 보청기기를 제공하라. 그리고 장애인을 위한 영화관련 정보를 원고들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공하라.”
아무리 법에 근거가 있다고 해도, 기술적으로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요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다양한 기술과 기기가 개발돼 적용되고 있습니다.
자막을 제공하는 방식에는 스크린 위에 자막을 띄워 모든 사람이 자막을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열린 자막)과 전용단말기 등 보조기기를 통해 해당 이용자에게만 자막을 제공하는 방식(폐쇄 자막)이 있습니다. 열린 자막이 장애인에게 보다 편리하겠지만, 폐쇄 자막 기술 또한 매우 다양하게 개발됐습니다.
▲ 좌석 앞 투명한 화면에 자막을 띄우는 방식 |
미국의 최대 상영관 운영자인 리걸(Regal Entertainment Group)은 소니(Sony)가 개발한 ‘자막이 흐르는 특수안경(Access Glasses)’을 청각장애인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좌석 앞 투명한 화면에 자막을 띄우는 방식(Rear Window)도 미국에서 이미 개발돼 있습니다.
‘캡티뷰(CaptiView)’라는 개인용 자막 처리기기를 활용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기존의 영화관 의자에 부착하고 무선 인터넷을 통해 전송되는 자막을 관람자가 원하는 각도로 조절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난청인 청각장애인들을 위해서 FM 보청기기(시스템)는 개인용 보청기 또는 인공와우와 같은 청각보조기를 통해 듣는 것을 도와주는 장치로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를 보다 명료하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2013년 FM 보청기기 시스템을 설치하여 난청인에게 영화 관람의 기회를 제공한 바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정당한 편의제공인 화면해설의 방법도 자막과 마찬가지로 ‘열린 방식’과 ‘폐쇄 방식’이 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2014년부터 폐쇄 방식의 화면해설을 제공해 시각장애인에게 영화를 관람하도록 했습니다. 화면해설을 위한 기기는 보다 단순합니다. 현재 다양한 보조기기가 개발돼 있으며, 최근에는 본인의 핸드폰에 어플리케이션을 깔아서 화면해설을 듣는 방식도 개발됐습니다.
▲ 캡틴뷰 재인용 자막 처리기 |
미국의 3대 영화관인 리걸, AMC(AMC Entertainment Inc.), 씨네마크(Cinemark Theaters) 모두 폐쇄자막과 화면해설 등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영화관 리걸의 예약 사이트는 영화 옆에 시간 표시가 있고, 그 옆에 폐쇄자막(CC), 화면해설(DV)이 가능한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영화 관객 수 천만 명을 돌파하는 시대에 시·청각장애인들도 천만 관객 중 한 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시ㆍ청각장애인들이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영화를 골라서 온전히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시작한 소송이 시ㆍ청각장애인의 영화 관람권을 포함한 문화 향유권을 보장하는 작은 첫걸음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소송은 법무법인 지평,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원곡 법률사무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사단법인 두루가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