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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실인지, 어떤 기억의 존치인지 묻자

[인권이 던진 질문] 단원고 기억교실 존치와 장애인통합교육의 현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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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와 유가족 존치교실 놓고 갈등 폭발”

 기사 제목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단원고 재학생 학부모들이 교실을 돌려달라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행사를 무산시켰단다. 전날에도 ‘단원고등학교 교육가족 일동’ 명의의 성명서를 내고 교실을 학교 주인인 재학생들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또 우리끼리 이러는가 싶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단원고 희생학생들이 사용하던 교실, 지금은 기억교실이라고 불리는 교실을 존치하는 것을 두고 이전에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학교 측은 갈등이 많았다. SNS와 각종 커뮤니티에는 교실 존치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다.

이번엔 학부모들 간의 갈등으로 나타나서 더욱 속상하다. 마치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른 듯 돌아가는 모양새가 속상하다. 자녀들을 학교로 보내는 입장이 같은데 이렇게 서로 대립하니 더 그렇다. 재학생 학부모들은 기억교실이 존치되면 아이들에게 심리적 불안감과 우울감을 줘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 어렵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기억교실이 존치돼서 그런 걸까? 304명이 그냥 어떤 손도 써보지 못하고 눈앞에서 다 물에 잠긴 걸 온 국민이 다 봤는데 그게 기억교실이 없어진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그냥 세월호 참사를 잊자, 마치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만들자는 말인 걸 모르는 걸까 싶었다.

 사실 화가 나는 건 학교나 경기도 교육청의 태도다. 그동안 기억교실 존치 문제에 대해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난해 9월 교실을 새로 짓자고 했고, 1년 만이라도 신입생 수를 줄여 새로운 방법을 찾아 보자고도 했다. 교무실이 있는 3층 공실 공간과 지하 1층을 활용해 재배치하면 3층에서만 적어도 7개 교실을 더 확보할 수도 있어서 그렇게 하면 어떻겠냐고도 했다. 그러나 학교나 경기도 교육청은 고려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다가 신입생이 들어올 시기가 되니 재학생부모들과 신입생부모들을 앞세워 나가라고만 한다. 추모관 건립하면 되지 학교에 기억교실이 왜 필요하냐고 했다. 이재정 교육감은 “교실은 추모공간이 아니며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라며 “단원고를 교육적으로 거듭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이는 전적으로 학생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유가족들을 쫓아내듯 기억교실을 없앤다면, 신입생이나 재학생들은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추모공간과 교육공간은 그렇게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인가? 정말 교육적인 것은 무엇일까?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며 다른 교육의 방향을 찾기 위해 공존을 위한 논의와 시도를 하는 게 아닐까.‘기억교실’이 단순한 추모의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위로와 공감의 장소가 되고 다른 미래를 위한 연대의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그곳에서 살아있는 자들끼리 손을 잡아야 가능한 게 아닐까. 그래야 제대로 된 애도도 가능하고, 공통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가 그곳에서 만나지 않을까. 교육당국은 애초 그런 생각이 없었으니 기억교실은 그냥 자리만 차지하는 ‘공간’일 뿐이었는지 모른다. 그저 아무 곳이든 추모공간 하나 만들면 된다는 ‘추모와 교육’에 대한 가치 없는 접근이 이런 비참함을 불러온 것이지 않을까.

 

어떤 폭력

교육당국이 손 놓고 학부모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걸 보니 옛날 일이 떠오른다. 대학교 신입생 때 가투에 참여했다가 전경에게 잡힌 적이 있다. 그때는 거리시위를 가투라 했다. 집회가 불가능한 시대라 신고 없이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은밀하게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정확히 그때 그곳에 가면 누군가 도로에 나가 구호를 외치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다. 그렇게 있다보면 전경이 와서 해산하는 식이었다. 그날은 해산 중에 넘어져서 잡혔다. 첫 연행이었다. 전경버스에서 전경이 학생들을 군홧발로 배를 때리고 화이바(전경이 쓰는 오토바이 탈 때 쓰는 두꺼운 안전모)로 머리고 할 것 없이 때렸다. 여자고 남자고 가리지 않고 힘껏 때렸다. 나도 많이 맞았다. 그런데 몸보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야, 이놈들아. 어제 내 동료가 너희가 던진 화염병에 맞아서 병원에 갔어. 너희 데모 때문에 우린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그가 울부짖은 내용이 너무 아팠다. 그때는 419혁명 기념주간이라 학교며 거리며 연일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과 전경들이 다수 부상을 입었다는 걸 뉴스에서 듣기는 했다. 그런데 직접 부상자의 들으니 상처에 붙인 반창고가 떼지는 듯 했다. 밤 12시가 넘어 풀려나 나는 집에 갈 수도 없어 학교에 가서 홀로 밤을 새고 선배들이 사주는 점심을 먹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선배들에게 어제 전경버스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우리가 잘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배는 담담하게 전경들이 무슨 잘못이냐며, 전경들을 앞세우고 뒤에서 권력의 횡포를 부리는 정권이 문제라고 했다. 전경들도 어찌 보면 피해자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시위를 안 한다고 달라지겠냐고 했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고민을 처음 하게 된 건 그때였던 거 같다.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적 폭력만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을 직시하지 않으면 다시 원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통합교육과 교실 존치

기억교실을 둘러싼 갈등을 보니 장애인통합교육이 겹쳐진다. 한국에서 통합교육은 미국의 통합교육을 따라가는 편이라고 한다. 1970대 후반 미국에서 장애인학생의 적절한 교육환경에 대한 요구로 시작된 통합교육은 물리적 공간의 통합에서 학교공동체 성원의 통합, 지역사회의 통합으로 고민이 확대되고 있다. 한국은 일반학교에서 장애인학생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특수학급이 있는 학교를 늘리는 방식으로 갔다. 물리적 공간의 통합이 중심이다. 그러다 2007년 교육과정의 통합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법(장애인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 개정되면서 고민은(현실이 아니라!) 진전됐다. 학계와 장애인권운동진영에서는 장애인학생과 비장애인학생의 상호작용 증진, 교육과정에서 참여의 증진과 배제의 감소. 행정적인 지원 등의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물리적 통합도 넘어서기 어렵다. 교육과정을 수정하려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입시와 성적 위주의 교육가치 속에서 장애인학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성적으로 평가하는 교육환경에선 비장애인학생도 장애인학생과 함께 어울리기란 시간과 감정을 내야 하기에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동등한 인간으로서 장애인을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통합교육이라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한다. 상호이해의 지점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장애인학생도 비장애인 학생도 함께 있어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는 학교가 아니라면 통합교육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연구에 따르면 학령기에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어른이 돼서도 해당 집단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나 부정적 인식으로 일반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일찍 서로 다른 사람들과 접하는 것은 중요하다. 장애인학생과 비장애인학생이 함께 배우고 어울리는 것, 또래집단의 관계 맺기가 동등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과 가치를 만드는 것이 통합교육일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상호작용의 경험으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도 생기고 장애인의 삶이 낯설지 않게 될 수 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입장을 생각해 볼 기회도 생길 수 있다. 비장애인학생이 장애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태도가 없도록 인권교육이 먼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단지 비장애인학생은 장애인학생을 도와야 한다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건 동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어떤 ‘갈등’이 발생했을 때도 무조건 비장애인학생이 이해해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풀 수 있는 기회와 방식도 고려해야 한다. 학교공동체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원인과 해법을 찾는 ‘과정’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장애인학생들도 비장애인학생들로부터 받은 폭력으로 다시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는 일이 사라질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관계 맺기가 필요한 것이지 함께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서로 인지적, 정서적 변화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시스템에서는 그건 불가능하다.

단원고의 기억교실 존치 문제도 비슷하다. 재학생과 신입생과 유가족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가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를 그 지향을 함께 나누는 것이 교육이다. 그러할 때 먼저 간 학생들이 웃고 울었을 기억교실에서 배우고 추모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니 기억교실은 교육장소도 추모장소도 아닌, 그저 거추장스러운 공간이 될 뿐이다. 게다가 성적으로 인해 고통 받는 학생들과 부모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봐줄 여유가 없다. 저러다 내 아이가 쳐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만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을 고통으로 밀어 넣는 건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시스템이지만 그걸 보지 않고 교실만 보고 있으니 답답하다.

우리 사회의 경쟁교육시스템에서 “장애학생이 우리 학급에 있어 평균점수가 떨어졌어요”라는 특수학급의 담임선생님의 말과 “단원고 재학생들에게 타학교 학생들과 동일한 학습 환경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재학생부모의 말은 비슷하게 서 있다. 경쟁 중심의 학교에서 장애인학생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듯이, 세월호 참사로 하늘로 간 친구나 선배들에 대한 기억도,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도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참 씁쓸하다.

그러니 우리가 원망하고 바꾸어야 할 구조적 폭력은 위로도 애도도 공감도 다 삭제해버리는 무지비한 입시 위주의 경쟁사회가 아닐까. 그리고 비판의 화살은 그러한 사회에 순응하라고 하는 교육정책만을 내세우는 정부와 교육당국을 향해야 하지 않을까.

 

논란만 읽지 말고 기억교실에 가보기를

끝으로 논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단원고 기억교실에 한번이라도 가보기를 권한다. 필자가 단원고 기억교실에 가서 느꼈던 그걸 경험하길 바란다. 그 곳에서 아이들의 웃고 있는 사진, 친구들이 정성스레 쓴 편지와 선물, 이름 모를 시민들이 남기고 간 약속과 애도의 말, 가족들의 아픔이 담긴 글과 사진을 보며 울컥 하면서도 따뜻함을 느꼈다. 학생들 하나하나의 삶이, 세계가 보였다. 그렇게 숨을 쉬고 산 그이들이, 속절없이 사라진 거구나 싶었다. 비정한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란 단어로 잠식해버린 기억교실의 따뜻한 기운이 기억과 공감, 연대를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작성자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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