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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에 대하여

인권이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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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기 농민 쾌유를 빌며 행진하는 시위대

“저도 그날 그 자리에 같이 있었습니다. 칠십이 다 되가시는 그 농민분이 불법에 맞서 우리의 분노를 전하기 위해 꼿꼿하게 현장을 지키셨을 때 전 쏟아지는 최루액을 피했습니다. 인도에 있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노동자들이 맨 앞에 섰더라면 백 동지가 사경을 헤매지 않았을 거란 죄책감으로 뒤숭숭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 저는 서울대병원의 간호사입니다. 그 살인 최루액 속에서 의료인을 찾을 때 쫓아가지 못한 게 그렇게 자꾸자꾸 회한으로 남습니다. 백남기 어르신이 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매우 늦었다고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현정희 의료연대본부 서울지역지부장이 백남기 농민 쾌유를 비는 문화제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날의 자신이 부끄럽고, 그날의 행동이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건 목울대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나 여당 정치인은 물론이거니와 사건의 직접적 책임자인 강신명 경찰청장은 사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백남기 님을 비롯한 시위참가자들을 파리를 테러한 조직인 IS에 빗댔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당당했다. 경찰은 물대포 사용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규정은 ‘예시’일 뿐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시위대를 이격시키기 위해 살수했는데 불행히 거기 그 분이 계셔서 변을 당한 것이다”고 변명했다.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경을 헤맬 정도로 공권력 집행을 잘못했다면 사과와 쾌유를 비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현실이 화가 났다. 사실 현정희 지부장도 집회 현장에 같이 있었고 함께 싸운 사람이 아닌가. 물대포를 직접 맞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도 함께 최루액에 콜록거리며 정부 정책을 비판하며 함께한 사람인데 그런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현실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정말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들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부끄러움이란 무엇이기에 이토록 다른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성찰적 부끄러움, 사회적 정의를 만들다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수오지심은 자신의 옳지 못함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으로 의(義)로움과 연관된 것이라고 한다. 부끄러움의 감정은 성찰적이며 그 성찰을 바탕으로 해야 정의가 설 수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부끄러운 감정이 있어야 자신의 말과 행동을 성찰하고 삼갈 수 있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삼가게 하기에 과거와 현재의 행동에 한정되지 않으며 미래와도 연관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이 미래의 행동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권의 역사도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부끄러웠던 역사를 성찰하면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제노사이드를 보며 인간의 잔인함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만들어진 것이 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이다. 이렇게 부끄러움은 성찰적이어서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집단의 윤리와도 연관된다.


부끄러움은 사람과 그 사회를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점점 부끄러움을 잃어가고 있다. 부끄러움에 무감한 사회. 정치인들이나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이 부끄러움 없이 막말을 해도 그것이 수용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나아가 일부 사람들의 반응은 부끄러움의 실종을 실감나게 한다. 일간베스트(일베) 게시판에 백남기 님이 쓰러진 사진을 캡쳐해 조롱하는 글을 썼던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정치지도자들이, 언론이, 사회가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나누지 못하거나 왜곡한 결과이다.
무엇을 부끄러워하는가는 자신과 부끄러움의 대상(사람이든 물건이든 사건이든)과의 관계-위치-욕망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가치 기준과 무관하지 않다. 필자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최근 일은 모두 ‘손’ 때문이었다. 한 번은 2013년 밀양 인권침해 감시활동을 하면서 주민과 만났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2014년 12월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 때문에 서울시청에서 농성하던 중 서울시 고위공직자를 만났을 때였다.
2013년 정부는 밀양 송전탑을 주민들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행정대집행을 하겠다고 하면서 주민들의 통행을 막거나 다치게 했다. 필자는 그러한 과정을 감시하며 주민들의 인권침해 경험을 증언받는 일도 했다. 70대 할머니도 인터뷰하고 40대 젊은 주민도 만났다. 농사를 짓다가 송전탑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반대운동을 시작한 젊은 그녀를 만날 때 속으로 부끄러웠다. 손을 감추고 싶었다. 그녀는 농사를 짓기에 얼굴도 까무잡잡했고 손도 거칠었다. 그에 비해 내 손은 하얗고 말끔했다. 물론 다른 사람 손에 비하면 내 손은 까맣고 거친 편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 거친 손으로 경찰들과 한국전력 용역 깡패들과 마주했을 장면이 자꾸 연상돼 미안해졌다. 단지 그녀가 나보다 젊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살아온 소박하고 정직한 삶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런 그녀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내 손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관계에 대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또한 부끄러움은 관계에서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경우에도 생긴다. 물론 사람에 대한 무시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생기니 부끄러움은 편견과 무관하지는 않다. 2014년 서울시청 농성을 하며 서울시 고위공직자와 협상을 위해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얼굴만 아니라 손도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하필 내 손은 농성 중에 제대로 씻지 못해 손톱에 까맣게 때가 끼어있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손을 쥐고 손톱이 보이지 않게 했다. 혹여 그가 내 손톱을 보고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 같다. 그와 동등한 대화를 해야 하는데 손톱의 때가 나를 만만하게 보게 만들까 걱정됐다. 깨끗하고 말쑥한 외모가 차지하는 위계로 인해 열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손톱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정말 제대로 된 대화 상대가 아님이 분명하지만 그런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도 번지르르한 외모를 사실 중시했던 건 아닐까. 신화연의 『부끄러움의 코드』에서 부끄러움을 “내면화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심리적 거리를 인식할 때 일어나는 감정” 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나에게 ‘깨끗한 외모’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내면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앞서 동등한 대화를 위해서 사회적 편견이 만든 위계를 떨쳐 버리려는 생각을 부끄러워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사회가 마련한 일정한 기준에 맞추지 못했다는 자책이 부끄러움을 일으킨다고 할 때 당시 내 부끄러움은 그렇게 생긴 것 같다. 공적 자리에서 말쑥한 모습으로 등장해야 한다는 그런 기준이 나에게 강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농성장이긴 하지만 공적 만남이니까. 지금은 왜 그 자리에서 내 손을 감추었는지, 그게 부끄럽다. 더 당당하게 내 검은 손톱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당신들 때문에 내가 시청 로비 바닥에 있느라 제대로 씻지도 못해 이렇게 더러운 손톱을 갖고 있다고 말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고 부끄럽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부끄러움의 감정은 누군가를 욕망하는 사람간의 위치와 관계를 말해 준다. 부끄러움이 같은 위치에 서고픈 욕망, 그의 고통에 다가가고픈 욕망일 때 부끄러움의 감정은 정의와 만나고 인권감수성을 일깨우는 게 아닐까. 내가 밀양의 젊은 여성을 만났을 때 그녀의 고된 삶에 다가가지 못했던 것을 내 손이 말해주는 것 같아 부끄러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를 존중하고 인정하고픈 마음에서 나오는 부끄러움이니까. 반면 부끄러움이 누군가를 누르고 싶을 때, 사회적 편견에 싸여 있을 때 부끄러움은 정의와 거리가 먼 가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날 시청에서 내 손톱의 때를 감추려 손을 오므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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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만들어낸 연결
부끄러움의 감정은 인권의 바탕이라는 걸 서울대병원 간호사이자 노조간부인 그녀의 말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움 속에서 백남기 님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백남기 동지가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누가 있더라도 우리는 똑같은 처지였을 것입니다. 거기 서있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끌려간 고등학생이 내 자식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 하나만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살고 우리 자식들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남기 농민의 위험을 보고 우리 모두 동시대에 같은 처지에 있다는 생각했고, 연결됐음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가 사경을 헤매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고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녀의 ‘부끄러움’의 감정은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부끄러움은 삶에 대한 긴장감을 주며 새롭게 인간과 삶, 세상에 대해 자각하게 만든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말대로 “인간은 얼굴을 붉히기도 하며, 혹은 붉힐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부끄러움의 감정을 잃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는 속물적 욕망에 자석처럼 끌려 다니며 삶에 대한 부끄러움도, 인간적 도리도 잊고 살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학교를 가도 텔레비전을 봐도 ‘돈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시대이니 그러한 감정은 오래된 유물 취급을 받을 지경이다. 아니 오히려 부끄러움은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약자의 감정이라고 치부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정치인들을 비롯한 힘 있는 자들은 자신의 비인간적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신이 원하는 부나 권력에 이르지 못하거나 쥐지 못한 경우에 부끄러워할 뿐이다.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싶다. 박완서의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시다』의 주인공은 순수한 부끄러움의 감정을 느끼기 전까지 세속화된 욕망에 부끄러움을 잊고 지냈다.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한국인 안내원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을 알아듣고서는 부끄러움에 휩싸인다. 주인공은 한국을 침략했던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이 역사를 잊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전도시키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순간 사회적 윤리가 전도됐음을 깨닫고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무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차츰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환희롭게. 나는 내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수했고, 자랑을 느꼈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며 부끄러움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부와 권력을 숭상하는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어떻게 가르칠까는 나의 화두가 되어 버렸다. 과연 권력자들에게 부끄러움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아니 권력자들이 아니더라도 일베에 막말과 모욕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라도 부끄러움을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르칠 수 있을까? 물론 우리가 아무리 부끄러움을 가르친다고 한들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건 권력뿐이니. 그렇다면 우리도 힘을 길러야지. 그러나 힘만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칠 수 없다. 그건 부끄러움이 아니라 힘에 의한 굴복에 그칠 수 있으니까.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다. 마비된 감각을 깨울 ‘신비한 자극’은 어디에 있을까?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작성자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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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ㅁㄴㅇ님의 댓글

ㅁㄴㅇ 작성일

근데 닭근혜와 그 패거리는 부끄러움도 없고 인륜도 없는 새12끼들입니다.
바랄걸 바래야죠... 금마들이 얼마나 쓰레기들인데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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