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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당신이 느끼는 복지에 대한 체감온도는?

타자화된 장애인복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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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춥다. 영하 18도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고 한다. 추위에 약한 사람, 더위에 약한 사람이 다 달라 실제 체감온도는 온도계의 온도만으로 짐작할 수 없다. 또 체감온도는 사람이 처한 위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바람이 불거나 고지대에 살거나 하면 체감온도는 더 떨어져 영하 20도쯤 될 거라고 한다. 햇수로 4년째 광화문 광장 지하에서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농성하고 있는 장애인권활동가들은 집에서 잠을 자는 이들보다 추울 것이다. 반면 날씨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있다. 운전기사가 운전해주는 차 뒷좌석에서 건물 주차장까지 따뜻하게 돌아다니는 사장님들에게 추위는 그냥 창문 너머 보이는 풍경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을 체감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세계에 위치한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자, 나의 몸과 생각, 수행이 어떠한지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머리만 움직여서는 불가능하며, 몸만 움직여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서울 시청 앞 옛 국가인권위 건물 옥상에서 고공농성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최정명·한규협 씨가 하늘에 오른 이유는 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법원은 현대차가 불법파견을 했으므로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정규직이라고 했으나 정몽구 회장은 처벌받지도 않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태는 그대로기에 하늘에 올랐다. 벌써 그들이 고공농성을 한 지 220일이 넘었다. 바람막이 제대로 없이 침낭 하나로 추위와 싸워야 하는 그들에게 오늘 같은 날씨는 영하 20도가 훨씬 넘는 추위일 게다.

그래서 지난 해 12월 26일과 27일 고공농성을 하는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있었다. 연대마당이 끝난 후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과 동료노동자들은 그들의 고난에 찬 싸움을 함께하겠다고 시청 앞 광장에서 하룻밤 잤다.

“연대는 우산을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고(故)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함께 밤의 추위를 맞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나는 하룻밤도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텐트에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따뜻한 공중화장실에 한참 있거나, 언제 아침이 오나 하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광장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밤을 샜다. 정말 얼마나 힘들게 그들이 싸우고 있는지를 몸이 깨달았다. 미안했다. 우리는 그들과 조금이라도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 ‘만나려’ 했다.

 

당신이 체감한 복지는?

복지제도에 대한 체감도 자신의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복지제도가 제대로 설계되고 집행됐는지를 보려면 복지정책의 주요 당사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들이 복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복지제도란 누구나 자유롭게 이동하고 정보를 이용하고 사생활이 보장되며 먹을 것과 입을 것, 잘 곳이 보장되면서 살 권리가 있다는, 헌법적 권리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복지제도도 인권의 보편성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누구든, 언제나, 어디서든 복지에 대한 권리가 보장될 수 있게 짜야 한다. 혹여 그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노인이라는 이유로 접근이 차단되거나 향유할 수 없는 권리라면 그것은 인권의 박탈이다. 즉, 요즘 유행하는 말로 흙수저를 들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삶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이 보장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복지제도가 아니다. 정부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모아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권리가 아닌 시혜의 시선으로 복지가 운영될 때 자원과 서비스의 한계선이 그어진다. ‘밥은 먹을 수 있게 하겠지만 안정적이고 따뜻한 집은 참으라’고 하는 건 복지가 아니다. 몇 개의 권리만 보장되는 것은 보장이 아니라 제한이다. ‘누구의 위치에서 복지를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복지의 내용과 수준을 설계한다면 복지는 차별과 분리를 재생산하는 도구일 뿐, 공동체 전체의 삶을 구성하는 도구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돈이 없어 하루 세끼를 먹는 일이 부담이 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무상급식은 필요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급식비를 못 내 학교식당에서 점심 먹으러 줄을 섰다가 담임선생님에게 핀잔을 받았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무상급식이 왜 중요한지 알 리가 없다. 급식비를 못낸 사람이라는 표식인 전광판의 깜박이는 등으로 민망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무상급식은 단지 밥만이 아니라 존중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따라서 복지는 당사자가 체감하고 있는 필요를 바탕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복지는 그림 위의 떡이자 통제의 수단이 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타자에 대한 관심,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 간의 만남과 교류가 중요하다. 2010년 새누리당 차명진 의원이 1일 최저생계비 체험을 하고선 하루 6,300원으로 황제의 생활을 했다고 보도자료를 뿌려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적이 있다. 6,300원으로 하루 3끼 다 먹고, 1,000원 기부하고, 600원 조간신문도 사서 읽고, 20원이나 남았다는 얘기까지 했다. 970원짜리 미트볼 한 봉지 970원 짜리 참치 캔 1개 800원어치 쌀 한 컵과 970원까지 쌀국수 한 봉지. 세 끼를 해먹는데 3,710원밖에 안 들어서 야식으로 황도 970원짜리를 먹으며 독서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김치도 없이 먹고도 황제의 밥상이라고 했다. 마치 반어법이 아닌가 싶다. 최저생계비를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는 매일 김치 없이 반찬 하나만 먹어도 충분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하루 동안 밖을 나가지도 친구를 만나지도 않았으며 전기세, 방세 등을 내지도 않았으니 한 달 생활을 하기에는 어림없는 돈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말했다. 차 의원의 행동은 진짜 가난한 사람들과의 교류였을까?

그도 진짜 하루 6,300원의 생계비를 ‘누구나 그 정도로 생활하면 황제처럼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여겨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기초생활수급자’라면 그 정도로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가난한 사람은 다른 종류의 인간, 아니 다른 종류의 집단일 뿐이므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다만 정치인이기에 관심이 있는 척했을 뿐이다. 관심 없는 타자다. 수급자는 함께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공통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이 아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우리가 자유와 그와 대립되는 것을 처음 자각하게 되는 때는 자기 자신과의 교류가 아니라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서”라고 했다. 그러한 교류를 통해 공공성이 만들어진다. 공공성이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공통의 문제나 사건에 대한 관심을 매개로 한 관계성이다. 최저생계비가 나와 관계가 없는 그들만의 것(삶)으로 치부됐을 때 고정관념이 만들어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 “운이 없는 사람들이군” 같은 고정관념만 만들어 더 나와 무관하다는 감성을 키운다. 가난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불행으로 여겨진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다름과 부정의한 사회제도에 대해 이해하려는 교류가 없으니 내가 체감한 복지를 자기 틀 안에서 사고한다. 무엇을 나누려고 했을까? 적어도 기초수급자와 한마디라도 했다면 그런 보도자료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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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생계비 체험을 하고 있는 차명진 의원(출처 : 차명진 의원실)

모든 체험은 체감으로 이어지나

게다가 차 의원이 지닌 물적 자원, 즉 자동차나 집으로 안정적인 주거생활과 이동의 자유를 누릴 것이며 인적 자원으로 친구를 만나 밥을 구할 수도 있으니 1박 2일 동안 밥 세끼를 해결하는 데 큰 부담이 없다. 세 끼만 대충 먹으면 되는 이례적인 행사이지 삶이 아니니까. 스치듯 1박 2일 최저생계비를 체험했다고 하고서도, 생계비의 현실성/비현실성을 체감했다고 자평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애초 공통의 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남의 가난’을 쇼핑한 것일 뿐이다. 최근 여러 체험행사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아슬아슬함은 그것이 교류와 소통보다는 소비적이고 과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체험은 행사일 뿐 나누고 전수되는 경험이 아니다. 몸으로 겪었을 뿐이다. 체험이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몸으로 ‘어떤 시공간을 경유했다’를 넘어서 ‘어떤 시공간에 위치한 타자와의 만남, 그를 통한 깨달음, 소통가능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할 때 그것은 경험이 되고 그들의 삶을 체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체험 행사’는 한번 몸으로 겪은 것에 그친다. 몸을 통과했으나 남지도 않고 옆으로 흐르지도 않는 것이다. “그거 별거 아니네!”라는 말로 표현되는 체험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삶과 만나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만 해석된다. 자기 것일 뿐. 누군가에 전할 ‘꺼리’도 없다.

 

장애등급제, 타인의 고유성을 삭제해

체감이 쉽지 않기에 우리는 타인의 다름을 존중하며 만나고 교류한다. 그렇게 ‘공공의 영역’이 만들어진다. 모든 것을 체감해야 만나는 것은 아니다. 다름을 다름대로, 그리고 다름 속에서 동일함을 발견하는 일이 우리가 타인과 접촉하고자 하는 이유일 게다.

그런데 지금 장애등급제는 그러한 서로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게 한다. 장애 유형도 다르고 장애 정도도 다른 상황에서 일괄적으로 장애등급을 매겨서 장애인의 필요를 제한한다. 1등급에게 필요한 서비스는 정말 3등급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중증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는 경증장애인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경증이나 중증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환경과 관계가 다 다른 조건을 지닌 사람인데. 게다가 사람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한다. 장애의 정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애를 살면서 맞닥뜨리는 일들이 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손에 장애가 있다. 지금 생활하는 데는 활동보조서비스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면 손 때문에 활동보조서비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의 장애등급제로는 그녀는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등급으로 나누면서 그 사람의 고유성을 삭제하고 그 사람의 필요를 상정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균질한 동일 집단으로 뭉뚱그려 놓는다. 장애인인 그/녀의 고유의 얼굴, 고유의 삶이 삭제된다.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장애인은 애초에 상정하지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없기에 24시간 서비스는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밥 한두 끼 먹고 집에 갇힌 장애인만을 그려놓은 게 장애등급제이고,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다. 활동보조서비스만 있다면 화장실을 가고 외출을 갈 수 있는, 가고 싶은 장애인이 있는데 그/녀에게 하루 24시간이 아닌 8시간만 인간으로 살라고 한다. 각자가 가진 삶은 없고 장애인이라는 ‘타자화된 정체성’만이 남는다. 타자화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타인과 관계를 맺기 어렵다.

게다가 장애등급제는 의사의 소견으로 장애인의 몸에 점수를 매기는 것이기에 장애인을 ‘몸’으로만 취급한다. 그의 ‘몸’이 그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집어삼키는 방식이 장애등급제이다. 장애인인 그/녀가 필요한 활동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의학적 소견에 따라 활동지원을 한다. 기계적으로 활동지원의 내용과 시간이 정해진다. 그런 점에서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의 위치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은 몸으로 환원되는 몸뚱이만 가진 존재로만 취급되고 있지 않은가. 장애등급심사제도 운영 예산이 2014년에 235억이었고 2015년에 264억이다. 새로 활동보조나 장애수당, 장애연금을 신청하는 사람과 새롭게 장애인 등록을 하는 1~3급 장애인들 모두에게 장애등급심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장애인의 욕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예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장애인복지가 아니라 장애인 통제인 셈이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작성자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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