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서비스 현금지급제도와 장애운동
본문
지난 호에서는 이용자 선택권 정도와 돌봄노동자 일자리의 질 보장을 위한 규제 정도에 따라 8개국 사회서비스 현금지급제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용자 선택권은 그 사회에서 이용자들이 갖는 힘에 따라 좌우될 수 있고, 일자리의 질도 노동자들이 갖는 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둘의 관계가 상쇄적(trade-off) 관계는 아닐 것이다. 즉 이용자 선택권도 강하면서 노동자 일자리의 질도 강한 모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이나 네덜란드의 경우 이런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번 호에서는 이용자 선택권에 보다 집중해 각 국가별로 이용자 선택권 정도가 달라진 이유를 장애운동과 연관 지어 살펴볼 것이다.
이용자의 선택권 정도에 따른 비교
지난 호에서 이용자 선택권 정도에 따라 각국의 제도를 세 개의 집단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 중 선택의 정도가 아주 낮은 경우에는 현물급여 대체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현물급여 이상의 선택 의미는 없었고, 선택의 정도가 아주 높은 경우 가족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용자 선택은 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재정공급자인 정부와 사용 범위에 대해 정확한 계약을 하고, 노동자와도 명확한 계약에 의해 서비스를 구매하는 정도로 선택권 수준이 중간인 경우에 이용자의 실질적인 선택권이 보장됨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제도로는 스웨덴의 활동지원수당, 네덜란드의 개인예산제도, 영국의 직접지불제도와 개인예산제도, 미국의 후기 모형인 개인예산제도가 속했다. 이 모형들은 사례관리자의 통제가 있는 등 현금사용방식의 유연성은 다소 떨어졌지만, 서비스 구매영역은 다양했다. 하지만 서비스 구매영역의 다양성 정도에서 국가제도별로 차이는 있었다. 또한 노동자 선택의 가능성도 다양했으며, 특히 정보와 지원시스템이 상당히 잘 갖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 모형들은 이용자 주도의 선택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사회서비스현금지급 모형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용자 선택권 정도와 제도형성 주도세력간의 관계
이용자 선택권 차이의 발생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제도를 형성한 주도세력의 차이에 따라 분석이 가능하다. 이용자 선택권이 아주 강하거나 아주 약해 실제적인 이용자의 선택 가능성이 떨어졌던 모형들은 대부분 정부 주도로 제도가 만들어졌다. 소득보전차원에서 사회서비스현금지급 모형을 선택했던 오스트리아 개인예산제도, 이탈리아 동행수당, 독일의 장기요양보험제도 중 현금급여는 정부주도로 모형이 개발됐으며, 또한 현물급여 대체차원으로 제도를 개발했던 프랑스 노인장기요양수당, 독일의 사례관리형 개인예산제도는 정부주도로 모형이 개발됐다. 선택권 정도가 중간이면서 실제 선택 가능성은 가장 높았던 스웨덴의 활동지원수당, 네덜란드의 개인예산제도, 영국의 직접지불제도와 개인예산제도, 미국의 후기 모형인 개인예산제도 등은 장애운동의 결과 제도화됐다. 결국 이용자인 장애인들이 주도하는 경우 이용자의 실질적인 선택권을 높이고자 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개발되고, 정부가 주도하는 경우 이용자의 실질적인 선택 가능성보다는 현물서비스를 대체하거나, 돌봄으로 인한 가구 소득감소에 의한 빈곤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다른 목적이 더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실질적인 이용자 선택권이 강한 모형으로 제도를 개발한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 미국에서 장애운동이 어떻게 제도를 발전시켜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제도를 논의하고 준비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는 함의가 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다음 장에서는 4개국에서 어떻게 장애운동이 제도에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4개국에서 장애운동이 사회서비스 현금지급제도 형성에 미친 영향
▲ 스웨덴에 활동지원이라는 용어를 소개한 라츠카(Ratzka) |
스웨덴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활동지원에 대한 직접지불을 경험했던 라츠카(Ratzka)1)는 1982년 발표한 논문에서 활동지원이라는 용어를 스웨덴에 소개했다. 그는 장애수당을 확장한 형태로 활동보조서비스에 현금지불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사회보험청으로부터 현금을 지급받아 경쟁적인 서비스 제공자로부터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어야 하며, 서비스 제공자와 계약할 수 없거나 스스로 제공자를 고용할 수 없는 이용자는 지방정부와 계약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후 라츠카는 1984년 ‘자립생활을 위한 스톡홀름 협동조합(STIL)’을 창립하고, 현금지불에 의한 활동지원모형을 구축하기 위해 1987년 1월부터 23명의 참여자를 대상으로 스톡홀름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2년 반 동안의 시범사업 이후 STIL은 스톡홀름시가 주체가 되어 욕구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활동지원서비스를 지속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시는 1989년 8월부터 모든 거주민들이 직접지불을 받아 자신의 지원을 구성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지원을 시작했다. 한편 다른 시에서도 이 모형을 따라 사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스웨덴의 활동지원수당 제도화는 라츠카를 중심으로 하는 자립생활운동 세력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네덜란드
네덜란드 개인예산제도의 도입은 노인과 장애운동에 따른 결과였다. 노인과 장애운동 세력은 전문가의 보호주의와 과도한 권력을 비판하면서, 더 많은 자유와 자결권, 더 많은 개인의 책임을 추구했다. 이에 따라 1995년 장기요양보험제도의 한 급여형태로 개인예산제도가 제도화됐다.
하지만 이후 장기요양보험제도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예산상한을 정함에 따라 대기자 수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에 대해 노인, 장애인 등 이용자 단체들은 1999년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자격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험적용 지원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도록 정부가 충분한 자금을 제공할 책임이 있음을 명확히 했다. 이에 따라 예산제한 규정이 없어지게 됐고, 정부는 필요한 사람 모두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러나 추가적인 직원 모집과 교육에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돌봄 제공기관들이 하룻밤 만에 생산량을 늘릴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개인예산제도가 보다 확대됐다. 이전에는 매년 일정량의 예산만 배정됐었지만, 2001년부터 이 제한이 제거됐고, 현물 서비스 대신 현금지급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현금으로 지급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1995년에 장기요양보험제도 내에서 개인예산을 도입하게 한 힘은 장애운동이 주도했고, 또한 2001년 본격적인 확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용자들이 예산 상한이 불법임을 제기하는 소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영국
영국의 직접지불제도는 광범위한 장애인 권리운동, 특히 자립생활운동의 결과였다. 이들은 국회의원에게 로비를 하고, 관련 회의, 연구 등을 조직하기도 했다. 특히 영국장애인위원회(BCODP)는 입법운동 과정에서 보수당 국회의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활발한 입법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사회서비스책임자연합(ADASS), 왕립장애자문위원회, 영국사회복지사협회, 광역자치시협의회 등과 같은 사회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해 제도화에 대한 지지를 받아내기도 했다. 직접지불제도가 지체장애인 주도로 도입되다보니 제도 초기에는 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이후 노인운동세력과 장애운동세력이 노인 제외는 노인차별이라는 주장을 함에 따라, 직접지불제도는 2000년부터 노인에게까지 확대됐다.
▲ 영국의 장애인 운동 |
또한 영국 개인예산제도는 지적장애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과 최근의 장애권리 운동의 한 부류인 통합 운동(inclusion movement) 주창자들이 만들어 냈다. 통합운동의 논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만든 인컨트롤(In Control)이라는 단체는 자기주도지원과 같은 새로운 지원방식을 제안했다. 이후 인컨트롤은 자기주도지원을 구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운영체계를 개발하고 있으며, 각 지방정부는 이 운영체계에 기반해 자신에게 맞는 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처럼 영국의 직접지불제도와 개인예산제도는 자립의 개념을 현금지급제도를 통한 활동보조인 직접 고용으로 연결시키려는 장애운동에 의해 도입됐음을 알 수 있다.
미국
1960년대와 1970년대 애드 로버츠와 쥬디 휴먼과 같은 장애권리운동가들은 활동지원서비스의 자립생활 모델을 발전시켰다. 이 모델은 나중에 ‘소비자 주도 개인지원서비스(CD-PAS)’로 불려졌다. 1980년대 로버츠와 휴먼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장애 연구소(World Institute on Disability)’는 CD-PAS의 개념을 확장해 재가서비스에 대한 현금지급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장애운동의 요구에 부응하여, Cash and Counseling 모형이 만들어지게 됐다. 이 모형은 인지 손상 때문에 스스로 지원서비스를 관리할 수 없지만 그들을 위해 관리할 수 있는 가족구성원이나 후견인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성인에게 선택과 통제권을 제공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이용자의 경우 현금관리 능력의 부족으로 사기나 학대를 당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하지만 지적장애인과 같은 일부 이용자의 권리를 거부할 수 없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었고, 또한 자신의 지원서비스를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는 사람과 관리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주장에 따라 현금지불을 이용할 수 있는 이용자를 선별하는 것은 금지됐다.
Cash and Counseling 시범사업 종료 후 이 사업에 재정을 지원했던 로버트 우드 존슨 재단과 대서양 자선재단은 2009년 ‘참여자주도서비스를 위한 전국자원센터2)’를 설립하였다. 이 센터는 Cash and Counseling으로부터 교훈을 이용해 참여자 주도 프로그램에 대한 기술적 지원을 하고, 참여자 주도 선택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훈련 및 도구들을 제공하고, 프로그램의 확산을 위해 연구와 정책의 노력을 조합하고, 전국 이용자 네트워크를 설립하여 이용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에 의해 현재 미국의 개인예산제도는 여러 주로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사회서비스 현금지급제도는 장애운동과 장애운동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주도됐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실행해 본 적이 없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실행해 나갈 때, 제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단체, 특히 장애인 중심의 단체가 필요한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보완함으로써 제도가 제대로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도 제도형성을 주도할 수 있는 장애인 중심 조직의 활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동석 사회복지학 박사,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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