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장애인 법안들
본문
아직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이 복지선진국들에 비해 부족한 한국은 매번 다양한 장애인 관련 법안이 논의되고 발의되고 통과되거나 통과되지 못한다. 통과된다고 해도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한다. 최근 몇 가지 법안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했다. 함께걸음에서는 최근 제정된 세 개의 법안을 둘러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01 건강권보장법
장애인건강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실현해야
글 이문희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사무차장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행복 요소이다. 더욱이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집단에게 건강은 그들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정상적인 사회적 활동을 하는데 마지막 남은 자산이기에 더 강조할 필요가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많은 장애인들이 건강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장애인의 건강문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주거지 근처에 병·의원들이 넘쳐 나고,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거나 혹은 의료급여 대상자이며, 나름대로 건강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장애인들이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보건의료기본법 제34조와 45조, 장애인복지법 제17조와 18조,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 제3조와 제31조에서 장애인건강을 직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그동안 장애인 건강 문제를 인권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1946년 채택된 세계보건기구 헌장에서 인권으로서의 건강권이 명시된 이후로 장애인권리협약에 이르기까지 국제사회에서 장애인건강권이 강조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장애인권리협약 25조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당사국들이 장애인이 장애를 이유로 차별 없이 최고로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의 건강을 향유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과, 당사국은 의료관련 재활을 포함하여 성별에 민감한 의료서비스에 대한 장애인들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제1~3차 장애인복지발전 5개년 계획을 보더라도 장애인건강과 관련된 과제들은 장애인을 건강증진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치료지원 대상이라는 제한적 시각에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장애인의 건강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장애 관련 치료와 재활에 대한 재정적 지원 측면에서만 진행돼 오고 있다가 최근 들어 국립재활원을 중심으로 장애인건강문제에 관한 연구와 소규모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장애인건강권 보장은 인권의 틀 안에서 사회정의 실현의 일환으로 이해돼야 하며, 평등과 차별금지의 원칙과 연결돼야 한다. 장애인건강권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인권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애인건강이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장애인건강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에 장애인건강권을 구축시키기 위해 장애계는 건강권 TFT 활동, 전문가 간담회, 정책토론회, 관련 연구, 장애인건강권 보장을 위한 법률안 마련, 국회의원실과의 긴밀한 협의 등 무던히 활동해왔다. 그 결과 지난 2015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다. 이 법률의 제정으로 장애인은 최적의 건강관리와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고, 장애를 이유로 건강관리 및 보건의료에 있어 차별대우를 받지 않으며, 건강관리 및 보건의료 서비스의 접근에 있어 비장애인과 동등한 접근성을 가질 권리를 갖게 됐다.
이 법은 장애인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지원, 장애인 보건관리 체계 확립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사항을 규정해 장애인의 건강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됐다. 그 제정 과정에서 장애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관철시킨 주요 사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장애인의 건강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실현할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었고, 또한 장애인과 그 가족에 대한 건강교육, 의료전문인을 대상으로 하는 장애인건강권 교육, 재활운동 및 체육, 장애인 건강 주치의, 의료비 지원을 관철시켰다.
장애인건강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실현해야 할 국가의 의무
국가는 어떻게 법률 4조 1항에 명시된 장애인 건강권을 존중(respect)하고, 보호(protect)하고 실현(fulfil)해야 하는 의무를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 어찌 보면 추상적 개념으로 명시된 ‘존중’하고, ‘보호’하고 ‘실현’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건강권을 존중하는 것 : 주로 정부의 입법 및 정책과 관련이 있으며, 국가가 국민이 향유하는 건강권을 제한하거나 직·간접적으로 저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가장 가난한 장애인도 부담할 수 있는 의료비를 책정하는 것과 국가가 장애인 보건부문의 법률과 정책에 있어 역행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건강권을 보호하는 것 : 국가가 장애인의 건강의 위험요인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할 의무를 말하며, 장애인의 건강권이 제3자에 의해 침해당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는 장애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다양한 사회적 요인을 제거함으로 기본적인 장애인건강권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건강권을 실현하는 것 : 국가가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장애인이 건강권을 향유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장애인 건강권이 보장되도록 혜택을 제공하고, 장애인 건강권의 완전한 실현을 보장하기 위한 법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고, 예산, 사법, 홍보 등의 관련 조치들을 채택하는 등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 하며, 또한 장애인의 보건을 위해 필요에 맞는 대책을 세울 의무를 갖는다.
장애인건강권 교육
장애인건강권 교육은 보건의료 및 건강관련 정보에 취약한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자신의 건강에 책임성을 가지고 유지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미국 등 복지국가에서 장애인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다. 또한 의료전문인들이 장애인 대상 의료행위에 있어 전문성이 미흡하여 진료 거부, 오진 및 의료사고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의료전문인 향상교육이 필요하다. 이에 장애인건강권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 법률 제13조에 장애인과 그 가족에 대한 건강교육과 제14조에 의료인과 시설종사자, 장애인 보조인력 그리고 장애인업무담당자를 대상으로 하는 장애인 건강권 교육을 명시했다.
재활운동 및 체육
이 법률이 타 장애인관련법과 차별되는 점은 예비장애인이 법률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점이다. 장애인이나 일정기간 내에 장애를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회복시키고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운동’ 또는 ‘체육’이다. 특히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는 장애인 또는 예비장애인을 대상으로 담당의료진이 일정기간 또는 일정 횟수의 운동프로그램 참여를 처방함으로써 장애인의 건강을 회복하거나 유지하고 향상시킬 필요가 있기에 재활운동 및 체육 프로그램의 제공을 법률 제15조에 명시했다. 이는 물리치료와는 다른 개념으로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재활운동 및 체육에 관한 제도가 도입돼 일반적으로 제공되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 의료계는 재활운동 및 체육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다. 이의 도입방안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시행령을 제정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건강 주치의
법률제정과정의 가장 핵심사항 중의 하나는 ‘장애인 건강 주치의’의 도입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대한의사협회가 장애인주치의 제도의 도입을 반대했지만 합의를 이루어 도입됐다. 장애인주치의란 일차의료 전문의(주치의)가 자신을 선택한 장애인의 명부를 활용함으로써 지속적인 의사-환자 관계 속에서 1차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체계이다. 장애를 가진 개인은 동네 의원의 단골의사를 주치의로 정해 등록한 뒤 평생 동안 진료 및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고, 1차 의료 전문의는 등록 환자에게 평생 병력관리 및 1차 진료, 전화나 컴퓨터 등을 통한 건강 상담 및 간단한 처방, 2차 및 3차 의료기관 예약·입원 의뢰, 질병 예방 및 건강 증진, 보건관련 자료제공 및 건강교육 등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는 주치의 제도이기 때문에 시행령 제정과정에서 많은 격론의 발생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장애인 건강을 인권적 차원으로 보장하는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지만 제대로 작동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에 장애인단체는 장애인건강권 보장에 관한 국가의무이행 여부를 매의 눈으로 다음과 같이 모니터링을 해야 할 것이다.
1 우리나라의 경제상태를 고려했을 때 장애인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의료기관의 수, 의료의 질 등 의료인프라가 얼마나 구축되어 있느냐를 측정하는 ‘가용성’ 평가를 해야 한다.
2 비차별성, 물리적 접근성, 경제적 접근성, 정보 접근성의 요소를 갖춘 접근성 기준을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3 수용성에 관한 평가를 해야 한다. 모든 보건시설과 장비 그리고 서비스가 장애인들에게 인권적이고 윤리적으로 제공되고 있는지, 장애인들과 상담자들의 존엄성이 존중되는지, 그리고 문화적으로 적합한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문화적 적합성이란 서비스가 장애인 개인과 지역사회의 문화를 존중하고 장애특성과 생애주기에 따른 요구를 잘 반영하고 비밀을 보장하고 장애인의 건강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
4 모든 보건시설과 장비 그리고 서비스가 의학적으로 적합하고, 제공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양질의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숙련된 의료인력과 안전한 약품과 장비, 그리고 위생시설을 갖추고 있는지 평가해야 할 것이다.
02 수화언어법
한국수화언어법 제정
억압의 언어에서 해방의 언어로
글 김철환 한국농아인협회 기획부장
지난 해 말, 재석의원 207명 중 204명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한국수화언어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서 10여 년 넘게 진행된 수화언어법 제정 운동이 마침표를 찍게 됐다.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된 것은 어려가지 의미가 있다. 농인들의 언어인 수화를 국어와 동등한 언어로 인정했다는 것과 대한민국도 단일 언어에서 이중언어(다언어)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수화언어법 제정은 그동안 억압을 받아왔던 수화언어(이하 수어)가 더 이상 차별의 언어가 아닌 농인들의 차별을 제거해 줄 언어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억압의 언어, 수어
프랑스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Claude)의 “슬픈 열대(1955)”에 브라질에 살고 있는 원주민인 남비콰라족의 문화를 고찰한 내용이 있다. 남비콰라족은 글을 쓸 줄 모르는 종족인데, 족장 역시 글을 쓸 줄 모르면서 글을 잘 쓰고 읽을 줄 아는 것처럼 위장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족장이 부족을 통치하기 위해 거짓으로 글을 쓸 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남비콰라족의 이러한 문화의 관찰을 통해 언어(문자)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지식과 창조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는 언어를 억압의 수단,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적이 있다. 히틀러의 언어정책이나 사회주의 국가들이 펼쳤던 언어정책, 강대국들의 다른 나라에 대한 언어정책 등이 그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무단으로 한국을 병합한 후 한국인의 의식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한국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 교육정책을 펼쳤던 역사가 있다. 수어 또한 억압을 받던 언어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다른 언어들과 달리 수어는 특정지역, 특정집단을 넘어 세계적으로 억압이 이루어져 왔다.
수어는 18세기 프랑스의 레뻬(C.M.de l’Ep’ee) 신부에 의하여 농교육에 도입되면서 소통의 양식으로 표면화됐다. 수어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농인을 완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또한 수어를 통한 교육의 효과가 나오면서 교육 불가론자로 분류되었던 농인에 대한 교육에 관심들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구화교육 전문 공립학교가 독일에서 세워지는 등 구화교육이 공교육으로 들어오면서 수어교육은 순탄치가 않았다. 급기야 188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렸던 ‘세계농교육자대회’에서 특수교육에서 수어를 금지시키기로 결의가 진행됐다.
이 대회 이후 각국의 특수교육에 수어가 사라지고 농인 교사들이 퇴출됐다. 농인 가정에서도 수어가 사용되지 않고, 수어를 통한 사회서비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반 시민들은 수어를 단순한 몸짓 혹은 원숭이의 몸짓과 같다고 천시하였다. 한국에서는 최근까지도 수어사용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수어를 모르는 교사가 농아동을 가르치고, 농아동이 수어를 사용하면 손을 묶어 놓거나 때리거나 하는 등 체벌하기도 하였다. 한술 더 떠 농아동의 부모들은 학교에 교육에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민원을 넣기도 했다.
수어권을 위한 활동과 법률 제정
국제적으로 장애인 권리운동의 흐름을 타고 수어가 언어로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가시화됐다. 또한 1960년 스토크(Stokoe,W.)에 의하여 언어로서 수어가 연구되기 시작하고, 뇌 과학의 발달로 수어가 언어로서 증명이 되면서 이러한 목소리는 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국에 법률에 수어를 언어로 인정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나라도 생겨났다. 더 나아가 수어와 관련한 독자적인 법률을 만든 나라도 나타났다. 슬로바키아(1995), 체코(1998), 슬로베니아(2002), 뉴질랜드(2006), 아이슬란드(2011) 등이 그것이다. 국제사회 차원에서도 수어를 언어로 인정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2006년에 유엔(UN) 총회에서 만들어진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이 수어를 언어로 명시하고, 수어와 관련한 권리는 물론 농문화의 인정과 지원이 명시된 것이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수어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러한 운동이 구체화된 것은 2003년 ‘수화는 언어다’ 운동이다. 당시 수어사용으로 인한 차별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고, 정부에 정책개선을 요청했으며 수어 권리 선언문도 발표하는 등 다양한 운동을 진행했다. 이후 2008년 당시 한나라당 윤석용 의원에 의해 수어 관련 법안 초안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정부와의 견해차로 입법 발의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 2011년 개봉되었던 <도가니>를 계기로 수어관련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농인의 교육과 수어법 제정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온 단체가 장애인정보문화누리이다. 장애인정보문화누리는 2011년 하반기부터 농인의 교육환경 개선, 수어법 제정 등을 위하여 다양한 운동과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뒤이어 한국농아인협회도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농아인협회는 2012년 10월 수화언어법을 만들기 위한 연대체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장애계 운동들은 ‘한국수화언어 기본법안’(더불어민주당 이상민의원), ‘수화기본법안’(새누리당 정우택의원), ‘한국수어법안’(새누리당 이에리사의원), ‘수화언어 및 농문화 기본법안’(정의당 정진후의원) 발의로 나타났다.
이렇게 발의된 법안들은 2013년 12월과 2014년 4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문위)에 상정하여 토론이 이어졌고, 2015년 3월 입법공청회를 거쳤다. 하지만 국내외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법안을 심의하지 못하다가 2015년 11월 교문위 법안심사소위원회를 거쳐 12월 교문위에서 4개 법안을 조정한 통합안이 마련됐다. 이어 진행된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통합안을 그대로 의결했다. 그리고 12월 마지막 날 국회 본회의에서 통합안인 한국수화언어법이 통과됐다.
법률의 주요 내용
통합안인 한국수화언어법은 총 4장 20조로 구성되어 있다. 법률의 목적은 ‘한국수화언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밝히고, 한국수화언어의 발전 및 보전의 기반을 마련하여 농인과 한국수화언어사용자의 언어권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하고 있다. 법률의 기본 이념에는 ‘한국수어의 대한민국 농인의 공용어 지정’, ‘수화언어를 사용하는 농인이 농정체성을 확립하고 한국수화언어와 농문화를 계승·발전할 수 있도록 협력할 의무’, ‘한국수화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모든 생활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할 권리’, ‘한국수화언어를 통하여 삶을 영위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등이 명시됐다.
법률의 주요 내용은, 농인의 한국수어 사용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 수립·시행(제4조), 한국수어 발전 기본계획 수립·시행(제6조), 실태 조사 실시(제9조), 한국수어에 대한 연구(제10조), 한국수어 및 한국어 능력을 신장할 수 있는 교육환경 조성(제11조), 농인 등 가족지원(제12조), 한국수어 사용 촉진과 보급(제14조), 수어의 날 제정(제17조) 등이 있다.
법률 제정으로 인하여 많은 변화들이 예상된다. 첫째, 정부 정책에서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수어에 대한 인식에 많은 변화가 올 것이다. ‘농인’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수어가 한국 내의 또 다른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이는 한국이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라는 기존의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둘째, 농문화가 청인들의 문화와 다른 양식의 독자적인 문화임을 법률에 명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국의 문화를 다문화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는 국내의 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어의 학습과 사용이 농인들의 권리로 명시됐으며, 이러한 권리는 농인만이 아니라 청각장애인 등 수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수어의 학습과 사용에 대한 권리는 사회 전반적으로 적용된다. 특히 그동안 사적인 영역으로 분류되어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가족 내에서의 수어 사용 환경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었던 농인의 교육 환경에도 많은 진전이 있을 것이다.
넷째, 비장애인의 수어 사용의 확산과 인식변화에 영향을 줄 것이다. 법률에 ‘수어의 날’을 지정하도록 하고 있어 수어가 언어로 자리매김하는 데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수어능력 검정시험 등이 도입될 경우, 이러한 인증시험이 가산점제도와 병행될 경우 수어에 대한 인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외국어와 같은 형태로 배우려는 시민들이 늘어날 수 있다.
다섯째, 수어를 배우려는 추세에 맞추어 수어교육 등이 체계화될 것이다. 법률 시행으로 수어 교육장이나 수어 강사(교원)의 인증제가 도입되면 수어강의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질적으로 우수한 강사와 강의 프로그램들이 나올 수 있다.
억압에서 해방으로
10여 년 넘는 운동으로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됐다. 그 동안 수어는 억압과 차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일부는 이러한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농인들은 사회에 순응하며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이 삶을 살아왔다. 숨어서 수어를 사용했으며, 가족이 있으되 진정한 가족 구성원이 되지 못했다. 교육을 받되 딴 나라 사람이었고, 눈치 하나로 버텨야 했다. 사회 구성원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결국 밀려났고, 그들끼리의 교류를 통하여 서로에게서 위로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이러한 억압과 차별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수어가 청인들에게 회자되는 언어이며, 돈과 시간을 들여 배우려는 언어로 탈바꿈할 가능성도 높다. 자연히 농인들이 권리가 회복되고, 농문화가 이색문화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찬 미래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법 이행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시행령이 어떤 내용으로 만들어지는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수화가 더 이상 억압과 차별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법률 제정 과정에 쏟았던 노력 못지않게 시행령 작업에도 장애인단체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03 보조기기지원법
법대로 합시다, 법대로!
장애인·노인 등을 위한 보조기기 지원 및 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 이야기
글 남세현 한신대학교 재활학과 교수
모두들 그렇게 안 살았다고 주장하고는 싶겠지만, 가끔 살다가 시비가 붙으면, 혹은 붙었다고 가정을 해본다면 “법대로 하자고 해! 법대로”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물론 법보다 주먹, 혹은 권력이나 돈이 가까운 세상에선 통하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그럼에도 ‘법’타령을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함께 지켜야 할 원칙이거나, 이견 혹은 다툼이 있을 때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기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 사이에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이처럼 중요한 것이 법이지만, 개인을 돕거나, 혹은 규제하는 국가의 의무나 권한의 범위를 정하는 중요한 것도 바로 법이다. 특히 정치인이나 공무원, 통틀어 정부가 만드는 제도와 정책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 가장 강력한 근거를 둘 수 있는 기틀이 바로 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최소한 하나의 제도나 정책이 법에 정해진 규정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라면, 정부의 입장에서는 지켜야 할 의무가 되고, 또 그 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국회의 의결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개인의 판단이나 권한으로 마음대로 좌우하기는 어려운 구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나 정책이 만들어지고 실행하는데 법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에게 보조기기를 지원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지속돼 왔다. 공식적으로 움직임이 노출된 것을 국회에 발의된 시점으로만 잡아도 17대 국회 후반부인 2007년부터 8년여의 세월이다. 그 시간 동안 국회에서만 17대, 18대, 19대 국회를 연이어 6개 법률안이 발의 되었으니 나름의 간절한 염원이 담겼다면 담겨있었을 터. 오랜 염원 끝에 지난 12월 19대 국회 법안 심의의 막차에 올라 탄 듯 ‘장애인·노인 등을 위한 보조기기 지원 및 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이라는 짧지 않은 이름의 법안이 통과됐다. 이름처럼 장애인과 노인에게 보조기기를 지원하고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이지만, 구체적인 많은 내용이 미완의 상태로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위임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절반의 기틀이 완성된 상태이니 그 위에 나머지 절반을 어떻게 채워야 할 것인가라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로 남겨진 것이다.
제정된 법률이 가지는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고, 향후 정부와 장애계가 함께 채워가야 할 절반의 숙제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법 제정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잠시 언급한 것처럼 생각보다 배경이 오래된 법이다. 2007년 17대 국회에서 안명옥 의원이 최초로 ‘보조기기 지원 및 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한 후 18대 국회에서 이명수 의원이 ‘장애인·노인을 위한 보조기구 지원 및 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하였고, 같은 회기에 윤석용 의원이 안명옥 의원이 발의했던 ‘보조기기 지원 및 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안’을, 그리고 정하균 의원이 ‘장애인·노인을 위한 보조기기 개발 및 보급촉진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17대, 18대 국회 모두 회기 내에 관련 법률이 통과되지 못하면서 자동 폐기됐고, 2012년 시작된 19대 국회에서 이명수 의원이 다시 ‘장애인·노인을 위한 보조기구 지원 및 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안’을, 그리고 김정록 의원이 ‘장애인 등을 위한 보조기기 활용촉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기까지 명칭도 비슷하고 내용도 비슷한 법률안이 6번이나 발의됐다. 시험이라고 치면 6수 끝에 합격을 한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법안이 통과되었던 12월 9일이 이번 19대 국회 본회의 마지막 날이었고 이번 19대 국회도 내년 4월이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라는 점, 국회 특성 상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본회의 이후에는 지역구에서 다음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통과가 되지 않았으면 결국 19대 국회에서도 법안이 폐기될 위기에 처해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2회기에 거쳐 법안을 발의했던 이명수 의원실의 강한 추진 의지가 마지막 기회에 기존 2개 법안을 병합심의하면서 개선안으로 제시된 상임위원회 제안을 통과시켜 보조기기 정책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법안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일단 법안의 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제1장 총칙, 제2장 보조기기의 지원 등, 제3장 보조기기센터, 제4장 보조기기 관련 전문인력, 제5장 보조기기 연구개발 및 활성화의 다섯 개 영역과 제6장 보칙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보조기기를 지원하고 활용을 촉진하기 위해서 보조기기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서비스 전달체계라고 할 수 있는 보조기기 센터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또 여기에 필요한 전문인력과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함께 지원하는 취지의 법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내용은 제법 균형이 잡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이 실행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들이 생기는가?’라는 점이다. 법의 실행력에 따라 장애인이나 가족들의 입장에서 기존에 활용하지 못하던 보조기기를 더 쉽게 활용하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림의 떡과 같이 무늬만 보조기기법인 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 바로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당장 눈에 띄게 체감되는 효과들도 일부 있고, 또 일부는 윤곽만 잡혀 있기 때문에 이후에 예산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조항들도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영향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이 법의 제7조와 제8조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조기기의 지원과 활용촉진 사업을 실시한다는 점과 보조기기 교부사업을 실시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제7조에서 보조기기의 교부나 대여, 사후관리와 같은 사례관리 사업을 실시하고, 보조기기에 대한 정보제공, 품질개발이나 연구 지원 등을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8조에서는 장애인의 신청에 의해서 보조기기의 교부나 대여, 사후관리 지원이나 여기에 필요한 예산의 지원을 하고, 장애인에게 적합한 보조기기가 지원될 수 있도록 사례관리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이 곧 바로 장애인에게 필요한 보조기기를 국가가 모두 지원해 준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제정된 법률에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의 범위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라고 정하고 있기도 하고, 사업의 구체적인 대상이나 범위에 대해서는 시행규칙 등에 따로 정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러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서 지원의 수준이 지금보다 크게 확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지금의 수준에서 크게 변화되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있다. 일면 아쉬운 부분이지만, 반대로는 그 만큼 앞으로 장애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혹은 지원 범위나 예산 확보를 강하게 요구한다면 보조기기 지원에 대한 제도가 지금보다 큰 폭으로 확대될 수 있는 기회와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은 분명한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또 다른 변화도 예상된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또 다른 변화는 법 제13조와 제14조에 규정된 보조기기센터의 설치와 운영이다. 제13조에서는 주로 행정적인 업무나 중앙에서 정하는 원칙이나 기준 등을 수립하고 연구하는 역할을 하는 중앙보조기기센터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고, 제14조에서는 장애인들이 가까이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역보조기기센터를 규정하고 있다. 지역센터는 보조기기 관련 상담·평가·적용·자원연계 및 사후관리 등 사례관리사업, 보조기기 전시·체험장 운영, 보조기기 정보제공 및 교육·홍보, 보조기기 서비스 관련 지역 연계 프로그램 운영, 보조기기 장기 및 단기 대여, 수리, 맞춤 개조와 제작, 보완 및 재사용 사업, 다른 법률에 따른 보조기기 교부 등에 관한 협조 등 장애인들이 지역에서 쉽게 보조기기를 빌려서 사용하거나 필요한 보조기기에 대한 정보를 받고, 혹은 가지고 있는 보조기기를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이나 수리를 지원 받는 직접 서비스를 제공할 될 것으로 기대된다.
법이 담고 있는 몇 가지 새로운 의미들도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법의 명칭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조기기를 사용하는 대상을 장애인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장애인과 노인까지 확대해서 적용하고 있다. 기존 장애인복지법 제65조의 ‘장애인보조기구’라는 명칭도 이 법 제3조 정의에서 ‘보조기기’라는 용어로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그 외에 정부가 기본계획을 5년마다 장애인정책종합계획과 함께 수립한다거나, 매 3년마다 장애인 실태조사를 할 때 보조기기 관련 실태를 조사하고, 보조공학사라는 자격을 도입해서 전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하거나, 관련된 기술개발과 연구, 우수 산업체를 육성하고 지원하는 등의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법을 완성시키는 남은 절반의 과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까지 완성된 본 법은 다소 선언적이거나 큰 틀의 윤곽만을 제시하고 있는 성격에 가깝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효성 있는 제도와 정책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 만큼 장애계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법에 근거한 요구를 강력하게 해야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업이 예산의 범위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이 법에 근거한 예산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가가 법을 실질적으로 얼마나 작동하게 만드느냐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그 동안도 장애계는 활동지원제도와 장애연금제도, 장애등급제 개편, 발달장애인 지원과 같은 다양한 권리를 위해 애써 왔다. 안타깝게도 이번 보조기기 관련 법의 제정과 시행에서도 ‘권리 위에 잠 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는 루돌프 폰 예링의 법 격언은 이전과 동일하게 우리들의 참여와 노력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희망을 기댈 법이라는 이름의 언덕이 생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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