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 던진 질문들 : 혐오가 확산되는 한국사회
본문
발달장애인 시설 반대에서 드러난 장애인 혐오
얼마 전 동대문구에 있는 중학교 빈 건물에 세우려는 발달장애인 직업체험 센터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시위를 뉴스에서 보고 매우 경악했다. 하나는 장애인에 대한 혐오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혐오가 아닌 듯 다루는’ 보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우리 사회의 인권감수성이 얼마나 퇴행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면 후자는 혐오의 논리를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반대하는 주민들은 발달장애인 직업체험센터에 성인 발달장애인이 있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중학교가 남녀공학이라며 중학생들이 성폭력 등 범죄에 노출될 것처럼 말했다. 발달장애인은 ‘범죄자’라는 논리가 전제돼 있다. 과연 그러한가? 실제로는 비장애인에 비해 장애인의 범죄 비율은 낮다. 그런데도 이러한 인식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애인에 대한 편견, 범죄화, 타자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장애인의 이미지는 두려움과 동정의 대상으로 양분화 돼 있다. 특히 발달·정신장애인에 대한 이미지에 폭력, 범죄, 위험성, 예측불가능성이 빈번하게 포함돼 이는 오해와 근거 없는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사회에서 ‘격리’돼야 할 존재로 표현된다. 그래서 장애인 편견을 최소화하기 위한 보도매뉴얼로 장애인을 사건사고의 유일한 원인처럼 기술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범죄의 환경적,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에 대한 균형 잡힌 기술과 보도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살인, 폭력, 총기사고, 자살 등의 사건사고에 관한 기사를 보면, 경찰의 조사결과를 전하면서 사건의 일차적 원인을 피의자의 정신 병력에 두려는, 편향된 경향을 우리는 종종 접한다.
한편 대중매체에서 장애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의존적 존재로 그려진다. 의존성은 장애인의 독립적 인격을 부인하는 근거로도 이어진다.(여기서 의존성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측면에서의 의존성에 대한 사회적 접근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장애인은 스스로의 판단과 실천을 할 수 없는 존재,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장애인은 이렇게 상상적 타자로 그려지고 ‘타자화’된다. 타자화된 존재는 어떠한 처분을 받든 타자가 아닌 다른 주체의 처분에 따라야 되는 존재가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관계망을 형성할 수 없거나 관계망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구성되게 된다. 도와주는 비장애인과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장애인이라는 방식의 관계로 재현된다.
이는 근대 혁명 이후 인간으로 인정받기에는 부족한 존재로 여겨진 여성에 대한 태도와 유사하다. “여성은 날 때부터 남성에 비해 신체적으로 약할 뿐더러 이성적인 사유능력도 떨어진다”는 생각은 서양철학의 기본 사고였다. 심지어 프랑스법은 개인은 모두 자유롭고 여성도 자유로운 개인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법적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위치, 즉 타자로서의 위치를 가져야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여성이 동등한 선거권을 1945년에 획득할 정도로 심했다. 여성은 언제나 딸이거나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즉 남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 혐오는 여성 혐오와 닮아 있다. 사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여성 혐오는 혐오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본적이다.
장애인을 타자화하는 속에서 장애인은 두렵거나 동정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두려움과 동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혐오로 이어진다. 언제든 동정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독립적 판단을 한다거나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허용하는 행동을 넘어서는 순간, 다시 말해 비장애인의 도움과 친절(?)을 거부하는 순간 혐오는 표출된다.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분임 토의에 참여했을 때 동정어린 시선이 혐오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목격한 적이 있다. 분임 토의에 참여하던 여성장애인의 휠체어에 부딪친 비장애인 여성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비장애인 여성은 “장애인이라고 봐줬더니, 지 분수도 모르고”,“장애인인 게 자랑이야” 라는 말로 공개적으로 장애여성을 비난했다. 물론 그 비장애인 여성은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을 없애야 한다며 토론에 참가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는 참가신청을 하지도 않고 와서 참가를 위해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다가 장애여성의 휠체어를 밀쳤다.
(그에게 휠체어는 그저 물건(!)인지라 별로 미안하지도 않은 듯 했다.)
장애인을 혐오하지 않는다?
발달장애인 직업센터를 반대하던 주민들이 들었던 피켓 중 하나가 아직 선명하게 기억된다. 피켓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도 장애우를 혐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학교 내 장애인 건물 설립을 반대합니다!”
나는 비슷한 논리를 2014년에 본 적이 있다. 바로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반대하던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주장이다. 그들은 말했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장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동성애를 옹호하고 확산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이렇게 앞뒤 안 맞는 말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은 ‘탈동성애의 권리’라는 표현으로 구체화된다. 그들은 동성애는 일종의 일탈이자 질환이고 그것은 동성애 전환치료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동성애 인권의 핵심은 그들에게 전환치료를 보장-강요하는 것이다. 동성애를 하나의 성적 지향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가능한 논리인 것이었다. 성소수자를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장애인을 혐오하지 않으나 장애인을 위한 직업시설은 반대한다는 논리는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은 금지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애인 범죄처럼 비장애인의 이익을 해치는 존재로 보거나 장애인을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상정하지 않기에 가능하다.
장애인 혐오와 다른 혐오범죄는 같다. 장애인 매체인 비마이너에 실린 영국 장애인 혐오 보고서의 번역에도 이렇게 나와 있다. “다른 종류의 혐오 범죄처럼 장애 혐오 범죄도 특정 집단에 대해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경멸, 증오, 적대 등에 의해 동기 유발된다. 장애인의 경우에 혐오 범죄란 그들이 매일같이 직면하는 편견과 차별의 극단적인 결합이다.” 영국 정부는 혐오 범죄를 “편견과 혐오가 이유가 되어 피해자 또는 다른 사람에게 지각된 범죄행위를 구성하는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혐오 범죄는 물리적 폭행, 폭행 위협, 언어폭력, 학대, 낙서, 괴롭힘, 기물파손, 악의적인 불평, 납치, 강간, 고문 그리고 살인 등 여러 형태를 띤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이 주민들의 반대논리를 그저 ‘지각없는’ 행동 정도로만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장애인 대상의 혐오 범죄에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한 행위임에도 이유도 없이 장애인을 공격하는 것인 양 보도된다. 그러나 장애인을 향한 비하와 경멸의 말들은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은 열등하고 취약한 존재가 ‘된다’. 장애는 사회구조와 질서의 문제임에도 장애인의 존재적 특성으로 왜곡해 낙인과 편견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렇듯 장애인 혐오 범죄는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경멸과 적대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도 장애인혐오 범죄를 혐오 범죄로 보지 않음으로서 장애인 혐오 범죄는 재생산된다. 이 점도 여성 혐오 범죄나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와 흡사하다.
원본인 여성 혐오를 따라가다
다시 말해 혐오의 원본을 따라가는 셈이다. 최근 일간베스트사이트 유저(이하 일베)들 이외에도 공인들에 의한 여성 혐오 발언이 늘어나고 있어 ‘여성혐오’는 우리 사회의 중요 의제가 되고 있다.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하거나 여성 혐오 범죄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이들을 감싸는 의견이 많다는 것이 한 예이다. ‘발언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 ‘실수로 수위를 넘어서 막말이 된 과한 표현’이므로 그냥 넘어가자는 것이다. “뭘 그렇게 오버하는가!”라는 식으로 혐오 발언의 주체가 지나친 비난을 받아 마녀사냥이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전도시킨다.
앞서 말했듯이 혐오란 특정 집단을 열등하거나 문제적 존재로 보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경멸이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표현처럼 여성을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로 여기며 동등한 사회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가 아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여성의 타자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여성 혐오이다. 나아가 ‘김치녀’라는 일베들의 묘사처럼 여자는 “남성의 돈을 밝히고 남성을 경제력으로 평가하고 남성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며”, 무임승차하는 존재로서 남자의 이익을 갉아 먹는 존재가 된다. 동등하지 않은 존재가 불이익까지 준다고 여기는 논리는 여성 혐오를 부추긴다. ‘삼일한’(여자는 삼일에 한 번 패야 한다)이라는 일베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혐오 범죄까지 당연시하고 있기에 심각하다.
일상적인 혐오 발언으로 혐오 받는 존재들의 권리는 사라진다. 새정치민주연합 장병완 의원이 2014년에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차별 비하 표현에 대한 방심위의 시정요구 건수가 2011년 4건에서 622건으로 150배 이상 급증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여성들의 지위와 권리는 바닥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145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5년 세계 성차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세계 116위(0.55점)로 조사됐다.
무임승차 논리와 신자유주의 속물주의의 만남
언론보도를 보며 또 눈에 띄었던 피켓과 구호는 “발달장애인을 왜 우리 아이들이 감당해야 합니까?”였다. 이 질문은 과연 질문인가, 모욕인가? 부당한 질문은 모욕을 구성한다. 질문의 형식을 띄었으나 질문이 아니라 모욕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두 가지의 편견과 하나의 욕망이 내재돼 있다. 장애인은 감당해야 하는 ‘짐’이며 발달장애인은 함께 살수 없는, ‘격리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그리고 그 인식은 발달장애인의 ‘격리라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장애인은 짐이라는 논리는 여성들이 무임승차한다는 편견과 비슷하다. 그래서 비장애인에게 손실을 주는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장애인은 ‘세금 축내는 존재’, ‘아무런 기여 없이 나라로부터 공짜 혜택만 받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 특히 이러한 무임승차 논리는 신자유주의의 내면화로 자기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속물주의적 태도와 쌍을 이룬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절대선이라는 논리가 불이익이나 불편을 준다고 여기는 ‘다른 존재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무임승차 논리로, 장애인시설이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논리로 그동안 많은 장애인시설이 거부당했다. 주민들이 표면적으로는 중학생들의 교육에 해를 끼친다며 반대하고 있지만 사실은 집값 때문이 아니겠냐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이 때문인지 한 언론사는 장애인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라는 통계 자료까지 보도했다.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겠지만 이러한 보도는 우리 사회에 속물주의적 태도가 얼마나 팽배한지를 보여준다.
혐오를 재생산하는 정부
그에 반해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여성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가 넘쳐나지만 침묵한다. 혐오를 혐오라고 부르지도 않으며 혐오가 생산되는 규범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특정 집단에 대한 낙인이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만큼 그것을 줄이는 전략 역시 관찰학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사상과 모델을 제공하기 위한 정보제공, 접촉 기회제공, 차이 감소 전략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접촉 기회를 늘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경제적 격차, 교육 기회의 격차, 고용률과 임금 격차 등)를 줄일 수 있도록 사회보장제도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여성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를 관용하는 분위기에서 장애인 혐오는 노골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정부와 그를 활용하고 있는 정치권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에서 혐오는 확산될 수밖에 없다. 혐오를 혐오라 말하고 혐오를 규제하는 사회적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더욱 확산될 것이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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