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권리협약과 의사결정지원의 제도화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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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장애인권리협약과 한국성년후견제도의 평가
종래 금치산·한정치산제도는 획일적 행위무능력을 전제로 후견인에 의한 포괄적 의사결정대행(대리)을 기본구조로 하여 자기결정권을 제한함으로써 본인을 보호하려는 제도였다. 그리고 새로운 성년후견제도는 획일적 행위능력 제한과 포괄적 권한 부여의 문제점을 완화하여 보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보호유형과 보호조치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였다. 새 제도는 과잉개입에 따른 의사결정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침해의 위험을 배제하고자 하였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여전히 행위능력제한과 의사결정대행을 중심으로 하는 낡은 패러다임에 입각하고 있고, 의사결정지원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우리나라의 정부보고서에 대한 심의 후 공표한 감시의견(concluding obser-vation)에서 후견인에게 포괄적 권한을 부여하고 의사결정대행을 중심으로 하는 성년후견유형에 관하여 큰 우려를 표시하면서, 의사결정대행에서 의사결정지원을 중심으로 후견제도를 변경할 것을 권고하였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의 이와 같은 권고는 장애인권리협약 제12조 및 동조에 관한 일반평석 제1호에서 밝히고 있는 의사결정능력 장애인 보호조치에 있어서 법적능력의 향유와 의사결정지원 요청에 입각한 것이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2조 제2항은 “당사국은 장애인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법적능력(legal capacity)을 누려야 함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규정하는 한편, 이를 전제로 제3항에서 “당사국은 장애인들이 그들의 법적능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받을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적절한 입법 및 기타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적능력(legal capacity)’의 의미에 대하여 협약에서 명확한 정의를 하지 않음으로써 권리능력 외에 행위능력 등이 포함되는지를 둘러싸고 협약의 성안 단계에서부터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14년 5월 공표된 일반평석 제1호에서 동 협약 제12조에 관한 평석을 발표함으로써 이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 인권존중의 관점에서 그 근본취지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동 평석에서는 법적능력과 사실로서의 정신능력(mental capacity)은 별개의 개념이고, 법적능력은 권리와 의무를 보유하고(권리능력) 그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행위능력)으로서, 사회에 의미 있는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3항은 제2항의 법적능력의 향유를 전제로 그 행사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기회를 제공할 법적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국제적 장애인인권규범에서 의사결정능력장애인의 보호를 위한 패러다임이 행위능력 제한과 이를 전제로 하는 의사결정대행에서 법적능력의 향유와 그 동등한 행사를 보장하기 위한 의사결정지원으로 전환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성년후견제도도 그에 부합하는 이념적 제도적 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협약에서 강조하고 있는 의사결정지원 패러다임은 합리적 판단에 기초한 자기결정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의사결정능력상의 장애 때문에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경우에도 그들의 의사결정을 지원함으로써 자기결정을 가능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사결정지원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행위로서 ‘합리적(정당한) 편의의 제공’으로 정당화된다. 이와 관련하여 협약 제5조는 장애인의 평등과 차별금지 그리고 장애인의 평등을 촉진하기 위한 ‘합리적 편의(reasonable Accommodation)’의 제공과 그러한 조치들이 도리어 차별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협약 제5조의 관점에서 보면,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에 대한 의사결정의 지원은 동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합리적 편의’의 제공으로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법적 조치로서 정당화된다. 반면에서 이러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시각장애인에게 점자정보를 제공하지 않거나, 청각장애인에게 수화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에게 경사로를 제공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결정능력장애인에 대한 차별인 것이다(국내법적으로도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4조 제1항 제3호 참조).
의사결정 지원원칙과 제도모델의 모색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의사결정지원을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립된 제도모델이 많지 않다. 장애인권리협약과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요청하고 있는 의사결정지원원칙은 이미 확립된 원칙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보편적 장애인인권규범으로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주의 대체합의법(Representaion agreement Act)에서는 의사결정능력장애인도 자신의 대리인과 재산관리 뿐 아니라 신상에 관하여 피후견인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의사결정을 지원하거나 대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이렇게 선임된 후견인(Representative)은 우선 피후견인의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피후견인에게 의사결정능력이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피후견인을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대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호주 빅토리아 주의 후견법 개정제안(Victoria Law Reform Commission, Guardianship Final Report 24)에서는 의사결정지원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① 본인이 서면으로 지정하거나 후견법원에 의해 선임된 의사결정지원자(supporter)가 본인을 대신하여 의사결정관련 정보에 접근 취득하여 본인에게 쉽게 설명하고 그 내용대로 결정이 집행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② 의사결정능력의 장애 때문에 본인 단독으로 결정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본인의 희망 등을 고려하여 법원이 공동결정자를 선임하는 방안, ③ 종래 후견인과 마찬가지로 의사결정을 대행하는 자를 지정하는 방안 등을 제안하고 있다.
어느 것이나 의사결정지원을 중심에 두면서도 의사결정의 대행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의사결정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능력 장애의 어느 단계에 있어서는 모든 합리적인 의사결정지원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본인이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 때에는 의사결정지원의 최후의 수단으로서 의사결정지원자에 의한 대행결정이 배제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의사결정대행에 있어서조차 본인의 희망, 의지, 욕구, 가치관, 선호 등 본인의 주관적 요소를 고려한 본인의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의사결정의 대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우리의 사회문화적 환경에 적합한 의사결정지원의 제도모델을 마련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제정된 발달장애인의 권리 보장과 지원에 관한 법률이 의사결정지원의 중요한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동법에 따르면, 발달장애인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신체와 재산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질 뿐만 아니라(동법 제3조 제1항), 자신에게 법률적 또는 사실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하여 스스로 이해하여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필요한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제2항). 특히 발달장애인은 자신의 주거지의 결정, 의료행위에 대한 동의나 거부, 타인과의 교류, 복지서비스의 이용 여부와 서비스 종류의 선택 등을 스스로 결정하며(동법 제8조 제1항), 누구든지 발달장애인에게 의사결정이 필요한 사항과 관련하여 충분한 정보와 의사결정에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지 아니하고 그의 의사결정능력을 판단하여서는 아니 된다(제2항). 만약 제1항, 제2항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충분하지 아니하다고 판단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보호자가 발달장애인의 의사결정을 지원할 수 있다. 이 경우 보호자는 발달장애인 당사자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제3항).
본법에서 정하고 있는 의사결정지원의 원칙과 기준은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는 구체화되지 못한 의사결정능력상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정당한 편의의 제공’으로서 의사결정지원에 관한 기본적인 원칙과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본 규정의 취지는 발달 장애인 이외의 모든 의사결정능력장애인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원칙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특히 사법상 어떤 법률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론적으로 연구해 갈 과제이다.
성년후견제도의 활용 방향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성년후견제도를 돌이켜 보면, 여전히 행위능력 제한과 의사결정대행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는 성년후견제도는 앞으로 개선하여야 할 내용들이 적지 않다. 앞으로 의사결정지원제도로의 전환을 위하여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여 학대, 착취, 폭력, 성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장애인들의 보호를 위해서는 기왕의 성년후견제도를 활용하여 적절한 보호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새로운 성년후견제도는 과거의 제도와는 달리 보호조치가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가운데에는 의사결정지원을 위한 보호조치로서도 충분히 활용해 갈 수 있는 것이 적지 않다. 가령, 의사결정지원의 관점에서는 의사결정능력에 관한 장애인의 자율성과 필요최소개입의 원칙에 기반한 후견대체제도로서의 후견계약과 특정후견의 활용이 적극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후견계약은 본인 스스로 후견사무의 처리의 방법과 기준을 설정하여 본인의 의사결정능력이 저하된 다음에도 자기결정적 삶을 실현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령자의 노후설계수단으로 유용하다. 특정후견은 발달장애인들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고 그들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고 사회참여를 촉진하면서 이들을 커다란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데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반면에 성년후견유형은 종래 제도의 문제점을 온존하고 있으므로 그 이용을 억제하고, 지속적 후견보호가 필요한 경우에도 한정후견을 중심으로 제도를 이용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한정후견의 동의유보는 후견인의 취소권 행사의 전제(행위능력 제한)가 아니라 공동결정의 방식에 의한 의사결정지원제도로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개정민법의 해석상으로도 한정후견인은 대리권을 부여받지 않는 한 당연히 취소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취소권이 없는 후견인은 본인의 취소권 행사에 관한 의사결정을 지원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년후견 외에도 후견목적의 특별수요신탁과 같은 새로운 후견대체수단에 대해서도 앞으로 연구와 검토를 통하여 제도화한다면, 특히 자신의 사후에 발달장애가 있는 자녀들의 생활을 염려하는 부모님들의 근심도 크게 덜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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