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보는 영국 서비스현금지급과 개인예산제도
본문
한국에서도 개인예산제도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찬반으로 나뉘는 것 같다. 찬성은 이용자의 선택과 자기결정이 획기적으로 높아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대는 선택도 의미 있게 높아지지 않고 제도적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양쪽 다 일리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예산제도에 대한 정보의 부족으로 서로 소통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런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목적으로 영국의 서비스현금지급(direct payments)과 개인예산제도(personal budgets)를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
영국의 서비스현금지급과 개인예산제도의 변천
영국에서 서비스현금지급과 개인예산제도 이야기의 시작은 1990년에 입법된 보수당 정부의 커뮤니티케어 개혁에서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를 네 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해야 한다.
배경적 제도: 커뮤니티케어 개혁
1990년에 제정된 커뮤니티케어법에 의해서 지방정부는 서비스 신청을 받아 이용자격을 결정하고, 이용자격을 인정받은 이용자는 제공기관을 선택해서 이용하는 서비스의 시장화가 이루어졌다. 서비스 영역의 전면적인 시장화는 ‘효율성 제고’와 ‘이용자 선택’이라는 명분을 표방하였다. 이 당시의 시장화의 원리는 현재 우리나라의 노인요양제도,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등과 유사한 것이다.
1세대: 서비스 현금지급제도 도입과 확대
시장화 도입 이후에 영국의 장애인단체들은 시장화 개혁이 장애인의 선택권을 높였는지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연구를 시행하였고, 그 결과는 회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장애인단체는 선택권을 주는 척 하지 말고 진짜 선택권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서비스에 투입되는 돈을 장애인에게 달라고 했다. 이 주장의 설득력이 인정되어 1996년 서비스현금지급법이 제정되었다. 제정 당시 법에서 서비스 현금지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18세에서 65세 사이의, 현금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한되었다. 사실상 신체장애인에게 국한하여 도입되었던 제도이다. 그러다가 2000년 이후 적용대상이 노인, 17~18세 청소년, 장애아동의 보호자, 발달장애인 등 성인 사회복지서비스 이용자 전체로 확대됐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대하여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물인 서비스 대신에 현금을 선택하도록 지원하라고 독려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현금을 선택하는 비율은 전체 이용자의 10~20%를 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현금을 받아서 스스로 서비스를 찾는 것이 번거로웠다. 둘째, 현금을 적절하게 썼다고 매월 지방정부에 가서 정산을 해야 했는데, 정산을 위해 기록하고 영수증을 챙기는 일이 번거로웠다. 셋째, 현금을 받아서 활동보조인을 개인이 고용하게 되면 노동자에 대한 고용주로서의 책임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하여 장애인단체는 정부가 또 한 번 선택을 주는 시늉만 했다고 비판했다.
2세대: 1단계 개인예산제도의 개발
서비스 현금지급제도의 이용자는 사실상 신체장애인과 일부 노인으로 국한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지방정부가 조정해주는 현물서비스를 받는 쪽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중반부터 발달장애인 지원단체들이 연합하여 ‘In Control’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발달장애인도 서비스현금지급을 이용하도록 하는 제도모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모형의 핵심은 발달장애인이 현금을 선택한 경우, 발생하는 문제들을 감당해 주는 지원서비스를 붙이는 것으로서, 이 지원서비스를 중개조력서비스(brokerage service)라고 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사람을 조력인(broker)이라고 했다. 발달장애인이 현금을 선택하면 이 돈이 발달장애인의 통장에 입금되고, 발달장애인은 통장을 조력인에게 맡겨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조력인에게 말한다. 그러면 조력인은 발달장애인의 의사에 맞게 서비스를 찾아주고, 비용을 대신 지불해주고, 지방정부에 정산을 대행해 준다. 이 방식을 서비스 대신 현금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현금지급제도와 구분하기 위하여 개인예산제도라고 하였다.
In control은 이 버전의 개인예산제도를 2000년도 중반부터 후반 사이에 여러 지방정부와 협약을 맺어 시범사업으로 진행하였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서비스현금지급제도와 개인예산제도는 별개의 제도이다. 서비스현금지급을 선택하는 사람은 현금을 받아서 스스로 지출하고, 개인예산을 받는 사람은 현금과 함께 지원서비스를 동시에 이용한다. 이 당시까지 개인예산제도는 중앙정부가 정한 제도가 아니라 지방정부 단위의 시범사업단계였기 때문에 실제로 구분되어 다루어지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세대: 2단계 개인예산제도
1단계 개인예산제도는 현금에다 지원서비스를 부가시킨 모형이다. 이 모형에서는 정부의 책임성과 발달장애인이 자기주도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지방정부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지출이 발달장애인 스스로의 의사가 확실히 반영된 것인지, 그리고 발달장애인의 권리와 안전이 확보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자기주도적 지원(self-directed support)이라는 개념이 주창되었다. 이 개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주도적 계획(self-directed plan)을 발달장애인과 가족들이 함께 수립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서는 발달장애인이 원하는 바를 중심에 놓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가족과 서비스 제공기관이 함께 논의하여 작성한다. 그 다음에 이 계획대로 비용을 집행해도 되는지를 지방정부 담당공무원과 협의하여 확정한다. 확정된 계획에 따라 관계된 기관을 이용하거나 발달장애인을 돕는 사람을 고용하거나 계획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필요한 훈련과정에 등록하거나 등에 정부비용이 지불된다. 이 때 비용 지불을 지방정부에 위탁하거나 또는 많이 이용하는 서비스 기관에 위탁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지방정부로부터 현금을 받아서 스스로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확정된 자기주도계획 중에 물건을 사야 하거나 개별적인 여가활동비 등으로 지출돼야 하는 돈은 현금으로 받고, 서비스기관을 이용하는 등의 돈은 지방정부에서 서비스기관으로 이전해 지출한다. 이 때 현금으로 받는 경우를 서비스현금지급이라고 한다. 현재 개인예산제도는 중앙정부가 공식적으로 채택해 지방정부에 시행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는 제도이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서비스현금지급은 개인예산제도의 일부이다. 개인예산제도를 선택한 사람가운데, 현금을 받아서 자기주도적 계획을 실행하는 사람은 개인예산제도 이용자 중 현금지급을 선택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현재 영국에서 18세 이상 성인 전체(65세 이상 노인을 포함하여) 사회복지서비스 이용자의 80%는 개인예산(자기주도적 지원)을 선택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예산을 선택하여 이용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20% 정도가 현금지급을 이용하고 있다.
개인예산제도의 방점 - 현금이 아닌 자기주도성
발달장애인에 초점을 맞춰 개발된 개인예산제도는 발달장애인 뿐만 아니라 모든 성인 사회복지서비스 이용자에게 적용되고 있고, 이 제도의 핵심 개념은 자기주도성이다. 영국에서 실제 제도가 적용되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제임스(James)는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이다. 성인이 되면서 성인 사회복지서비스를 받기 위해 시에 서비스를 신청한다. 그러면 시에서는 2, 30개의 질문에 체크할 있는 질문지가 온다. 이 질문지에 표시를 하여 시에 보내면 이를 확인하는 전화통화 또는 방문면접이 이루어진다. 표시한 답변에 따라 제임스의 욕구는 위험(critical), 중대(substantial), 중간(moderate), 낮음(low) 중의 하나로 결정된다. 지방정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발달장애인의 경우 중대(substantial) 이상 등급이어야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 등급 이상에 해당되면 서비스 이용자격을 얻게 된다. 이용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질문의 답변 항목을 전산 프로그램에 입력해 추정 지원급액(initial budget)을 산정해, 이 금액을 알려준다. 대략 이 금액의 범위에서 자기주도 계획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그러면 제임스와 가족은 함께 원하는 바를 만들어 본다. 예를 들어 제임스가 농촌에 살고 있고 애완동물을 좋아한다면, (농촌지역이라 수요가 적어서 애완동물 용품가게가 없다면) 애완동물 용품을 파는 가게를 열어서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 경우 개인예산은 이 가게에 필요한 물품을 사는데 지출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 계획을 가지고 시의 담당자와 의논하고, 시의 담당자는 이 계획이 제임스의 의사를 잘 반영한 것인지, 실제로 실현가능한지, 계획대로 했을 경우 안전 등에 문제가 없는지 등을 검토하고 협의하여 계획을 조정해 확정한다. 계획이 확정되면 확정된 계획에 맞게 개인예산의 수정된 액수와 지출방법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 계획에 수정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담당공무원과 협의해 수정한다.
현재의 영국 개인예산제도는 3세대 버전이다. 이 버전을 주도하는 슬로건은 인간중심의 유연화(personalisation)이다. 지원이 인간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개인예산제도(personal budget)는 이전의 경직된 예산(rigid budget)을 대체하자는 것이다. 서비스 중심의 예산에서 개인을 중심에 두는 예산으로 가자는 것이다. 3세대 버전의 개인예산제도의 중심은 현금을 지급하느냐에 있지 않다. 대신에 자기주도성에 방점이 있다. 정부의 딱딱하고 규칙에 맞게 배열된 서비스가 아닌 개인이 하고 싶은 바를 도와주는 유연하고 인간중심인 서비스를 지향하는 방법이다.
서비스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사회서비스가 제도화되는 과정은 표준화(standardi-zation)이다.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 메뉴를 정하고, 각 메뉴의 가격을 정하고,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할 서비스 양을 정하고, 이용자는 정해놓은 메뉴를 선택해서 이용하고, 여기에 정부는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표준적 모습이다. 그리고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이 서로 양해하여 메뉴에 없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면 부정수급이 된다. 메뉴에 없는 서비스가 진짜 이용자에게 필요한 서비스인 경우에도 이는 부정수급에 해당된다. 이것이 표준화의 모습이다. 인간중심의 서비스가 아니라 제도의 실행을 위한 서비스의 모습이다. 지금까지 사회서비스의 제도화 과정은 바로 이 표준화의 과정이다. 이 표준화의 반대말이 인간중심의 유연화(personalisation)다. 메뉴를 미리 정하지 말고 정해진 비용의 범위에서 진짜 이용자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창의적으로 구성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예산제도, 자기주도지원, 인간중심의 유연화는 닮거나 같은 모습이다. 서비스 문화의 큰 흐름을 제도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꾸고자 하는 총체적 흐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비스 문화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활동지원제도, 장애인복지관, 거주시설, 직업재활시설, 주간보호시설 등의 모든 서비스 제도와 기관에 적용되는 문제제기이다. 개인예산제도는 사람중심의 제도, 사람중심의 기관으로 변신해야 하는 인간적인 압박이다. 우리는 이제 이 압박에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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