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성에 대한 우리의 잣대
본문
"장애인과 관련이 없는데도 장애인권운동에 헌신적인 활동가들을 보고 정말 존경스러웠어요.”
얼마 전에 만난 장애인부모의 말이다. 그녀는 장애인부모가 되고 나서 장애인권운동에 발을 디딘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복잡했다. ‘나는 왜 인권운동을 하지? 나는 왜 장애인권에 관심이 많지?’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장애인권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내 삶과 연관된 일, 내 어머니의 일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이거나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가 장애인이어서 장애인권운동을 하면 그건 존경받을 이유가 아닌가. 뭔가 저평가를 받은 것처럼 마음이 복잡했다.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종종 접한다.
내가 인권운동을 하게 된 것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렇게 노동운동을 비롯한 여러 운동을 하다 인권운동까지 하게 됐다. 20대의 내 꿈은 혁명가였다. 인권운동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 중의 하나였다.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관심으로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인권운동을 하면서 나는 많이 달라졌다. 거대담론과 조직화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사고하고 고민하던 사유방식이 변했다. 내 삶에 대해, 내 주변에 대해, 나의 사유와 삶의 방식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그러면서 가족의 문제인 장애인 차별에 눈이 갔다. 이른바 인권감수성의 촉이 발달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많은 운동이 그렇듯 부당함, 억압, 차별을 겪으며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이대로 있기는 좀 억울하지 않아’ 이런 마음이 들 때 조심스레 입을 연다. 작은 용기가 큰 용기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개인에게 닥칠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따지기도 한다. 설령 끝까지 가지 않더라도, 문제해결까지 버티지 못하더라도 그건 세상에 잘못됐다고 항변하는 일이기에 돌을 던지는 일이다. 돌멩이가 세상에 일으킨 파문이 크든 작든간에 개인에게는 엄청난 파문, 아니 소용돌이가 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 용기에 대해 제대로 평가해줘야 하지 않을까.
특히나 자기 문제로 싸운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걸고(그것이 삶의 전부이든 일부이든 간에) 싸우는 일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싸우는 것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종종 세상은 이에 대해 ‘이해관계자’가 싸우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해관계자라는 이유로 ‘불순’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평하는 경우도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 임금을 받게 해달라고 하거나 노동조합의 활동을 방해하거나 탄압하지 말라는 싸움을 하면 ‘배부르고 이기적인’ 집단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조직률 즉 노동조합 가입률은 매우 낮다.
더구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심한 성소수자운동의 경우에 당사자로서 나서서 운동한다는 것은 매우 큰 결심이 필요하다. 성소수자의 성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을 말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나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차별을 감수하고 커밍아웃을 해서 세상의 편견에 맞선다. 그래서 그/녀들의 용기는 존경받을만하다.
지지와 연대, 보편적 인권에 속한다는 증명
그런데 그러한 이유로 당사자들이 아닌 지지자들의 운동이 더 필요하기도 하다. 이러한 지지를 보며 다른 사람들이 성소수자의 인권이 보편적 인권의 한 영역이라고 여기게 되기도 한다. 성소수자들을 변태라고 욕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으로 부정하는 현실에서 성소수자는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다를 뿐 ‘존엄성이 있는 인간’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비당사자들의 공감과 참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혐오하도록 만드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기 안의 소수성을 긍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찾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도 지지와 연대는 큰 힘이 된다.
국가권력과 맞서 싸우는 경우에도 그렇다.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에 연대하는 운동을 통해 송전탑 반대운동이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나가는 싸움’이라는 게 부각된다. 밀양주민의 이기적인 싸움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을 죽이는 핵발전에 반대하는 운동임을 강조된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밀양 할매들의 싸움이 존경스럽다고 했다. 도시에서는 펑펑 전기를 쓰는데 그 고통을 밀양 할매들이 받는다며 미안해했다. 이렇게 우리는 연대운동의 과정에서 우리가 서로 연결됐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항상 연결감을 느끼며 연대하는 것은 아니다. 동정의 시선으로 내미는 손도 많다. 이걸 어떻게 마주할까를 결정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동정을 받을 정도’로 열악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무조건 손사레를 칠 수도 없다. 이주민이나 장애인의 경우에 그런 ‘지지의 손’들도 많이 만난다. “장애인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여기까지 나왔겠어” “먼 나라에서 와서 가족 없이 고생하는데 좀 나은 우리라도 도와줘야지” 당연히 ‘당사자성’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는 거리가 좀 있다. 동등한 관계가 아닌 우위에서 내려다보며 ‘도와줄게’라며 대상화하는 것은 온전한 ‘지지’가 아니다. 그래서 언제든 자신의 필요에 따라 태도를 바꾼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다. 비장애인의 동정어린 도움이나 시선을 얌전하게 수용하지 않으면 곧바로 ‘동정’은 철회된다. 한번은 전동휠체어를 탄 어떤 장애여성이 지하철을 탑승하려는데 뒤에 있던 나이 있는 남성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휠체어를 뒤에서 밀더란다. 전동휠체어라 뒤에서 밀어주면 움직이는데 걸리적 거릴 뿐 아니라 청하지 않은 도움을 받는 게 불편해서 그만두라고 요구했단다. 그랬더니 그 남성이 화를 냈단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저렇게 (마음이) 삐뚤어졌으니 몸이 성하지 않지. 쯔쯧.” 도움을 받을지 말지는 당사자가 결정하는게 맞는데도 말이다. 도와주고 싶은 사람 마음대로 결정할 게 아니라 당사자에게 묻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의 행위 속에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
▲ 지난 10월 21일, 자립생활권리 쟁취를 위해 장애인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당사자주의, 당사자 중심성
이는 장애운동에서 논의됐던 ‘장애인당사자주의’에 대한 고민과 만난다. ‘장애인을 배제하고 장애인의 문제를 결정하지 말라’,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인이 제일 잘 안다’라는 명제에서 드러나듯 장애인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장애인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닌 주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장애인은 ‘장애인복지정책의 대상’이나 ‘전문가들이 문제를 풀어줄 대상’ 이 아니라는 뜻이다. 논의과정을 비롯한 결정구조에 장애인이 참여하고 그 속에 장애인의 목소리, 입장이 반영돼야 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기획하고 결정하는 주체라는 뜻이다.
피터 비에리라는 철학자는 자기결정권을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없고 내적 독립성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결정은 세상과 떨어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의지와 경험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역사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함과 동시에 삶의 역사가 주는 조건에 의해 제약 되어야”하며, “자기결정권은 그러한 선제조건들로 이루어진 인과관계적 삶이 흘러들어온 틀 안에서의 영향력으로만 존재”한다고 했다. 자기결정권조차 진공의 상태가 아닌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렇듯 운동의 주체성을 당사자들만의 자기결정권 행사로 이해하는 것은 좁을 뿐 아니라 비현실적이다. 자기결정의 행사는 무수히 많은 만남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니까.
그런데 ‘-주의’라는 말이 그렇듯, 장애인 당사자주의는 언제나 부정과 긍정의 줄타기를 한다. 주체성과 폐쇄성을 양 끝에 둔 위험한 줄타기 말이다. 일본의 토요타 마사히로라는 사람은 일본의 장애운동의 역사를 평가하며 장애인당사자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일본의 과거 장애인운동은 ‘장애인해방’의 이념이 있었으나 현재는 당사자운동이라는 논리로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권위적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당사자주의가 특정 집단에게만 ‘당사자성’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아가 이러한 당사자주의는 장애인권의 문제가 전체 사회구성원의 문제임을 은폐하게 되고 구조적 문제를 가리게 된다고 우려했다. 장애인권이 일부만의 문제가 되고 일부 단체의 권위만 부여하게 되서는 안 된다고 했다. 따라서 중요한 건 당사자중심성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가 아닌 모든 사람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사라지는 다른 세상을 기획하는 것이다.
당사자 중심성을 잃지 않으면서 함께 가기
그렇다고 소수자운동에서 당사자 중심성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 당사자만이 당사자에 얽힌 모든 문제를 알고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당사자만이 말할 수 있다는 뜻이라기보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당사자의 말을 가로채는 것을 경계하자는 뜻이 아닐까.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에 의한 대리주의가 팽배한 장애인 운동에서 더 그렇다. 물론 대리주의는 전문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침묵하지 않되, 다 아는 냥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닐까. 과거 미국에서 벌어진 흑인 민권운동에서 백인들이 함께 손을 잡고 흑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며 함께 운동하고 함께 모욕을 감내했던 것처럼 말이다.
당사자성에 대한 우리의 잣대가 이중적으로 보이는 건 어쩌면 연대와 지지가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당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천하고 힘없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소수자에 대한 주류적 시선과 한 쌍을 이룬다.
그러니 당사자이건 비당사이건 우리가 소수자운동을 하면서 견지해야 할 것은 당사자 중심성과 위치성에 대한 열린 자세일 것이다. 그/녀가 당사자이든 아니든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되 그 위치성은 언제나 변화 가능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소수성은 개인이나 집단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이자 권력의 문제라는 바탕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장애인이건 아니건 간에 ‘내가 장애인이다’라는 구호를 외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한 철학적, 사회적 자세를 잃지 않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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