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형 선거공보, 밑빠진 의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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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총선이 시작되기까지의 시간이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참정권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기본적인 국민의 권리로서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은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언제나 떠오르는 화두였다.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의 참정권은 기본적인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선거때마다 침해 사례가 수집된다. 이에 본지에서는 총선이 실시되는 때까지 장애인 참정권 침해와 권리 보장에 관한 기사 및 기고를 싣고자 한다.
선거공보, 점자이거나 음성이거나
지난 7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정안 내용에는 장애인 선거권 보장과 관련한 부분으로 점자형 선거공보 의무화가 포함됐다. 대상 선거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자치단체 선거다. 해당 선거 후보자들은 점자형 선거공보를 별도로 제작해 제출하거나 일반형 선거공보에 음성 출력 가능한 전자적 표시를 해야 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장애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점자형 선거공보 의무화를 추진해왔다. 후보자들 중 점자형 선거공보를 제작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아 시각장애인들의 선거 정보 접근성 차별이라는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이번 개정안은 그러한 요구를 일정부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문제는 ‘음성으로 제공되는 전자적 표시장치’가 점자를 대체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이는 점자와 전자적 표시장치를 두고 후보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점자형 선거공보를 의무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이하 한시련) 강완식 정책실장은 “개정안을 보면 의무라고 되어있긴 하지만 단서 조항이 존재해 문제다. 만약 당에서 전자적 표시장치를 제공하라고 공지하면 후보자 누구도 점자형 공보를 제작 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점자형 공보를 기본으로 두고 다른 방식을 병행해도 된다는 식이라면 인정하겠지만 선택의 문제로 두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점자 사용 시각장애인 5% 아닌 41.6%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점자형 선거공보와 대체 가능한 전자적 표시장치를 동시에 적용한 이유로 낮은 비율의 점자 해독 인구를 꼽았다. 장애인실태조사 결과 시각장애인 중 점자 해독이 가능한 인원이 5%에 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자 해독률은 모든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즉, 점자형 선거공보를 제공받는 1급에서 4급 시각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2014년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시각장애인 언어 사용 환경 개선 중장기 계획 수립’(이하 국어원보고서)의 연구 책임자였던 조선대학교 김영일 교수는 “시각장애인 점자 해독률이 10% 미만이라는 항간의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라며 “점자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점자 해독이 가능한지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점자가 필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사실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어원보고서 연구 과정에서 전국 1급~4급 시각장애인 1천명에게 점자 사용 여부를 조사한 결과, 점자를 사용한다고 답한 이들은 전체의 41.6%였다. 점자형 선거공보 제공 대상자 10명 중 4명이 점자 사용자인 것이다.
한시련 강완식 실장은 “선관위 측에게 전자적 표시장치에 무엇을 염두해두었냐고 물었더니 QR코드나 보이스아이 등으로 뭉뚱그렸다. 스마트폰 등 보조 장치가 있어야 정보 습득이 가능한데, 스마트폰 사용률이나 보이스아이 인식 보조 장치 보급률 등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국어원보고서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스마트폰 사용 여부 조사 결과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61.6%였다.
10명 중 4명이 점자 사용자, 6명이 스마트폰 사용자다. 개정안대로 후보자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어느 한 쪽에 속한 시각장애인들은 선거 공보를 통한 정보 습득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스마트폰 사용자라고 해서 전자적 표시장치를 모두 활용할 수 있을 것인지도 미지수다. 예를 들어, 고령의 스마트폰 사용자에게 점자 없는 책자를 주고 알아서 어플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또한 선택권의 문제도 존재한다. 점자 해독이 가능하고 전자적 표시장치를 매끄럽게 사용할 줄 아는 스마트폰 사용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어느 한 쪽만 제공하고 그것을 강제할 순 없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당사자 A씨는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형태의 정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선호하는 형태가 있을테니 다양한 형태로 제공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보이스아이는 보조장치 없이 핸드폰만으로 읽으려면 미세하게 잘 맞춰야해서 어려움이 있고 QR코드는 후보들 홈페이지에 음성 지원이 돼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덧붙였다.
글씨 크기는 3배, 면수는 동일
점자형 선거공보 제공에는 또 다른 문제가 숨어있다. 일반 선거공보와 동일하게 면수를 제한한 부분이다. 점자의 경우 글씨 크기가 묵자보다 커 한 페이지당 인쇄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3분의 1에 그친다. 일반 선거 공보 내용을 모두 싣기 위해서는 점자형 선거 공보의 페이지가 3배정도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현재와 같이 면수 제한을 동일하게 적용하면 점자형 선거 공보 내용은 일반 선거 공보 내용을 편집한 것으로 내용상의 한계가 있다. 편집된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보의 질도 달라진다.
앞서 수차례 점자형 선거 공보를 접한 시각장애인 당사자 A씨는 “묵자 한 장을 3분의 1로 요약해서 점자형 선거공보 한 장에 넣어야 하는데 대부분 요약이라기보다는 헤드라인만 넣는 방식이다. 심지어 일부는 양에 맞춰 앞이나 뒤를 잘라내고 붙여넣기 하기도 한다”며 “충분한 정보 습득이 불가능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점자형 선거공보 면수제한은 2014년 위헌확인 소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점자형 선거공보 면수제한이 시각장애인의 선거권 등을 침해한다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결론적으로 심판청구는 기각됐지만 당시 판결은 나뉘었다. 면수제한이 시각장애인 선거권 침해라는 점에 동의한 재판관들은 이 사안에 대해 “선거공보의 면수 한정은 그 내용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점자는 일반 활자와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하여 약 2.5배 내지 3배 정도의 면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판대상조항은 점자형 선거공보에 대해 임의적 선택사항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장애를 고려하지 아니하는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시각장애선거인의 후보자 등에 대한 정치적 정보취득의 기회가 박탈될 수 있게 하거나 제한되게 하여 선거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 시각장애선거인에게 불리한 결과 즉 실질적인 불평등을 초래하여 그를 선거권 행사 영역에서 차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 영국선거관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투표안내 사이트 |
장애 특성 맞춘 복합적 방식으로 정보 제공해야
시각장애인용 점자형 선거공보를 둘러싼 허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청각장애인, 발달장애인 등에게도 적용된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7조 제3항에서는 ‘공직선거후보자 및 정당은 장애인에게 후보자 및 정당에 관한 정보를 장애인이 아닌 사람과 동등한 수준으로 전달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동등한 수준의 정보 제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장애인이 필요로하는 모든 방식으로의 정보 제공이다. 예를 들어 선관위에서 제작 배포하는 투표안내문처럼 선거공보를 제작해야 한다. 시각장애인에게 배포되는 투표안내문은 점자, 확대활자, 바코드, 음성녹음 씨디까지 함께 제공된다. 비장애인들이 활자로 된 선거공보와 라디오, TV, 인터넷 등 다양한 정보수집 방법 중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것을 고르듯이 장애인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해당 장애유형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방법만을 고집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청각장애인의 선거정보 습득에도 시각장애인과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한국농아인협회는 지난 선거에서부터 자막과 수화를 동시에 제공하길 요구했다. 수화를 제1언어로 선택해 교육 받은 청각장애인의 경우 문자해독률이 떨어져 활자선거공보나 TV자막으로 충분한 정보 습득이 어렵다. 때문에 선거공보에 QR코드를 삽입해 수화를 제공하고 방송에도 자막과 함께 수화를 제공해야 모든 청각장애인들이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선거 당시 선거공보에는 QR코드가 적용되지 않았고 선거방송에서도 공중파 자막은 100% 제공된 반면, 수화는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국농아인협회는 “문자정보에 취약한 청각장애인을 감안해 선거정보와 같은 중요한 정보는 100% 수화를 제공해야 한다”며 다가오는 총선에서 다시 한번 수화 제공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달장애인에게 선거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아직 초석도 마련되지 못했다. 발달장애인은 문자해독과 관련한 정보처리에 어려움을 갖는 장애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 선거정보가 전혀 제공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국지적장애인복지협회는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해 그림과 쉬운 문장으로 구성된 선거정보를 제공이 시급하다. 또한 반복적인 학습이 가능하도록 발달장애인 부모, 복지기관에서 해당 자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며 영국의 리즈시에서 배포한 발달장애인 투표 정보 책자를 예로 들었다.
국민의 기본 권리 보호는 국가의 의무
지난 9월 중순, 선관위는 한시련과 만나 점자형 선거공보 의무화를 위해 선거사무안내에 점자형 선거공보를 우선으로 하도록 하는 내용을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선거사무안내 점자형 선거공보 관련 내용은 한시련에서 작성, 선관위에 송부할 예정이다. 한시련은 다가오는 총선에서 지난 선거 대비 점자형 선거공보 비율이 얼마나 상승할 것인지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한시련 강완식 실장은 “선관위 등 정부가 장애인에게 선거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며 “국민이 기본적인 권리를 행사하는데 제약이 없도록 해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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