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문제 공론화를 위한 시민사회 국제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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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장애인권리협약 최종권고 이행 실태 점검 ②
장애인권리협약 이행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돼 왔으나, 그 내용과 해석에 대해서는 한국 시민사회와 정부 사이에 분명한 온도차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협약 자체의 이해도를 증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외적인 연대 활동을 통해 협약 이행을 가속화하기 위한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 개최한 UN 사이드 이벤트의 과정을 통해 시민사회 연대의 필요성에 대해 살펴봤다. - 편집자 주 -
GPS 없는 내비게이션, 장애인권리협약
▲ UN 사이드 이벤트에서 발언중인 이문희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사무국장 |
장애인권리협약은 구성과정부터 내용까지 시민사회와 정부 간 민주적 소통과 협의를 통해 장애인당사자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잘 녹인 모범적 국제인권조약으로, 장애인단체 활동가에게 있어 내비게이션과도 같은 존재다. 협약이 채택된 지 올해로 8년차로 접어들면서, 국제사회는 각국의 협약 이행상황을 점검하고 국가 간 격차를 비교하기 위해 장애 포용적 데이터 수집과 통계 구축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즉, 장애인권리협약이라는 내비게이션에 장애통계라는 GPS 기능을 탑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로 이 GPS 기능이 현재 없기 때문에, 한국 시민사회와 정부가 장애인권리협약에 대해 느끼는 온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는 통계를 기반으로 타 국가와 비교해 협약이행 격차에 대해 논할 수 없으므로, 협약이행 가속화를 주장할 핵심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시민사회 측의 강력한 논리가 부재한 상황에서, 국민의 혈세가 소요되는 일에 정부는 응당 정치적으로 미온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또 다른 주체는 국가인권위원회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기구로서 아쉬운 행보를 거듭하며 장애인권리협약이 가진 인권 프레임을 확산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장애계가 장애 이슈를 국내에 성공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는 대안적 프레임의 확보가 시급하다.
인권과 대등한 장애이슈화 프레임 ‘빈곤해소’
인권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면서, 정부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슈가 무엇일까. 필자에게는 빈곤해소 프레임이 가장 원론적이며 설득적으로 다가왔다. 빈곤만큼 인권을 포괄적으로 침해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빈곤은 건강, 주거, 교육, 사회참여 등 인간의 사회경제적 권리에 가장 직접적으로 타격을 준다. 코피 아타 아난 제7대 유엔 사무총장 또한 빈곤과 인권에 대해 다음같이 말한 바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빈곤에서 구제될 때마다, 우리는 인권을 수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실패할 때마다, 우리는 인권수호의 미션에 실패하는 것이다.”
사실 빈곤해소 프레임을 통한 장애 이슈 주류화 시도는 이전부터 있어 왔다. 1999년 빈곤감소전략보고(PRSPs: Poverty Reduction Strategy Papers)가 주요빈곤국의 부채 경감을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도입되면서, 보고서에 ‘취약계층(vulnerable groups)’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언급된 취약계층은 그 대상이 매우 광범위했으나, 장애인을 포함해 정의됐다. 이후 2000년, 새천년개발목표에 의해 빈곤감소가 제1의제로 채택되면서 빈곤에 대한 국제 공동대응은 전 세계로 확산됐다.
제1의제의 목표달성을 위해 The Hunger Project를 추진하면서, 2002년 James D. Wolfensohn은 워싱턴그룹의 주요 보고서를 토대로 “세계 빈곤 인구의 20%가 장애인”임을 언급하며 국제 빈곤해소를 위해 장애인의 처우 개선을 강조하는 빈곤해소 프레임을 활용했다. 그리고 2004년에 이르러 유엔 장애개발팀 또한 같은 프레임을 활용하여 국제빈곤 감소에 장애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다룬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 올해 9월 채택 예정인 지속가능발전목표에 ‘장애’와 ‘장애인’이란 단어가 포함되었다. 따라서 인권 프레임보다 통계 구축의 역사가 긴 빈곤해소 프레임은, 시민사회가 자국 내 장애 이슈를 주류화 하는데 필요한 근거자료들을 훨씬 풍부하게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빈곤해소 프레임 속 장애인단체 전략 공유
▲ 사이드 이벤트에 참석한 해외 단체들 |
이런 맥락이라면 한국장애계는 향후 장애인권리협약의 인권 프레임과 빈곤해소 프레임을 함께 가져가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빈곤해소 프레임을 한국사회에 맞게 적용하려면, 한국장애인이 겪는 빈곤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해줄 목소리가 필요했다. 통계와 더불어 자국 장애인이 체감하는 빈곤현황에 대해 말해주고, 서로의 자원을 발굴해주며, 빈곤해소 프레임을 통한 장애 이슈화 전략 공유에 동참해줄 해외 장애인단체와 교류해야했다.
이에 따라 지난 4월,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은 유엔 특별협의지위를 활용해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등록된 6백여 개의 해외장애인단체 연락처를 확보, 빈곤해소 프레임 속 장애이슈 대응을 위한 국제연대를 제안했다. 그 결과 15개 해외단체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확보했지만 서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관계로 온라인상 깊이 있는 논의를 하는데 한계가 존재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본 교류를 보다 실질적인 논의로 격상시키고자, 제8차 장애인권리협약 당사국 회의에서 시민사회 부문 사이드 이벤트를 토론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류를 하던 해외장애인단체 중 상당수가 뉴욕으로 갈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사이드 이벤트 초기 계획이었던 대륙별 패널리스트 섭외는 포기해야만 했다. 참여가 가능하다고 밝힌 곳은 콜롬비아와 스리랑카 총 두 단체로, 이들과 함께 사이드 이벤트를 꾸려나가게 되었다.
유엔에서 회동한 각국의 장애인단체, 장애와 빈곤에 대해 이야기하다
시민사회단체의 첫 번째 회동이자 논의인 만큼, ‘빈곤해소 프레임과 장애’에서 다시 주제를 구체화시켜야 했다. 이에 빈곤을 정의하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인 경제적 박탈, 소득 부족, 고용에 관해 다루기로 했다. 사이드 이벤트는 주제와 관련된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시민사회의 답변을 듣는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장애인의 취업 및 실업에 관한 통계를 제시한 후, 고용의 질과 장애인 빈곤에 대해 패널리스트의 생각을 밝힌다. 둘째, 장애인 관련 정책·법·사회보장제도 등이 장애인 빈곤 완화 및 소득보장에 가지는 실효성에 대해 패널리스트의 생각을 밝힌다. 셋째, 장애인의 빈곤 완화와 소득보장을 위한 시민사회계의 행보와 입장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장애인의 빈곤에 대한 국제공동연대를 통해 기대하는 바를 이야기하도록 했다.
한국 패널리스트로 참가한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이문희 사무차장은 한국에서 시행되는 세 개의 소득보장 체계에도 불구하고 각각 불완전하게 시행돼 장애인 상당수가 절대빈곤 혹은 상대빈곤에 처해 있으며, 최저임금 적용 제외 문제, 성별임금 격차, 비장애인 대비 낮은 임금수준에 대해 비판했다. 콜롬비아에서는 안드레아 파딜야 교수가 패널리스트로 참가하여 낮은 공교육 이수율에 따른 국민 전반의 사회경제적 지위 하향평준화 문제, 법 미이행, 신뢰도 낮은 통계 문제 등을 지적했다. 스리랑카에서 온 라산티 아타나야크 연구원은 전쟁으로 인한 높은 장애 출현, 그리고 국제기구 지원사업의 의존현황과 문제점에 대해 논했다.
이렇게 구성된 네 개 질문은, 뉴욕에 오지 못했으나 연락을 지속하고 있던 장애인단체에도 공유되었다.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고,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통해 장애 통계가 구축된 국가와, 자국 내 장애 이슈화를 위해 세계 각국 장애인단체가 활용하는 자원과 전략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이드 이벤트를 통해 한국장애계의 행보와 전략 공유를 요구한 해외장애인단체들과 연락을 지속하면서 국제사회 내 한국장애계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UN 사이드 이벤트의 유산과 향후 과제
저녁시간대에 진행한 사이드 이벤트임에도 불구하고 참석인원은 16명이었다. 사이드 이벤트의 평균 참석인원이 12명인 것을 감안하면, 첫 시도치고 합격점인 셈이다. 또한 이른 귀국으로 연락처를 두고 간 장애인단체 활동가 및 정부 관계자가 사이드 이벤트의 자막통역 공유를 부탁하고, 본 프레임 논의 작업에 동참 의사를 밝힌 해외장애인단체 활동가 90명의 연락처를 확보하는 등의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국제무대에서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가 목소리 낼 기회를 제공했고, 정책과 현실의 괴리를 함께 체감하며 연대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빈곤해소 프레임을 통한 장애 이슈 주류화 논의는 현재 확보한 국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온라인상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온라인 플랫폼은 이메일을 통해 장애와 빈곤해소 프레임과 연관된 다양한 질문들을 발송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수렴 및 피드백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현재까지 버클리대학교 연구진, 유럽, 아프리카, 호주 등을 포함한 장애인 관련 10개 단체로부터 회신이 온 상태다. 그러나 본 연대를 강화하고 보다 실질적인 전략 공유의 파트너로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가까운 미래에 다시 사이드 이벤트를 개최하여 회동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원 확보를 통해 해외장애인단체의 참석을 보장하고 논의의 풀(pool)을 확장함으로써 빈곤해소 프레임을 통한 장애 이슈 주류화 전략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한국과 더불어 국제사회에서 장애인이 여성·아동과 대등하게 언급되어 국제인권 중심에 서는 주요 대상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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