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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줄타기 낙인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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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타기를 민속촌에서 본 적이 있다. 아슬아슬했다. 고수라지만 저 높이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부상을 입을 것이 분명하기에 보는 내내 주먹을 꼭 쥐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에도 종종 나오는 외줄타기는 사람이 오직 하나의 줄에서 앉거나 걷거나 뛰거나 하는 동안 무게로 인해 줄이 계속 흔들린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 수용은 이러한 줄타기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대체 장애인의 줄타기는 무엇의 무게 때문에 흔들리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장애가 낙인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당사자이건 비당사자이건 사람들이 장애를 수용하거나 인지하는 태도 속에서 낙인은 확인된다. 내 주변에는 심하지 않은, 아니 쉽게 인지되지 않는 손상(장애)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쪽 눈이 안보이는 사람, 한쪽 귀가 안 들리는 사람, 한쪽 팔 관절을 다친 사람……. 한 사람은 아직 학생이라서 장애판정을 받지 않았다. 판정을 받는 순간 그에게 쏟아질 불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취업도 쉽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편견을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니까 노동 효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 마음대로 부려먹었다간 비난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업주들은 장애인을 고용하기 꺼려한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스스로 장애를 수용하지 않고 밀쳐둔다. 최소한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한 때가 되면 장애판정을 고려해본다. 그런데 한국의 장애인복지제도가 워낙 부실한데다 2007년부터 시행된 장애등급제로 인해 앞서 말한 경증 장애는 이익도 없으니 고려대상이 아니다. 기껏해야 교통비 할인, 공공미술관 할인이 전부다.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사람들은 생존전략으로 장애를 수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이는 장애인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용관계가 아닌 사람들의 관계에서 장애는 어떻게 인지되고 수용되는가. 무엇을 장애라고 하고 무엇을 장애라고 하지 않는가. 시각장애를 예로 들여다보자. 시각장애에 대한 법적 정의는 나쁜 눈의 시력(교정시력 포함)이 0.02 이하이고 좋은 눈의 시력이 0.2 이하인 사람이거나 두 눈의 시야를 2분의 1 이상 잃은 사람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시력교정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또는 하지 않았다면 비슷한 시력이지만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로 시력을 보완한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지만 보완할 수단이 없는 사람은 장애인이다. 장애인복지법에서도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장애를 손상된 신체 또는 기능으로 한정하고 있지 않다. 손상을 장애로 체험하게 하는 사회가 장애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신체적 손상이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손상이 장애로 체험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같다.

달리 말하면 시력이 낮은 비장애인은 생활하기 위해서 도구(안경)에 의존하고 그 결과 비장애인으로 범주화된다. 이렇듯 장애는 고정되거나 개인의 특성이 아닌, 가변적인 개념이고 사회적인 개념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같은 이유로 특정한 사물(보조기구)이 장애보장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안경이나 콘택트렌즈 같은 시력보정기구는 장애인에 등록되면 보장구로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장애인보장기구가 아니다. 평상시 우리는 안경을 장애보장구로 보지 않는다. 보청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의수나 의족 같은 장애보장구는 다른 시각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장애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 탓이다. 시력이나 청력이 약해서 겪는 어려움과 손이 없어서 겪는 어려움의 차이를 위계화하고 있다. 지체장애인들이 의수족 없이 생활하기 힘든 것처럼 근시가 있는 사람들이 안경 없이 생활하기 힘든 것은 같은 데도 말이다.

고정된 낙인 속에 구성되는 정체성

눈에 보이는 장애가 아니라면, 장애를 숨길 수 있는 장애유형이라면 장애정체성을 숨기게 되는 것도 낙인효과 때문이다. 최근 만난 청각장애인은 어렸을 때 부모가 그에게 수화를 가르치지 않아 오랜 시간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수화를 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자녀의 다름 (청각의 상실), 장애를 알게 되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청각장애인의 신체기능 손상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므로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장애인이 있는 집안이라는 낙인을 받고 싶지 않아 부모는 자녀에게 수화를 가르치지 않았다. 양육을 잘못했다거나 혈통이 안 좋다는 비난과 편견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 부모의 행위, 장애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으로 인해 그의 장애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그는 청력의 손상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족관계·친구관계 등 사회적 관계로 인해 소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듯 장애정도, 장애상태는 의료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무엇이 장애이고 무엇이 장애가 아닌가는 사회(사회제도, 관행, 의식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언제나 흔들린다. 장애를 판단하는 기준은 유동적이며 장애인에 대한 낙인 속에서 장애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용하는 일은 개인이건 사회이건 간에 어렵다. 소수자의 정체성은 언제나 낙인의 걸림돌 속에서 주체에 의해 거부당하기 일쑤다. 장애인의 줄타기는 근본적인 것일 수 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나올 때까지 나는 여성성-여성의 몸에 대한 부정적 시선으로 내 몸이 불만족스러웠다. 집안 내력인 큰 가슴은 내게 골칫거리였다. 언제 형성되었는지 모르지만 가슴이 큰 여자는 백치미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육체파 여성들은 백치미를 발산했고 그러한 여성들은 주체성을 잃은 채 남성들에 의해 삶이 좌우되거나 이용당했던 것을 얼핏 느낀 탓이리라. 나는 그렇게 취급받기 싫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여성으로서의 몸(몸의 일부)을 부정했다. 여성정체성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페미니즘을 접하고서야 내 몸을 긍정하게 됐다.

그리고 입시 위주의 학교 교육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에 똑똑한 사람, 이성적인 사람에 더 가치를 두었던 것 같다. 백치가 지적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용어이듯 백치미는 장애인과 여성이라는 주체를 대상화하고 폄하하는 말이다.

이성은 근대 산업화와 자본주의체제 아래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판정 기준인양 취급되었다. 이성은 객관성, 법칙성을 특성으로 하는 합리적인 것으로 여긴다. 우리가 흔히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태도를 취하라거나 이성적이지 않다는 말이 비판과 비난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성-지적 능력이 제한적인 지적 장애인을 하대하는 태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백치미가 의미하는 폄하를 어렴풋 느꼈던 탓이다. 소수자에 대한 여러 낙인은 해당 정체성을 수용하기를 꺼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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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21일 열린 광화문 농성 3주년 행사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페연대와 굳건한 연대를 선포한 전국교직원노조, 정의당, 녹색당, 빈곤사회연대, 행동하는 성소수자연대 등 각 단체 대표와 깃발들이 모여 투쟁결의문을 발언하고 있다.

저항하고 연대하기

사실 사회적 약자들은 하나의 소수성만 있지 않다. 앞서 말한 대학생인 경증 장애가 있는 대학생은 미취업자, 다시 말해 고용관계에 진입해야 하는 계약의 을인 노동자가 돼야 하는 소수성이 있는 셈이다. 사회적 소수자(약자)는 힘의 관계에서 열세인 집단이라 할 때, 하나의 집단은 그 소수성으로 인해 다른 소수성을 끌어들이고 강화한다. 하나의 권리 박탈은 다른 권리의 박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해 노동시장 진입이 어렵고 (교육권의 박탈과 노동권의 박탈) 비싼 의료비로(의료접근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 그나마 있는 돈도 탕진하므로 장애인들은 가난해지기 쉽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장애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장애인들은 사회적 배제와 소외로 가난할 수밖에 없고 빈민이라는 소수성과 만난다. 빈곤여성, 빈곤장애인이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물론 모든 장애인이 빈곤하다는 것은 아니다. 빈곤과 조우할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소수자들의 연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최근 발호하고 성소수자혐오에 반대하는 운동에 장애인들이 함께 하고 있다. 단지 차별받고 있는 집단으로서 공감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장애를 만드는 구조와 기준을 문제 삼는 것처럼 성적 주류가 아닌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변태로 낙인 찍는 이성애중심의 사회질서를 문제 삼는 성소수자운동이기에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하는 정상성의 기준을 없애기 위해서는 저항과 연대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

작성자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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