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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와 국가, 그들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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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가면 행진입니다. 불법행진이니 갈 수 없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청와대에 의견서를 전달하려는 우리를 막아서는 경찰이 한 말이다. 의견서의 내용이 과격하거나 엄청난 주문을 담은 것도 아니었다. 국제인권기구가 권고한 대로 대통령이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인선절차를 마련해서 임명하라는 내용의 의견서였다. 게다가 기자회견이 시작될 무렵 정보과 형사에게 청와대 민원실로 3~4명이 의견서를 전달하러 갈 것이라고 이미 말해둔 터여서 경찰의 태도는 더 황당하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경찰이 나 혼자만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경찰은 왜 나를 지목했을까? 나와 함께 의견서를 전달하러 가기로 한 사람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권활동가였기 때문은 아닐까. 아마도 그가 비장애인이거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아닌 다른 장애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오래 전에 비장애인들이 경찰차를 타고 청와대 민원실에 갔던 일도 떠올랐고, 몇 년 전에 장애인권활동가들과 1시간을 싸우고선 겨우 민원실에 갔던 일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경찰차를 타고 갔을 때보다 휠체어 장애인들과 갔을 때 경찰이나 경호원이 더 많이 붙었던 게 생각났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손쉽게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건 비장애인이라고 판단한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의견서의 내용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내용이든 간에 경찰이 원하는 대로 통제가 가능한가에 따라 출입을 결정한다.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가 인권을 누릴 수 있으려면, 아니 정확히 말해 국가권력이 인권을 최소한 보장해주는 기준은 ‘국가의 통제’가 가능한가에 달렸다. 통제가 쉽지 않은, 정확히 말해 통제를 하려면 국가의 비용(인력, 돈)도 많이 들고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휠체어장애인에게는 아예 권리를 주지 않는 게 아닐까. 휠체어장애인을 태울 경찰차도 없는데다, 휠체어장애인의 속도는 비장애인인 경찰의 걸음보다 빨라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에게 휠체어장애인은 경찰력의 예측가능성을 넘을 수 있는 불확실한 존재들인 것이다. 갑자기 전동휠체어가 방향을 바꾸어 간다면 따라잡을 수 있을까 라고 경찰은 생각했을 것이다.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경찰들의 훈련이나 대응의 체계화와 관료화는 비장애인을 상대할 때로 주로 구성되었을 테니까.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규율과 훈련이 있었을지라도 그건 너무 비용(노동)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니 국가로선 이들의 권리를 아예 차단하는 게 편하다. 다시 말해 그냥 한번 장애인들에게 욕을 먹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맥도날드의 효율성

효율성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나니 스무 살에 처음 알바 하러 갔던 웬디스가 떠오른다. 지금은 별로 없는 햄버거 가게이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알바하겠다고 웬디스에 갔더니 교육을 받아야한다고 했다.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동영상을 30분간 보여줬다. 보는 내내 이걸 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는 일이 다 세분화되고 규격화되어 지켜야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음식점 알바가 뭐 이리 복잡해 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그에 비해 알바비는 형편없이 적었다.

이러한 패스트푸드공장의 체계를 만든 것은 맥도날드다. 이른바 맥도날드화라고 불릴 정도로 맥도날드는 조리와 서비스에 공장의 조립라인과 비슷한 생산 공정을 도입했다. 굽기 담당, 튀김 담당, 드레싱 담당 등 종업원을 전문화(세분화)하였고 음식과 서비스도 규격화했다. 예를 들어 굽기 담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서 가로세로 각각 6개씩의 패티를 구워내는 석쇠 위에 햄버거를 올려놓도록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첫 번째 두 줄은 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뒤집도록 지시를 받는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이런 세세한 지침은 실제 효율성을 높인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허투루’ 쓰는 시간이 1분도 안 되니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고 돈을 많이 벌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일을 하는 노동자는 숨 한번 마음 놓고 쉴 수 없다. 이렇게 생산에 합리적인 체계는 노동자(사람)에게는 비인간적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체계는 그를 사람이 아니라 기계로 만든다. 그러니 이러한 합리성과 효율성에는 ‘인간성’을 삭제하는 마력이 있는 셈이다.

이러한 합리성, 효율성이 우리에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편리하게 은행에 맡긴 돈을 찾을 수 있다는 ‘현금자동지급기’나 지하철 표를 구매하는 기계는 우리의 생활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지하철 표 지급기를 찾아 헤매거나 현금카드 충전을 제때 하지 않으면 충전보급소를 못 찾아 버스나 지하철을 놓치기도 한다. 기계가 사람의 동선을 지배한다. 현금자동지급기에서 에러가 나면 결국 은행 창구에 가서 직원을 만나 상담해야 한다. 그러나 창구 직원은 적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상담이라도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게 늘어난 셈이니 우리에게는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고용주(사용주)는 직원을 별로 두지 않아도 되는 ‘기업의 비용 절감’이라는 효율성을 준 것은 사실이다.

 

 통제와 효율성은 만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성과 효율성이 중심이 되어 장애인의 노동과 장애인의 삶을 부인해왔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구성원의 자격은 국가의 통제 가능 여부로 결정된다. 부천에 있는 맥도날드 역곡점에서 일하던 알바생이 서울 신촌점에서 열린 ‘맥도날드 불법행위 폭로’ 기자회견에 유니폼을 입고 참석했다는 이유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며 해고된 적이 있다. 근로기준법 제26조 해고 예고에 위반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해고했다. 점장은 통제를 따르지 않는 알바생이니 없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장애인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은 많다. 시설도 있고 편견도 있다. 무엇보다 대표적인 건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방법 중 국민기초생활법과 장애등급제일 것이다. 그 제도들은 의학적 판단으로 장애의 등급을 정하고 필요한 서비스를 정한다. 장애의 정의와 진단, 필요한 서비스의 공급이 의료적 진단에 맡겨져 있다. 장애인은 복지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한 분석과 조작의 대상이 되고 고유한 인격을 가진 인간성은 삭제된다. 장애인이 다양한 욕구와 일상생활을 하는 보통의 인간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의료의 관문을 통과해야하며 그렇게 그/녀의 삶은 전문가에 맡겨진다. 그 결과 장애는 단지 신체적 기능 ‘부족함’으로 해석되고 사회가 만든 장애(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사회가 굴러가도록 짰기에 발생한 장애)의 문제는 사라진다. 또한 의학적으로 장애 몇 급인 사람은 혼자서는 생활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주어 사실상 사회의 지원과 구조 개선을 할 국가의 의무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학의 관문으로 장애인을 일렬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성적으로만 줄 세워서 쉽게 통제하는 것과 비슷하다. 장애인은 더욱 쉽게 분류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노동능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스템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니 정확히 국가와 기업의 입장에서 매우 편리하고 효율적인 일이다. 장애인은 돈이 없어 다른 욕구를 실현하거나 다른 능력을 개발할 수도 없는 빈곤한 상태로 계속 있게 된다. 적자생존의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탈락되어 그냥 집이나 시설에만 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장애인은 무능력자이고 의존적인 존재라는 프레임의 근거로 사용되고 그건 애초의 잘못된 정의로 환원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야말로 악의 순환적 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저항하는 장애인이 있다면 그는 제거하면 된다. 낙인이나 벌금으로 그의 발을 꽁꽁 묶는다. 빈곤한 장애인에게는 벌금이 신체구금보다 무서운 일이다. 한 달에 40~50만원 되는 돈으로 살아가야하는 장애인에게 200만원 안팎의 벌금은 더 무섭다.

이렇듯 장애인을 통제하는 방식은 비장애인과 다르다. 장애인의 신체를 구속하려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장애인을 구속하려면 구금시설에 편의시설을 만들어야 하고 장애인지원서비스를 위한 인력도 만들어야 하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구금은 효율적인 통제수단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권활동가들이 노역을 결의하고 구치소에 들어갔으나 제대로 된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어 출소되는 아이러니한 일을 겪어야했다. 작년에도 90명에게 6,845만 원의 벌금이 선고돼 이에 항의하기 위해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노역을 결의하고 서울 구치소에 들어갔다. 화장실 등 장애인편의시설도 없고 활동보조서비스도 지원되지 않아 단식까지 해야 했다. 노역할 권리, 저항할 권리마저도 장애인에게 주지 않는다.

 

‘효율’을 흔들기

그럼에도 이러한 장애인권활동가들의 투쟁은 현 국가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다. 지금의 국가질서, 국가권력의 작동방식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벌금이 구금보다 가벼운 형벌이라는 공식은 깨진다. 휠체어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경찰력의 사용을 곤란하게 만드는 존재로 바뀐다. 의료는 치료가 목적인 행위가 아니라 현 질서(비장애인중심의 노동력을 쥐어짜는 질서)에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일 뿐임을 드러낸다. 이렇게 모든 기구-사물-낱말-행위의 의미가 조각난다. 효율적이라고 말했던 그들의 모든 행위와 제도들이 사실은 ‘그들에게만’ 효율적이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모든 것을 다시 바라봐야 하고 ‘제대로’ ‘인간답게’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에 균열을 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정치학자 존 홀러웨이가 말했듯이 투쟁하는 행위는 자본주의를 균열시키는 일이다. 다름의 공간들과 순간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특히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질서에서 장애인의 싸움은 지금의 질서와는 다른 공간과 순간을 만들고 있다. 효율의 이름으로 반복적으로 창출하는 국가권력의 통제와 효율의 제도화를 흔드는 셈이다. 그러하기에 장애인들의 싸움은 비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들,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해와 닿는다. 효율의 시계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한다. 효율의 시계가 멈출 때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작성자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gypsy7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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