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다 없다 그리고 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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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1주년이던 지난 4월 16일, 서울 광장에 전시된여러 조형물 중 하나에 누군가의 다짐이 모두의 약속으로 새겨져 있다.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스틸 엘리스>를 보면서 인간이란 존재와 관계 그리고 기억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영화는 언어학자인 주인공 엘리스가 희귀성 알츠하이머에 걸리면서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고통, 생활의 변화와 두려움을 그렸다. 그녀는 가르치는 일도, 가까운 사람도 점점 잊어버린다. 심지어 화장실을 못 찾아 옷에 소변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그녀가 기억을 잃고 그 때문에 생활이 변하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엘리스이다. 인간 존재란 개인의 특성으로‘만’ 그/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관계 맺은 사람들, 그/녀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 영화였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나는 존재하게 되는 거니까.
기억으로 사회적 시간을 얻다
세월호 참사를 거치면서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잊지 않겠다’거나 ‘기억하겠다’다. 뇌의 생물학적 시간적 한계가 있으니 잊지 않으려면 힘이 들어간다.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그만큼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요, 감정과 신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떤 경우는 잊으려 해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이나 황홀했던 경험들도 있다. 세월호 참사 같은 경우는 둘 다 해당할 것이다. 304명이 그냥 속절없이 수장된 참극이기에 도저히 잊을 수가 없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참사를 잊어왔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는 신념과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시는 세월호 참사와 같이 무심하게 생명이 죽어가도록 방치하지 않겠다, 국가가 움직이도록 노력하겠다, 생명의 존엄성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겠다는 약속이다.
또한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건 희생자들의 소멸된 생물학적 시간을 사회적 시간으로 소생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살아 숨쉬었다는 기억을 바탕으로,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약속이라는 형식으로 생명을 얻는다. 그렇게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 속에 살아 돌아오는 일이 기억한다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죽음과 삶이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하밀 할아버지가 자신의 좋은 기억력에 대해 감사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육십 년 전쯤, 내가 젊었던 시절에 말이야, 한 처녀를 만났단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여덟 달 만에 끝장이 났어. 그런데 육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거든. 그때 나는 그 처녀에게 평생 잊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어.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단다. 사실, 가끔씩 걱정이 됐지.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 많았고, 더구나 기억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는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니, 보잘 것 없는 인간인 내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었겠니? 그런데 이제 안심이구나. 나는 죽을 때까지 자밀라를 잊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밀 할아버지처럼 우리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장애인을 비참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도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마음을 잊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고(故) 우동민, 고(故) 김주영, 고(故) 송국현… 그들 앞에 했던 약속들을 떠올려본다.
이름으로 기억되지 못한 장애학생
한편 기억은 관계 맺음에 대한 반영이다. 그/녀가 어떻게 타인과 세상과 관계를 맺었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한다. 그/녀와 친할 때, 또는 싸웠을 때가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지가 드러난다. 또한 기억의 내용에서 그/녀를 또는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냐’가 드러난다. 학교에서 뛰어나게 운동을 잘하거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독특한 행동이 인상 깊게 남는 경우도 있다. 사실 기억은 그/녀의 무엇(삶, 특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상 깊게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기억은 창이기도 하고 거울이기도 하다. 연결을 보여주면서도 그 창의 색과 두께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을 남기니까. 그래서 차별적인 의식이나 시선은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기억에도 영향을 미친다.
얼마 전에 들은 장애부모의 경험이 그랬다. 아이가 학교에서 폭력을 당해 자초지종을 들으러 담임선생님과 얘기했는데 그 선생님은 비장애인이었던 가해학생들의 이름은 다 기억하는데 피해학생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장애학생으로만 불렀다고 했다. 비장애인이었던 선생님에게는 그 학생은 그저 ‘장애인’으로만 기억됐다. 아마도 그 선생님은 그의 이름 등에는 관심이 없었나 보다. 그 학생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알았을까 하는 의구심은 사치 같은 질문인지 모른다. 이름도 기억되지 못한 채, 고유의 개성이 삭제된 채 학교에서 관계를 맺고 있을, 아니 왜곡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을 장애학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마저도 부담되는 거추장스런 존재가 아니었나 싶어 씁쓸하다.
언제나 주류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존재감 없이 투명 인간으로 살아왔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동성애자나 양성애자가 그렇듯,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은 존재감이 없다. 과거에는 노골적으로 장애인을 보이지 않게 하는 정책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장애인정책이 조금 나왔지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관계 맺음이 이루어진 건 아니다. 감정과 생각이 있는 고유한 존재이기보다는 그저 장애인일 뿐이다. 장애학생을 이름으로 기억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이게 아니었을까. 그가 오롯한 사회적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잘 가, 오렌지가 좋아
생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인권활동가다. 그의 삶과 죽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의 시간을 연장하고 싶다. 그는 2008년도부터 인권활동을 시작했다. 신부전으로 몸이 아팠으나 투쟁 현장을 찍으며 함께 했다. 12세 때부터 투석을 받았다고 하니 꽤 오랜 시간 힘겨운 삶을 살았을 게다. 그런데도 그는 현장에서 정말 밝았다. 마치 고(故) 우동민 열사처럼 잘 웃었다.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려고 했을 때도 나와 함께 인권침해감시단 활동을 했었고, 얼마 전 세월호 집회에서도 인권침해감시단 활동을 함께 했다. 그의 이름은 오렌지가 좋아(엄명환)이다.
아직도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밀양에서 경찰이 할머니들을 모욕적으로 강압적으로 끌어내릴 때 경찰을 향해 소리 쳤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5월 1일과 2일 세월호 집회에서 인권침해 감시활동을 하면서 맞은 최루액 섞인 물대포 때문에 빨갛게 부어오른 팔뚝을 보여주던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도 우리는 그에게 빨리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으라고 권하면서, 그의 건강보다는 경찰의 폭력성을 기록해야 한다는 무심한 말만 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함께 활동했던 일이 전부다. 난 그가 아파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그래서 야학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그의 가난도, 그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된 무심한 사람이다. 그에 대해 무엇을 알았을까 하는 미안함에, 그의 죽음을 더 믿기 싫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발인 때 그의 이름 앞에 붙여진 ‘고인’이라는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함께 삶을 나눴다는 것, 그와 함께 차별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꿈꿨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기억하리라.
잘 가라, 오렌지. 너와의 활동을, 너의 삶을, 너의 꿈을, 우리의 꿈을 기억할게.
▲ 고 엄명환 님의 생전 모습. 그는 다산인권센터와 삼성반도체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 활동하면서 <골목잡지 사이다>와 현장에서 사진을 계속 찍었고 '오렌지가 좋아'의 세월호 수원시민공동행동 기록전",'또하나의 가족을 만나다-반올림 사진전' 등의 전시회도 했다. (사진 홍진훤 작가) |
글·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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