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금 빌려주는 장발장은행
본문
은촛대 대신 대출을
경미한 범죄에도 교도소행, 벌금제도 개선 시급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은행이 문을 열었다. 은행이지만 돈도 없이 시작했고 이자놀이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출은 한다. 대출은 하지만 아무나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가난해서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야 할 처지에 놓인 현대판 장발장들이어야 한다. 그런 장발장은행이 문을 연지 어느덧 백일이 지났다. 백일동안 155명의 장발장들이 도움을 받았다. 그새 대출금을 완납한 장발장도 나왔다. 이 은행의 마지막 목표는 더 이상 대출해 줄 일이 없어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다. 교도소에 가는 대신 돈으로 ‘자유’를 사도록 돕는 장발장은행을 찾았다.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장발장은행
벌금형은 비교적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피고에게 선고되는 형벌이다. 돈을 빼앗음으로써 범죄자에게 고통을 주려는 의도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몇 십만원에서 몇 백만원 때문에 교도소에 가는 것이 현실이다. 가혹한 형벌일 뿐이다.
매년 4만명이 넘는 사람이 교도소에 가고 있다. 그 중엔 장애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들의 죄질이 나쁘거나 위험해서가 아니다. 단지 벌금의 미납으로 신체를 구금하고 사회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이다. 국가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슬프고, 공평하지 않다.
인권연대는 벌금제 폐해를 바로 잡기 위해 <43,199>캠페인을 전개했다. 43,199는 2009년도에 벌금을 납부하지 못하여 교도소에 수감된 인원의 숫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돈을 못내서 감옥을 가는 만큼 사회적 영향력도 없고 발언권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장발장은행 대표)은 “이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 거듭 호소했지만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법과 제도를 고쳐야 하지만 일단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습니다”라며 “당장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궁여지책으로 은행을 만들었습니다”라고 밝혔다.
하루에 수 백 건의 전화, 뜨거운 호응
장발장은행은 인권연대가 설립한 새로운 개념의 은행이다. 말이 은행일 뿐 실제 여수신업무(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빌려주거나 외부로 부터 자금을 빌려오는 업무)를 하지는 않는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다음, 생계 곤란 등의 이유로 벌금을 내지 못해서 교도소에 갇혀 강제노역을 해야 할 위기에 놓인 가난한 시민들이 대상이다. 벌금미납으로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미성년자, 기초생활보장법 상 수급권자와 차상위 계층에게 벌금을 빌려줌으로써 불필요하고도 무의미한 구금의 고통을 겪지 않도록 돕는다.
장발장은행은 개인이나 단체의 기부로 운영되는데 지난 2월 25일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때 일정 액수의 후원금이 모이면 곧바로 대출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이후 이틀 만에 2천만원이 넘는 성금이 모였고 3월 2일부터 대출관련 업무가 시작됐다. 대출이 접수되면 2~3주에 한번씩 장발장운영위원회를 열어 대출심사를 한다. 성폭행이나 음주운전 등 사회에서 지탄받을 만한 범죄는 심사를 통과하기 어렵다. 대출심사를 통과하게 되면 장발장은행은 최대 300만원까지 대출해준다. 6개월 거치, 1년간 균등분할 상환방식으로 무담보, 무이자 대출이다.
1백일 좀 넘은 6월 10일, 3억3천만원의 후원금이 모였고 1천35명이 전화로 신청한 상태다. 오국장은 “후원해주시는 분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죠. 물론 그것보다 돈 빌려 달라는 전화는 훨씬 더 뜨거웠습니다.(웃음) 하루에 수 백 통의 문의전화가 옵니다”라며 “저희가 1백일이 조금 넘었고 실제로 접수할 땐 내야 할 서류가 많습니다. 번거로운 데도 현재 1천명이 넘는 사람이 신청한 상태”라며 1백일 동안 1백55명을 도왔다고 전했다.
▲ 2~3주에 한번씩 장발장운영위원회를 열어 대출심사를 한다. |
현실에 널려있는 범죄들
김 모씨(23세)는 친구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벌금이 나왔다. 그에겐 벌금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부모와 친지들이 대신 내주지도 못했다. 결국 이 청년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강력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그를 가족과 사회로부터 분리해 교도소에 가두어버리는 처벌만이 능사는 아닌데도 말이다.
법학 교과서에는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깨뜨린, 특별히 해로운 행위를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평범한 시민들이 의도치 않게 범죄자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담배꽁초 버리기, 길거리에 침 뱉기, 구걸행위, 심지어 시끄러운 소리로 손님 모으기도 경범죄 위반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자동차 운전자의 경우 교통사고 뺑소니나 음주운전만 범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호위반 운전자, 가파른 비탈길의 내리막에서 서행하지 않은 운전자, 혼잡한 교차로에서 일시 정지 하지 않은 운전자도 모두 형사처벌 대상이다. 보행자의 경우 신호등을 지키지 않아도, 무단횡단을 해도, 차도 보행을 해도 처벌 대상이다. 예비군 동원 훈련에 응하지 않아도 범죄자가 된다. 생각보다 범죄와 형사 처벌 또한 가까운 곳에 있다.
살인과 같이 누구나 명확하게 인식하는 범죄가 있지만 형법상에 범죄라고 돼 있어도 수긍하기 어려운 것도 많다. 범죄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벌금제의 개선
장발장은행은 근본적으로 법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벌금이 남발되고 많은 국민들이 형사처벌 될 수 있는 시스템 자체를 바로잡아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벌금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
첫째로 분납, 연납제도를 도입한다. 벌금을 선고받으면 30일 이내에 목돈을 일시불로 완납해야 한다. 이것을 형편에 따라서 나눠 내게 하자는 것이 분납제도다. 연납은 낼 수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몇 달이라도 납부를 연기하는 것이다.
둘째로 벌금형에도 집행유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집행유예란 형의 집행을 일정한 기간 동안 유예하고 이 기간 동안 다른 범죄를 또 범하지 않는다면 선고된 형벌을 무효로 하는 제도이다. 자유형(징역형)이 벌금형보다 무거운 형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벌금형에도 유예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셋째로 총액벌금제에서 일수벌금제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피고인의 재산 상태에 관계없이 벌금이 부과되는 총액벌금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일수벌금제는 피고인의 자력에 맞는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즉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내듯이 벌금을 소득이나 재산에 따라공평하게 내는 것이다. 이는 총액벌금제가 갖는 실질적인 불평등을 완화하고, 벌금의 납부율을 높여 노역장 유치의 집행을 그만큼 감소시킬 것이다.
넷째로 노역장 유치제도 자체의 집행을 보완하는 것이다. 벌금을 안내면 노역장에서 강제노역을 해야만 한다. 대개는 6개월 미만의 단기 자유형(징역형)이지만 형벌이 의도한 개선효과는 거의 없다. 오히려 다른 죄수들로부터 범죄학습만 받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이럴 바엔 사회에서 노역을 하는 것이다. 교도소에 가면 가족관계가 단절되고 생업을 잃게 되며 전과자만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거리 청소 등 지역사회에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는 사회에서의 노역으로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발장은행은 현재 네 가지 개선안 외에 그 어떤 개선안도 추진하거나 도입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형 집행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부족한 건 관심뿐이다. 오국장은 “우리 사회는 돈이 없는 것만으로도 차별을 받습니다. 심지어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가야 되는 건 모욕입니다.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이런 것들로 인한 차별도 견디기 어려운데 이러한 모욕은 헌법 제 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명문 규정을 명확하게 어긴 겁니다”라고 지적한다. 소리 소문 없이 차별당하고 인간적 모욕을 일상적으로 경험해야 되는 가난한 시민들이 돈 때문에 감옥에 안갔으면 하는 취지라며 그런 안타까움과 그런 바람, 그런 마음을 모아서 장발장 은행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회로 간 장발장
장발장은행은 출범 1백일을 맞아 지난 6월 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국회의원과 시민들에게 벌금제 개혁 법안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국회로 간 장발장’이란 행사를 열었다.
이에 탄력받아 6월 8일에는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이 현대판 ‘장발장’들을 돕기 위한 ‘형법 일부개정 법률안(일명 장발장법)’을 대표발의했다. 개정 취지에 공감한 41명의 여·야 의원들도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홍 의원은 “현행 형법 제62조 제1항에 명시된 집행유예의 기준을 ‘징역, 금고의 형’에서 ‘징역, 금고 또는 벌금의 형’으로 확대함으로써 벌금형 역시 집행유예가 가능하도록 개정안을 작성했다”며 “피고인의 경제적 능력을 감안해 벌금 전액을 일시에 납입하기 어렵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그 납입 기한을 연장하거나 분할 납입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법원과 검사는 벌금형이 예상되는 피고인에게 분할납입, 납입기한 연장, 벌금형을 대신한 사회봉사가 가능함을 고지해야 하는 내용도 개정안에 포함되어 있다.
오국장은 “국가도 교도소 운영으로 인한 비용을 절감하는 겁니다. 낮은 수준이지만 그렇게만 법이 바뀌어도 저희 생각에는 1만명, 2만명은 금방 줄어들 수 있습니다”라며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전했다.
독일은 ‘수감 대신 땀 흘리기-대체 자유형 대신 사회봉사 프로젝트’를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무보수지만 공익적인 봉사활동을 통해 교도소에 구금되는 대신 땀으로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독일 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일수벌금제를 채택하고 있다. 소득이나 범죄의 정도에 따라 벌금형에서만 36만 배의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의도치 않게 범죄를 저질렀으나 형편이 안되어 전과자로 전락할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비인도적 처사만이 방법은 분명 아니다.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주교가 은촛대를 얹어주어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처럼 장발장은행은 대출이란 은촛대로 시대가 만든 장발장들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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