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언어법안의 발의와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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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법 제정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본격적’이라는 말은 법안 발의를 위한 활동이 아닌 실질적인 법제정 활동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수화법 제정의 본격적인 활동은 지난 3월 2일 열렸던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국회 상임위)의 수화 입법 공청회일 것이다.
현재 국회에는 4개의 수화관련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수화관련 법안은 2013년 8월 20일 이상민 새천년민주연합 의원의 「한국수화언어기본법안」을 시작으로 발의됐다. 뒤이어 같은 해 10월 8일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의 「수화기본법안」, 10월 22일 이에리사 새누리당 의원의 「한국수어법안」이 각각 발의됐다. 11월 26일에는 정진후 정의당 의원의 「수화언어및농문화기본법안」이 발의됐다.
이러한 법안들이 공청회를 기점으로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진행된 공청회는 농인들이 요구해 왔던 입법 절차라는 점과 수화법 제정을 공론화했다는데 의의가 크다. 더욱이 그동안 내재돼 있던 4개의 법안들 간의 쟁점이 공청회를 통해 표면으로 드러났다.
다만, 공청회를 통하여 나타난 이견을 ‘쟁점’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기는 쉽지 않다. 공청회 과정에 노출된 여러 가지 문제들은 법안간의 ‘쟁점’이라기보다는 ‘제기된 의견’ 또는 ‘당위성에 대한 주장’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러한 내용들을 쟁점으로 묶는 이유는 향후 법안의 제정 과정에서 법안 간의 대립 양상이 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쟁점으로는 첫째, 언어로서 수화의 지위, 둘째, 농인 가족 지원조항과 농문화 지원근거 마련, 셋째, 비장애인 아동의 수화교육 실시근거 마련, 넷째, 수화 관련 용어의 정의, 다섯째, 농인들이 조기에 수화교육을 받을 권리 명시, 여섯째, 수화연구소 설치, 일곱째, 농인의 권리보장 근거의 구체적 명시 등이다.
특히 발의된 4개의 법안 가운데 한국농아인협회(이하 농아인협회)가 중심이 된 이에리사 의원의 발의안(이하 이에리사안)과 장애인정보문화누리(이하 장애누리)가 중심이 된 정진후 의원 발의안(이하 정진후안)이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를 볼 때 향후 두 개의 법안을 중심으로 쟁점에 대한 공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에리사안과 정진후안을 중심으로 수화법안의 쟁점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법안의 쟁점을 다루기 앞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농아인협회가 2003년 수화 관련 법안을 발의하게 된 계기는 수화에 대한 차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공론화에서 비롯됐다. 이를 바탕으로 2008년에는 법안 초안 작업 등의 활동도 한 바 있었다. 하지만 국회에 발의된 법안의 직접적인 계기는 영화 <도가니>였다. 영화 <도가니>를 계기로 2011년 장애누리는 농인의 교육을 비롯한 의사소통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을 토대로 장애누리를 중심으로 2012년 ‘수화언어권공대위(약칭)’가 구성되었으며, 농아인협회도 자극을 받아 ‘수어법연대(약칭)’를 공식화해 다시 입법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두 단체의 운동방식은 달랐다. 농아인협회는 법안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의견에 보조를 맞추는 양상을 보였다. 때문에 이에리사안으로 발의된 법안은 포괄적인 내용이 많고, 수화를 중심으로 구성해 다소 보수적이다. 반면 장애누리는 법안 발의과정에 집회를 여는 등 현장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발의된 정진후안은 법안 내용도 구체적이고, 비장애인 학교에도 수화교육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만, 지면의 한계로 현재 드러나고 있는 쟁점을 모두 다루기는 어렵기 때문에 몇 개의 쟁점만 간추려보고자 한다. 첫째, 언어로서 수화에 대한 지위를 부여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에리사안은 “한국수어는 국어와 다른 형식의 농인 고유 언어”라고 정의하며 음성언어와 차별성을 두면서 독자적인 언어의 자격을 명시하고 있다. 반면 정진후안은 “수화언어는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갖춘 언어”라고 명시한다.
수화의 지위를 어디까지 둘 것인가는 중요하다. 이에리사안처럼 수화를 농인들의 공용어로 한정해 규정하면 비장애인들이 수화를 ‘농인들만 사용하는 특수한 언어’로 인식할 수 있다. 즉,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법제정 취지와 다르게 법률 내용이 격하될 우려가 있다. 수화법 제정 취지가 수화를 언어로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수화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억압과 핍박을 받아온 농인들의 현실 개선에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제정 과정에서 수화의 지위를 어떻게 가져갈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둘째, 농인 가족 지원과 농문화 지원조항을 명시하는 문제이다. 대다수의 농인들이 의사소통의 제약으로 가정에서 차별을 받는다. 따라서 제정하는 법안에는 이러한 문제가 반드시 거론돼야 한다. 또한 언어로서 수화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농문화의 내용도 강조돼야 한다. 이에리사안에서는 이러한 내용 규정이 취약하다. 하지만 정진후안의 경우는 두 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법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해당 안의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농인 가족 지원에 대한 내용 규정은 많은 국회의원들이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농문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둘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는 의견도 있다. 문화의 밑바탕은 생활양식이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언어를 바탕으로 하기도 한다. 혹은 생활양식을 표현하는 양식 가운데 하나가 언어이기도 하다. 언어와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지만 이것만으로 문화를 전부 드러낼 수는 없다. 즉, 한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은 언어만으로 부족하다. 정부가 국어에 대한 정책과 별도로 문화예술 정책을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농문화에 대한 내용 규정은 국회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셋째, 비장애인 아동을 대상으로 수화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만드는 것이다. 이에리사안에도 수화 교육에 대한 내용은 있다. 하지만 교육 대상이 아동인지 성인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내용이 대다수이다. 반면 정진후안의 경우 “「초·중등교육법」 제23조에 따라 교육과정에 수화언어 과목을 도입해야 한다”며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수화법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법안에서 ‘수화’를 한국 내의 언어로서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정규 초·중등 교육과정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이는 사회 통합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따라서 법안을 제정할 때 깊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넷째, 수화 용어사용의 문제다. 법안의 명칭으로 이에리사안은 「한국수어법」을, 정진후안은 「수화언어및농문화기본법」을 사용하고 있다. 법안의 명칭을 놓고 볼 때 이에리사안에서는 ‘수어’로, 장진후안에서는 ‘수화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수어’라는 용어는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낯선 용어다. 그럼에도 농아인협회는 ‘수화(手話)’의 ‘화(話)’가 “언어의 의미보다는 회화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수어’를 주장하고 있다. 즉, 수화의 언어적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언어의 의미를 가진 ‘어(語)’를 사용하는 ‘수어(手語)’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인 가운데는 여전히 ‘수화’라는 용어 사용이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수화’는 우리 사회에서 100년 넘게 사용해왔던 용어이고 비장애인들에게도 익숙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용어에 대한 지지의 측면에서 ‘수어’에 대한 욕구가 약간 높을 뿐 의견은 팽팽한 상태이다. 다행인 것은 공청회 과정에서 ‘수화언어’라는 중재안이 나왔다는 것이다. 앞으로 법안 제정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합의가 필요한 내용이다.
지난 3월 19일 열린 농아인협회 총회에서 새로운 인물이 회장으로 선출됐다. 신임회장은 농아인협회가 지지하는 현재의 수화법안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 향후 농아인협회의 입장이 수정될 가능성이 높다. 쟁점사안에 대한 농아인협회 입장이 바뀌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제정되는 법이 차별받는 농인들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농인들이 바라는 바이고, 법을 만들려는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즉, 앞으로의 가장 큰 쟁점은 농인들의 언어로서 수화의 독자성 못지 않게 농인의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내용 구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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