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일을 잘 보는 게 가능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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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니까 기본적으로 생리 현상은 비켜갈 수 없다. 그건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화장실을 만나면 애써 배변을 미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술집에 있는 남녀공용 화장실은 너무 불편하다. 내가 깔끔해서라거나 유난을 떨어서가 아니다. 많은 비장애인 남성들이 서서 소변을 보는 과정에서 변기에 튀었을 그것이 싫다. 그래서 변기에 몸을 대지 않는 신공을 부리며 용무를 마칠 때도 있다. 내가 자라온 삶의 방식, 내가 배워온 편견, 사람들이 비장애인 여성을대하는 태도 등이 내면화된 탓이다.
그래서 나는 남녀가 구분된 화장실이 좋다. 그런데 8년 전쯤 트랜스젠더 활동가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수술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는 성별로 나눠진 화장실 중 어디를 이용하더라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한데다 수술을 하지 않은 비수술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성별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변태 취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실은 성별로 구분하는 화장실이 아니라 1인 화장실로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마음 편히 볼일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사실 간성(신체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있거나, 어느 한쪽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신체적 조건을 가진 이들)이거나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 등도 있으니 두 개의 성별로 이분화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 (호주에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을 공식 인정해서 출생증명서의 성별란에 제3의 성을 기록하도록 했다고 한다.) 제3의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남녀로만 구분된 화장실이 불편할 수 있다. 난 아직도 남녀공용화장실이 불편한지라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같아, 그게 낫겠다고 맞장구쳤다.
그리고 얼마 후 장애여성 활동가를 만났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장애인화장실은 성별 구분 없이 하나로 되어있다며, 장애인은 여성으로도 보지 않는 것 같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장애인은 장애인일 뿐 그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회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례다. 난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한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떻게 화장실을 구분해야 옳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비장애인, 비트랜스젠더인 나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장애인이 있다면 그/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성별로 구분된 화장실과 성별 구분 없는 화장실 중 무엇을 선택할까?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트랜스젠더장애인이 없어 물어보지는 못했다. 물론 트랜스젠더장애인의 경우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기 더 어려울 것이다. 영국에서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시각장애인 에밀리에 대해 유명 칼럼니스트가 “앞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자기 성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라고 비꼬는 글을 기고할 정도로 편견은 세계 어디서나 지독하다.
아마도 트랜스젠더장애인은 당장 그/그녀에게 쏟아지는 차별과 편견의 무게에 따라 선택하지 않을까. 그/그녀가 장애인으로서 겪는 차별의 시선이 많다면 성이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 화장실을 원하지 않을까. 아니면 그/그녀가 존중받고 싶은 정체성(장애인, 성별정체성)에 따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장애인은 성별도 없는 존재, 그/그녀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제3의 성인지, 트랜스젠더인지를 보지 않으려는 사회 질서와 문화이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들을 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는 것 또한 문제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차별을 느끼는 맥락을 짚고 주체의 욕구를 짚어야 문제도, 해법도 보일 것이다.
차별 없이 볼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 체계는 무엇일까. 사실 문제는 화장실로 표현되는 장애인과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다. 그/그녀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더라도 존중받고 있음을, 삭제되지 않은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으면 된다. 장애인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아직 없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차별의 경험이 ‘같은 장소’에서 장애인과 트랜스젠더에게 ‘서로 다르게’ 다가오는 현실을 나누는 장이 많아져야 한다. 당분간은 성별로 구분된 장애인화장실과 구분 없는 1인용 화장실이 공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나의 편견이 포함된 구분법이다. 장애인을 휠체어 이용 장애인으로 한정하고 이야기를 풀었으니 이 주제는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에게 관련이 적은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휠체어 장애여성과 트랜스젠더만이 아니라 다양한 장애 유형의 장애인들과 여러 성소수자들을 떠올리는 정도가 우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몇 년 전에 서울의 모 인권단체 사무실에서 1인용 화장실이 등장했다. 성별 구분이 없었다. 어찌 보면 남녀공용 화장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난 거기서 술집이나 음식점에 있는 남녀공용화장실을 만날 때 느끼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곳을 이용하는 남성들이 앉아서 용변을 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성도 앉아서 용변을 본다는 것이 상징하는 것. 즉 남성성의 과잉이 아닌, 누그러진 마초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편안함을 느낀 이유는 그곳에서는 근본적으로 성차별이 덜할 것이라는 신뢰가 내 마음에 깔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그 사회가 어떤 인식과 문화를 갖고 있냐에 따라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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