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단체들 ● ②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본문
단체사진을 찍겠다고 했더니, 실내의 모든 이들이 단숨에 한데 모여 제각기 자세를 잡는다. 플래시 광량을 조절하기 위해 연습으로 몇 장 찍겠다고 하니까,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모두의 동작이 일시에 바뀐다. 손가락으로 ‘브이(V)’를 했다가 뺨에 손가락 하나를 댔다가, 구호를 외치듯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입술 위로 손가락을 올리는 등 일사불란하게 전체의 모습이 하나돼 움직인다. 이건 보통의 팀워크가 아님을 반증한다. 각종 집회와 행사에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걸로 유명한, 가장 열성적인 활동으로 더 널리 알려진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났다. 창립 10주년, 익숙한 얼굴들로 가득한 그 내부를 들여다본다.
너와 내가 아닌, 동지의 마음으로
4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왼쪽 복도 방향에서 여러 명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를 따라가면, 항상 열려 있는 문 앞에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올 때마다 똑같다. 심각한 대화를 진지하게 나눈 뒤에도 웃음소리, 서로를 부르는 음성 뒤에도 웃음소리, 전화를 걸면서도 웃음소리, 도대체 무엇 때문에 웃을 일이 이렇게 많은 걸까. 아마도 센터 소장인 최진영 씨의 얼굴이 항상 스마일 그 자체라서, 모두에게 웃음 바이러스가 퍼진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성동센터)는 지난 2001년에 조직돼 활동을 시작했지만, 정식으로 센터를 개소한 건 2005년 6월이다. 그 해 8월 ‘지역사회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기반 조성을 위한 세미나’를 시작으로 센터의 외연을 넓혀가면서,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활동을 펼치는 센터로 자리매김하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
중증장애인의 인권회복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립생활의 이념과 철학에 입각한 지역사회 기반조성 및 구축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와 수용이 아니라, 지역에서의 통합과 남녀평등 촉진 및 사회참여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각종 자조모임이 활성화돼 있고, 부모회의 활동 또한 가장 활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체험홈 운영과 주거환경 개선사업, 권익옹호와 동료상담, 자립생활 이념보급과 자립생활 기술교육에 특히 중점을 두며, 14명의 상임활동가들이 오늘도 최선을 다하며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가는 중이다.
잘못된 제도가 사람을 죽였다!
성동센터가 전국 차원의 집회와 행사에서 항상 중심에 자리하는 이유는, 센터가 걸어오고 겪어야 했던 특수한 환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 성동구 도선동에 위치한 성동센터와 불과 1km 떨어진 곳에서 故 김주영 씨가 세상을 떠났고, 고작 8백 미터밖에 안 되는 자리에서 故 송국현 씨 또한 탈시설 6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다. 모두 성동센터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함께 활동하던 얼굴들이었기에, 센터 가족들이 간직해야 할 여운은 더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연말 갑자기 떠나간 故 박홍구 씨 역시 센터와 지근거리에서 영원의 이별을 맞이했기에, 지역 사회 안의 장애당사자들을 마주대하는 센터 가족들의 심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모두 활동보조서비스만 제대로 운영됐다면 막을 수 있었던 화재로 인한 참변이었기에, 체험홈과 활동보조서비스를 관장해 온 성동센터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고 있다. 지나온 10년을 되돌아보고 다가오는 10년을 준비하는 성동센터의 오늘을 격려와 함께 응원하며, 센터 가족들의 생생한 음성으로 센터 내부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보기로 한다.
● 최진영 성동센터 소장
▲ 최진영 성동센터 소장 |
Q. 실제 현장에서 가장 많이 뵙는 분이 소장님인 것 같다. 언제부터 성동센터 소장 업무를 맡았나
최진영 소장(이하 소장) : 2010년 1월부터 했으니까, 햇수로는 6년차가 된다.
Q. 소장으로서 성동센터가 갖는 가장 큰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소장 : 강점은 많다. 그 중 한 가지만 언급하라면, 지역 내에서 다양한 모임 활동이 매우 활성화돼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지역의 장애당사자들이 자주 모여 다양한 활동을 한다. 생활하면서 불편한 점, 개선해야 될 점을 토론하고 실제 활동으로 개선시킨다. 부모님들의 모임도 아주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Q. 소장으로서 센터의 활동가들에게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면
소장 : 다른 데도 다들 열심히 하겠지만, 우리는 운동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사업을 열심히 하는 만큼 현장의 운동도 함께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실천 없이 업무만 잘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항상 현장 참여를 강조하는 편이다.
Q. 성동센터가 구성원 간의 유기적인 단결이 가장 잘되는 팀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보는가
소장 : 누가 시켜서 하지 않는다. 그건 억지로 하는 것밖에 안 된다. 우린 운동과 사업 모두 자발적으로 하는 분위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 모두가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그 틀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Q. 센터가 올해 가장 주안점을 두는 사업은 무엇인가
소장 : 올해는 성동센터가 1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앞으로 10년의 활동이 어떻게 진행돼야 하는지를 깊게 생각해 보는, 더 높은 지점으로 발돋움하는 그런 한 해를 만들 계획이다. 그리고 소장으로서는 남들이 하기 어려운 영역을 더 잘할 수 있는 성동센터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Q.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현실의 벽과는 여전히 엄청난 간극이 존재할 텐데, 어떤 면이 가장 아쉽고 어떤 면에 역량을 집중시키고자 하는가
소장 : 중증장애인들이 보다 살기 좋은 환경과 제도로 바꾸기 위해, 우린 우리 나름의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 하지만 차별이 아니라 차이로 관점을 변화시키는 데는 여전히 너무나 많은 게 부족하다. 자립생활이 허울 좋은 생색내기용으로 지원되는 게 아니라, 중증장애인도 원하는 삶을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센터의 모든 활동가들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장애 비장애를 떠나 모든 분들이 마음을 한데 모아주는 우리 지역사회를 기원하고 싶다.
▲ 정동은 성동센터 사무국장 |
● 정동은 성동센터 사무국장
Q. 성동센터가 다른 센터들과 다른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동은 사무국장(이하 국장) : 성동센터는 자조모임이 굉장히 활성화돼 있다. 당사자 모임과 부모님 모임, 그리고 활동보조를 하는 분들의 모임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발달장애인도 성인기와 학령기의 자조모임을 각각 결성하는 건 다른 센터들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Q. 성동구에 장애당사자는 얼마나 거주하고, 센터와 연결돼 활동하는 분들은 얼마나 되는가
국장 : 관내에 등록된 장애인은 1만2천 명 정도 되고, 센터와 직접 연결되며 지내시는 분들은 2백 명 정도 된다. 그런데 성동구 내 장애인 거주자의 수가 계속 줄어들어 어려움이 늘고 있다.
Q. 계속 줄어든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국장 : 성동구에는 임대아파트가 없다. 그러다 보니까 임대아파트를 신청한 분들이 대거 다른 구로 이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상왕십리 지역의 대대적인 재개발로 지역의 서민들이 시의 외곽으로 많이 옮겨갔다. 장애인 주민의 수가 계속 줄어들면서, 복지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예산 편성 등의 문제에 있어서 어려움을 많이 호소한다.
Q. 직접 사업을 진행하면서, 지역 내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국장 : 지역 내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의미 있는 한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헌법에도 기본적으로 행복추구권이 보장돼 있고, 이론상으로는 누구나 차별 받지 않는 인권과 권리를 다들 얘기한다. 하지만 실제로 지역을 들여다보면,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구조와 체계들은 거의 전무하다는 게 현실이다. 여기저기 어디를 살펴봐도 갖춰진 게 너무 없다는 것이다.
Q. 작년과 지난 2012년의 가장 큰 사고로 기억되는 두 인물이 있다. 故 김주영 씨와 故 송국현 씨가 성동센터와 함께했던 당사자들이었다는 게 참으로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국장 : 저는 ‘국현이 형’이라고 불렀다. 형은 우리 성동센터가 운영하는 체험홈에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는데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국현이 형은 장애등급이 3급이란 이유 하나로 아무런 국가지원을 받지 못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우리가 정말 절실하게 주민센터를 찾아가고 구청, 시청, 국민연금까지 찾아가서 요구하고 하소연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대안도 받은 게 없었다. 너무 위태로웠다. 명절과 주말에는 더 대안이 없었기에, 우리는 형의 탈시설 이후 6개월을 너무 진하고 강렬하게 만나야 했다. 어떻게든, 어떻게 끙끙대든 살아 보겠다고 6개월을 그렇게 만나다 보니까, 이 정이 정말 커져서 형이 돌아가신 충격은 모두에게 너무 크게 다가왔다. 등급의 숫자 하나 때문에 지역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 이게 너무 힘든 것이다.
Q. 정부는 활동보조를 3급까지 확대하겠다고 했다가 중복3급이라 말을 바꾸고, 그마저도 유야무야 뒤로 밀리기만 하는 것 같다
국장 : 국현이 형은 24살 때 사고를 당해서 중복장애를 얻었고, 시설에 들어가서 인생의 황금기 27년을 그 안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보냈다. 중년의 나이가 돼 뒤늦게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 보겠다고, 자립생활이라는 건 완전한 핑크빛의 꿈이었다면서 너무나 하고 싶었던 공부를 노들야학에서 시작했고, 새로 만나게 된 친구들과 모임도 하고 술도 한잔 하고 짧은 여행도 하며 자립생활에 아주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27년의 간극이 너무 커서, 이 사회와 지역 안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도상으로 그걸 채워 줄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그리고 우리 성동센터 세 단체가 함께 조를 짜서, 저녁과 주말마다 형의 생활을 지원하고자 노력했다. 허나 명절은 정말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설날을 앞둔 작년 1월엔 형을 저의 집으로 모시고 갈 생각도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Q. 지금도 지역 곳곳에 제2, 제3의 김주영과 송국현이 불안한 오늘을 생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지역 내의 장애당사자들을 바라보는 성동센터 활동가들의 마음이 남다를 거라 생각된다
국장 : 센터 차원에선 탈시설로 지역에 정착하려 하는 분들을 위한 집중적인 체계 마련을 위해, 구에서 예산을 준비할 때마다 정책 제안을 계속하고 있다. 시설을 직접 방문하고, 센터가 운영하는 체험홈 및 자립가정과 연계된 활동도 더욱 더 심도 있게 진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부분부터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서 정책과 제도 개선을 위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주영 동지와 국현이 형을 그렇게 떠나보내면서, 우리가 더 열심히 했더라면 최소한의 혜택을 이끌어내고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성동센터가 집회 현장에 더 열심히 나가려고 하는 이유도, 상주(喪主)의 입장이 돼 보니까 이 모든 부조리를 바꾸고 시급히 개혁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절실해진 까닭도 있는 것이다.
Q. ‘상주’라는 표현이 참 아프게 마음에 와 닿는다
국장 : 그렇다. 우리가 주영 동지와 국현이 형, 특히 형의 장례 때는 27일 동안 상주 역할을 맡아서 했다. 상주가 돼 보니까, 정말 제대로 된 제도를 어서 빨리 만들지 않으면 그 사이에 더 많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겠다 싶어 더 열심히 투쟁하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일과 투쟁 두 가지를 병행하며, 더 열심히 활동해야겠다는 다짐을 센터 활동가 모두 공유하고 있다. 성동센터 올해의 365일은 그 하나의 목표로 모든 게 진행될 것이다.
● (나이 아닌 업무로써) 막내 활동가 노희영
▲ 노희영 활동가 |
Q. 일한 지 얼마가 됐고, 담당하는 업무는 무엇인가
노희영(이하 노) : 작년 2월에 들어왔으니까 만 1년이 됐다. 활동보조 코디네이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을 연결하는 업무인데, 그동안 여덟 분 정도를 연결시켜 드린 것 같다.
Q.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나, 인상에 남겨진 업무가 있었나
노 : 제가 초기상담이라는 걸 진행한 적이 있었다. 각 코디네이터마다 담당하는 분들이 나눠져 있는데, 지역 안으로 새로 오신 이용자를 제가 맡게 됐다. 그래서 그 분을 만나러 나가서 초기상담을 진행했는데, 우리 센터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지침으로 움직이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다. 센터에 막 들어왔던 시기라서 의욕만 앞선 채로 어색하고 서툴게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그 이용자 어머니께서 감격에 겨워하시는 건 정말 뜻밖의 반응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데가 없었다. 이렇게 꼼꼼하게 지침을 듣게 된 건 처음이다. 다른 곳에서는 사람을 그냥 빨리 연결시키는 데만 치중하는데,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된 게 놀랍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리셨던 거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감정이 북받쳤고, ‘정말 열심히 해야겠구나, 정말 열심히 배워야겠구나!’라는 다짐을 하게 됐다. 그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센터에서의 활동, 이런 분야의 일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노 : 사회복지학이 전공이다. 전공의 필수과정인 실습을 위해 학교에서 복지관으로 실습을 나갔는데, 그때 장애인들과는 처음 함께하게 됐다. 발달장애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장애와 장애인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생기게 됐다. 그래서 자원봉사도 따로 하며 졸업을 맞게 됐는데, 성동센터 활동가의 활동보조인으로 있던 개인적인 친구의 제안으로 여기에 들어오게 됐다.
Q. 밖에서 보던 장애계와 안에서 확인하는 장애계는 아주 많이 다를 텐데, 실제 활동을 하면서 가장 아쉽고 부족한 부분, 이것만큼은 반드시 개선돼야겠다는 의견 같은 게 있는가
노 : 좋지 않은 법이 있다면 그 법은 개정돼야 하는 게 맞고, 잘못된 부분에 대한 사례들이 나오면 그런 것들을 수용하고 개선방안을 찾아야 함이 마땅한데, 법과 제도 차원에서 그런 게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제가 센터에 처음 들어왔을 때 (송)국현이 형과 만나게 됐다. 국현이 형의 자립을 위한 몇몇 업무를 제가 대신 해드리면서 가깝게 지냈는데, 난데없는 화재로 형이 돌아가시게 됐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런 경험은 정말 처음이었다. 사람이 죽고 그렇게 상을 당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면서, 잘못된 법 때문에 서비스를 받지 못한 사람이 죽게 됐다는 거…, 정말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깊게 하게 됐다.
Q. 적성에 맞는, 자신이 있을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앞으로의 목표 같은 게 있다면 듣고 싶다
노 : 적성에 잘 맞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늘 자부한다. 목표라기보다는 앞서 이용자 어머니의 예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용자 분들이 감동을 받는 활동을 저의 노력으로 해드리고 싶다. 더 자세히, 더 열심히 설명하고 함께하면, 이용자 여러분들도 우리와 함께하는 데 훨씬 더 자연스러워지지 않겠는가. 제가 받는 감동만큼 그 감동을 전해드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활동하겠다.
▲ 성동센터의 다양한 모습들(사진제공 = 성동센터) |
(탈시설 후 사회에 첫발을 딛은 故 송국현 씨의 모습이 첫 번째 사진 중간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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