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장애인권리협약 민간보고서 초안 리뷰 ④
본문
참정권은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면 누구나 갖는 권리다. 우리나라에서는 헌법 제13조, 제24조 등에서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고, 국제사회에서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을 비롯한 국제 문서에서도 참정권을 다루고 있다. 지금은 당연한 권리가 된 참정권도, 과거에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고대 그리스에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남성뿐이었다. 그마저도 빈민은 제외되었다. 그 외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적으로 여성, 흑인, 장애인 등은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모든 국민이 동등한 참정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월 15일 제21대 총선을 앞둔 요즘, 정당마다 비례대표에 사회적 소수자를 영입했고, 장애인 당사자도 정당별로 후보에 올랐다. 장애계에서도 후보들에 대한 리더십, 장애인당사자로서의 정체성, 대표성 등 장애인을 대표할 수 있는 적임자인지에 대한 치열한 지지와 비판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듯 장애인 당사자의 정치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장애인과 관련된 정책 결정 과정에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 장애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인 이유는, 현실 정치 참여를 통해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집행할 수 있는 실천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정치 및 공적 생활에 대한 참여
CRPD에서는 제29조(정치 및 공적생활에 대한 참여)를 통해, 당사국으로 하여금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정치적 권리와 기회를 보장하도록 하였다. (가)항에서는 장애인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자유롭고 동등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선언하고 있는데, 그 방법으로는 △접근 가능한 투표소와 이용 가능한 투표용구 및 절차 마련, △비밀투표 보장, 선거 출마, 모든 공적기능 수행을 위한 보조기술 개발 및 사용 촉진, △유권자로서의 자유로운 의사표현 보장과 투표 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나)항에서는 장애인이 차별 없이 공적 활동 수행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장려하도록 권고한다. 이러한 공적 활동에는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와 같은 비정부기구, 비정부단체, 정당 활동, 장애인 단체의 결성과 가입 등이 해당한다. 이는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 뿐 아니라 정책을 모니터링 하는 것 역시 정치활동의 한 과정이며, UN이 장애인의 참여를 필수요소로 인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1차 심의를 마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14년 최종견해를 통해 △많은 투표소가 장애인에게 완전히 접근가능하지 않은 현실과 △투표 관련 정보가 다양한 장애유형을 고려하며 제공되고 있지 않은 문제, △정치활동 참여와 선거 입후보 비율이 저조한 상황은 물론이고 △정신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 등 행위무능력 선고를받은 자들의 투표권과 피선거권 박탈에 대해 우려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어지는 2018년 보고 전 쟁점목록(LoIPR)에서는 △투표소와 유세장의 자유로운 접근 등을 포함한 각종 지원과 조치, 그리고 △투표보조인제도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는 2019년 3월 발표한 제2·3차 정부보고서를 통해 △전 과정에서 투표 편의를 제공하고 있고, △선거 관련 정보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공직선거법」에 따라 본인이 원하는 2인의 보조를 받아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어서 △「정치자금법」을 통해 장애인의 정치참여를 장려하고 있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함께 제시한 투표 편의 제공에 대한 통계자료를 보면, 단순히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이나 1층에 설치되어 있는 투표소의 비율을 제시하고 있으며(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거나 1층에 투표소가 설치되었다고 해서 모두 접근 가능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어통역사 배치(사전투표소 7%, 투표소 2.3%), 임시경사로 설치(사전투표소 12%, 투표소 2.39%) 등 그 비율이 매우 낮았다. 또한 장애인이 지명한 사람이 1명(가족 제외)인 경우에는 투표사무원에게 투표를 보조하도록 하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업무지침이 비밀선거원칙에 위배 된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으며, 장애인 당사자의 정치권 진입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자금법」에 의한 보조금 지급 제도는 그 조항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2019년 NGO연대에서 작성한 민간보고서 1차 초안에서는 △보장되지 않은 투표소의 물리적 접근성과 선거정보 접근성, △2인 동반 투표 규정의 개정 필요를 이슈로 다루고 있다. 실제로 인천지역의 한 장애인 단체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사전투표소를 모니터링 한 결과에 따르면, 2층이면서 승강기가 설치되지 않은 투표소가 134개소 중 30개소나 되었으며, 시각장애인의 경우 선거공보물 면수 제한 규정으로 충분한 점자 정보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고, 청각장애인 역시 발화자의 구분 없이 송출되는 수어통역 방송 화면 때문에 사실상 선거 정보를 얻지 못한 사례를 예로 들었다. 추가적으로 장애인단체의 정책 모니터링 등 공적 활동에 대해 정부 지원이 소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점, 매년 활동을 평가받아 예산을 책정하는 등의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접근권①-물리적 접근권
이렇듯 장애인의 정치 참여 이슈는 항상 뜨거운데, 그 중에서도 정점을 찍는 문제는 단연 투표소 접근성일 것이다. 장애인의 접근권은 장애인의 사회참여 보장의 기본 전제가 된다. CRPD는 전문 (어)항을 통해 “장애인이 모든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를 완전히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어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 및 보건과 교육, 그리고 정보와 통신에 대한 접근성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그 중요성은 제3조(일반원칙)를 통해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제9조(접근권)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제9조는 접근권을 △건물, 도로, 교통 및 학교, 주택, 의료시설 및 직장을 포함한 기타 실내외 시설과 △정보, 통신 및 전자서비스와 응급서비스를 포함한 기타 서비스 등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고 있다.
CRPD위원회의 1차 최종견해에서는 물리적 접근권과 관련해 우리나라 정부에 △접근이 불가능한 대중교통과 △접근성의 기준이 일부 건물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상황에 우려를 표하며, 보고 전 쟁점목록을 통해 △대중교통과 건물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이뤄진 조치와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제(BF인증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에 우리나라 정부는 △저상버스 제도와 특별교통수단 도입, △적합성 확인제도를 통한 편의시설 설치률 제고, △5년마다 전수 실태조사 실시를 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제’에 대해서는 △공공부문 87%, 민간부문 13% 이행으로 참여도 제고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2019년 본 보고서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것처럼,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 도입률은 당초 정부의 목표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저상버스의 경우 편의시설의 문제와 더불어 심리적 접근성도 매우 저조한데, 이는 버스 운전원과 승객들의 불쾌감 표시, 안전 무시 등에서 기인한다. 또한 BF인증제도는 1998년 이후에 설치된 건물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체 건물 중 2.78%를 대상으로 한 인증률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국가보고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BF인증제도 인증률과 전수조사는 2.78%의 건물만을 대상으로 시행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NGO연대의 민간보고서 초안에서는 이에 대한 세부적인 통계와 사례 제시를 통해 반박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특별교통수단이 지역 간 이동이 불가능한 문제, 여객 선박 접근권 등도 함께 논의하였다. 또한 키오스크(무인안내기), 관광 안내 표지판, 피난 시설 등 여전히 물리적 접근권과 관련하여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당사국은 장애인이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하기 위하여…”로 시작되는 본 조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접근성은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완전한 참여의 필수적 요소이다. 학교에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없다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학생은 교육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며, 장애인이 직장에 갈 수 있는 대중교통에 접근이 불가능하다면 노동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투표소의 물리적 접근성이나 선거정보에 대한 정보 접근권의 부재도 장애인의 참정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장애인의 접근성은 다른 모든 권리의 실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만큼,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를 비롯한 NGO연대와 장애계는 앞으로도 사회 전반의 접근성이 확실히 보장되어, 정치·고용·교육·지역사회 등 다양한 영역에 장애인이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A Voice of Our Own!(우리의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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