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만 생겨나는 이동편의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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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던 공간, 없다던 예산, 죽고 나면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죽어간 자가 마지막 존재했던 자리에 서면, 숙연함을 넘어서는 비장함 같은 감정이 온 몸을 휘어 감는다. 1초 뒤의 운명을 전혀 상상도 못했을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생각했을까?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진 않았을까?
누군가 죽어야만, 난데없는 죽음을 비참하게 당해야만 비로소 생겨나는 이동편의시설들, 그건 왜 죽음 이전에는 설계조차 되지 않았던 걸까? 안 한 걸까? 아니면 못한 걸까? 설계할 공간이 없다던, 설치할 예산도 없다던 서울지하철 신길역 환승통로에 ‘리프트형 엘리베이터’라는 번듯한 이동편의시설이 완공돼 운행에 들어갔다. 현장의 의미를 담는 본문 작성에 앞서, <함께걸음>은 고(故) 한경덕 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깊이 고개 숙인다.
다음 순서는 누구인가? 아무도 모른다
故 한경덕 씨(향년 70세)는 베트남전 상이군인(머리 부상, 상이등급 4급)이었다.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던 그는 1986년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고 왼팔의 운동기능을 상실하며 지체장애인이 됐다. 2017년 10월 20일 오전 10시경, 그가 1호선을 타고 와 신길역에서 환승하려던 5호선의 목적지는 중앙보훈병원이었다. 리프트를 타기 위해선 역무원을 호출해야 하는데 호출버튼은 왼쪽에 있었고, 왼팔 기능을 상실한 그는 오른손으로 버튼을 누르기 위해 전동휠체어를 돌려 위치와 자세를 잡으려 했다. 잠시의 전진과 후진, 그게 그가 자신의 의지로 시도한 이승에서의 마지막 움직임이 되고 말았다.
전동휠체어와 함께 긴 계단으로 굴러 떨어져 의식을 잃은 그는, 98일 동안 단 한 차례도 깨어나지 못한 채 2018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 그랬듯 서울교통공사는 이용자의 과실로 단정 지으며, 리프트를 이용하기 전에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유가족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와 함께 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장애인권단체들의 지난한 투쟁 끝에 법원은 유족에게 1억3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1심 판결을 내렸다. 소송 제기 1년 7개월 만의 판결에 대해 장추련 김성연 사무국장은 “리프트와 호출버튼이 설치된 구조를 본다면, 신길역 역무원들과 서울교통공사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호출버튼을 누르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을 위험조차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유족과 장추련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의 결과에 의미를 부여했다.
▲ 사진 아래 왼쪽 지점이 故 한경덕 씨가 머물렀던 바로 그 자리이다. 긴 계단의 깊이는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함을 전달한다. |
문제는 연이은 지하철(전철)의 사고가 서울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현실이다. 부산과 대구 지하철에서도 리프트 추락사고가 발생했고, 스크린도어 설치 이전에는 수도권 전철에서 5명의 시각장애인이 선로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유야무야 봉합돼 알려지지 않은 개별 부상 사고까지 포함한다면, 지하철(전철)이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이동권약자들은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날 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같은 리프트를 사용하는데 ‘누군가’는 사고를 당한다. 같은 열차를 이용하려는데 ‘누군가’는 선로에 추락한다. 이렇듯 언제까지 정당한 이동수단을 이용하려다가 희생당하는 ‘폭탄 돌리기’가 계속돼야 한다는 걸까?
같이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신길역 추락 사망사고 훨씬 이전부터 이동권투쟁의 산증인으로 활동해 온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문애린 공동대표는 문제의 핵심을 ‘인력의 부족’으로 꼽았다. 서울교통공사의 구조조정으로 최소한의 인력만 배치했기 때문에, 역 내부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일들에 일일이 대응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리프트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각자 열쇠를 가지고 다니면서, 혼자 작동시키며 위아래로 이동했다. 그런데 워낙 사고가 많이 일어나니까, 역무원이 와서 작동해야만 탈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꿨다. 그런데 일손이 모자라다 보니까, 다른 업무를하던 역무원이 리프트까지 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이동의 편의까지도 ‘장애인의 속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동편의시설을 만든다 해도, 실제 장애당사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맞지 않아 더 불편한 경우도 많다. “단차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빈번하다. 서울지하철 2호선이 특히 심하다.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당사자들은 열차와 승강장 사이를 단번에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높낮이가 달라 앞바퀴가 걸리거나 부딪치면, 그 충격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하면, 앞바퀴가 부러지거나 휠체어 자체가 고장 나는 경우도 발생한다. 휠체어의 손상은 당사자 신체의 부상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사실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역의 엘리베이터는 서울교통공사가 ‘시혜’ 차원으로 설치여부를 검토할 사안이 아니다. 처음부터 ‘당연히’ 있어야 했던 이동편의시설이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게 없었기 때문에 만들라는 것이고, 이런저런 기술상의 이유와 예산의 핑계로 멈춰 있을 시간이 없다. 장애인권운동단체들이 그토록 긴 투쟁을 펼친 결과로 역마다 뒤늦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있지만, 실제 주요 이용자들은 어르신들을 포함한 비장애인 중심이다. 장애당사자들의 이동권을 위해 운행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탑승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뒤로 밀려나는 건 장애당사자들이 돼 버린 지 오래다.
▲ 새로 설치돼 운행을 시작한 리프트형 엘리베이터 내부에서 바라본 아래쪽 출구 방향의 모습 |
“그래서 새로운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1역 1동선 확보’다. ‘1역 1동선 확보’는 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하나의 동선으로 지상에서 승강장까지, 승강장에서 지상까지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하지만 설치가 됐다 해도 하나뿐인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면, 교통약자들은 그 역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발생한다. 비장애인들은 여러 출구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해 나가는 게 가능하지 않은가. 1역 1동선이 완비된다 해도, 교통약자들은 매번 원치 않는 지점으로 나가야 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최소한 길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1역 2동선 확보’의 요구도 병행해서 진행할 것이다.”
신길역에 리프트형(수직 방향이 아닌 케이블카처럼 사선의 각도로 이동함) 엘리베이터가 완공되고 운행을 시작하던 날, 그 현장에 참석했던 인권운동활동가들은 말로 표현할 방법 없는 참담함을 공유했다고 문애린 공동대표는 전했다. 몸의 경직이 심한 중증장애당사자들을 위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기술상의 배려까진 좋았지만, 고작 1분 남짓 걸려 이동이 가능해진 이 공간을 오가기 위해 그동안 몇 십 분씩 기다리고 돌아서가야 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른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편의시설의 도입이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어낸 상징물이라는 점에 모두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사고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철렁철렁 내려앉는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까?’, ‘나와 같이 활동했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우려부터 떠오르는 게 사실이지만, 우리가 모르던 누군가라 해도 분노가 치미는 건 마찬가지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화가 난다. 그렇다. 화가 난다. 우리가 그토록 외치고 요구할 때는 외면하더니, ‘죽음’이 발생한 다음에야 대응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평등한 이동권 확보는 인권의 문제다. 얼마 전 설치된 광화문역 엘리베이터도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신길역 역시 불가능하다고 했다. 왜 죽어야만 그제야 바라보는가. 언제까지 죽어야 하는가. 우리의 요구는 단순하다. 세상을 함께 살자는 것이다. 비장애인만 가능한 세상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의 요구와 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도 엘리베이터 설치가 안 된 그 많은 역들도 여전히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인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조사해서 작성한 ‘지하철 장애인휠체어리프트 추락사고 및 참사의 기록’을 보면, 방송뉴스와 신문지상에서 짧게 봤음직한 내용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1999년 혜화역(중상), 천호역(중상) | 2000년 종로3가역(중상) | 2001년 오이도역(사망), 고속터미널역(전치8주), 발산역(두부골절상), 영등포구청역(전치7주) | 2002년 발산역(사망) | 2004년 서울역(두부손상 등 중상) | 2006년 회기역(갈비뼈 골절 중상), 인천 신수역(사망) | 2008년 화서역(사망) | 2017년 신길역(사망)….’
이 참사의 기록 자료에서 간과해선 안 되는 건, ‘1999년 혜화역(중상)’ 이전엔 사고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추락사고와 사망사고는 끊이지 않았지만, 본인과실로 치부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게 대부분이었다. 이는 서울교통공사의 누리집에서도 확인된다. 1971년 4월 12일 서울지하철 1호선 착공식부터 1974년 8월 15일 개통식까지, 1984년 5월 22일 지하철 2호선 전 구간 완전개통부터 2000년 8월 1일 7호선 전 구간 개통까지의 ‘밝은’ 내용은 가득하지만, 어디서도 ‘참사의 기록’ 비슷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1999년 혜화역’을 기점으로 잡은 건 이동권운동의 발화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서울지하철 사당역 인근에 있던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앞에선 장애인권활동가들의 집회와 시위가 계속 이어졌고, 아무런 반응도 없던 정부와 관계당국은 2001년 1월 22일 오이도역 휠체어리프트 추락사망사고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장애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이 일제히 거리로 몰려나왔고, 한 달 후 지하서울역 철로 점거라는, 장애인이동권투쟁의 상징과 같은 극단의 투쟁이 언론을 통해 온 사회에 알려지게 된다.
이동권투쟁은 20년이 흐른 지금도 곳곳의 현장에서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고, 정부와 지자체의 각성과 결단을 촉구하는 각종 대담과 토론회가 끊임없이 개최되고 있는 중이다. 길거리의 턱 하나 없애는, 자갈밭 같던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공중화장실에 ‘장애인 전용’ 공간이 설치되는, 지하철역 같은 필수이동시설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는 이 모든 과정들이 하나처럼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우리 모두 절대 잊어선 안될 일이다. 참사의 다음 순서는 ‘나’의 가장 소중한 얼굴, 아니면 ‘나’ 자신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환승통로 위에 설치된 故 한경덕 씨 추모동판의 모습(왼쪽), 서울지하철 1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한 엘리베이터 입구 모습(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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