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한 나눔, 우리들 마음도 은하수가 된다
본문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운동’이라는 말이 있다. 커피 한 잔으로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문화로써, 100여 년 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지방에서 ‘caffee sospeso(맡겨 둔 커피)’라는 이름으로 전해오던 전통에서 비롯된 운동이다. 운동의 원리는 간단하다. 자신이 마실 커피를 주문할 때 ‘서스펜디드 커피’를 추가로 더 주문해서 카페에 맡겨두는 걸로 끝난다. 이렇게 맡겨진 커피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음료 한 잔이 아쉬운 이들이 찾아와서 마실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일종의 기부문화이다.
이탈리아 지역 고유의 문화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2010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서스펜디드 커피 네트워크’라는 조직이 이탈리아에서 결성되면서 이젠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커피 전문 프랜차이즈 회사들을 중심으로 150개 이상의 커피 전문점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에겐 그보다 더 넓고 깊은 뜻을 담은 운동이 펼쳐지고 있어 많은 이들의 주목과 응원을 받고 있다. 요란한 광고도 없이, 화려한 문구도 없이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펴져나가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나눔의 운동, 바로 ‘미리내 가게 운동’이 그것이다.
원리는 서스펜디드 커피와 거의 같다. 하지만 커피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매장이든, 어떤 음식이든, 어떤 지역이든 상관없이 거의 모든 걸 나눌 수 있다. 이미 전국적으로 200호점 넘게 확산되고 있고, 입소문을 통해 미리내 운동을 알게 된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열린 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하나의 밀알에 불과했던 이 운동은 거대한 나눔의 문화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친구에게 햄버거 하나를, 아내에게 화장품 하나를, 아이들에게 떡볶이 한 접시를, 선생님께 꽃 한 다발을 시간차를 두고 전할 수 있다.
꼭 누군가를 지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대상을 정하지 않고 해당 가격을 ‘미리 내면’, 그 무언가가 필요한 이들이 와서 그 무언가를 먼저 사용하고, 자신의 능력이 될 때 또 다른 누군가에게 미리내 운동을 전해주면 된다. 다시 말해서 당장 현금이 없을 때 무기명으로 기증된 라면 한 그릇을 먼저 주문해서 먹고, 자신의 지갑이 채워졌을 때 여러 미리내 가게 중 한 군데를 들려서 누군가를 위한 비용을 미리 내주면 되는 것이다.
‘미리 낸다’는 의미의 미리내지만,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기도 하다. 외롭게 혼자 반짝이는 게 아니라 수많은 별들이 함께 모여 밤하늘을 가득 수놓듯, 미리내 운동도 수많은 ‘우리들’이 모여 서로를 위한 나눔을 실천하는 큰 의미를 담고 우리 곁에 다가오는 중이다. 매장의 수입이 급증하는 요인이 되는 것도 아닌데, 전국의 그 많은 매장 사장님들이 왜 미리내 가게 운동에 적극 동참하며 즐거워하는 걸까? 또한, 요란한 캠페인 노래 하나 없이, 어떻게 이런 알찬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된 걸까? 미리내 운동의 첫 밀알을 심고 힘껏 달음질치고 계신 동서울대학교 전기정보제어과 김준호 교수, 자칭 타칭(他稱) ‘미리내맨’인 그에게서 그 해답을 일문일답으로 직접 들어본다.
여러분이 바로 나눔과 감동의 주인공입니다
미리내맨 김준호 교수
▲ 김준호 교수 |
Q_아주 뜻 깊은 나눔의 운동을 이끌고 계신 것 같다. 드러내기에 급급한 세상에서, 이렇게 보이지 않는 운동을 조용히 진행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자기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건 쉽다. 자신에게 있는 건 그냥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줄 수가 있다. 돈 버는 일보다 쉽다. 남의 것을 얻어내는 건 굉장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제일 어려운 건 사실 남의 돈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 역할을 지금 미리내 가게 사장님들이 해주고 계신 거다. 단순하게 전달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건 신뢰와 투명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하겠다.
Q_첫 시작점은 언제였고, 어떤 방식으로 진행을 한 건가
작년 5월 6일이 시작점이다. 처음 준비를 할 때 주변의 좋은 분들이 너무 많은 의견과 조언을 전해주셨다. 그런데 지금도 솔직히 희한하게 생각하는 건, 제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그 전에 뭔가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 많은 사장님들이 너무 쉽게 동참을 해주신 거다. 시작하자고 의견을 꺼낸 건 제가 맞지만, 실제 주인공과 주체들은 전국의 미리내 가게 사장님들이시다. 미리내 간판을 달았다가 내린 분이 아직 안 계신다. 오랜만에 전화를 하고 오랜만에 찾아가도 너무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그런 게 가장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Q_200호점을 넘어섰다고 알고 있다. 나눔의 운동에선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사례들이 아주 많을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경우를 말씀해 주실 수 있는가
사례들은 정말 많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듣게 된 소식을 말씀드리는 게 낫겠다. 서울 모 대학 앞에서 찹쌀순대집을 하시는 미리내 가게 사장님이 계신데, 어느 날 청소년 학생 하나가 매장 밖에서 계속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 미리내 쿠폰이 있었기에 들어와서 먹으라고 했는데, 그 학생은 너무 고마워하며 잘 먹고 갔다 한다. 그런데 며칠 후 여성 고객분이 오셔서 식사를 한 뒤 미리내 기부를 하겠다고 하셔서 어떻게 이 운동을 알고 계신가 물었더니, 며칠 전에 자기 아들이 여기서 순대국 식사를 무료로 먹고 갔다 하기에 찾아왔다고 했단다. 그 청소년은 가출을 한 상태였고, 무료로 먹게 된 식사 한 끼로 인해 귀가를 결심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각 매장 사장님마다 이런 사연들을 다 가지고 계시고, 지속적으로 페이스북 등을 통해 여러 사연들을 올려주고 계신다.
▲ 미리내 페이스북 중에서 |
▲ 미리내 카카오 앨범 중에서 |
Q_미리내 가게 운동의 확산이 더 속력을 낼 것 같다. 이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규모로 질적 양적 성장을 하리라 예상하셨나
전혀 아니다. 처음에는 대여섯 곳, 많아야 열 곳 정도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 정도라면 제가 10만 원 정도라도 밑돌을 놓아 유지는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신청하는 사장님들을 일일이 뵙다 보니 이런 의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너무 많았고, 더욱이 실제 이런 운동을 이미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제 예상을 뛰어넘는, 그러니까 정말 대단하게 자신의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던 분들이셨다. 제가 그 분들을 만나 의견을 듣고 확인하려 했다는 게 참 우스워지고 반성해야 했을 만큼, 이미 나눔의 삶을 살고 계시던 분들이 이 운동에 적극 동참해 주셨던 거다.
Q_민감한 질문일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이 벌어졌거나 실패한 케이스도 있는가
없다. 그건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사장님들이 그런 걸 워낙 잘 관리하는 분들이시고, 모두 다 동네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잡음이 생길 수가 없다. 기존에 마을에서 신뢰를 얻고 계시던 분들인데, 이 작은 나눔의 금액 가지고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겠나. 비용을 미리 낸다 해서 그 금액을 안 좋게 사용한다든지 하는 의심은 일반적인 외부인들의 편견이고, 실제 진행되는 걸 보면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실 것이다. 미리 내는 기부를 하는 고객들은 다 단골이자 동네 사람들이다. 미리내 가게를 운영한다는 건 그 마을에서 신뢰와 투명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Q_미리내 운동의 대상이 정해져 있는지 알고 싶다. 예를 들어 ‘어느 분야가 중심이다’ 하는 구분이 있는가
이탈리아의 서스펜디드 커피는 커피 매장 중심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커피의 문화가 아니지 않은가. 어느 가게든 상관없다. 국밥이 될 수 있고 떡볶이나 자장면이 될 수도 있다. 미리내 가게 1호점이 경남 산청의 커피숍이었기에 서스펜디드 커피와 연계시키는 분들이 많은데, 김밥집도 많고 옷가게와 각종 카페나 분식집, 심지어는 복싱체육관도 있다.
Q_복싱체육관에서 어떻게 미리내 운동이 운영된다는 건가
체육관이 예전에는 선수들 위주였지만, 지금은 일반인들의 운동과 다이어트 등의 용도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진짜 선수가 되고 싶은데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이 있을 수 있다. 관장이 무료로 해줄 수 있겠지만,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는 식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운동하는 일반 관원들에게 미리내 기부를 십시일반으로 받아, 정말 선수가 되고 싶은 학생들을 운동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 이곳이 미리내 가게임을 알리는 현판이 출입문 위에 부착되어 있다. |
Q_그렇다면 각 지역의 미리내 가게들끼리의 연대 같은 게 만들어져 있는가
얼마 전까지는 각각의 사장님들과 저와의 일대일 관계가 전부였다. 그런데 지역별로, 매장별로, 사장님마다 나름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만들어내시다 보니, 처음엔 의도하지도 않았던 문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A매장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같은 지역 내의 B매장 사장님께 미리내 운동을 추천해서 B매장 사장님이 흔쾌히 받아들인다면, B매장에 필요한 쿠폰함과 알림판과 현판 등의 물품비용을 A매장 사장님이 대신 내주신다. 미리 내주시는 거다. 그럼 무료로 물품을 갖추게 된 B매장 사장님은 다음의 C매장 물품을 대신 지원해주시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활성화되고 있다.
Q_그럼 모든 분야의 매장이 다 미리내 가게가 될 수 있는 건가
자제해야 할 분야가 있다. 일단 ‘청소년 유해업소’는 될 수 없고, 호프집 같은 술집은 아직까지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한다. 청소년한테 담배를 나눌 순 없지 않은가. ‘담배 한 갑 미리 사놨어요.’ 이건 안 될 일이다. (웃음)
Q_서스펜디드 커피와 미리내 가게 운동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정리해 주시면 좋겠다
서스펜디드 커피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전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을 우선하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 모두가 누구나 누릴 수 있고 기부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누구나 받는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기부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받으면 되고, 여유가 생기면 어떤 방식이라도 갚으면 된다. 우리의 정신 안에 품앗이의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음을 잊지 않으시면 된다. 함께 사는 세상은 가장 작은 관심 하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미리내 가게 운동은 우리의 공동체 구현에 큰 힘을 발휘할 거라 믿는다.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서로 만든다. 우리는 도울 뿐
미리내 가게 운동에 동참하는 이삭토스트 박병권 사장
▲ 박병권 사장 |
Q_미리내 가게 운동은 언제 동참하셨나
이 운동을 알게 된 건 작년이었는데, 직접 시작하게 된 건 두 달 정도 됐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기만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김준호 교수님께 전화를 해서 동참의사를 밝히고 시작했다. 참 좋은 운동을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Q_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 같은 게 있으신가
예전에는 서로의 비용을 누군가 내주는 문화가 있었는데, 지금의 20대는 열 명이 오면 열 명이 다 제각기 자기 것만 계산한다. 한번은 누가 내고 다음번은 누가 내는 게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것만 정확하게 따로따로 계산한다.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까, 5년 전부터 이런 분위기로 확 바뀌는 게 느껴졌다. 나눔이 파고들 여지가 없어진 거다.
Q_이 운동을 실제 진행하시는데, 손님들의 반응은 어떤가
다들 신기하다고 한다. 신기한 게 절대 아닌데도 신기하다고 한다. 이게 뭐가 신기한지 저는 이해를 못하겠는데, 이런 걸 신기하다고 하는 데 제가 더 놀라게 됐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홍보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신혼부부 위주로 저녁 때 많이 찾아온다. 미리내 현판과 알림판을 보며 남편이 이게 뭐냐고 물으면, 아내가 나름대로 설명해 주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런 손님들은 가족 구성원 위주의 미리내 기부를 자주 하고 가신다. ‘조금 있다가 형부가 올 거예요.’ ‘내일 조카가 와서 먹을 거예요.’ 하며 미리 계산을 하는 것이다.
▲ 매장 입구 알림판에는 누가 누구에게 미리내 기부를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메모가 적힌 쿠폰들이 부착되어 있다. |
Q_직접 매장을 운영하시는 입장에서, 이 운동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주실 수 있는가
이건 새로운 기부문화가 아닌가. 일부러 기부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를 때가 많은데, 이걸 통해서 불특정다수에게 기부하는 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리고 싶다. 단체주문이 오면, 저 또한 대여섯 개 정도는 더 만들어 보낸다. 제가 저의 역할로 할 수 있는 나눔이 그게 아닌가. 그러다 보니까 단체주문이 여러 곳에서 더 많이 들어오게 됐다. 나눔을 실천했더니 이렇게 돌아오는 것도 있구나 하는 좋은 마음을 얻게 된다.
Q_같은 지역 상권 내에서 미리내 가게 운동을 추천하고 싶은 매장이 있는가
있다. 우선 영업을 오래한 집이어야 이 운동의 취지와 맞는다고 본다. 신규업체는 자기 자리 잡기에도 바빠서, 이 운동의 취지를 퇴색시킬 우려가 있다. 신뢰가 중심이 돼야 하기에, 지역 안에서 지역민들과 오랜 유대관계를 가진 매장 중심으로 이 운동이 운영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Q_미리 내는 손님들은 주로 어떤 분들인가
어른들이 많다. 하나를 시켜먹고 두세 개를 기부하고 가신다. 더 많은 이들에게 나누고 싶다고 한다. 주로 대상을 지정하지 않고 불특정다수에게 기부하시는데, 저 역시 더 많은 분들이 편안하게 와서 식사하실 수 있는 문화를 함께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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