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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부딪치세요. 그게 자립과 독립의 지름길입니다

[만난사람]장애인권활동가 김정

본문

여(女)와 남(男)을 구분하지 않는 인간 그 자체로 볼 때, 남다른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특별한 이유를 대거나 애써 만들어낼 필요 없이, 호감은 ‘그 사람’의 인상 자체로 형성되면서 사회적 관계의 활력소를 제공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인물을 이번 달에 만나게 된 것 같다. 장애인권운동현장에서 항상 만날 수 있고, 특히 장애인노래패 ‘시선’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고 있는 장애인권활동가 김정 씨가 그 주인공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에게서 어떤 호감을 발견하게 될지, 함께 들여다보기로 한다.

 

   
 

세발자전거만큼의 세상

“제가 아주 어렸을 때는, 그러니까 이게 정말 장애라는 걸 못 느끼고 나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때는,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야구선수였어요. 지금은 스포츠를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어렸을 때는 야구를 참 좋아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달리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던 것일 수도 있어요. 달리고 몸으로 부딪치며 운동을 한다는 거…. 그 야구선수가 참 오랜 기간 동안 저의 꿈이었는데, 그게 안 되는 걸 알게 되면서 그 꿈을 접게 됐죠.”

80분 가까이 이어진 대화를 담아놓은 녹음기에는, 위의 발언이 맨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계획 같은 게 있는가?’라는 미래형 질문에, 그는 먼 과거의 인생 한 부분을 대답으로 내놓은 것이다. ‘달리고 싶다는 욕구’라고 말한 표현이, 녹음 내용을 반복해서 듣는 내내 마음 한가운데를 맴돌았다.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표현임이 분명했기에, 그의 삶을 보다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정리해야겠다는 다짐마저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저희 가족, 특히 저의 어머님 말씀을 전해 듣는다면, 백일 전후로 황달이 심했는데 그 열로 인한 뇌손상이 왔다고 해요. 당시엔 그걸 전혀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황달이 좀 오래가나 보다 하며 지켜보는 정도였는데, 그 이후로 팔이 돌아가는 등의 뇌병변 장애 증상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등급 상으로는 1급의 장애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만날 때부터 ‘긴장 된다’ 등의 멍석 깔기(?)에 바빴던 김정 씨, 그런데 대화의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는 모든 얘기가 말 그대로 ‘청산유수’였다. 오랜 기간 가깝고 먼 자리에서 마주치기를 반복했기에, 그동안 보아왔던 그의 이미지가 실제 성격과도 일치하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낙천적이고 쾌활했다. 빙빙 돌리며 둘러대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분명했다. 그 느낌은 대화가 이어질수록 확신으로 바뀌게 됐다. 고향이 어디냐 물으니 서울 영등포구란다. 영등포에서 태어나 영등포 안에서만 몇 차례 이사를 다니며 지내왔기에, 자신은 평생 영등포 사람으로 살아왔단다. 그래서 현재의 직장도 영등포 안에 있는 거냐고 물으니, 그건 의도한 바가 아니라며 밝게 웃었다. (함께 만나 대화를 나눴던 자리도, 영등포의 한복판인 구청 청사 바로 옆의 커피전문집이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형이 탔던 세발자전거가 있었어요. 그 뒤에 바구니 같이 생긴 게 달려 있었는데, 동네 친구들이 저를 거기에 앉게 하고 동네 전체를 막 돌아다녔어요. 그렇게 세상 구경을 했던 거죠.”

단지 그의 설명으로 들었지만, 그 골목길의 풍경이 하나의 영상처럼 눈앞을 스치는 것 같았다. 그게 장애인지 아니, 장애라는 게 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을 동네 친구들이 그를 세상으로 불러냈다는 것. 그렇다면 학교는 어떻게 다녔을까? 학교는 전혀 다니지 못했단다. 왜? 집에서 안 보냈다는 건가, 아니면 교육 시스템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걸까? 당시 집에서 할 수 있는 여력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친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하나뿐인 형, 그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는데 부모님은 늘 맞벌이를 나가셨고 형은 학교를 다녔기에, 김정 씨는 사실 할머니 손에 자란 셈과 마찬가지란다. 그렇다 해도 동네 친구들이 등하교를 하는 걸 보며, 학교에 대한 나름의 욕구나 갈망 같은 것도 없었을까?

“물론 저도 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했죠. 그런데 그 어린 마음에 의식을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장애인지도 몰랐겠지만, 그냥 ‘아, 나는 갈 수 없는 곳이구나.’ 하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 몸이 남들보다는 불편하구나. 나의 친구들하고는 다르구나.’ 하는 거…. 그리고 13살인가 14살인가 됐을 때, 정말로 집을 기어서 나가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가 장애라는 걸 진짜로 받아들이게 됐던 시점이 아닐까 싶어요. ‘아, 이게 참 영원히 나와 함께 갈 그런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밖에 대한 동경 - 그 해결점은

   
 
그렇다면 바깥세상은 언제부터 맞이하게 된 건지가 궁금했다. 지금 나이가 34살인데, 전동휠체어를 처음 사용하게 됐던 25살 때부터가 개인적인 이동의 시작이었단다.

“19살 때부터 3층에 있던 집에 살았어요. 그 이후로는 계속 집에만 있었던 거죠.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어린 시절 그 세발자전거와 골목길이 제가 본 세상의 전부였어요. 무조건적인 ‘밖에 대한 동경’이 있었지만…, 아예 외출을 못하며 지냈던 거죠.”

‘무조건적인 동경’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자포자기였을지도 모를 일일 텐데, 집 안에서만 지내던 그 시절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다른 것보다 먼저 책을 많이 읽었단다. 구립도서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10권을 대여해 주는 서비스가 있다는 걸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는데, 김정 씨는 그 서비스를 10년 동안 계속 이용하며 지냈다고 한다. 보고 싶은 책을 직접 정하기도 했지만, 책에 대한 실제 정보가 극히 부족했기 때문에 가져다주는 책들은 무조건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단다. 단순한 계산만으로도 10권 곱하기 12개월 곱하기 10년이면 1천2백 권이 되는데, 책을 통해 알게 된 세상의 깊이도 상당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밖에 대한 동경’은 언제 어떻게 해결이 됐다는 걸까?

“제가 열아홉 살 스무 살 정도 됐을 때, 대학에 다니던 형이 컴퓨터라는 걸 처음 샀어요. 그걸 어깨 너머로 배운 거죠.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형이 없을 때는 컴퓨터를 만질 사람이 집에 없었잖아요. 처음엔 게임 정도 하는 게 다였는데, PC통신이라는 걸 전화선으로 연결하게 된 뒤부터는 환경이 완전히 바뀌게 됐죠. 그때 ‘디딤돌’이라는 카페가 있었어요. 비장애와 장애 모두 함께하는 모임이었는데, 거기에서 인연을 맺게 되어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게 됐죠. 그 카페 회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비로소 세상을 경험하게 된 거예요.”

아주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언급하는 동안, 김정 씨의 얼굴이 정말로 환하게 밝아졌기 때문이다. PC통신에 이어진 인터넷 세상에선 더 큰 여러 모임들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거기서도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 지금까지 연결되며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지금은 장애인인권운동의 활동가로 활약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삶을 살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에, 막연하게나마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던 시절이었단다. 자신의 카페 활동을 좋게 보신 분들이 이런저런 도움을 주시겠다 하여 관심을 갖고 준비했었는데, 실제 인생의 직업으로 택하기에는 한계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 경증의 장애라면 가능할 텐데, 자신의 장애가 너무 중증이라는 게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돌발질문(?)을 던졌다. 오래 전부터 갖고 지내던 궁금증이었기에, 외람됨을 무릅쓰고 무작정 솔직하게 물었다. 장애등급 1급으로 전혀 안 보인다고, 3급 정도일 거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는데 1급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그랬더니 김정 씨는 그런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며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었다. 외모 상으로는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 모양이라고, 아마도 뇌병변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선 언어장애가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다고 말이다. 실제로 계절의 영향에 따라 몸 전체가 경직되는 기간에 접어들었다며, 그는 자신의 장애증상에 관한 몇 가지 부연설명을 진지하게 덧붙였다.

 

   
 

저의 인생 역사는 딱 10년!

“인생에 대한 사회적 장벽을 느끼고 또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다 보니까, 실제로 하고 싶은 게 없어지고 의욕마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답답함이었어요. 제가 머물러 있던 곳이 3층이었잖아요. 어린 시기를 벗어나 뭔가를 해야 할 나이가 됐는데, 나이 스물을 넘어서면서부터 당장의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는 걸 견디지 못했어요. 그때가 혈기왕성하던 시기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세상을 직접 보고 싶었어요. 간간이 몇 번 나가다 보니까 ‘아, 이런 계기와 기회가 이렇게 많이 있는데?’ 하는 새로운 부분들도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했죠. 다른 친구들이 나오는 걸 보면, 저보다 더 심한 친구들이 오히려 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분명히 저 친구들보다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갈증이 정말로 심해졌다는 거죠.”

그때가 2003년 무렵이었는데, 당시 접하게 된 정보 하나가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터닝 포인트’로 기록되어야 할 것 같다. ‘정립회관’이라는 곳에서 전동휠체어를 분양한다는 것, 단 3대를 분양하는데 인터넷으로 신청서를 잘 써야 한다는 것, 특히 그 휠체어로 자신이 하고 싶은 욕구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 - 컴퓨터는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았기에, 김정 씨는 그 소식을 듣게 된 후 자신 있게 준비해서 신청을 했단다. 신청서류 심사는 통과됐고 직접 방문해서 진행하는 면접까지 잘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4등으로 결론이 나서 탈락됐다고 한다. 그런데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할까? 그를 면접하러 왔던 심사위원이 그를 좋게 봤는지, 수동휠체어를 개조한 여분의 전동휠체어를 개인적인 권한으로 선정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 투쟁 아닌 투쟁을 하게 됐어요. 제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선물을 받게 된 건데…. 그래서 ‘저 전동휠체어를 무용지물로 만들 거냐? 나는 1층에 있어야 한다. 내가 자유롭게 나갈 수 있어야, 그나마 저것을 활용하며 살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나는 1층으로 내려갈 거다.’ 그렇게 하며 거의 밥을 굶어가면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1층에서 생활하게 된 지가 딱 10년이 됐네요. 저희 집이 있던 같은 건물 1층인데, 좀 힘들게 무리를 하셨지만 그렇게 저의 자리를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렇다면 ‘첫 외출’이라는 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럼요!” 온라인의 만남에서 하던 정기모임이 있었는데, 비장애 도우미 회원들이 차량을 이용해서 그를 데리러 왔단다. 모임 장소는 일산 호수공원이었고, 아들의 첫 외출을 걱정한 어머님께서 마침 일이 없던 일요일이라 동행을 하셨다고 한다. 그는 당시 엄청 긴장했었다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지금이야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도 즐겁게 대화 나누며 잘 지낼 줄 알지만, 당시엔 인터넷상으로만 친할 뿐 직접 만난 적 없던 이들을 마주대한다는 게 적잖은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저의 의지로 나오긴 했는데, 뭔가 불안한 건 분명 있었어요. 그런데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예뻤어요.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나 동경하던 그런 풍경들이 바로 앞에 있다는 건 엄청난 희열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어머님 손에 이끌려서 다녀야 한다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혼자만의 외출을 할 수 없다는 게 더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 모임부터는 저 혼자 나가겠다고 했고, 실제로 혼자만의 외출을 실행하게 됐어요. 그렇게 밖으로 나오게 된 지가 딱 10년이 됐네요. 저의 역사는 그렇게 10년이에요. 제 모든 인생에서 바깥 활동은 이제 10년차가 됐다는 거죠.”


 
‘맨땅에 헤딩’, Let’s go!

그럼 모임도 아닌, 누구의 동행도 아닌 혼자만의 외출은 언제 처음이었을까? 전동휠체어 운전 연습을 위해 집 밖으로 나왔던 때였는데, 완전한 초보운전이었기에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었단다. 그런데 때마침 정립회관에서 전동휠체어를 분양 받은 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 참가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한다. 멘토 역할을 해주시는 분과 함께 지역을 오가며 체험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거주지에서 정립회관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법과 여러 활용법 등을 배우며 익히게 됐다고 했다.

그럼 세상에 대한 뒤늦은 경험이 아니라, 직접 무언가를 ‘하겠다’ 내지 ‘하고 싶다’는 결심은 언제 어떤 계기로 생겨나게 됐을까? 당시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였던 정립회관 민주화투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자신의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는 건데, 전동휠체어로 사회를 접한 지 반년 정도 지난 후에 터진 일이라 처음에는 ‘멋모르고’ 그냥 참가하곤 했단다. 사람이 좋고 사람과 함께하는 게 즐거워서 동참하긴 했는데, 이상하게도 당시에 있던 여러 조직 같은 데는 끌리지가 않았다고 한다. 분명 잘 아는 이들이 많이 참가한 조직들이었는데도, 그쪽으로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오히려 그런 쪽보다는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해도, 이제 막 시작하는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그냥 시작하고 싶었던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아예 맨땅에 헤딩하듯이 아는 사람이 없는 게, 오히려 제가 자립하기엔 더 좋겠다고 판단했다는 거죠. 사실 운동적인 것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저의 자립을 위해 한 거예요. 맨땅에 헤딩해 보자는 거, 그래야만 일도 빨리 배우고 뭐든 빨리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 실행했던 게 센터를 세우는 일이었어요. 집에서 나와 서울지하철 5호선을 타고 한 시간을 가면, 고덕역 인근에 자취방 하나의 공간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중증장애인 몇 명이 모여서 준비모임을 만들었던 게, 바로 강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시작이에요. 제가 그 센터의 초기 멤버인 셈이죠.”

지금과 같은 ‘협의회’ 체제가 없던 시절에 단독적인 결정으로 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다는 건 사실 굉장한 결단이 필요한 일인데, 당시 그 센터가 지향했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처음부터 대정부 투쟁 등의 선명성을 강조했던 걸까? 그건 아니란다.

   
 

“무슨 투쟁 이런 게 아니라, 그런 걸 실행하기 이전에, 정말로 그냥 밖에 나오기라도 해보자는 게 설립 목적이었어요. 지역 장애인들을 나오게라도 만들어 보자, 다가가서 얘기라도 한번 해보자, 센터의 역할이라는 게 과연 무엇이냐, 그런 것부터 고민하며 시작했던 거죠. 센터를 만들고, 사무실은 당시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 안에 책상 하나 놓고 같이 공생을 했어요.”

일반적으로 지역의 시민단체나 진보정치단체와 손잡고 운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역시 그런 방식을 적절히 선택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중앙무대’로의 진출은 언제 이뤄진 걸까? 2004년 말 즈음이라고 기억된단다. 정립회관 투쟁 때 약식집회가 참 많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이런 제안을 계속했다고 한다. ‘장애인운동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들이 너무 고정되어 있으니까 너무 식상하다.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니까 네가 한번 해봐라.’

“쉽게 말해 ‘새 피를 수혈하겠다’는 건데, 저는 절대 못한다고 했어요. 그때는 정말 숫기 없는 사람 중 하나였거든요. 바깥 활동을 한 지 1년도 안 된 새내기라서 못하겠다 했는데, 언어장애도 없어 의사전달이 확실하니까 끝까지 제가 해야 된다는 거예요. 당시엔 정말 저는 말주변이 없었거든요. 마이크를 붙잡고 그냥 덜덜 떨었죠. 행사 진행순서도 다 잊어버리기 일쑤였고…. 그런데 몇 차례 반복하다 보니까 노하우 비슷한 게 생기더라고요.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생각될 무렵이었는데, 그 다음해에 곧바로 중앙무대 위로 제가 올라가게 했죠.”

 

다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

2005년 8월로 기억된단다. 당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전국장애인대회가 열렸는데, 전국단위의 집회에 ‘누군가’가 그를 사회자로 올려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행진을 따라갔는데, 도착한 곳은 서울시청 앞이었다는 것 ? 그날의 그 집회를 기점으로 해서 참석의 빈도가 높아지다 보니, 1,2년 지난 뒤부터는 대오에 섞여 있는 게 아니라 앞에 나와서 주도를 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됐단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지금의 ‘장애인권활동가 김정’의 삶이 만들어졌다는 건데, 그렇다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가장 보람 있던 일이 있다면 무얼 얘기할 수 있을까.

   
 
“일단 생활하는 게 많이 바뀌었죠. 예전 제가 처음 밖에 나올 때와 지금의 환경을 비교해 보면, 거리에서 정말 장애인들이 많이 보여요. 휠체어를 타거나 스쿠터를 타거나 어떻게 다니든 간에, 사람들이 정말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죠. 예전에는 아주 가끔 보였고 불필요한 시선을 끌기도 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다니고 대중의 시선도 훨씬 자연스러워졌어요. 그런 걸 보면서 ‘야, 정말 하긴 잘한 것 같다. 지난했던 투쟁을 참 잘 만들어온 것 같다. 나도 거기에 한몫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장애인노래패 ‘시선’은 언제 어떤 인연으로 참가하게 된 걸까? 2008년 3월부터 활동하게 됐는데,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단 장애운동 자체가 계속된 일의 연속이고 이슈만 이어지는 것 같아, 개인적인 활동이 별로 없다는 게 아쉬웠단다. 특별한 취미생활도 없어서 뭔가 다르게 표현되는 게 있지 않을까 싶던 차에 말 그대로 ‘시선’이 ‘시선’에 들어왔단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노래패였지만 ‘내 것’이 아닌 제3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아, 저 활동은 나도 할 수 있겠는데?’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고 한다. 원래 노래를 좋아했고 노래방도 즐겨 찾았기에, ‘시선’의 활동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 같단다.

“제가 아까 ‘맨땅에 헤딩’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사실 자립적인 사회생활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봐요. ‘밖에 대한 동경’은 누구에게나 있고 분명 비슷한 욕구가 있을 텐데, 그걸 장애인들만의 문제라고 단정하는 건 맞지 않죠. 그 욕구를 받쳐줄 수 있는 바탕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부모가 됐든 형제가 됐든 활동보조인이 됐든 누구든 간에, 그런 조력자만 있다면 다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욕구는 사실 어떻게 풀어내느냐의 문제예요. 그런데 그걸 풀어내는 방법을 모르는 거고, 어떻게 시작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게 현실인 거죠. 저처럼 무모하게 시작하는 것도 답이라고 볼 순 있겠지만, 저는 그게 무조건적인 답이라고 보진 않아요. 제도화된 틀이 있다면 훨씬 쉬워지겠죠. 조력자가 있다면 더욱 쉬워지는 것이고요. 그런데 그런 장치가 너무 미비해요. 일정한 틀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김정 씨의 발언은 진지했다. 그 스스로도 가족 구성원 안에서 치열하게 부딪친 뒤에야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지 않았던가. 혹시라도 동경과 욕구만 간직한 분들이 계시다면, 주변에 도움이 될 손길들이 정말 많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단다. 지역에 센터가 있고 시민사회단체도 있기 때문에, 게다가 굳이 단체가 아니어도 믿을 수 있는 이웃이 존재한다면, 개인에게도 도움의 길을 받는 게 가능하니까 먼저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단다.

“지금까지의 장애인운동은 사실 ‘절실함’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저는 생각해요. 사실 작년부터 아주 깊게 고민하는 게 있어요. 운동의 방향이 맞는지 다시 고민하고 있고, 제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지도 고민하고 있거든요. 만약에 문제가 있다면 그게 구조적인 문제인지, 사람들의 문제인지, 아니면 저 자신의 문제인지도 살펴보려 노력하고 있어요. 생각이 유연해야 하는데 그 유연함을 많이 잃은 것 같다는 점도 함께 고민하고 있죠. 우리의 운동이 단기간에 끝날 리 없기에, 더 많은 중지를 모으는 노력을 함께 해나가야 된다고 봅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시면 좋겠네요.”

 

작성자대담 이승현 기자 / 정리·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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