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는 여러분이 ‘말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본문
“2001년에 설립된 기관이기에 인권위원회는 이른바 ‘좌파정부’의 유산이라는 단세포적인 정치논리의 포로가 된 나머지, 1993년 유엔총회의 결의에 부응하여 설립된 기구라는 것, 권고결의 당시에 국가인권기구를 보유한 유엔위원국이 5,6개국에 불과했으나 15년이 지난 오늘에 120개국으로 급증한 사실을 감안하면, 그 누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더라도 필연적으로 탄생했을 기관이라는 사실은 추호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국제인권의 추세에 둔감한 정부이기에 지난 3월 말에는 ‘효율적인 운영’이라는 미명 아래 적정한 절차 없이 유엔결의가 채택한 독립성의 원칙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기구의 축소를 감행함으로써 또다시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의 남용과 부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일, 그것이 인권위원회의 본연의 소임입니다. 모든 국가기관을 대리하여, 약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대해 고언을 제공하는 일, 그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강자와 다수자에게 생길지 모르는 약간의 불편을 무릅쓰고라도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국가. 인권국가, 법치국가의 본령입니다. 인권의 본질은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인권의 길에는 종착역이 없다는 사실을. 또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정권을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우리들 가슴 깊은 곳에 높은 이상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의연하게 걸어갑시다. 외롭지만 떳떳한 인권의 길을.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이 분노와 아픔은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한 작은 시련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다집시다. 제각기 가슴에 품은 작은 칼을 벼리고 벼리면서, 창천을 향해 맘껏 검무를 펼칠 대명천지 그날을 기다립시다.”
지난 2009년 7월 8일에 발표된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안경환 위원장의 이임사를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읽어보게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반강제적으로 물러나게 된 전임 위원장의 이임사 내용은 지극히 옳고 당연한 본질을 담고 있으나, 실제 현실은 갈수록 왜곡되며 퇴보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인권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지탄을 받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본래 설립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건, 작금의 세상을 제대로 직시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함께걸음>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 밖으로 비춰지는 인권위와 내부의 인권위가 얼마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직접 살펴보기로 했다. 서울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소장과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하 여장연) 상임대표를 거쳐, 장애계를 대표하는 인권위 상임위원직을 수행하고 있는 장명숙 상임위원을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만난사람’의 지면에선 경험할 수 없었던, 이론 중심이 아닌 감성 가득한 그의 속마음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 같다. 그 대화 내용을 여기에 옮긴다.
연말연시 무척 바쁜 일정을 보내고 계실 텐데, 이렇게 인터뷰 요청을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 대선정국도 끝이 났는데, 인권위 차원의 변화 움직임은 감지되는지 궁금하다
모 일간지를 보니까 앞으로 인권위를 강화하겠다는 기사가 나왔다. 정권 교체기에 으레 나오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얘기가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단 중요한 것 같다. 아예 언급조차 안 되는 것보다는 나은 게 아닌가.
인권위의 지도부랄까, 인적 구성원의 교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도 기대는 하고 싶다. 그런데 기대를 하면 실망도 많이 하게 되지 않은가. 기대라는 건 남모르게 하는 거다.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간직해야 하는 건데,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인 다짐이지만, ‘기대보다는 내공을 많이 쌓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진짜로 많이 한다. 기대가 잘못 표출되어 분노로 표현될 때도 많지 않은가. ‘기대가 아니라 내공이다.’ -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 이것이다.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씀인 것 같다. 우선 독자 여러분을 위해서 상임위원님은 인권위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그 명칭 속에 다 담겨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다. 상임위원들은 국가의 모든 인권 분야에 관한 여러 정책을 함께 다룬다. 민원인으로부터 진정이 들어오면 조사관들이 진정 들어온 것에 대해서 조사를 다 하고, 소위원회에 올린 다음에 다 함께 협의를 한다. 권고를 해야 하는지 의견표명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인권위법에 따라서 이것을 각하시켜야 하는지 기각시켜야 하는지, 이런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리는 임무를 수행한다.
여장연 상임대표로 계시다가 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오셨는데, 업무에 임하는 자세 같은 것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듣고 싶다
제가 처음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소장으로 근무할 때는 지적장애여성 위주로 바라봤는데, 사무처장이 되고 여장연 상임대표가 된 뒤로는 확인해야 할 장애영역이 확 넓어지지 않았나. 내부는 물론 외부로 시야가 넓어지면서 장애인에 대한 모든 사안을 바라봐야 했는데, 사실 인권위에서는 장애가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인권이라는 그 수많은 주제가 다 열려 있기 때문에, 상임위원은 그 모든 주제와 정책 들을 거의 다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신문이나 방송뉴스에 나오는 것도 많지만, 거기에 나오지 않는 것들까지 살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여장연 상임대표 시절과 가장 다른 점은, 여기서는 결정문이라는 걸 가지고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것으로 변화를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정문으로 효력이 발생할 때는 뭔가를 바꿀 수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뿌듯함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업무의 영역이 너무 넓어서 부담이 되진 않으신가
제가 장애계 대표로 왔기 때문에, 이 일만큼은 확실히 철저하게 해야 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 같은 걸 가지고 있다. 부담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여장연 상임대표 당시에도 저 자신이 공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여기에 온 뒤로는 그 이상의 생각과 다짐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내가 나의 것이 아니구나.’ 이런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최근에 큰 문제가 됐던 원주의 장아무개 목사 사건은 인권위의 결정이장 목사의 구속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바 있다. 굉장히 큰일을 하셨다고 평가한다. 법망을 용케 잘 빠져나가던 인물이었는데, 인권위의 결정과 권고가 내려지자 무려 일곱 가지의 죄목으로 구속됐다고 한다
우리는 변론할 기회를 준다. 제가 위원장으로 있는 장애인차별시정위원회에선 피진정인에게 반박이나 변론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 목사도 와서 변론을 했는데, 그 자리에선 정말 너무너무 천사와 같은 언행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런 예처럼 한 인간으로서 한 인간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한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 어느 일면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를 항상 바라봐야 하는 게 상임위원의 역할이다.
장애차별 문제를 상임위원님 중심으로 풀어나가겠지만, 위원님 생각과 다른 위원들의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다. 위원님의 판단을 따라오지 못하는 측면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건 상대적인 것 같다. 제가 장애문제가 아닌 다른 분야를 볼 때는 저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가능한 한 협조하려 노력하지만, 장애차별문제는 제 의견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편이다. 다른 침해구제위원회나 차별시정위원회 등이 있지만, 실제로 거기보다는 장애인차별시정위원회가 더 절실하다. 더 간절한 내용을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듣기로는 인권위 민원의 상당 부분이 장애 관련 민원이라고 한다. 비율로 따진다면 어느 정도가 되는지 알고 싶다
2011년에 286건인데, 1년 사이에 534건으로 권리구제율이 86.7% 증가했다.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다른 위원회에 50건이 있다면 장애인차별시정위원회는 100건이 항상 넘는다고 보시면 되겠다. 제가 처음 인권위에 왔을 때, 인권위 전체 진정의 60%가 장애인 진정이었다.
그 정도라면 인권위가 ‘국가장애인인권위원회’라 불려도 될 수준 아닌가. 장애가 주가 되고 나머지가 부수적이 되는 수치인데, 장애를 담당하는 인력이 훨씬 더 많아져야 할 것 같다
인원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늘어나는 진정사건에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인권위 인력이 대폭 축소됐지 않은가.
호주나 다른 나라들 같은 경우는 차별에 대한 진정 중에서 고용에 대한 진정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고용현장에서의 승진차별이라든가 임금차별 이런 식이 주를 이룬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적은 편이다. 그건 아마도 상대적으로 실제 고용되어 있는 확률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판단하고 있다. 호주처럼 그렇게 되려면, 제 생각으로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지금 들어오고 있는 차별의 진정을 보면, 아직도 이런 걸 차별하는 나라인가 싶기 때문이다. 인권에 관한 한 우리나라의 인식과 수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일의 현장에 장애인들이 많다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을 것이다.
좀 까다로운 질문일 수 있겠다. 인권위 상임위원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 인권의 실제 수준은 어느 정도인 것 같은가
장애인 인권 수준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인권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저의 관점으로는 인권이란 노력하는 것이다. 말로 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한 개인이 인권의식을 갖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인권은 ‘인위적으로 너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거’, 저는 그것을 인권이라고 본다. 인위적으로 보면서 생각한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장애인에 대한 인권을 거론할 때, 대개는 ‘불편한 사람들’이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불편한 것을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진 않다. 불편한 우리를 본다는 거…, 그 ‘불편’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인식 수준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불편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 우리의 인권 수준은 그 정도일 뿐이다. 아직은 그런 것 같다. 그냥 ‘삶을 같이 사는 이웃이야’, 이렇게 말을 왜 못하는가.
아주 좋은 말씀을 하셨다. 같은 대상을 대하면서도 어떻게 표현하고 받아들여지는지 여부에 따라, 실제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상임위원님의 의견에 동감한다
제 개인적인 소감 몇 가지를 남겨드리고 싶다. 제가 장애계에서 처음 일을 하게 됐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는 장애인 아니다.’였다. ‘네가 장애인? 네가 무슨….’ 장애계 안에서조차 이런 말을 들으며 지냈다는 것이다.
그건 무슨 말씀인가? 상임위원님은 보행에 불편이 있는 장애를 가지고 계시지 않은가. 중증장애가 아니라서 배제한다는 뜻이 되는 건가
결론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중증이 아니라는 이유로 저를 장애인 취급도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다. 저는 중간지대를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 속에서 저는 심한 장애인이었다. 중증 속에서는 ‘네가 무슨 장애인이냐?’ 이러는데, 사실은 저는 중증 속에서 더 많이 살았던 게 아니라 비장애인 속에서 대부분의 지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너무나 철저하게 이 땅의 장애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정말 놀림을 당할 만큼 당했고, 그렇기에 경증장애인들 대부분은 자기 정체성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저도 장애인이 아니고 싶다. 아니, 아니고 싶었다. 그렇게 비장애인 속에서 그런 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더 오래인데, 막상 장애계에서는 ‘네가 무슨 장애인이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제가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소장이 됐을 때도 ‘장명숙? 장애계에 이름도 없는 애가 직책을 맡고 있다더라’는, 실제 들었던 얘기들은 그런 내용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처를 받으셨을 것 같다. 왜 이 좁은 세계 안에서조차 서로에게 상처를 주려 하는지…, ‘비장애인 속에서 철저한 장애인이었다’는 말씀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인 것 같다
제가 장애계에 와서 활동하면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판단한 내용을 말씀해드리고 싶다. 성폭력상담소장을 맡았을 때는 정말로 ‘이건 뭐야!’ 그러니까 ‘이런 일이 세상에 있다니!’ 치를 떨면서 ‘악!’ 하고 내지를 수밖에 없는 일들뿐이었다. 아주 초기 시절의 사건 하나를 예로 들어야겠다. 경증장애를 가진 30대 여성이 사무실로 직접 찾아왔다. 전화로 먼저 상담하고 우리가 찾아가는 상담을 진행하는 게 보통의 경우인데, 이 여성은 직접 찾아와서 ‘성폭력을 당해서 왔고 고소하고 싶다.’고 했다. 성폭력을 당했다고 직접 찾아온, 제가 만난 첫 번째 인물이었던 거다. 사실 굉장한 용기 아닌가. 그래서 상담일지를 내밀며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여성이 자기 이름을 못 쓰는 거다. 보장구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힘들게 보행을 하는 이 여성이 문맹(文盲)이라는 사실은 제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성폭력 문제를 전담하고 있던 때라 성폭력 문제해결이 최고라고 생각했었는데, 이후 제가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은 바로 교육문제였다. 그래서 저는 그때를 계기로 해서, 여장연의 모든 행사에는 자필로 쓰는 걸 하지 않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게 바로 차별이기 때문이다.
사실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해도 남성은 어떻게든 최소한이라도 교육을 시키려 하는데, 왜곡된 인식이 너무 크다 보니까 여성의 교육은 여전히 부진한 것 같다
저는 시골 출신이다. 그래서 그 여성에게 물어봤다. 왜 무학(無學)이냐? 도대체 어디에 살고 있기에 무학이냐? 그랬더니 서울에 산다는 것이었다. 너무 놀랐다. 그래서 학교가 가까운 데 없느냐고 물으니까, 가까운 데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당신처럼 예쁘고 똑똑한 사람이 왜 무학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단 한마디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이 사건을 정식으로 고소했고 우리가 승소를 한 뒤, 몇 달이 지났을 때 그 여성이 사무실로 다시 나타났다. 제게 와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하시라고 했더니, 사실은 자기가 이름을 쓸 줄 안다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럼 왜 그때는 못 쓴다고 했느냐 되물었더니…, 자기 나이 서른두 살인데 32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써보라고 했던 사람이 제가 처음이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크게 놀랐다. 32년 동안 살아오면서 자기 이름을 외부에서 쓸 기회가 단 한 번도 없던 여성이었다는 게 아닌가.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바로 교육이라는 점을 정말 절실하게 깨닫게 됐던 사건이었다.
충격적인 현실이다. 기본적인 교육이 이뤄져야 취업과 사회활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데, 처음부터 모든 게 차단된 상황에서만 머물렀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 교육과 취업은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본다. 배우고 일을 해야 자아가 생겨나지 않는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을 못하고 있을 때의 그 막막함과 막연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제가 처음 일을 가졌던 게 30대 중반이었는데, 그때까지 면접을 보러 가면 제일 많이 들었던 게 이 말이었다. ‘너, 걸어 봐!’ 이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뛰쳐나왔던 게 부지기수였다. 이런 하나하나의 모습들이 우리의 장애와 인권의 현주소였다는 것이다.
말씀을 들으면서 공감을 하는 게, 장애를 가진 분들한테 절대로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다들 무언가가 가슴에 담겨 있다는 거다. 그걸 드러내놓고 얘기하지 않을 뿐이다. 오늘 정말 좋은 말씀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내용들을 말씀해 주셨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여쭙겠다. 인권위에 장애 관련 진정이 가장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일부가 이걸 활용할 뿐이지 전체가 다 인권위의 가치를 안다고 보진 않는다. 인권위 상임위원으로서, ‘우리 국가인권위원회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고 항상 함께해 달라.’는 부탁 겸 조언을 마지막으로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께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독자 여러분 입장에서도 ‘내 편이 더 있구나!’ 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현재의 인권위가 어떤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막혀 있는 것 같지만, 일부 정치적인 소견 때문에 문제가 큰 것으로 비춰지지만, 인권위 자체는 막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곳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무슨 말이든 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비록 기각이 되고 각하가 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국가인권위원회라고 생각한다. 극히 개인적인 얘기지만, 저는 말을 아예 하지 않던 굉장히 내성적인 아이였다. 제가 그랬다는 건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밤에 잘 때 ‘엄마!’하고 부르면 ‘왜?’ 하며 답을 해주셨다. 그러면 저는 ‘엄마, 나 오늘 한마디도 안 했다.’ 그랬던 아이였다. 그런데 20대와 30대 초반까지도 그렇게 살았다는 거다. 하루에 한마디도 안 하던 아이…. 그런데 제가 변했다. 저는 다른 누구의 변화보다도, 저의 그런 살아있는 기억들이 더 생생하고 소중하다. ‘엄마, 나 오늘 말 한마디도 안 했어.’ 그렇게 자신감 없고 힘들어 했었다. 집에서는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밖에 나가서는 장애라는 것 때문에 한없이 작아져야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제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게 사회생활의 출발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마찬가지 의미로, ‘인권위는 당신이 말을 할 수 있는 곳이다.’ -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다. 그렇다면 인권위에 말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직접 방문하셔도 되고, 글로 해도 되며 전화로도 가능하다. 인권위 건물 7층에 있는 방문센터로 오시면 언제든 상담이 가능하다. 어떤 말씀을 하셔도 된다. 여러분이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권위라는 걸 잊지 않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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