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집 주소를 말씀드릴까요?
본문
지난 2010년 12월호 <함께걸음>의 화보 내용은 ‘탈시설자립생활 활동가대회 이음여행’ 현장 취재였다. 그 화보의 제목을 ‘탈시설은 내 인생 찾기의 시작입니다’라고 새겨놓았는데, 그 제목이 참 좋았다는 격려를 정말 여러 경로를 통해 반복적으로 전해 들었다. 제목 하나를 가지고 칭찬 비슷한 호응을 듣게 된 경우는 처음이라서, 나름 그 이유를 되새김질하는 기간이 얼마간 이어졌다는 게 솔직한 입장이다.
‘내 인생 찾기’의 시작은 ‘탈시설’이라는 거…, 너무나 당연한 걸 표현했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바로 그 현실’에 외면당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면서부터 마음은 적잖게 씁쓸해졌다. 그 제목이 좋았다는 칭찬과 호응 모두가, 오히려 ‘SOS’나 ‘119’와 같은 긴급구조요청의 외침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번 신년호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 인물이 바로 탈시설에 성공한 ‘1인’이라는 연락을 받는 순간, 객원기자 입장에선 반가운 마음부터 앞섰던 이유가 바로 그 대목이었던 것 같다.
장애를 느끼지 못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이번 겨울의 첫 한파가 몰아치던 어느 날, 이름 석 자와 전화번호와 주소 한 줄만 적힌 메모지를 들고 서울 성북구 어딘가로 향했다. ‘SOS’나 ‘119’ 같은 긴급호출이 아닌, 무언가의 해결책과 해답을 지닌 이가 저편 어딘가에 존재하리라는 생각 때문인지 발걸음은 가벼웠다. ‘사람사는 이야기’는 이렇듯 사람이 사는 실제 이야기로 채워져야 할 일 아닌가. 만남의 주인공이 있다는 건물 앞에 도착했고, 주소를 한 번 더 확인하는 전화 통화를 끝으로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공간 자체는 넓지 않았지만, 창문 전체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모든 실내가 환하게 빛나는 한가운데 자리에 이번 호의 주인공이 있었다. 처음 마주 대하는 순간, 초면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부터 확 다가왔다. 최근에 탈시설을 한 입장이라면 만날 기회가 없었을 텐데, 왜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까? 마음 한쪽에 물음표 하나를 찍어놓으며 인사를 나눈 뒤, 이번 취재의 의미를 설명했다. 끊이지 않는 넉넉한 미소가 친근감을 두세 배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아직은 어리둥절해요. 한 달 남짓 됐거든요.”
장희영 - 오랜 요양원 시설 생활을 정리하고 최근에 탈시설을 실천한 뒤, 지역사회의 1인으로 자리 잡았다는 그 사람. 이젠 그 주인공을 만났으니 ‘그는 누구인가?’를 집중적으로 파헤칠 일만 남은 건데, 정작 그의 입에선 아직 한 달도 채우지 못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좀 잠가달라는 부탁이 이어졌다. 첫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대답 비슷한 게 전해진 셈이다. 자신의 손길로는 휠체어 작동을 제어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 말이다.
“저의 부모님 하시던 말씀으로는 첫돌이 지나서 홍역을 앓았다는데, 시골 분들이라 빨리 대처를 못하고 변변한 병원도 없다 보니까 그냥 방치해 뒀나 봐요. 열이 많았다는데… 그 열 때문에 뇌성마비를 얻게 된 거래요. 지금 장애판정은 1급으로 돼 있고, 처음에는 4급 판정을 받았었어요.”
지금은 1급인데 당시에는 4급? 그렇다면 지금 상태가 훨씬 더 심해졌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단다. 완전히 ‘깡촌’이라 불리던 지역에서 태어나고 살아왔는데, 당시에는 남들 보기에 많이 불편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걸음걸이가 가능했었다고 한다. 동네 주민 모두가 다 아는 이웃이던 시절, 희영 씨도 초등학교를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단다. 몸도 불편하고 당시 오른손이 뒤틀려 있던 입장이었기에, 더군다나 몸이 많이 약한 상황이니까 1년 뒤 입학을 하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제가 학교 다니는 걸 무척 좋아하고 기대했었나 봐요. 그래서 딸이 저렇게 조르는데 통지서라도 나왔나 해서, 엄마가 출장소로 갔더니 마침 통지서가 나와 있었대요. 그래서 아버지를 설득해서 입학을 했대요. 또래들하고 잘 어울리고 곧잘 따라하면서, 개근상은 못 탔지만 6년 정근상은 탔어요. 몸도 3학년 때부터 조금씩 좋아져서 아이들하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짚더미에서 숨바꼭질놀이도 하고 남자애들하고 총싸움도 했던, 그랬던 기억이 나요.”
집하고 학교 사이의 거리는 희영 씨 걸음으로 10분 정도, 그때까지는 자신의 몸이 힘들다는 인식 같은 게 별로 없었단다. 한 마을 친구들이니까 항상 잘 어울렸고,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같이 자기도 하면서 스스럼없는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에 장애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된 건 중학교에 올라간 이후였는데, 그때까지 친하던 친구들이 새로운 얼굴의 다른 애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많아졌던 모양이다. 동네 개념이었던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는 인근 여러 마을의 아이들이 새롭게 뒤섞이게 되지 않은가.
“그러면서 소외감이라기보다는 저의 자격지심이라고나 할까요? 제 딴에는 그렇게 느껴진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공부를 악착 같이 했어요. 친했던 애들이 조금씩 멀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솔직히 힘들었거든요.”
▲ ⓒ채지민 객원기자 |
그런데 살던 지역엔 고등학교가 없어서 서로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희영 씨는 아는 얼굴도 없는 학교로 혼자 배정이 됐단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큰 도시의 학교로 갔고 얼마간의 애들은 상업계 쪽으로 가면서, 자기 혼자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로 가게 되니까 진짜로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고, 게다가 집이 아닌 객지생활을 나와서 해야 했기에 어려움은 훨씬 크게 느껴졌단다.
“상황 모두가 너무 힘들어서…, 그때 당시에 제가 저의 장애를 확 받아들였다고나 할까요? ‘나한테는 이런 장애가 있구나’ 싶은 그런 거 있잖아요.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친구들을 사귀어야 할 텐데… 어떡해야 할까? 그러다가 제 생각 끝에 교회를 갔어요. 교회를 가면 아무래도 좋은 친구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는 그때까지 힘든 거를 이렇게, 진짜 이런 얘기들을 친구들 앞에서는 전혀 안 했었어요. 뭐라 그럴까…? 부모님은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일을 하시고, 그런 걸 보며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 힘든 마음을 내색하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저 혼자 견디려고 노력했거든요.”
지금 시점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희영 씨는 스스로 담을 쌓고 살았던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단다. 그 와중에 천만다행으로 교회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참 많은 힘을 친구들로부터 얻게 됐다고 한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또래보다 성숙한 것 같았고, 생각하는 내용들도 자신과는 많이 틀렸단다. 그래서 고교 3년 동안 그 친구들에게 많이 의지하며 살았던 것 같다는, 그 얘기를 천천히 꺼내던 그의 눈길이 잠시 천장 어딘가를 맴돌았다.
어려움이 있다면 한 줄기 햇살이 비춰야 하는데, 우리네 인생에선 어려움 위에 또 다른 어려움이 다가와 덧붙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법이다. 희영 씨가 힘들게 객지생활을 하며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대학을 졸업한 큰오빠한테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단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비슷한 일을 잠시 하며 신변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학교생활까지는 건강했던 오빠의 입에서 허리가 이상하다는 말이 자주 나오게 됐다고 한다.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결과는 허리디스크로 인한 군 면제 판정!
군대를 안 가게 된 거야 좋든 나쁘든 개인의 문제일 테지만, 그 이후로도 허리에 힘이 없다는 하소연이 계속돼서 결국 지인을 통해 예약을 하고 서울대학교병원까지 가게 됐단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명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고, 신경계 질환이기에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 해서 시골집으로 되돌아오게 됐다고 한다. 허리가 약해지니까 다리가 말을 안 들어서 지팡이를 잡고 다녔는데, 지팡이로도 지탱이 안 될 만큼 다리가 떨려 걸음을 옮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단다. 그렇게 힘든 상황으로 내몰리던 무렵 이웃의 교회에 큰오빠 또래의 전도사님이 오셔서 친분관계를 갖게 됐고, 1년여의 시간을 보낸 뒤 오빠는 적극적으로 하나님 일을 해보겠다며 신학교 편입을 결심하게 됐다 한다.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는데 아버지는 확실히 밀어준다는 얘기는 안 하시고…, 옛날 분이라 무뚝뚝하잖아요. 그래서 관심 있으면 해보라고, 그게 전부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시골에선 소가 재산목록 1호잖아요. 아버지는 소를 팔아 등록금을 대주셨어요. 그런데 등록금을 낼 때마다 외양간의 소가 점점 텅 비어가는 거예요. 소들이 계속 빠져나가는데, ‘아, 이렇게 힘드시구나!’ 그런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제가 철이 늦게 들었던 거죠. 그래서 오빠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저는 저의 힘든 내색을 하지 못했어요. 정신도 없는 집안 상황이었기에, 저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할 형편도 아니었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결혼, 점점 안 좋아지는 몸, 결론은…
희영 씨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당시는,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은행에 취업하는 게 최고라고 여기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졸업한 옛 친구들이 취직을 해서 첫 월급으로 부모님께 무슨 선물을 했다는 식의 얘기가 돌던 시기였기에, 희영 씨 마음도 나름 불편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자리를 알아보려 애를 썼지만, 뜻대로 연결이 되는 게 없었단다. 그래서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집을 나와 친척집에서 생활하게 됐고, 서울과 수도권을 오가며 새로운 세상을 향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그때부터 제 다리가 서서히 약해진 것 같아요. 컴퓨터를 배우려고 학원을 다녔는데,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멀어도 그냥 걸어서 다니고 싶더라고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걷고 또 걸었어요. 그런데 다리가 약해진다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 전에는 계단도 쉽게 오르내리며 다녔었는데, 자꾸만 저도 모르게 길옆의 난간을 붙잡고 다니게 되더라고요. 저의 느낌에도 ‘어, 이게 아닌데 왜 이러지? 왜 다리가 자꾸 약해질까?’ 하지만 당시엔 부모님이 큰오빠한테 전적으로 매달린 상태였기 때문에, 저까지 어려운 일을 보태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 일을 얘기 안 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엄마한테 다리가 약해진다고 한마디만 했었으면, 그래서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다면….”
거기까지 말하다가 잠시 멈춘 채 정지해 있던 희영 씨의 두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잠시의 시간이 필요했다. 괜히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건 아닌지, 너무 깊게 들어가는 내용을 되새기게 만든 건 아닌지 걱정과 미안함에 뒤섞일 무렵, 희영 씨는 자신이 하던 얘기를 계속 이었다. 두 다리가 동시에 힘이 없어지다 보니, 혼자만의 위로 비슷한 걸 반복적으로 떠올렸단다. 이러다가 낫겠지, 몸의 에너지가 좀 더 충전이 되면 좋아지겠지, 몸이 좀 허해진 모양이다, 조금 지나면 다 낫겠지, 하면서 말이다.
그 시기를 거치면서 ‘정희영’ 인생의 전환기가 찾아들었다 한다. 고향의 복지관에서 추천한 어느 직업훈련원의 컴퓨터 교육을 받기로 결정이 돼서 새로운 환경과 분위기 속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거기에서 ‘인생의 누군가’를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정말 컴퓨터를 잘 다루는 어느 남자가 있어서 가르쳐 달라고 했고, 그렇게 만남과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정이 들어버렸단다. 그러다가 모든 교육이 끝나고 수료증을 받으며 작별의 악수를 나누게 됐을 때, 희영 씨는 왠지 오래 만나고 싶었던 그 남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단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냐’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말을 처음 꺼내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을 가지며 지낸 1년여 동안, 그 분이 제일 편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얘기 못했던 모든 걸 그 분한테만은 말할 수 있었다는 거, 그래서 저는 그 분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낙천적인 분이셨거든요. 숟가락 하나만 가지고 오라는데…, 그때 결심이 섰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순 없잖아요. 그 분은 다리만 약간 불편한데, 저는 얼굴에도 장애가 있었고 지금보다는 덜 심했지만 그래도 제가 느끼기엔 적잖은 차이점이 보이는 거예요. 예전 같은 자격지심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또한 결혼은 비용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가진 건 하나도 없고 부모님한테 받아야 될 형편인데, 그 모든 게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는 거예요.”
‘우여곡절’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사용되어야 할 용어가 맞다. 모든 난관을 뚫고 이겨내며 결국 결혼을 하게 됐고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아 가정의 행복을 잠시 느꼈지만, 희영 씨의 몸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상황이 돌변하게 된 모양이다. 아이를 어디 맡길 수도 없어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며 희영 씨의 건강까지 감당해야 했고, 생계를 위해 어렵게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며 노력했지만 ‘엎치고 덮치는’ 여러 일들이 연이어지면서 점점 더 어려움으로 채워지게 됐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알아봐야 할 입장으로까지 내몰리게 됐다는 대목에서, 희영 씨의 눈망울이 또 한 번 출렁거렸다.
“어쩔 수 없이… 아기아빠는 나름대로 애를 썼다고 봐요. 지금도 아기아빠한테 어떤 원망 같은 건 없어요. 제 건강이 워낙 안 따라줬고, 부모님마저 저를 감당 못하실 때 신랑으로서 끝까지 노력을 보여줬잖아요. 요양원 생활과 집으로의 외출 생활이 복잡하게 반복될 때… 어느 날 제가 먼저 얘기했어요. 이런 생활을 계속 못하겠다고, 나도 지치고 당신도 지치지 않느냐고. 그래서 헤어지자고…. 언제까지나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제가 느끼기에도 힘들어하는 게 계속 보이기에, 요양원에서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얘기했어요. 정리하자고….”
더 많은 내용의 마음 깊은 얘기를 희영 씨는 독백처럼 아니, 고백처럼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털어내야겠다는 듯이, 그의 입에선 그 누구에게도 언급한 적 없었을 것 같은 언어들이 쏟아지며 흘러나왔다. 취재의 당위성과 개인적인 사생활 내용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매번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당연히 ‘정희영 개인만의 프라이버시’가 우선이기에 굳이 활자로 옮기며 정리하진 않기로 했다.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 기록하는 걸 반기는 독자는 없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날씨는 너무 추워도 마음은 너무 따뜻한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한참 대화를 나눈 희영 씨한테 물었다. 사회로 다시 나온 뒤 어디어디를 방문해 봤냐고.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뜻밖의 대답이 이어졌다. 시설에서 나온 지 3주 정도 지났는데, 자신이 수동휠체어를 타기 때문에 활동보조 도우미가 도와줘야만 움직일 수 있다고. 그래서 시설에서 나온 바로 다음날 ‘이음여행’이라는 2박3일 행사에 처음 참가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이음여행이라고? 아하…, 처음 이 자리에 들어설 때 초면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 생각이 내내 마음속 한쪽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해답의 열쇠가 등장한 셈이다. 이음여행의 그 취재 자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며 계속 마주쳤던 ‘붉은 외투’의 1인, 그녀가 바로 정희영 씨였다는 의미가 아닌가.
▲ 지난 2010년 11월 서울여성프라자에서 2박 3일 동안 진행된 ‘이음여행’에서, 장희영 씨 (앉은 이 왼쪽)가 환하게 웃고 있다. (2010년 <함께걸음> 화보 수록 사진) |
시설 생활은 26살 때부터 바로 얼마 전인 39살까지 14년 동안 했단다. 14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님은 누구나 인정해야 할 대목이기에 다시 물었다. 우리의 이번 만남에선 ‘탈시설’이 주된 테마로 논의되어야 하니까, 언제 어떤 계기로 그 결심을 굳히게 됐는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요양원에 있던 동료들이 자립한다며, 현실을 박차며 처음 나갔던 게 7,8년 전의 일이라고 기억된단다. 그렇다면 그 이후로 탈시설을 선언하며 사회로 나간 분들은 누가 있냐고 또 물으니까, 이 이름 저 이름이 여럿 등장했다. OOO, OOO 등 모두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넓고도 좁은 게 세상이라더니…, 그동안 현장에서 마주쳤던 이들이 희영 씨와 같은 공간에서 지냈던 면면들이었다는 의미로 남겨지는 것이다.
“저는 이것저것 신중하게 따지는 스타일이거든요. 제 몸 상태를 먼저 고려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시설) 안에 있을 때, 안에서 일하는 분들이 이런저런 말씀을 저한테 해주셨어요. ‘너도 이젠 나가서 같이 움직이며 살아야 할 텐데.’ 다른 한편으로는 ‘희영이는 몸 상태를 봐선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너무 다그치면 안 돼.’라고요. 그런 얘기들이 반복적으로 저한테 던져졌어요. 그런데요. 다 어딜 가나 자기 할 나름이잖아요. 요양원이 수용시설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충분히 웃을 수가 있거든요. 모든 건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거라서, 요양원 안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내부의 비리 같은 소식도 끊일 만하면 다시 들려오는 나날 또한 이어졌단다. 오랜 기간 들어왔던 게 워낙 많아서 예를 들며 말할 게 몇 가지 있다며, 희영 씨는 큰 사고 같은 일들을 잠시 나열했다. 이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내용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직접 생활했던 이들만 알고 있을 법한 사실 몇 가지도 세세한 설명과 함께 추가됐다. 요양원은 생각 없이 살면 딱 좋은 곳이란다. 아무런 생각 없이 주는 밥 먹고 잠을 자고, 진짜 육신이 편하게 쉴 곳은 그런 곳이 딱 좋은 장소란다. 처음에는 진짜 그런 마음 하나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냥 편하게 있다가 눈 감지, 뭐.’
“그런데 이게 자꾸만 내 자신이 사람 같지 않은 거예요. 뭘 하나 사려고 해도 일일이 신청하고 허락을 받아야 내 돈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뭐든지 내 의지대로 하려고 하는 게 안 되는 거라고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내 마음대로 먹어야 하잖아요. 활동보조의 손을 빌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건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 있다 보니까 진짜 하고 싶은 건 하나도 할 수 없고 할 만한 것마저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예요.”
옷을 줘도 (진짜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었단다. 늘 헐렁한 운동복 아니면 아동복 위주로 나왔다고 한다. 어디서 어떻게 구입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옷 같지도 않은 옷들을 방마다 던져주듯 배분했단다. 입으라고. 또한 입히라고. 내부적으로는 열심히 고민했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장애우들한테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물품들이 선심을 쓰듯 지원되곤 했던 모양이었다.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제가 적극적으로 생각이 바뀌게 됐어요. 저 나름대로 사회에 나와서 사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건가. 옛날처럼 생각을 해본다면 솔직히 별다른 게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보다 몸이 안 좋다면 하다가 알아서 쉬면 될 일이고…,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깊어졌던 거죠.”
요양원이라는 시설에 들어가기 전, 26년이라는 긴 세월의 사회 경험이 희영 씨한테는 크나큰 자산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냥 천천히 하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내부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젖어든 다음부터는, 그마저도 선택의 어려움을 안겨줬던 모양이다. ‘사람이 환경을 만들지만,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이 이럴 때 등장해야 할 해답이자 명제가 된다.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거, 정말로 하게 된다면 악역 비슷한 역할을 맡고 싶다는 거…. 희영 씨는 그런 생각을 늘 떠올리며 지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탈시설에 성공한 이후,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에 자신의 삶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말해달라고 했다. 나름 조심스럽게 물었던 건데, 그 질문을 듣자마자 희영 씨는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담으며 난데없는 대답을 꺼냈다. “저기 수첩을 꺼내 보세요.” 수첩이라고? 무슨 수첩이냐 되물으니까, 자신의 파란 가방 안에 담겨 있는 빨간 색깔의 수첩을 꺼내 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 안에 있을 땐 금전관리를 못했잖아요.” 그의 음성이 흐르는 동안, 펼쳐든 수첩 안에는 눈에 확 띄는 내용들이 빼곡 담겨 있었다. ‘오렌지주스, 결명자, 다진마늘, 계란, 다시마, 설탕, 요리당, 야채, 자반고등어….’
자신이 구입한 목록이란다. 수첩의 다음 면에는 ‘조각케이크’가 진하게 적혀 있었다. “이런 걸 체험 못해 보잖아요.” 그 다음다음 면에는 ‘돼지고기’, 그 다음 면에는 ‘친구들과 커피 마신 날’, 며칠 후인 11월 OO일자 메모에는 ‘통장 개설, 체크카드 만들기, 전입신고, 등본 발급, 수급자 신청’ 같은 내용이 이어졌다. 이게 다 계획대로 진행한 거냐고 물으니까 맞다고 한다. 전부 다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직접 나가서 한 것이고, 그걸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란다. 물론 글씨는 도우미의 손길을 빌리긴 했지만 말이다.
“제가 수동휠체어라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못 움직이니까요. 대신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많아요. 예전에 요양원으로 봉사활동 왔던 동생들이 집에 왔다갔어요. 저기 벽시계를 사주고 갔거든요. 목사님도 늘 방문해 주시고, 엊그제는 아는 사람들과 함께 시립미술관도 갔다 왔어요. 전에 바깥의 생활을 해봤으니까 낯설진 않아요. 지하철을 탄다든지 그런 건 낯선 게 없는데, 단지 휠체어를 이용해서 이동해야 한다는 거, 예전에는 걸어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지하철을 이용했었는데, 지금은 계단도 이용 못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며 이동해야 한다는 거, 그런 게 달라진 거죠.”
탈시설을 결심하고 실천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아직까지 꿈속엔 시설 안의 생활이 지속되고 있지만, 시설에서 생활하는 분들한테는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단다. 적극적인 생각을 하라고, 밖에 나오면 개고생(?)을 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 고생을 할 각오를 하며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가 제일 중요한 거라고.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약에 나오고 싶고 나올 일이 생긴다면 “장희영이를 이용해라!” 이렇게 말해주고 싶단다. 탈시설의 삶을 현재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바탕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 주고 싶다는 것이다.
모든 대화를 마친 뒤, 이 월간지가 발간되면 책을 발송할 주소를 알고 싶다고 물었다. 희영 씨는 오늘 봤던 모든 표정 중에서 가장 밝은 눈빛으로 환하게 웃음 지었다. “저의 주소는요. 서울시… 성북구… OO동… OOO… OOO…이에요.” 그 주소를 받아 적고 난 뒤, 작별의 인사를 전하기 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의 만남 중에서 희영 씨가 가장 예쁘고 아름답게 느껴졌던 순간은, 바로 자신의 주소를 얘기하던 그 시간의 그 모습이었다고.
▲ ⓒ채지민 객원기자 |
“지난 12월 OO일 저녁에 눈이 굉장히 많이 왔잖아요. 저녁 때 자립생활 교육을 끝내고 나오는데, 눈이 정말 엄청나게 오는 거예요. OO씨(도우미)가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는데, 다리에 눈이 쌓이고 머리에도 쌓여서 제가 눈사람이 되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예쁜 젊은 여자 분이 우산을 씌워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앞길 중간까지 왔는데, 그 분이 자기는 반대쪽으로 간다면서 저한테 우산 쓰고 가시라며 우산을 주시더라고요. 그때 너무 따뜻했어요. 날씨는 너무 추웠는데, 마음이 너무 따뜻한 거야. 그래서 아는 사람한테 이 얘기를 인터넷에 올려달라고 부탁했거든요. 밥 한끼라도 사드리고 싶어서요. 그 내용을 보면 꼭 연락을 달라고요.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정말 연락을 주세요. 정말 진짜로 꼭 만나 뵙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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