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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세상을 향해, 세상 속으로 나오세요!

[사람사는 이야기] 한국작은키모임 회장 김세라

본문


  ‘한국작은키모임 회장, 김세라, 010-XXXX…’

  이번 달 역시 객원기자 1인에게 전해진 정보는 딱 세 가지였다. 무엇을 하는, 누구, 전화번호, 그 나머지는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편집부 취재기자의 미안함 2% 섞인 전화기 속 목소리가 전부이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긍정적인 기대감이 생겨나야 즐거운 일 아닌가. 첫 만남 자체가 마지막 만남이 되는 경우가 있는 만큼, 초면의 인사를 나누는 순간부터 기나긴 인연을 떠올리게 될 경우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 몇 가지로 만남의 준비를 시작했다. ‘한국작은키모임’이 어떤 단체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우선 살펴본 뒤, ‘작은키’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이리저리 확인해 봤다. 저신장(short stature)이라 하고, 왜소증이나 성장장애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같은 연령대의 정규분포 100% 중에서 3% 미만의 신장일 경우 저신장증이라 부른다는 것, 질병 없이 부모의 키가 작거나(가족성 저신장) 사춘기가 늦게 오는 체질성 사춘기-성장 지연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앞의 두 가지는 비장애로 분류되는데, ‘성장 장애’의 경우가 장애의 범주에 포함된단다. 호르몬 장애, 골격계 이상, 염색체 이상일 경우 등 그 증상의 종류 또한 많은 것 같았다.

  작은키의 의미는 일단 정리했으니, 다음 단계는 ‘김세라’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전화를 걸었다. 받는 이 없어 1차 접촉(?) 실패, 얼마 후 2차 시도에서 접선(?) 성공! 그런데 전화기 속 상대방은 첫 음성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성격과 인생 모두를 다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하, 안녕하세요!” 굉장히 활달한, 낙천적인, 일면 도전적인, 또한 긍정적인 인생을 사는 것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이어졌다.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난 뒤, 통화를 마치면서 떠오른 생각은 딱 한 가지였다. 만남의 자리에서 왠지 대화가 빠르고 진지하며 화끈하게 진행될 것 같다는, 그래서 모든 대화의 마무리는 소주잔을 맞대는 건배로 끝날 것 같다는 그런 즐거운 예감 비슷한 것 말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왜 나만 제외시키는가

  이튿날 약속장소인 서울 여의도 모처의 카페로 향했다. 10분 넘게 늦어서 허둥지둥 뛰어갔는데, 그의 첫인사는 낯익은 음성으로 똑같이 울려 퍼졌다. “아하, 안녕하세요!” 상대방의 얼굴빛이 환하면, 늦게 간 미안함이 한파주의보의 수은주처럼 뚝 떨어지면서 바닥 어딘가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혼자서 대화와 녹취와 사진 촬영을 모두 다 담당해야 했기에 음료를 주문하고, 카메라를 준비하고, 녹음기를 켜고, 질문지를 꺼내놓고, 그 와중에 첫인사의 덕담까지 나누면서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러는 짧은 시간 동안 첫 만남인 상대방 이미지는 아주 단순하고 깔끔하게 정리됐다. 대화가 통할 사람이라는 것!

  자신은 희귀질환으로 분류된 저신장장애 중에 연골무형성증이라고, 자신이 태어난 1968년 당시엔 지금 같은 의학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태어난 다음에야 장애가 확인됐다고, 그래서 선천적 장애라고, 2녀 1남의 첫째인데 늦게 가진 첫 아이라서 어머님께서 임신과정에 굉장히 조심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그런데도 조금 다른(?) 아기가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굉장히 많이 놀라셨던 것 같다고…. 그는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사항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취재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철칙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탄생에 대한 그의 언급이 일상적으로 ‘아무한테나’ 발언하는 수준인지, 아니면 ‘누구한테만’ 표현할 수 있는 마음속 사연인지는 어렵지 않게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 고백’은 당연히 후자에 속하는 내용이 될 일이다.

  “보통 신생아가 태어나면 신체비율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 신체비율에 비해서 유독 몸이 작고, 게다가 머리는 또 유난히 크고, 그래서 맨 처음에 의사가 저를 받아서 보자마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자체적으로 검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보여드렸대요. 어머니께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시게 한 다음 저를 보여드렸다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만 해도 저신장장애는 많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었잖아요. 더군다나 소아마비 같은 경우에도 처음 태어날 때는 그 증상이 없다가 후천적으로 닥치는 건데…, 저는 태어날 때부터 외견상 모습 자체가 차이나는 상태였기에… 어머님이 많이 놀라셨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자신의 신체적 상황을 언제 처음 장애라고 인식하게 됐을까?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됐단다. 이 대목에선 그가 전한 부연설명이 약간 첨부돼야 할 듯하다. 김세라 씨의 저신장증은 호르몬 장애나 염색체 이상이 아니라 골격계 이상인 연골무형성증이었기에, 신체적으로는 비장애의 입장과 똑같은 생활이 어린 시절엔 가능했다는 것이다. 팔다리가 기형이거나 뇌 조직의 문제가 있어 행동장애나 기능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외견상으로는 저신장의 증상이 나타날 뿐 몸 전체의 기능은 온전했기에 장애라는 느낌 자체를 어릴 때는 몰랐다는 의미가 된다. 더욱이 가족의 사랑과 주변 이웃들의 관심이라는 테두리 안에선, 장애라는 인식을 느끼지 못하게끔 환경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니까 그 또래의 아이들이 모이잖아요. 그런 문화 속에서 애들이 저를 놀리고, 또 그 애들의 부모들이 저를 쳐다보며 뒤에서 쑥덕거리고…. 게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이들이나 선생님들한테 제가 다른 처우랄까? 다른 대접을 받는다고 할까…? 그런 걸 받게 될 때부터 ‘아, 나한테 장애가 있나?’라는 인식을 갖게 됐죠. 제가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건 체육시간이라든가, 단체적으로 움직이는 소풍 같은 행사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저의 의견을 묻기도 전에, 무조건 저부터 빼놓고 제외를 시키는 거예요. 그때까지 저는 그런 걸 몰랐는데, ‘내가 이러니까 나는 당연히 빠져야 하는구나.’ 하는 인식을 아주 강압적으로 느꼈고 세뇌 당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반복됐던 것 같아요. 거기서 제가 생각하게 됐죠. 장애라는 걸… 그때부터….”


 

    ▲ ⓒ채지민 객원기자 친구가 없었다는 거, 그런데 생겼다는 것

  초등학교 다음은 중고교 시절, 그러니까 사춘기를 동반하는 민감한 시기가 이어지게 된다. 이성(異性)에도 눈을 뜨고 신체적 변화도 뒤따르는 기간이면서, 개인적인 갈등과 고민이 폭발하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바로 그 기간이기도 하다. 사춘기 때 갈등이 컸냐고 물으니까 컸다는 대답부터 돌아왔다. “왜냐하면… 친구가 없었어요.” 초등학교 당시까지는 어머니의 보호막이 확실하게 존재했단다. 장애를 가졌다면 입학마저 거부당하던 시절 아니었던가. 지금이라면 전국적으로 난리가 날 일이겠지만, 당시엔 장애인의 입학거부 정도는 일상적으로 만성화되던 사회적 환경이 존재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일반학교에 보내고자 했던 부모님의 노력이 힘겹게 이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감당해야 할 부분과, 부모가 옆에 나서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되는 상황이 분명 존재했던 시대가 맞기는 맞다. 어머니께서는 당신 나름으로 ‘우리 애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계속 하고 다니셨고, 당신 딸의 보호막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고 한다. 그런 결과 때문인지 아이들의 간섭이나 스트레스 같은 건 많이 줄어들긴 했는데, 그건 초등학교 때까지만 허용되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른 게 중학생들의 세계 아닌가.

  “중학교에 올라가면 진짜 친구라는 게 생겨야 하는데… 친구가 안 생기는 거예요. 저는 성격이 활달하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했는데,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선 제가 하다못해 사탕 하나라도 사줘야 하고, 아니면 애들 숙제라도 대신 챙겨줘야만 하는 그런 조건부적인 친구 관계가 간헐적으로 형성이 되곤 했는데…, 저만의 친구가 안 생기는 거예요. 저는 정말 친구를 사귀고 싶었는데 안 생기는…. 저의 사춘기 시절의 가장 큰 고민은 그것이었어요.”

  그 대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려는 부분에선, 훨씬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밝히며 움직이게 됐단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강조했다는 의미가 된다. 선생님한테 직접 찾아가며 말씀드렸다고 한다. 수학여행도 가고 싶고 체육시간도 참여하고 싶다고, 모든 시간에 자신을 의도적으로 빼지 말라며, 자신의 의견을 다 밝혔다는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하겠다고. 그 결과로 중학교 때부터는 체육시간에 참가를 하게 됐단다. 달리기 빼곤 다 했고 체력장도 치렀으며 소풍도 가면서, 학교 내에서 이루어진 단체생활에는 아주 열심히 참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3년 동안 항상 혼자였단다. 자신의 외로움에 힘들어하기보다는, ‘왜 애들은 나랑 안 놀까? 애들은 왜 나랑 손 잡고 같이 안 갈까?’ 하는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는 대목에선 긴 여운이 남았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던 시절,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말문이 막힌 스스로를 보며 깜짝 놀라게 됐단다. 체력이 워낙 약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셨고, 나중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작은 기술 하나 배워서 생활을 유지하겠다는 생각 정도가 그 당시의 전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런 것보다는,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려는 생활에 익숙하던 무렵 그는 고등학생으로 인생의 옷을 또 한 번 갈아입는다.

  “중학교 때까지는 애들이 아직 어리니까, 또 연합고사라는 시험을 거친 아이들끼리 고등학생이 되니까 이젠 친구 사귀기가 더 편해지고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자기들 끼리끼리 또 무리들이 생기더라고요. 아, 이건 정말 완전히 어디에도 낄 데가 없는 거야. 항상 키는 제일 작았으니까 1번이라는 번호는 늘 놓치지 않았는데…, 아, 평생 1번!”

  ‘아, 평생 1번!’이라는 강조의 한마디를 재차 반복하며 김세라 씨는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의 의미가 지금까지의 분위기하곤 다른 것 같았다. 뭐랄까, 인생의 ‘무언가’를 확인한 사람의 자신감 같은 게 묻어난다고 할까? 그래서 첫 친구는 언제 생기게 됐냐고 질문을 이었다. 순간 그의 표정과 음성이 확 바뀌었다. 아주 편안하게, 아주 담담하게, 아주 여유롭게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요.” 아, 그렇다면 드디어 친구라는 게 등장했다는 건가? “그런데 친구가 아니라 선배였어요.”


 

   
▲ ⓒ채지민 객원기자
‘있는 그대로’

  혼자였던 시절, 여고생 김세라가 머물 곳은 학교 안 한쪽의 조그만 동물농장 앞이었단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거기로 가 혼자 앉아서 그 동물들을 바라보는 게 일과였단다. 그런 나날이 길게 이어지던 어느 날, 그의 곁에 뜻밖의 얼굴이 찾아들었다 한다. 고전문학을 가르치시던, 2학년 선배반의 담임이셨던 한 선생님이 그의 곁에 다가와서 앉으시며 그에게 대뜸 물었다는 것이다.

  “세라야, 너는 왜 매일 여기 혼자 와 있니? 너는 친구가 없니? 너는 애들하고 안 어울리니? 내가 볼 때마다 너는 항상 여기 혼자 와 앉아 있더라고. 왜 혼자 있는 거니?”

  “아…, 선생님, 반 친구들이 같이 어울려 주지도 않고 얘기도 안 해요. 그래서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혼자 있어요.”

  “그래? 왜 너한테 친구가 없어? 그러면 내가 너한테 네 친구는 아니지만, 좋은 선배들을 소개시켜 줄게.”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그 즉시 당신이 담임을 맡고 계시던 반의 대의원들을 호출하셨단다. 반장 부반장 총무와 같은 학생 간부들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1학년 김세라를 이렇게 소개하셨단다. ‘얘는 내가 1학년 가르치는 반 애들 중에 김세라라는 친구인데, 내가 볼 때는 참 밝고 경쾌한 친구인데 늘 혼자 지낸다. 그러니까 앞으로 너희들이 같이 잘 어울려서 세라를 잘 보살펴 줘라.’

  그날부터 그에게는 같이 어울리며 움직이게 된 동반자들이 생겨났는데, 그 선배들은 단순한 ‘그냥 선배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표현을 빌리자면 확고한 이념적 사고를 가진 운동권 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때 이미 데카르트와 같은 전문 철학서들을 두루 섭렵하며 토론하는 수준의 선배들이었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대화 나누는 수준 자체가 그러하니, 일반 교실에서 접하는 애들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 셈이다. 한 학년 차이인데도 이렇게 다르다니…, 그는 정말 깜짝 놀라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참 고마웠던 건 3명의 그 선배들은 언제나 그를 급하게 끌고 가지 않았단다. 항상 먼저 선택의 배려를 해주고, 김세라의 선택에 자기들이 맞춰주는 관계를 끈끈하게 이어줬다는 것이다.

  “그 선배들을 잊을 수 없었던 게 뭔가 하면…, 그 선배들 때문에 처음으로 분식집이라는 데를 가봤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쫄면이라는 걸 먹어봤어요. 분식집이라는 데는 가고 싶어도, 거기는 친구들하고 함께 가는 곳이잖아요. 혼자 가는 곳이 아니잖아요. 그런 데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내부까진 접해보지 못했던 거죠. 분식집에서 먹는 단팥빵이 그렇게 맛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리고 선배들하고 시내 큰 서점이라는 데도 처음 가봤어요. 제 손으로 책을 선택해서 골라보는 즐거움이 그렇게 큰 건지도 그때 처음 알았거든요.”

  작은 키(?)의 후배가 책 보는 걸 너무 좋아하니까, 선배들은 그를 청계천 옆 당시의 헌책방 골목까지 데리고 가서, 책 고르는 재미와 책 읽는 정서적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늘 그에게 강조했단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가치관이고, 지금 네 나이 때는 스스로 많은 시와 책을 읽어서 너의 그 감성을 많이 키워야 한다고 말이다. 그 선배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사회에 내미는 첫 발걸음이 어렵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인간 김세라는 당시 그 선배들 덕분에 정말 많이 성장했음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선배들을 소개시켜 주셨던 박OO 선생님은 그에게 고시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한 편씩의 고시조를 적어서 건네주셨단다. 그를 둘러싼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으니, 눈에 띄는 변화가 확연히 드러남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니까 제가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해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그걸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시내를 나가고 선배들과 어울려서 어디어디 서점에도 가고 분식점도 가면서 더 많이 더 넓게 돌아다녔어요. 그 전까지는 하나같이 집과 학교 사이의 왕복, 그 반복뿐이어서 그 생활 이외를 몰랐거든요.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한 거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또 부딪치게 되는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들의 시선과 어떤 쑥덕거림 같은 거, 그런 것들 때문에 견디기 힘든 일도 많았지만 스스로 부딪쳐갔어요. 그때마다 선배들의 손을 잡고 이끌며 나가면서, 제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과정을 크고 넓게 가졌던 것 같아요.”

  시간이 흘러 학력고사를 본 선배들이 졸업을 했고, 고등학생 김세라는 새로운 홀로서기에 도전하게 된다. 하지만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생이 된 선배 중 하나가 그에게 편지를 아주 많이 보내줬다는 것이다. 그 편지 내용들이 쌓이면서, 인간 김세라한테는 평생의 좌표가 될 선배의 언어가 가슴 한가운데 자리를 잡게 된 모양이다.

  “그 선배가 저한테 전해준 말들 중에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 문구가 있는데,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에요. ‘있는 그대로’ 그 어느 것도 내가 퇴화될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내가 싸워 이길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의 너를 스스로 받아들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있는 그대로’이다. 그 스스로를 네 스스로가 먼저 인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죠.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을 그 선배는 저한테 굉장히 많이 강조를 해주셨어요.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을 네 스스로가 인정하고, 거기에 만족하며 그모두를 네가 사랑해라!”


 

   
▲ ⓒ채지민 객원기자
세상으로 나오세요

  김세라 씨의 대학 전공은 스페인어였단다. 어떤 심사숙고의 결정이 아니라, 스스로의 느낌에 의해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고교 시절 당시 다양하게 듣던 음악 중에서 특히 제3세계 음악에 빠져 들었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음악을 구해들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마침 주위에 있었기에, 그는 스페인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캐듯이 연구하며 공부를 했단다. 고교 시절 제2외국어는 일본어였지만, 스페인어가 갖고 있는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것. 그래서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공을 스페인어로 결정했단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선 정말 정열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학교생활은 어땠는지를 물었다. 교복이라는 유니폼으로 상징되는 청소년기와 사춘기를 벗어난, 말 그대로 열린 공간인 캠퍼스 생활은 뭐가 달라도 분명히 다를 게 아닌가. 물론 군사정권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모든 걸 암울하게 억누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김세라의 지난 시절 지배했던 틀과 대학의 틀은 확연하게 다른 면을 나타낼 것 같았다. 폭풍우 같았단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준다는 게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중고교 시절처럼 거리를 두며 따돌리는 게 아닌, 새로운 어울림의 세계가 그를 강하게 빨아들였다는 것. 그래서 그는 수도 없이 이어지는 술자리도 꼬박 함께하면서, 대학이라는 문화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사람들과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이었단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그 많은 책들, 소중한 선배들로부터 듣고 배우게 된 인생의 철학과 가치관, 선생님의 영향으로 섭렵하게 된 고시조 등의 모든 내용들이 대학 생활의 모든 대화에선 엄청난 정서적 교감의 샘물로 솟아났다는 건데, 그 결과로 소통과 동질감을 느끼는 여러 인간관계를 돈독히 만들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학교생활 그 자체를 열심히 하려 노력했고, 자기 자신이라는 사람을 많이 알리려는 노력 또한 많이 했다는 대목에선 그의 대학생활이 영상처럼 비춰지는 듯했다. 

  “그런데 3학년이 되니까 취업 걱정 때문에 거의 전쟁 같은 분위기가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때 얼마간 여유로웠던 것 같아요. 저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제게 두 가지 사항을 세뇌교육처럼 말씀하신 게 있었어요. 하나는 ‘너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거고, 또 하나는 ‘너는 사회생활하기가 힘들 거다’라는 것이었죠. 저의 저신장장애 때문에 염려 겸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지만, 그래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제가 뭔가를 판단할 나이가 되기 전까지 그런 말씀을 반복하셨던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거기에 익숙해지고 기가 눌리다 보니까, 정말 기가 눌리다 보니까 결혼과 직장생활에 대한 갈망 같은 게 희미해진 거예요. ‘아, 나는 그냥 졸업하고 엄마 말씀에 따라 학원 다니면서 기술 하나를 배워야겠다. 그리고 조그맣게 뭔가를 차려서 생활하는 게 내 삶의 전부일 거다.’ 하면서요.”

  지금처럼 장애인들의 사회참여에 관한 자료나 사례 같은 것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당연히 집에서 지내야만 되는 걸로 알고 있었단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과 욕구가 굉장히 강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일반 직장 생활도 하고 싶었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학교 선생님도 하고 싶었고, 당시 출판계에 편집디자인이 아주 유망한 직종이었기에 그것도 하고 싶었을 만큼 사회생활을 향한 갈망은 갈수록 커져갔단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자신에겐 다가오지 않았단다. 장애를 가졌다면 일단 무조건 배제되고 열외가 되던 당시 사회에선 ‘보이지 않는 벽’이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는 벽’ 자체가 너무 굳건했던 까닭이기도 한 일이다.

  하지만 두드리면 열리는 무언가가 있는 법! 대학으로 찾아드는 각 대기업의 공채에서도 해당사항이 없던 그에게 학과 교수님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친구를 소개해 주셨고, 거기서 면접을 받아 첫 사회생활을 편집디자인으로 내딛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연결고리를 놓아준 교수님은 그에게 이런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셨단다. ‘너는 어디를 가도 잘할 것이다. 왜냐, 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네게는 누구를 만나도 그 만난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그런 기운이 네게 있으니까, 처음엔 힘들더라도 그 처음만 네가 잘 견디면 너는 어디를 가더라도 꼭 성공할 것이다.’

  그렇게 전달된 용기와 희망을 품고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사회의 첫 발걸음은 어떻게 보면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고 차별 아닌 차별을 가장 심하게 받았던 시기로 기억된단다. ‘다름’이라는 걸 그만큼 뼈저리게 인식했던 때가 바로 그 당시라는 얘기였다. 수습으로 들어가서 8개월 동안 남들 퇴근하고 출근할 때까지 밤 시간 동안 꼬박 야근을 했다는 것, 이 수많은 도시의 건물들과 불빛들 속에 자신이 마음 놓고 일을 할 공간 하나 왜 존재하지 않는 건가 하며 긴 한숨의 나날이 이어졌다는 것…. 하지만 그는 열심히 하고 성실하다는 이미지를 모두에게 심어주기 위해, 진짜로 집중하고 전념하며 일을 했던 것 같단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린다면 ‘무식하게 미친 듯이’ 열심히 몰두했는데, 그 결과는 모든 거래처 입에서 ‘김세라 씨한테 이 작업을 부탁합니다.’라는 합창의 메아리로 돌아왔단다. 많을 경우엔 대학교재 6권을 동시에 혼자 작업했던 적도 있었다니, 그는 일로써 자신의 인생 성공을 스스로 개척해 낸 셈이 된다.

  그렇게 첫 직장에서 3년, 또 다른 출판사에서 3년과 또 3년, 종교 관련 신문사에서 편집 전문가로 활동한 다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은 공연기획사를 만들어 이 사회에 또 다른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자신의 기획으로 큰 행사를 연이어 치러냄으로써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됐고, 그 인연의 끈은 그때까지는 몰랐던 한국작은키모임과 맞닿게 되어, 몇 해 뒤에는 그 모임의 회장 자리에 오르는 사회적 책임 또한 맡게 됐다. 그 회장의 직위가 어쩌면 또 하나의 인생 전환점이 될 텐데, 본인 스스로의 느낌은 어떠냐고 물었다. 자기 인생의 플러스가 된 게 분명하단다. 자신의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역할이 생겼기 때문이란다.

 

   
▲ ⓒ채지민 객원기자
“저는 일을 굉장히 좋아하고 일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데 굉장한 만족감을 느껴요. 결과는 별로 신경을 안 써요. 할 수 있다는 그 과정에 포인트를 두기 때문에, 나중에 나온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따로 대안을 찾으면 되니까요. 대신 그 과정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제가 시간을 잃어버린 게 되니까 항상 과정을 중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있는 많은 저신장장애인들, 어디선가 자신의 꿈만 삭히고 있을지 모를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격려의 조언을 전할 게 있는지를 마무리 차원에서 물었다. 김세라 씨는 오늘 들었던 음성 중에서 가장 단호한 발음으로, 가장 큰 울림을 남기는 한마디를 꺼냈다. “나오세요!”

  “나오세요. 밖으로 나오세요. 나오셔서 어디를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느 길에 서야 될지를 모르겠다 한다면 우리 모임을 찾아주세요.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여러분이 어디로 가셔야 된다고 일러드릴 수는 없지만 - 제가 여러분의 인생을 아직 잘 모르기에 - 여러분이 원하는 길을 걷기 위한 그 출발선 상에 설 수 있을 때까지는 손을 잡아드릴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경험과 삶의 체험은 같이 공유함으로 인해서 더 빛이 나니까요. 그리고 그게 전달이 될 때 서로에게 더 큰 용기가 생기니까요. 그러니까… 꼭 나오세요!”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cjm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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