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아야죠, 최선을 다하며 살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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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화면이나 일간지 지면의 여러 소식들을 둘러보다 보면, 이런저런 상념에다가 궁금증 비슷한 게 매번 떠오르곤 한다. ‘개인재산이 2조원이 넘는다는 서울 여의도 모처의 누구는 막상 자신한테 얼마만큼의 금액이 부족하다며 생각하고 있을까?’, ‘1조원 따위의 단위를 훨씬 뛰어 넘는 어마어마한 자산을 가진 어느 그룹 총수는 평소에 무엇이 모자란다는 불만 때문에 힘들어 할까?’ 등등.
그 높은 곳의 분들이 누리는 우아함은 당연히 못 따라가겠지만, 분명한 내용으로 상상이 되기는 한다. 이건 아주 찬찬히 생각해 보면, 단순한 답이 나올 만한 현실 속 상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얼마나 힘들까? 아마도 ‘자살 직전이 될’ 힘든 부분이 정말 많지 않을까? 오죽하면 그 큰 대기업의 회장이었던 어느 분도 몇 해 전 투신자살을 했을까? 정치경제적으로 얽히고설킨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속사정이야 넘쳐나겠지만, ‘1천억만 더 있으면 1조를 채울 수가 있는데’ 따위의 고민 또한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아닐까?
오래 전 언젠가 ‘1만5천원’이 없어서 자살을 했다던, 힘겨운 하루살이 인생에 지쳤다던 일용직 어느 누군가의 유서 내용이 새삼 되살아난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은 과연 무엇일까? 돈? 명예? 돈이라면 얼마? 명예라면 어디까지? 종이돈 1장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더불어 오늘 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아는 건 결국 소시민이자 우리들 자신이다. ‘더불어 사는 방식’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들이 더 잘 안다. 실제로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거, 그걸 가장 확실하게 일상 안에서 체득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들다는 얘기는 잠시 뒤로 접어두자. 우리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게 있다. 오늘보다 더 열악한 내일을 맞이하지 않으려는 건 결국 우리의 의지이자 실천밖에 없는 법! 그래서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는 언제나 마주치며 지내는 이웃을 만나러 출발했다. 거리에서든 골목 안 어느 가게에서든 얼마든지 마주대하며 지낼 만한 평범한 이웃이 주인공인 것이다. 굳이 그들을 바라보며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장애’를 가졌다는 한 가지뿐.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만남의 의미는 적지 않다고 판단하게 됐다. 이제 그들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기로 한다.
▲ ⓒ채지민 객원기자
넉넉한 미소로 맞이하는 부부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늘어난 수도권 전철 1호선 전철역 중 이번에는 부개역이라는 곳에 내렸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80년대 시절의 1호선에 익숙했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역은 새로 생긴 역이 분명했다. 인근 송내역 주변 전체가 끝도 없는 밭으로 펼쳐지던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기에, 중동 신도시 같은 지역을 지나갈 때면 지금도 여전히 놀란 시선으로 한참을 둘러보기도 한다. 부개역이라…, 부평역 바로 직전의 역인데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 호의 주인공 집에 도착했다. 넉넉한 미소로 반기는 부부의 모습은, 낯선 길이니 먼 길이니 뭐니 하며 오던 길에 떠올렸던 감정을 단번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떻게 저만큼 편안한 미소로 맞이할까?’ 첫 번째 느낌은 정말 그랬다. 무언가에 힘겨워하고 뭔가에 지쳐 있는 이미지를 나름 연상하고 왔던 방문객의 뒤통수를 제대로 내리치는 모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집에 들어서니 이방인을 맞이하는 건 ‘멍멍멍!’ 아니, ‘으르르, 왈왈왈!’이라고나 할까? 애완견 한 마리의 공격이었다. 만남의 자리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경계의 짖어댐을 멈추지 않는 걸 보니, 주인에 대한 충성도가 확실함은 분명했고 이방인의 낯섦 또한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일반적으로 이런 취재를 나가면 녹음기(voice recorder) 2대를 나란히 앞에 놓고 대화를 진행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녹음된 내용의 절반 이상이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희미한 채 ‘으르르, 왈왈왈, 멍멍멍’로 가득 찼다. 녹취를 옮기는 작업이 전례 없이 힘겨웠음은 물론이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 시설 밖으로
정금숙 황운천 부부 - 각각 신체적 장애를 가진 입장이라 했지만, 시종일관 낙천적인 미소와 넉넉한 마음씨의 화법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이만큼 여유 가득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그 해답은 결론부에 적기로 하고 일단 첫 대화의 물꼬부터 풀어내기로 한다. 이 대목에서 기존의 ‘사람사는 이야기’와 다른 전제를 미리 달고 시작해야겠다. 부부가 모든 대화를 일일이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이끌었기에, 그 대화 내용을 하나하나 성함을 달며 묘사하기는 힘들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편’과 ‘아내’라는 명칭으로 대신 진행함을 양해로 남기고자 한다.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물었다. 남편은 지체장애 2급, 아내는 지체장애 3급이란다. <함께걸음>에 부부가 등장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두 사람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됐고, 결혼 생활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먼저 질문하겠다고 했다. 시설에서 만났고, 기술을 배우기 위한 과정 중에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한다. 1983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 이전에는 부산에서 왔다는 ‘여자’가 동양자수를 배우고 있었다는 점과 그녀가 참 좋은 사람으로 눈에 띄었다는 부연설명이 남편의 음성으로 뒤따랐다.
“(아내) 처음에는 제가 ‘오빠’ 하면서 따르니까 잘해 주더라고요. 그렇게 잘 대해 주니까 저도 ‘오빠’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지낸 거죠. 처음부터 결혼하려고 만났겠어요? 저를 잘해 주다 보니까, 저 또한 잘 따르다 보니까 정이 들고 그러다 보니까 뭐, 애인이 됐나 보죠. 하하하!”
그럼 누가 먼저 청혼을 했느냐고 물었다. 서로를 마주보던 시선이 잠시 이어지더니, 남편 입에서 낮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제가 했죠.” - 동양자수를 공부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참 성실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됐고, 그렇게 자주 마주치다 보니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회수권과 토큰이 버스 승차 수단이었던 시절 당시에 매표소를 운영했던 그는, 그녀를 그 매표소로 자주 불러냈단다. “만나자고 자꾸 불러내더라고요.” 아내의 추임새가 덧붙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오랜만의 일이 분명한 것 같았다. 옛 기억을 되살리려는 두 사람의 눈빛이 진지하고 평화롭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남편) 같이 얘기하다 보니까 사람이 참 괜찮고 또 같이 하면…, 서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함께하면… 우리가 남부럽지 않게 살지는 모르겠지만, 서로가 마음을 같이 하면 잘 살지 않을까 해서 제안을 했던 거죠.”
‘오빠’의 그 제안을 받고 언제 ‘OK!’를 했냐고 물었다.
“(아내) 한참 지난 다음이었어요.”
“(남편) 시간이 좀 지난 다음이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결혼 날짜를 잡아왔더라고요.”
“(함께) 뭐를 잡아왔다고요?”
“(남편) 결혼 날짜요.”
“(함께) 여자 쪽에서 먼저 잡아왔다는 건가요?”
“(아내) 뭘 내가 잡아와? 같이 잡자고 해서 정했던 거지.”
“(남편) 좌우지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진짜로 날짜를 잡아왔잖아.”
말꼬리를 붙잡으며 티격태격 잠시 논쟁(?)이 벌어졌는데, 결론은 똑같이 ‘하하하! 호호호!’로 끝이 났다. 시설 내에서 이렇게 부부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냐고 물었다. 많이 있단다. 두 사람 역시 동료들의 축복을 받으며 시설 안의 교회당에서 예식을 올렸고, 결혼을 계기로 시설에서 나와 둘만의 신혼생활을 독립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 날짜는 잡아놨고 가진 돈은 하나 없고…, 그래서 그의 표현 그대로 ‘밥줄’이었던 매표소를 팔아 권리금 비슷한 자금으로 제일 싼 방을 얻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행복한 신혼이라 해도, 세상의 장벽 앞에선 엄연한 현실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
“아내는 집에서 수를 놓아서 그걸 팔아 하루하루 살고, 저는 친구 소개로 회사에 들어갔다가 그만두고, 그 다음엔 장사를 시작했는데…. 어휴, 장사도 진짜… 풀빵장사부터 시작해서 정말 별거 다 했어요. 액세서리도 했고 꽃가게를 하다가 안 돼서 팬시점을 하다가, 그것도 안 되어서 문구점을 하고…. 아무튼 살아남으려고 이것저것 다 했죠.”
▲ ⓒ채지민 객원기자 |
일어서고 주저앉고, 다시 또 일어서기
돌고 돌아서 문구점으로 귀착이 됐지만, 문구점 운영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몇 백만 원 어치 물건을 구입해서 진열해도, 한쪽 일부만 채울 정도밖에 안 됐단다. 내부 전체를 문구로 채운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화원을 운영했을 때는 꽃들 자체가 풍성하고 자리를 많이 차지해서 초기자본에 큰 부담이 없었는데, 문구점 안을 다 채우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조금씩 자리를 잡으며 안정을 찾게 됐다는 대목에서 질문 하나를 던졌다. 혹시라도 초등학생들이 가게 주인의 장애를 의식하며 ‘어?’ 하는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을까? 남편은 있었다고 회상하는데, 아내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아내) 처음부터 ‘어?’ 이렇게는 안 해요. 그냥 물건을 사고 가는데, 얼마 지난 후엔 한참 쳐다보다가 느닷없이 ‘아줌마, 아줌마는 왜 키가 작아요?’ 이렇게 물어요. 그렇게 지나가다가 한참 뒤 또 ‘아줌마, 저런 건 어떻게 올렸어요?’ 하며 궁금해 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대답해 줬죠. ‘야, 그것도 다 아줌마가 올렸다 내린 거야. 해볼까? 아줌마는 다 할 수가 있어.’”
그렇다면 관점을 약간 바꿔서, 주위에 있던 다른 문구점이나 분식점 같은 동네 상권 주인들이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시선 같은 건 없었을까? 그리 크게 의식할 만한 경우는 없었단다. 아이들한테 항상 잘해 줬고 애들이 부모님과 같이 찾아와 구입도 하면서, 확실한 단골손님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학교 앞뒤로 십여 군데 있던 문구매장들 중에 이 부부의 문구점이 가장 잘 되는 가게로 손꼽히게 됐단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무언가 새로운 물건이 출시되면, 도매상들은 무조건 이 부부의 문구점에 제일 먼저 납품을 하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들 세계에서 속칭 ‘뜨기’ 위해선 잘 팔리고 입소문의 홍보가 빠른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도매상들의 입장에선 이 부부의 문구점이 바로 그 대상으로 선정됐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너무 잘 되는 것도 문제가 뒤따르는 모양이다. 아내가 인근 시장 쪽에 생활용품가게를 새로 열었단다. 문구점은 남편이 맡고 아내는 예쁜 매장 하나를 따로 시작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 매장이 전혀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문구점이 잘 되긴 했지만 운영하는 데 체력적인 한계를 느껴서 정리하려는 와중에 새 매장을 열었던 것인데, 결과는 모든 걸 다 잃어버리는 방향으로만 흘러갔다고 한다.
“(아내) 가게를 한 번 해본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해요.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면서, 못해도 1년은 붙들고 있다는 얘기가 맞는다는 거예요. 그걸 우리는 2년을 붙잡고 있었어요. 결국은 거기서 모든 걸 날리게 된 거죠. 하지만 문구점을 그만 둔 건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아침 7시 반에 열어서 저녁 10시에 닫는 생활을 일요일 빼곤 1년 내내 반복했는데, 그렇게 매달리다 보니까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모든 게 축 가라앉는 느낌도 견디기 어려웠거든요.”
지금부터 6년 전인 2005년 전후로 그 모든 걸 접기로 결정했고, 아내는 평소 가장 하고 싶었던 꽃꽂이를 배우며 자격증을 취득했단다. 몸이 불편했던 남편은 운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전국장애인체전 탁구 종목에서 3위에 입상할 만큼의 실력을 키우게 됐다 한다. 예전에는 바로 앞에 있는 지점까지도 걸어가지 못했는데, 이젠 시장 전체를 오갈 만큼 건강 또한 좋아졌단다. 그 대목에서 아내에게 물었다. 꽃꽂이가 자기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느냐고. 그렇단다. 꽃꽂이를 하고 있는 요즘의 생활이 가장 행복하다고 믿으며 지낸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남들은 몇 년 과정으로 배우던 꽃꽂이를 그는 단 3개월 만에 모두 수료했단다. 3개월 만에 생화 꽃꽂이는 물론, 부케까지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익히게 됐다는 것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장애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건…
이제 곧 결혼 30년차에 다다를 부부였기에, 대화의 분위기를 잠시 바꿔보기로 했다. 두 가지 질문을 차례로 던졌다. 첫째로 신체적 불편함을 갖고 결혼해서 30년 가까운 삶을 살아오셨는데, 장애를 가진 부부의 관점에서 이 사회의 불합리함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를 말씀해 달라 했다. 대답은 아내가 먼저 시작했다.
“(아내) 제가 결혼해서 살아보니까요. 제 신랑이 손과 다리가 아프잖아요. 손이 아프니까 뭐든 일을 하고 싶어도, 우리 사회에선 일을 할 게 없어요. 그런데 장애인콜택시 같은 건 손 한쪽이 아파도 운전할 수가 있는 거잖아요. 제 신랑이 한 손으로도 운전을 잘하는데, 그런 콜택시 같은 일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뽑아서 맡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왜냐하면 제가 제일 답답했던 게 그것이었거든요. 만약에 우리 남편이 어디 가서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제가 막 이렇게 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저의 성격도 있었겠지만, 제 생각엔 우리 부부가 살아나가려고 무작정 발버둥을 쳤던 것 같아요. 정말 엄청나게 발버둥을 쳤거든요.”
“(남편) 제가 한 손이다 보니까 솔직히 말해서, 진짜로 일을 구하러 공장 같은 데를 많이 쫓아다녔거든요. 그런데 한 손으로 한다는 그게 진짜로 일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장애가 있다 어떻다 하는 건 이해가 안 되고 불합리한 것 같아요. 저는 인간이 공평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장애를 가졌든 안 가졌든 간에, 사람은 똑같이 살아가잖아요.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참 마음이 안타깝죠.”
두 번째 질문을 이었다. 지금 시설이든 일반 지역이든 간에, 남녀가 만나는 데 있어서 서로 장애가 있다는 점 때문에 주저하는 인생의 후배들이 분명히 있을 게 아닌가. 정말 잘할 수 있을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다든지 하며 그걸로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이들이 있을 텐데, 직접 살아온 입장에서 그들한테 전할 만한 조언이나 격려의 언어가 있는지를 물었다.
“(아내) 저는 요즘도 젊은이들과 얘기할 기회가 많아서 자주 조언을 하는데…, 저의 생각은 이래요. 상대자를 굳이 비장애로 찾지는 말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만나 봐라. 그러면 더 마음을 열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보다 낫고 일단 비장애를 만나려 의식하다 보니까 아직까지 결혼 못한 사람들이 많은 거다. 그러다 보니까 나이만 자꾸 먹는 게 아닌가. 그게 솔직한 저의 입장이거든요. 제가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는 게 가장 마음 편하고 오래 간다는 점을 확신하게 됐어요. 저는 그 점을 항상 강조하며 그 생각을 전달하고 있어요.”
말이 나온 김에, 보다 더 무게감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지금 현재 시점에서 장애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는지를 물었다. 아내 정금숙 씨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아내) 제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지금 복지관에도 공예 강의를 나가요. 자원봉사 개념으로 하게 됐는데, 저는 공예 강의가 자원봉사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같은 강의에 비장애 강사도 쓰는 모양이에요. 복지관 자체 내에 공예 강사를 따로 두고 있다는 건데, 그들은 강사료를 지급 받고 재료비도 제대로 받으면서 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저한테는 봉사해 달라고 해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 이건 아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실력이나 능력은 차이나는 게 없는데, 저는 왜 자원봉사로 구분돼야 하는 거죠? 자원봉사는 둘째로 치더라도 재료비가 극히 미비하게 지원되니까, 그 재료비를 가지고 뭘 어떻게 가르치라는 건지…. 그래서 그렇게는 못 가르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조금 더 추가해서 재료비가 나오던데, 저는 그 미비한 재료비를 가지고 아주 미비한 작품으로만 가르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강의하는 걸 원치 않거든요. 제가 배운 그대로, 아는 지식만큼 제대로 발휘하며 강의를 해야 올바른 건데….”
따끔한 지적인 것 같다. 같은 내용의 강의를 진행하는데도 누구는 정식 강사이고 누구는 자원봉사? 글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더욱이 공예 강의라면 제대로 된 준비물이 있어야 강의가 원활하게 진행될 게 아닌가. 부족하고 없는 재료로 강의의 목적이 충족될지 여부는 굳이 문답 자체가 필요 없는 부분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로 궁금해진다. 왜 누구는 강사료를 받고, 누구는 ‘자원봉사’로 분류가 돼야 하는 걸까?
▲ ⓒ채지민 객원기자 |
이웃을 향해, 나눔을 위해
이런저런 대화를 즐겁게, 진지하게, 심각하게, 또한 부담 없이 나누다 보니, 정작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장애가 선천적인지 중도인지를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편인 황운천 씨께 먼저 물었다. 소아마비인데 그 증상이 손까지 올라온 거란다. 어르신들 말씀에 의하면 돌 이틀 전에 열병에 걸렸고, 적시의 치료시기를 놓쳐서 소아마비가 확대된 것 같다고 한다. 아내인 정금숙 씨는 중도장애라고 했다. 그리 높지 않은 다락방에서 여섯 살 당시의 자신을 언니가 업으려다가 밑으로 떨어뜨린 일이 발생했단다. 다락방 높이가 높지 않다는 건 분명한데, 하필 아래에 있던 아궁이 바로 옆 맷돌에 뼈를 부딪친 게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다. 수술까지 했지만… 그래서 깁스까지 하고 지냈지만,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그 이상의 희망을 남겨주진 못한 채로 끝났다고 한다.
분위기가 어둡게 이어졌나 싶어서, 이제부턴 희망을 얘기하자고 했다. 결혼 30주년을 목전에 둘 만큼 부부의 인연으로 살아오셨는데, 개인적인 계획 말고 부부로서 살아가고 싶은 앞으로의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뭔가 거창한 내용을 준비하는 과정 같은 게 잠시 이어질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입에서는 일상의 언어를 얘기하듯 질문과 동시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남편) 그냥… 우리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대한 열심히 살아가면서, 우리 가정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외부의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물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마음으로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들한테 꼭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그래도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전하며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또 우리가 살아온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가진 게 있다면, 줄 수 있는 건 또 줄 수가 있는 거잖아요. 어렵게 산다 해도 이렇게 가꾸며 살면, 더 나은 내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지냅니다.”
“(아내) 저는 우리 둘이서 운동을 열심히 하며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고요. 제가 가진 손재주로 꽃꽂이를 하고 공예를 하면서, 좀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면서 봉사를 할 곳이 생기면 봉사를 하며… 그렇게 살고 싶어요.”
부부인 두 사람은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웃을 돕는 삶을 살겠다는 것! 순간 참으로 이해가 안 된다던 평소의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가진 것이 넘쳐나는 사람들한테선 이웃을 돕겠다는 말 자체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극히 희미하게 들린다. 그런데 막상 가진 게 별로 없는 이들한테선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함으로 넘쳐난다. 이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 혼자만의 생각으로 만지작거리던 이 내용을 넋두리처럼 얘기하자, 정금숙 씨가 쐐기를 박는 정답을 꺼내놓았다.
“(아내) 저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와 같은 수많은 단체 생활이 있잖아요. 저는 그 단체 내에 있을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살펴봐야 하고, 그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든 먼저 보듬어 주면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수많은 단체 생활들을 보면 내부의 상황은 생각을 안 하고, 안에서 죽어나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마저 헤아리지 않아요. 그러면서 일단 바깥으로 나가서 자신들을 홍보할 수 있는 곳, 대외적으로 눈에 잘 띄는 ‘드러나고 보이는 곳’에 가선 봉사들을 열심히 하죠. 저는 그게 참 마음에 안 들거든요. 저는 물질적으로 할 수 없을 땐, 일단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끔 해서 대화를 나누고 공감할 대목을 찾아갑니다. 나중에라도 물질적으로 좋아질 날이 온다면, 저는 정말로 멀리 안 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열심히 찾아볼 거예요.”
직접 그 대답을 듣고 있던 순간에도, 참으로 마음이 절로 따뜻해지는 언급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맞는 말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던 누군가의 그 말씀은 2000년 전의 낡은 덕담으로 취급되며, 이미 화석(化石)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매번 마주치는 경우가 아닌가. 드러나기 위한, 뭔가를 더 보이며 홍보하기 위한, 그것이 마치 종교의 본질이라는 듯 뿌려지는 전단지 같은 행렬은 오늘도 길거리 여기저기를 뒤덮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참으로 마음 따뜻한 부부를 만났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마지막으로 좌우명과 같은 생활신조 같은 게 있는지를 물었다. 명언과 같은 한마디도 괜찮고, 종교적인 문장도 상관없으며,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일상의 표현도 환영하겠다며 대답을 유도했는데…, 정금숙 황운천 부부의 생활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는 듯한 대화가 이어졌기에 그 내용을 아래에 (녹취록 그대로) 남기며 마무리를 짓는다. 이 글을 최종 정리하는 이 와중에도, 이 두 분의 모습이 창밖의 동네 어딘가에서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남편) 좌우명? 글쎄요. 그냥 열심히 사는 거죠, 뭐.”
“(함께) 그래도 평소에 생각하시던 문장 같은 게 있으신지….”
“(남편)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죠.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있거든요.”
“(아내) 그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이잖아.”
“(남편) 아니,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면 한번 해 봐. 그게 쉬운 일이야?”
“(아내) 그러니까 다른 말을 좀 생각해 보라는 거지.”
“(남편) 아니야. 우리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는 심정을 말씀드리려는 거야.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진짜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샘이 솟아날 수도 있는 거잖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최고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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