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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마당보다 훨씬 큰 이 세상으로 나오세요

[사람사는 이야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이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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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기자라는 입장으로 각종 행사나 집회에 참석하다 보면, 정식 인사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익숙해지는 얼굴들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아니, 늘어난다. 그런 자리와 기회 및 시간들이 몇 해에 걸쳐 반복적으로 연결되다 보니, 서로의 이름 석 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밝은 표정의 눈인사를 나눌 관계로 발전한 이들이 이젠 제법 많아진 것 같다.
정말 솔직하게 얘기한다면… 편하다. 그냥 이웃이고 친구 같은 얼굴들이다. 마음 가까운 선후배님들 같고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와줄 것 같은,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손을 내밀며 다가갈 수 있는 이들이란 생각도 든다. 거기엔 취재를 해야 할 입장이라는 식의 전제조건은 개입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런 방향으론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덧붙일 부연설명도 필요 없고, 그냥 그 자체가 결론이자 전부라고 믿게 됐다. 그것뿐이다. 자주 마주치면 익숙해지고, 통성명을 나누며 정이 들다 보면 인생의 친구가 되는 법 아닌가.
사회현상의 모든 걸 원인과 결과로 나누며 따지고 분석하려는 행위에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들이기에, 인간관계마저 분해하고 재조립하려는 시도 자체가 피곤해진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진솔하게 가슴을 열면 서로가 편해진다. 그게 전부이자 최고가 아닐까? 이번 호에 취재할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이 ‘누구’라는 연락을 편집부로부터 받는 순간, 이런 생각들이 ‘반짝거리며’ 머릿속에 맴돌았다. 물론…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1남 1녀, 2남 2녀, 3남 2녀

   곰곰이 헤아려보니 그동안 정말 많이 마주쳤다. 여기의 행사, 저기의 집회, 더불어 어느 단체의 사무실 공간 등에서 ‘그’와 마주친 일은 정말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묘하게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는 점이 뒤늦게나마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주 마주쳤다면 명함 정도는 주고받을 기회가 적잖게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결론이자 해답은 아주 간단했다. 이번에 정말 제대로 진지하게 만나려 그랬나보다 - 라는 거, 그게 정답이다. 세상일이라는 건 이렇게 요약하듯 정리해야 마음이 편하고 가벼워진다. 복잡하게 분석하려 할수록 정리할 방법은 요원해진다. 그 대신 복잡하게 느꼈던 모든 걸 단순화시킬수록, 답은 눈앞에 둥둥 떠 있기 마련이다. 복잡했던 건 혼자만의 마음이었다는 결론과 함께 말이다.

  이원교 -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그동안 각종 활동현장에서 마주치던 그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남아있었던 터라, 약속장소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정말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오랜 기간 눈에 익숙했던 투쟁적(?) 복장이 아닌, 완벽한 신사정장의 단정한 차림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첫인사가 아닌 게 분명할 인사를 나눈 뒤. 첫 번째 질문으로 지금의 이 정장차림의 의미가 뭔지를 물었다. 2박3일에 걸친 전국 차원의 중요한 행사가 있단다. 그래서 우리의 약속장소를 그 행사장으로 정하게 된 걸 양해해 달라고 했다. 대답은 당연히 ‘OK!'

  뇌성마비 1급이라고 밝힌 이원교 씨. 태어났는데 아기가 울지 않았단다. 그래서 이상이 있구나 싶었고, 결론은 장애로 판정이 났다고 한다. 출생부터 얘기를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자신의 집안 얘기가 부연설명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단다. 그래서 민감한 대목이면 언급 안 해도 된다 했더니, 자신도 편하게 얘기하겠다며 대화의 한 축을 계속 이어나갔다.

  1950년 6·25 당시에 이원교 씨의 아버지와 할머니께선 모든 가족을 잃어버리셨다고 한다. 여러 형제들과 (이원교 씨의) 할아버지까지 잃고 난 뒤, 아버지께선 홀로 남겨지신 어머님(이원교 씨의 할머님)과 함께 자수성가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으셨던 모양이다. 당시 의학(醫學)의 길을 걷던 분이셨는데, 홀몸이 되신 어머님과 가정을 이끌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고 들었다는 대목에선 이원교 씨의 한숨이 중간마다 뒤따랐다.

  “홀어머니를 모시는 가장이 돼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데, 결혼을 하고 1남 1녀를 낳으셨대요. 둘만 낳고 그만 낳자고 했는데, 할머님 말씀이 ‘아들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 네가 이제 독자(獨子)가 됐으니까, 아들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셨다는데… 그래서 또 낳은 아기가 딸이었다는 거죠.”

  딸? 그럼 이원교 씨가 형제 중 네 번째인지 물으니까, 그게 아니라 자신이 쌍둥이란다. 이란성 쌍둥이 누나가 먼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특이한 언급이 뒤따랐다. 딸이 태어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어머님께서 30분 후에 다시 진통을 시작하셨다는 얘기였다. 아니, 그렇다면 임신 기간 내내 쌍둥이를 잉태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셨다는 말인가?

  “그게 1960년대 중반의 일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병의원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이 안 좋아서, 병원 가는 걸 극히 싫어하셨거든요. 의술이라는 것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라 했기에, 집에서 낳는 게 더 깨끗하다 하셔서… 그래서 집에서 출산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진통 후에 나온 아기는 머리가 아닌 다리부터 나왔단다. 게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태어나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신생아는 울지도 않고…, 그래서 의학적 지식과 정보가 많으셨던 아버님은 직감적으로 ‘아, 이건 애가 잘못됐다’고 받아들이셨다 한다. 지금이야 초음파검사는 기본이고 이런저런 검사는 ‘반드시’ ‘꼭’ ‘반복적’으로 받아야 한다며 예비 엄마아빠들을 다그치는데, 당시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하루가 멀다 하며 감기와 폐렴을 앓던 자신을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시던 어머님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지도 모를 것 같단다. 아들로 태어난 손자의 증상을 마음 아프게 여기신 할머님께서는 또 하나의 아들 손자를 원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얻게 된 건 이원교 씨의 막내 남동생이고, 3남 2녀의 가족은 그렇게 완성이 됐다고 한다.


마당만한 세상

   
▲ ⓒ채지민 객원기자
  어린 시절의 기억 또는 추억을 물으니까, 자신은 외롭다는 생각을 모르며 지냈던 것 같다고 한다. 할머님과 부모님, 3남 2녀의 형제에다가 아버님과 같이 일하시던 직원 두 분까지 같은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항상 북적거리던 집 풍경은 그에겐 우호적인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불편한 점이 있었으니, 그건 자신의 집이 일가친척 중 ‘큰집’이었다는 사실이란다. 명절 때마다 20명에서 30명 가까이 모여들어 복잡한 상황을 연출했다 하니, 그에게는 가장 기피되는 기간이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집이 워낙 조그만 집이었으니까 어디 숨을 데도 없고…. 다른 장애인들도 어린 시절엔 다 똑같은 입장이었겠지만, 집에 어른들이 오시면 한마디씩 툭툭 던지며 하는 그런 얘기들이 있잖아요. 그 중에 가장 많이 듣던 내용은 늘 똑같았죠. ‘인물도 좋은 놈이 건강만 했으면….’ 거기에다 또 ‘어휴, 이 집안 형제들은 다 인물이 좋은데, 저 아이만 건강했다면 걱정이 없을 텐데.’ 하며 한마디씩 덧붙이는 거…. 뭐, 옛날에는 다 그랬다 하지만, 어린 제 마음엔 그게 가장 많이 힘들었다고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언제 처음 인식했을까? 인생을 살면서 장애 자체를 받아들이는 건 나중의 일이 되겠지만,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건 훨씬 어렸을 때인 게 보통이다. 이원교 씨의 경우는 형제들이 학교를 다니게 됐을 때라 한다. 형과 누나가 학교에 간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쌍둥이 누나가 초등학생이 되어 학교에 다닐 땐 ‘왜 나는 학교에 안 보내줄까?’ 하며 의문점을 갖게 됐단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고, 다섯 살 차이가 나던 남동생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서야 비로소 ‘아, 나는 다르구나….’ 하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한다.

  당시 살던 집은 좁은 평수의 단층짜리 한옥이었는데, 혼자 있는 시간마다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곤 했단다. 그러다가 사춘기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텐데, 지금의 시점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때 당시의 소년 이원교는 어떤 삶을 살았다고 회고하는지를 물었다. 모든 게 자기 혼자와의 싸움이었던 것 같단다. 혼자 존재해야 하는 그 공백을 이겨내려고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고 했다. 집요하게 많이 읽었다며, ‘집요하게’라는 단어에 강조점을 뒀다. 집에 있는 책은 한정되었기에 형제들한테 외부에서 빌려달라고 하거나 용돈을 모아서 사는 등, 그의 숨통을 트이게 만든 행위는 ‘집요한’ 독서였던 모양이다.

  “그때 제 인생을 움직였던 책을 꼽는다면 단연 <삼국지>입니다. 거의 서른 번 이상 읽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요약본으로도 읽었지만, 월탄 박종화 님의 전집 같은 여러 전집류도 모두 다 읽었어요. 그 작품은 제 인생에 있어서 세상을 깨닫게 하는, 세상을 알게 해주는 어떤 힘을 저한테 준 것 같아요.”

  외부와 분리된 삶을 살아야 했는데, 창밖에서 들려오는 또래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궁금했다. 자신도 아이들 노는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단다. 그래서 혼자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작은 마당을 지나 대문 앞에 다섯 개 정도의 계단이 있었는데, 그걸 혼자 기어서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어머님께 정말 크게 혼났고,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또렷할 만큼 생생하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이 타는 장난감 말 있죠. 발끝에 바퀴가 달려 있어 굴러가는 그런 거. 저는 마당에서 항상 그걸 타고 다녔어요. 좁은 마당이었는데, 저의 어린 시절은 거기서 다 보냈잖아요. 그 마당이 저의 세상 전부였던 셈이죠.”

  지금 생각해 봐도 어린 시절의 자신은 참 착했단다. 모가 나게 돌출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전혀’라는 단어가 다시 한 번 반복되며 강조됐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많이 보호 받고 살았다는 건 확실한데, 이제 와서 되돌아본다면 그게 좋은 점이 많았던 만큼 나쁜 점도 많았다고 받아들이게 된단다. 단점이라고 떠올리는 게 뭔지를 물었다. 도전할 시기를 놓쳤다는 거란다.

  “TV나 신문이나 이런 걸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과 살아가는 얘기는 다 알고 있었고, 글도 저 혼자 깨우쳐서 별다른 불편은 없었는데…, 문제는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뭔가를 하고 싶은데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십대 후반부터 반항기에 접어들기 시작했고, 형제들하고 싸움이 좀 잦아졌어요. 어머님한테 대들기도 했죠. 많이 놀라시곤 했어요. 생전 안 그러던 녀석이 대들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다섯 형제를 키우고 가정을 꾸려가야 했던 입장이시니, 저한테까지 신경 쓸 겨를이 거의 없으셨겠죠. 하고 싶어도 몰라서 못했을 테고, 그래서 하루하루를 답답해 하셨던 게 맞을 거예요.”


세상으로 첫 발, 그리고 ‘나’를 찾기

  형제들이 다 성장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인이 되던 무렵, 큰누나가 이원교 씨한테 제안 한 가지를 했단다. 기술을 배우는 1년 코스의 과정이 있는데, 괜찮은 곳 같으니까 다닐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는 것이다. 경기도 광명에 있다는데, 1년 동안 입소해서 생활하며 목공예 기술을 배우는 곳이라 했다. 스물네 살에 이르러 처음으로 세상과의 만남이 이뤄지게 된 셈인데, 눈앞에 펼쳐진 전혀 다른 세상 안에서 적응은 잘 했는지, 또한 1년이라는 그 기간이 지금의 자신에겐 어떤 의미로 남겨지는지를 물었다.

  “그때까지 저도 장애의 몸으로 살아왔지만, 저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거기서 처음 봤어요. 다른 장애 요인들이 다 모여 있었죠. 저 같은 뇌성마비는 물론 소아마비와 중도장애와 심지어 자폐까지 기술을 배우러 다 와 있었어요. 거울로만 보던 제 모습이 아닌, 직접 제3자의 장애를 본다는 건… 당시엔 정말 충격이었어요.”

  피드백(feedback)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행위를 마친 뒤, 그 결과에 따라 반응이 일어나거나 행동을 변화시키는 일을 뜻한다. 생에 처음으로 다른 이들과 1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뒤, 그에겐 무슨 변화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게다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해지기 시작할 나이였기에, 그 또한 자신의 인생에 관해 신중히 고민했을 게 분명한 일이었다. 맞다고 한다.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많이 했단다. 그렇다면 목공예를 하는 게 자신의 일이자 인생이라고 생각했을까?

  “저는 모나지 않도록 착하게 살아왔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이었어요. 제가 목공 기술을 배워서 이 기술로 돈을 벌며 살아가진 못할 거라는 걸 그때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당시 목공을 가르치시던 선생님들도 목공의 감각은 제가 제일 뛰어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곧바로 드러났죠. 1년 과정이 끝나고 거기서 취업을 주선해서 나가게 됐는데, 저는 취업을 못했어요. 감각이 저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기술도 밀리던 동료들은 취업을 해서 나갔습니다. 단지 장애가 약하다는 이유 하나로. 그러니까 휠체어를 이용하는 경증장애인들이 가장 먼저 취업을 하는 거고, 그 뒤로는 중도장애나 소아마비 장애인들이 취업되는 거고, 나머지 뇌성마비 같은 중증은 뒤로 밀려서 취업이 거의 불가능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 언급됐다. 장애의 경중을 따지는 잣대 때문에 취업이 제한됐다는 거, 그럼 그 다음 단계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집으로 갈 뻔했단다. ‘갈 뻔’이라면 아니라는 의미 아닌가. 그의 설명이 곧장 뒤를 이었다. 90년대 초 장애인 기술 시설 쪽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서, 단순작업장들이 많이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경증장애인들 위주로 취업이 이뤄지다 보니까, 나라 차원에서 중증장애인들 취업 문제를 그런 방향으로 해결하려 했던 모양이다. 시설 개념의 작업장들이 여럿 등장했고, 이원교 씨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단순작업장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5년 동안 말이다.

  그 기간의 시설생활이 원하던 건지, 아니면 원치 않던 생활이었는지를 물었다. 당연히 원치 않았던 생활이었단다. 게다가 ‘관리’라는 말을 정말 안 좋아하는데, 지내다 보니까 시설 내 동료들을 관리하는 입장을 맡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기숙사 반장 같은 역할이었다는데, 워낙 중증의 생활인들이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몸 상태가 ‘덜 중증’으로 보인 이원교 씨한테 그런 역할이 주어졌던 것 같단다. 그렇게 지내다가 나이 제한 비슷한 규정에 따라 5년 만에 그 곳을 나와야 하게끔 됐는데, 그 과정이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안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이상하게 안티(anti)성향이 강해지더라고요. 냉소적으로 무시하는 그런 게 아니라, 저는 대안을 내놓으면서 직접 얘기하는 편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규정 같은 걸 내세우면, 저는 반드시 문제제기를 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그러니 시설 측에서도 제가 많이 껄끄러웠겠죠. 사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으니까, 직원들이 저를 굉장히 어려워하곤 했어요. 게다가 반론과 대안을 계속 꺼내며 지냈으니…, 5년 이상 시설에 있던 사람들은 내보내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더라고요.”

  1년간의 교육과 5년간의 시설생활이라는 긴 외지생활을 마친 뒤, 그는 ‘이번엔’ 집으로 갔단다. 그런데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절망이나 비관 같은 자포자기의 상태였을까?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나의 꿈이 있었기 때문에 시설생활을 깔끔하게 털고 나올 수가 있었고, 그 꿈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언급에선 인생의 확실한 전환점을 맞이했음이 느껴졌다.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결혼’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내 인생의 임무는 바로 이것이다

  단순작업장 시설 내에서 ‘누군가’를 알게 됐고 만나게 됐으며, 그 누군가와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가기를 약속했기에 담담하게 시설을 ‘함께’ 나오게 된 거란다. 아마도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시설생활 자체를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단다. 서로 많이 의지했고, 그 힘으로 5년이라는 기간이 지탱된 거라는 언급에선 그의 얼굴 가득 진지함이 묻어났다. 1997년에 결혼을 했고 지금도 정말 행복하단다. 더 자세하게 가정생활을 묻고 싶었지만, 그건 사생활의 영역으로 접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행복하다’는 그 한마디로 모든 걸 다 고백한 셈이 됐으니까 말이다.

  대화의 물꼬를 공적인 그의 사회생활 영역으로 돌렸다. 우리가 만난 그의 공식직함이 바로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인생에서 ‘자립생활’이라는 단어가 언제 등장하게 된 건지, 그리고 그 의미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 내용을 질문으로 던지니까, 뭔가 중요한 핵심을 말하기 위해 준비하는 듯 그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 모습은 흡사 ‘자연인 이원교’가 아닌, ‘이원교 회장’ 입장으로의 탈바꿈과도 같았다.

  경기도 안산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당시, 집 근처의 장애인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단다. 평소 그 복지관을 이용하고자 종종 왕래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정도였는데, 어느 날 직접 연락이 찾아들었다는 것이다. 자립생활에 대해서 배워볼 생각이 없냐는 의견을 듣고 복지관을 방문해서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름의 판단으로는 일리가 있고 받아들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괜찮은 내용이다’ 싶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는 수동휠체어를 두 손으로 밀며 서울까지 지하철을 타고 왔단다. 그게 2001년의 일인데, 그때부터 그에게는 ‘자립생활’이라는 단어가 인생의 이름으로 동행을 하게 된다.

  “만약에 자립생활이라는 단어를 그때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랬다면 저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떠올리곤 하죠. 아마도 저는 야학에 가서 공부를 했을 테고, 아니면 조그만 가게를 차려서 생활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야학을 직접 만들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을 거예요. 사실… 학업에 대한 욕구는 엄청나게 가지고 있었거든요.”

  서울로 와서 담당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일본에서 ‘동료상담’을 가르치러 전문가가 오니까 한번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정립회관에서 진행하던 그 교육을 받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자립생활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게 불과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는 게 생소하기만 했다. 훨씬 긴 역사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야 그 개념이 전파되고 뿌리를 내리려 한다는 게 아닌가. 당시 같이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됐던 이들이, 지금 우리나라의 자립생활센터를 전국 각지에서 이끌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란다. 그 협의회의 회장이 바로 이원교 씨이고, 이 운동은 이제 시작점을 막 출발해서 꿈틀거리며 기지개 켜는 단계로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교육을 받고 들어선 이 길이 제 인생의 길이라는 확신은 갖게 됐는데, 사실 그 이전에도 저는 친구들 얘기를 많이 들어주는 편이었거든요. 상담이라기보다는 그냥 남의 얘기 잘 들어주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상담 분야에 관심이 많이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동료상담’을 진행하다 보니까, 정말 저에게는 충격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그런 충격적인 장애계 전반의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상담 중에 듣게 된 수많은 사연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기억되는 사례가 뭔지 얘기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한참동안 멈춰 있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딱 한마디를 꺼냈다. “아…, 많았죠. 정말 많았어요.” 그 한마디의 무게감 때문에 그에게 다시 제안했다. 대답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미 그 한마디만으로도 모든 현실을 다 언급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이다.


자립생활의 본질을 나누고 싶다

   
▲ ⓒ채지민 객원기자

  대화를 나누던 자리 주변의 분위기가 점점 더 어수선해지고, 바삐 움직이는 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뭔가가 떠올랐다. 아하, 오늘 중요한 행사가 2박3일 일정으로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행사의 총책임자인 ‘회장님’을 마냥 붙잡고 있기엔 어려울 것 같았다. 본인은 괜찮다고, 전혀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취재하는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이 팽창되기 시작하면 덩달아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마무리 차원의 질문을 먼저 던졌다. 자립생활을 강조하는 단체의 총책임자로서 전국의 장애인들에게 전하고픈 조언이나 격려의 한마디가 없는지, 더불어 동료상담의 의미와 미래 같은 걸 설명해주시면 좋겠다고 물었다. 그런데 그는 “식상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이란 첫 마디를 던진 뒤 한참이나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멈춰 있었다. 5초나 10초가 5분이나 1시간처럼 느껴지는 그런 상황이라고나 할까?

  “저는 저한테 무슨 직함이 있다는 생각은 지금 하고 싶지 않고요.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가 됐던 부분을 대신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의 경험을 전해드리는 거니까, 편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에서 착하게 살지 마라’ - 이것입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제가 반항을 좀 더 빨리 했더라면, 좀 더 빨리 집이든 시설에서든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많은 장애인들이, 특히 중도장애인들이 더 그러는데, 장애를 입고 나서 ‘아, 내가 가족의 짐이구나,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됐구나’ 하며 자신이 어떤 것을 요구한다는 게 무슨 죄를 짓는 것처럼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어요. ‘내가 가족의 짐이 되어 어쩔 수가 없는데, 또 무엇을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하며, 자기의 욕구를 그냥 억누르기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스스로의 억누름이 당장은 서로한테 좋을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본인과 가족한테도 극히 안 좋은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는 대목에선, 이 의견의 무게감이 몇 배로 늘어난다는 실감이 들었다.

  “장애를 가진 입장에서 가장 큰 지원군은 바로 가족이고요, 가장 큰 적군도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실천할 수가 없어요. ‘나’는 가족의 짐이 아닙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어떻게 하면 가족과 같이 살아가고, 어떻게 하면 독립해서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대화하는 가족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서의 특징이기도 한데, 끌어안으면서도 무관심한 가족관계의 틀을 벗어나서, 자립생활이라는 본질적 의미가 뭔지를 같이 고민하는 계기가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jm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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