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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가며 둥글게 살아요

[사람사는 이야기] 자립생활 동료상담가 이 라 나

본문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딱 한 번만 만났을 뿐인데도, 수십 차례 연이어진 인연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종종 생겨나게 된다. 물론 반대의 경우로 여러 차례 만난 게 분명한데도, 이름 석 자조차 가물거리는 이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처음 마주보며 앉았는데도 마음이 아주 편안한 사람이 있고, 매번 마주칠 때마다 불편함만 더해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왜 그럴까? 그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자 세상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결정됐다는 연락을 <함께걸음> 편집부로부터 받은 뒤, 그를 만나러 준비하면서도 아무런 부담감 같은 게 없었던 까닭이 무엇인지를 한참 동안 헤아려 봤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번 호의 주인공과 마주친 적은 분명 많이 있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통성명을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내게 인연이 될까, 아니면 불편함의 대상이 될까? 답은 이미 내려져 있는 듯했다. ‘그’가 사람들 속에서 항상 보여주던 편안한 미소의 그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화초처럼 키워야 하는 아이

  미리 정해져 있던 약속장소로 출발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만남의 장소를 바꿔도 되겠냐고, 동료들의 행사가 있다는 연락이 갑자기 와서 그쪽으로 먼저 오게 됐다고. 원래 약속장소는 인근 지하철역 출구였는데, 새로 정해진 자리는 아담하면서도 깨끗한 카페 공간이었다.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대화 나눌 장소를 물색하는 게 매번 고민이었는데, 이번에는 가장 편하게 어울리는 장소로 자연스레 안내됐기 때문이다. 다소곳이 앉아 있던 오늘의 주인공이 ‘낯설지 않았을’ 이방인의 등장을 미소 가득한 얼굴로 반겼다. 

  이름은 이라나, 지난 2009년 12월호 <함께걸음>의 화보에 소개된 바 있었던 장애인노래패 ‘시선’의 멤버 - 솔직하게 말한다면. 직접 만나 앉을 때까지 사전에 알고 있던 지식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뭐랄까. 스쳐 지나감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오랜 기간 반복되며 쌓여진 마주침의 무게감이 비로소 느껴진다고 할까?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자마자, 수십 번은 만나며 지내왔다는 듯 편안한 첫인사와 첫 대화가 이어졌다. 

  아담한 체격이 늘 눈에 띄었기에, 그 부분부터 먼저 질문을 던졌다. 골형성부전증이란다. 지체장애 1급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 증상은 태어날 때부터 안고 난 것 같다고 한다. 그럼 부모님은 언제 처음 자신의 딸에게 이상이 있음을 깨닫게 됐을까?

 “제가 아기일 때 저를 목욕시키는데 ‘뚝’소리가 나더래요. 씻기고 있는데 팔이 부러졌다는 거예요. 별다른 충격 같은 것도 없었는데, 뚝 소리가 나서 너무 놀라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아이가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판정을 받았대요. 돌 이전 때의 얘기죠.”

  이유도 없이 뼈가 자주 부러진다는 거, 그런 증상에 대한 얘기는 종종 접했지만, 그 당사자를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왜 그런 일이 반복되는 걸까? 뼈가 자라는 데 필요한 호르몬 분비가 잘 안 돼서, 뼈가 잘 부러지고 크지 못하게 되는 병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는 1년에 3번 정도는 그렇게 다쳤단다. 척추 같은 데가 아니라 주로 팔 다리였는데, 부러진 충격은 며칠 누워 있으면 완화가 되고 다시 활동이 가능해지곤 했다고 한다. 그럼 그런 증세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니란다. 이 병 자체가 2차 성장기 전까지 주로 발생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부러진 기억은 고등학생이 된 무렵이었던 것 같단다.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셨죠.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몹시 걱정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큰 병원에 가서 정밀하게 확인을 해보니까 ‘이런 병이니까 화초처럼 키워야 한다.’고 했대요. 화초처럼….”

  그럼 골형성부전증의 대표적인 증상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일단 키가 안 자란다는 것, 그리고 뼈가 계속 부러지다 보니까 뼈 자체가 고르고 예쁘게 자라지 못한다는 것, 어딘 더 자라고 어딘 덜 자라면서 휘어지기도 하고 튀어나오는 데도 있는 거란다. 앉아선 모든 걸 다 할 수 있고 붙잡고 일어설 순 있지만 오래 있지 못한다는 것, 걷는 게 힘들다는 게 라나 씨의 증상이라고 한다. 그럼 스스로의 몸이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생각은 언제 처음 떠올렸을까?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단다.

 “자꾸 다치고 아이들하고 뭔가를 똑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되다 보니까… 체육시간에 나갈 수 없었고 나간다 해도 가만히 앉아 있으며 열외가 되어야 했다는 거, 그러다 보니까 ‘아, 내가 좀 다르구나.’ 하는 걸 느꼈던 것 같아요.”

  항상 엄마 등에 업혀서 학교를 다녔는데, 특이한 점은 지금 생각해 봐도 자신의 성격이 유별나게 밝았던 것 같단다.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친구들도 참 많이 있다고 한다. 저학년 때는 엄마와 학교에 다녔지만,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친구들이나 이웃집의 언니 오빠들이 자신을 학교에 데리고 다녔단다. 어떻게? 업고서? 그 질문의 대답은 라나 씨의 웃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때는 유모차를 타고 다녔어요. 제가 작았으니까요. 유모차에 타면 모두가 저를 밀어주며 다녔던 거죠.” 

   
전신거울 속 자신을 외면하던 시절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부모님은 춘천에 있던 특수학교를 생각하셨대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다가 저를 업고 거기를 가보셨는데, 애들이 멍들어 있고 누워 지내는 애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예요. 아시다시피 제 병이 절대로 그래선 안 되는 병이잖아요. 게다가 지적장애 아이들까지 많이 섞여 있다 보니까, 저처럼 약한 아이들은 항상 다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들으시고 너무 놀라서 포기를 하셨던 거죠. 그래서 저를 직접 업고 초등학교를 데리고 다니셨던 거예요.”

  그래도 라나 씨한테는 남다른 복이 따랐던 것 같다. 생활 주변에 항상 좋은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건데, 단짝친구라고 부를 친구가 늘 있었고 자신을 도와줄 선배나 선생님들의 손길이 언제나 곁에 있었단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건 외부의 움직임과 내면의 움직임이 일치해야만 조화로운 화음을 내는 법 아닌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자신에게 변화된 모습이 생겨났단다. 

“중학생이 됐던 그때였던 것 같아요. 어느 날부터인가 전신거울을 못 보게 됐어요. 제 모습이 온전히 담겨 있는 거울을 못 쳐다봤다는 거죠. 초등학교 때는 그런 걸 몰랐는데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그게 사춘기였던 것 같은데, 그때부터 전신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 싫게 보였고 친구들과 정말 다르다는 걸 알게 됐죠. 항상 고쳐 입어야 했던 교복도 너무 불편했고요.”

  그때부터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도피 또는 회피하려는 마음이 생겼고, 그 탈출구로 찾아낸 것이 펜팔이었단다. 당시는 컴퓨터통신이라는 통신망 문화가 막 활성화되던 시기였는데, 참 많은 편지를 온라인상의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고등학생이 된 뒤 그에게는 하나의 생각이 계속 떠올랐단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거, 아이들 틈 속에서, 또래 속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계속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대학은 고향을 벗어나 충북 청주에서 다녔는데,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학부제 성적에 밀려 사회학이 전공으로 정해졌다는 말과 함께 예의 맑은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초중고 시절과 다른 게 바로 대학이라는 사회 아닌가.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탈바꿈되고, 규율과 제약 위주의 청소년기를 벗어났다는 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게 만들곤 한다. 라나 씨의 경우는 어땠을까? 대학생이라는 성인이 됐다면, 말 그대로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었을 게 아닌가. 허나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던 당시의 수동휠체어와 같이, 그에겐 보이지 않는 벽 또한 존재했던 모양이다.

“가장 기억이 많이 나는 건… 이건 개인적으로 자주 언급하곤 했던 얘기인데요. 대학교 1학년 때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기숙사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같은 방을 쓰게 된 룸메이트 부모의 반대로 기숙사를 나와야 했어요. 방을 배정 받았는데도 나와야 했던 거죠. 그래서 학교 정문 앞에서 자취를 하게 됐어요.”

  일그러진 세상과의 부딪침은 그렇게 대학생활 시작부터 찾아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둠이 있다면 밝은 빛도 있어야 균형이 맞을 게 아닌가. 학교의 남자동기들이 의기투합해서 조를 짜기 시작했단다. 무슨 조일까? ‘이번 주에는 너희 조가 라나의 통학을 담당하고, 다음 주는 우리가 라나의 통학을 맡는다’는 약속과 분담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아, 완전 감동이었어요!” 그 얘기를 꺼내던 라나 씨의 큰 눈이 더 커졌다. 당시의 느낌이 그대로 떠올랐다는 듯이 말이다. 

 01학번인 라나 씨는 그 대학에서 장애를 가진 유일한 대학생이었단다. 장애당사자의 눈높이에 맞는 편의시설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수동휠체어 하나로 대학생활을 한다는 건 너무도 막막할 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말 그대로 ‘정의의 사도’들이 등장한 게 아닌가. 엘리베이터도 없던 사회과학대 건물 안에서 ‘정의의 사도’들은 언제나 조를 짜서, 라나 씨를 휠체어에 앉은 그대로 번쩍 들어서 올렸단다. 그리고 4층짜리 건물의 이 강의실 저 강의실로 이동하는 도우미 역할을 ‘너무나도 고맙게’ 담당해줬다는 대목에선, 듣고 있던 제3자의 입장에서도 덩달아 고마움이 느껴졌다. 조를 짰던 구성원 중 누군가가 군 입대를 하면, 그 빈자리는 새롭게 나타난 예비역 선배가 채워주는 식으로 라나 씨의 든든한 힘이 되어줬단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대학 안에선 단대와 단대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멀리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듣고 싶었던 과목들을 거의 못 들었어요. 정말 듣고 싶었던 건 복지 분야의 과목들이었는데…, 동기들한테 그것까지 부탁하긴 어려운 일이었죠.”

 

   
그래도 라나 씨가 모르고 있던 그의 존재감이 학교 차원에 영향을 끼쳤던 모양이다. 그가 3학년이 됐을 때, 그 대학 모든 건물들 중에서 사회과학대에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는 것이다. 그런 대학생활을 보낸 그에게 지금껏 남겨지는 아쉬움 같은 건 무엇이 있을까? 동아리 활동을 전혀 못했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른단다. 무얼 하든 간에 주체적으로 다가가려고 하면 누군가의 도움이 항상 필요했기에, 뜻을 펼치기도 전에 스스로 접어야 했던 부분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두려움 없이 무조건 부딪치자는 것

 “졸업을 앞둔 시점이 됐을 때, 그때부터 현실을 똑바로 본 것 같아요. 누구나 4학년이 되면 취업준비를 하잖아요. 그때 정말 많이 이력서를 내기도 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왜 떨어졌는지를 잘 모르겠어요. 제가 욕심을 냈던 곳은 엄청난 데가 아니었어요. 그냥 장애인을 받아주겠다는 곳이었거든요.”

  당시 라나 씨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은 단 한 가지였단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전화 상담을 하는 콜센터의 업무가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이유 아닌 이유를 대며 거절을 당했다는 데선 이 사회에 만연된 그늘이 확인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라나 씨의 대학생활 중 4학년 시기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질 큰 변환점이 생겨나기도 했다. 바로 전동휠체어를 지급받았다는 것! 사회과학대에 엘리베이터가 생겨 각층으로의 이동이 자유로워졌는데, 전동휠체어까지 생겼다는 건 날개를 단 일과 다름 아닌가. 전동휠체어로 인해 생활과 활동의 범위가 비약적으로 늘어났을 텐데, 당시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말하기도 전에 미소부터 입 안 가득 머금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우선 그 넓은 대학교 전체를 처음으로 라운딩 해줬죠, 뭐. 하하하!”

  그리고 그토록 듣고 싶었던 교양과목을 자신 있게 선택해서 들었단다. 거리가 멀어서 3년 동안 생각 자체를 접으며 지냈던 그 교양수업들을, 비록 4학년이던 1년 동안이었지만 마음껏 수강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4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졸업했다면, 그때부터는 진짜 인생의 본론으로 진입하게 됨을 의미한다. 곁에 늘 함께하던 ‘정의의 사도’들과도 작별을 하게 됐을 텐데, 대학의 문을 나선 이후의 그는 어떤 다짐과 미래를 설계했을까?

  자신의 성격 중엔 이런 게 있단다. ‘무조건 부딪치자’는 것, 먼저 두려워하거나 주저하는 건 없었다는 것. 그래서 항상 부딪치는 인생을 살았고 준비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고향을 떠나 외지의 대학을 다니는 데 대한 부모님의 걱정 같은 건 없었냐고, 순서를 놓친 뒤늦은 질문을 던졌더니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한고집(?)을 하거든요.” 부모님의 걱정은 엄청났지만 딸의 고집을 꺾진 못하셨단다. 그 ‘부딪침’에 대한 각오와 다짐이 오히려 부모님께 믿음을 전해드린 것 같다고 했다.

  졸업 후 6개월의 기간 동안 자신이 일할 수 있는 곳들을 두루 살피며 지냈는데, 서울 모처에서 차량용 핸즈프리를 생산하는 기업의 구인광고를 접하게 됐단다. 그래서 연락을 해봤더니 작업장 자체에선 일을 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재택근무를 하는 게 어떻겠는가 하는 역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어, 이거 괜찮은데?’ 그래서 서울로 와서 사흘 동안의 교육을 마친 뒤 고향의 집에서 재택근무를 시작하기는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열악한 노동자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첫발부터 뼈저리게 확인하게 됐단다.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점심시간 40분을 제외하곤 쉬는 시간 없이 핸즈프리 검사를 위한 전화를 계속 받아야 했는데, 한번이라도 받지 않으면 근무이탈로 처리됐다고 한다. 그가 참으며 견뎌낸 건 3개월이었고, 스스로가 정말 폐인이 되는 것 같아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단다. 그 다음엔 시청의 공공근로를 6개월 했는데, 대학까지 나왔음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그에게 주어진 일은 단순히 도장만 찍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 과정 중에서도 라나 씨는 시간제 이수를 통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새로운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사회복지사로서 자신의 미래를 다시 한번 탈바꿈시키게 됐단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실습도 했던 곳이 강릉센터였는데, 취직도 그 곳으로 하게 됐죠. 그래서 1년 동안 근무하며 지냈는데, 어느 순간 막연하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그 생각이 점점 더 절실하게 다가왔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나이가 아니면 돈을 못 벌겠구나 하는 생각이 정말 강해졌어요. 센터의 사정이 너무 어려워져서 활동가 1명의 월급도 못 주게 된 상황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서울행(行)을 준비하기 시작했죠.”

  마음 뜨거운 인연을 만나다

  인간 이라나의 활동지역이 서울로 옮겨지게 됐다는 대목에 이르자, 대화 진행의 순서를 잠시 접어두며 다른 질문부터 던졌다. ‘장판(장애운동계를 가리키는 구어체 표현)’은 어떻게 알고 들어오게 된 거냐고. 그가 잠시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듯 멈춰 있기에, 흔하게 하던 농담조의 한마디를 덧붙였다. 누구의 ‘꼬임’에 의해서 들어오게 됐냐고 물으니까, 라나 씨는 크게 웃으며 예상 밖의 대답을 꺼냈다. “누구의 꼬임이라기보다는, 제가 그런 꼬임을 스스로 찾아다녔죠.” 스스로 찾아다녔다고? 이건 무슨 말일까?

   
“서울로 와서 다시 콜센터 생활을 새롭게 시작했는데…, 서울 생활이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 아침에 서울 지하철은 출근시간에 사람이 왔다 갔다 할 수 없는 지옥행이더라고요. 제가 워낙 사람들 속에서 안 보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무조건 저를 밀어붙이고 마는 거예요. 그게 너무 공포였거든요. 그래서 아침 5시에 일어나서 6시에 미리 출근한 뒤 1시간을 자고 나서 업무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까 일상이 너무 건조하고 메마르게 느껴지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때 떠오른 얼굴이 있었단다. 사회복지 실습을 할 당시에, 교육을 담당했던 분이 라나 씨의 초등학교 대선배님이셨단다. 그 분이 마침 서울에 와서 살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분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물었단다. “제가 너무 힘듭니다. 이럴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직장 외에도 취미생활도 좋고 뭐든 다 좋겠어요.” 그랬더니 그 대선배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셨단다. 교사를 해보지 않겠냐고. 그래서 무슨 교사냐고 되물으니까, 그 선배님은 라나 씨를 마로니에공원으로 데리고 갔단다. 거기서 마주치게 된 건 천막투쟁이라는 걸 하고 있던 노들야학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노들 사람들이 거기 마로니에공원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을 때 제가 그 안으로 들어갔는데… 뭔가가 뜨거운 거예요.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들어가면서부터 가슴에 느껴지는 뜨거움 같은 게 있었어요. ‘어, 이 느낌은 뭐지?’ 그렇게 혼자 자문자답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편하게 묻겠다는 전제를 달며 질문을 던졌다. 라나 씨의 첫인상이나 외적 이미지 자체만 본다면 순하고 여성스럽고 아기자기한 일을 좋아할 것 같은데, 그런 농성 현장의 모습에서 거부감 같은 건 없었느냐고. 그랬더니 대학 시절에는 솔직히 그런 거부감이 있었단다. 대학 전공이 다름 아닌 사회학 아닌가. 운동권 선배들로 가득한 분위기였기에 투쟁의 현장 같은 건 익숙했지만, 그런 제안을 받을 때마다 라나 씨는 싫다고 거절했었단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에요. 전 싫어요.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랬던 마음으로 살아왔던 사람이었는데, 노들의 농성천막에 들어설 때는 어떻게 가슴 뜨거움을 느끼게 됐을까?

“천막을 치고 맨땅에서 야학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난 여기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어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정말로 진지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시민교사 제안을 받고 그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그들과 자주 얼굴을 익히고 점점 더 반가운 얼굴이 되어갔어요.”

  당시 라나 씨가 다니던 직장은 모(某) 공기업의 콜센터였는데, 업무 자체는 이전의 재택근무 당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단다. 쉬는 모습이 보이면 같이 근무하던 같은 조 사람들의 점수를 다 같이 깎아버리는, 화장실에 있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눈치를 봐야 하는 틀 속에 꼼짝도 못하며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치게 된 노들의 사람들한테선 말 그대로 ‘숨통이 트이는’ 세상이 느껴진 셈이니, 그의 몸과 마음이 향하는 길 또한 그렇게 바뀌는 게 당연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추운 천막 안에서도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살아오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저는 비장애 속에서 대부분 살아왔기 때문에 많은 장애인들을 한번에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많은 장애인들을 거기서 만나게 됐죠. 처음엔 ‘어떻게 이런 데가 있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공부를 하겠다고 이렇게 찬 바닥에 나와 있는데… 저는 너무 편하게 학교를 다녔구나 싶었죠. 제가 경험하고 해왔던 모든 것들이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느꼈던 모든 감정들도 너무 사치스럽다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우리 함께 둥글게 살아요

  인연이라는 건 이렇게도 연결이 되는 걸까? 그때 노들에서 제안이 들어왔단다. 이쪽에 와서 일을 할 수가 있겠느냐고. 그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묻지 않아도 정해진 답이었을 테고, 그는 활동보조 코디네이터가 되어 그들과 함께하는 인생의 옷을 다시 한번 갈아입게 됐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거, 같이 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거, 세상에서 그것보다 마음 편한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면 노들을 알게 된 이후로 자신의 인생에서 바뀐 게 무엇이 있는지를 물었다.

“무엇이라기보다는… 송두리째 다 바뀐 것 같은데요. 제가 그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제 삶의 목표였던 많은 것들이 바뀐 것 같아요. 가치관들도 많이 변화했고요. 그 이전까진 저는 그냥 세속적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느끼는 요구 그대로 받아서, 저의 장애와 무관하게 그 사람들이 원하는 삶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막연하게 노력했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데 그런 과정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게 항상 불만이었던 것 같고요.”

  투쟁의 현장이든 관련단체 사무실이든 어디든 간에, 인간 이라나의 모습은 여기저기에서 눈에 띈다. 그런데 변함없이 느껴지는 건, 항상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생에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자신감과 만족감의 반증이 아닐까. 제도와 계약의 틀을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설명해야 하는 콜센터의 직원이 아니라, 서로의 인생을 나누고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동료상담가로서의 삶이 훨씬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저는 제가 특별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렇다고 제 삶이 특별하기를 원했던 적도 없지만, 어쨌든 제 성향 자체가 부딪치기 전에 미리 겁내거나 하는 성향하고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살아온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인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자주 얘기하곤 해요. 많은 사람들이 겁내기 시작하면서 뒷걸음을 치는 속도보다는, 뭔가 해내고 앞으로 나가려는 속도를 좀 더 냈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야만 후회도 줄어들 테니까요. 무언가를 했다는 건, 하지 않았던 것만큼의 후회를 덜할 수 있는 길이 되거든요.”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공적인 게 아닌 개인적인 계획을 말해 달라 했는데, 지금까지도 몸이 많이 아프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란다. 또한 마음에 가장 힘들게 남겨지는 일 또한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선은 건강이 가장 먼저인 것 같고, 아픔이라는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겠단다. 더불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게 내내 남겨지는 후회라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반복하곤 한단다. 그리고 성인으로서, 여자로서 설계할 수 있는 여러 인생의 꿈을 자유롭게 펼쳐보고 싶다고 한다.

  모든 대화를 마치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길목까지 함께하면서 느낀 건, 참 오랫동안 만나왔던 친구와 동행하는 것 같다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좋은 만남의 시간을 자주 갖자는 인사와 함께 골목길로 접어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봤던 영상의 문구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글 시작 부분에도 짧게 언급했지만, 2009년 겨울에 이라나 씨가 속한 노래패 ‘시선’의 공연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각 멤버의 삶을 얘기하는 시간에 라나 씨를 소개하는 동영상이 짧게 상영됐었는데, 그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한마디를 새기며 사라졌었다.

    '둥글게 살아요 - 이라나’ 

 어쩌면 이 한마디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압축하며 표현한 모든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둥글게 살되 뒤로 물러남 없이 부딪치자는 것, 뒷걸음을 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 다음 만남의 기회가 생기면, 그때는 더 깊어진 마음과 진해진 그의 미소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jm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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