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구애받지 말고, 자신의 꿈 먼저 설계하세요
[사람사는 이야기] 시각장애 교수 이동영
본문
모든 월간지가 마찬가지겠지만, <함께걸음> 역시 새 책을 발행하자마자 편집회의부터 연다. 다음 호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 목차에 해당되는 내용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중요하지만,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을 결정하는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게 된다. 책 표지의 구성과 구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와 핑계로 매번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중구난방의 토론과 함께 예비후보(?)를 복수로 압축하고, 그 다음에 섭외 작업을 시작한다. 이번 11월호는 시각장애를 가진 입장으로 최근에 교수 임용이 됐다는 ‘그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결정됐다. 교수라는 단어가 남기는 선입관에 따라 중후한 연령대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해당 자료를 통해 확인한 얼굴은 뜻밖에도 동안(童顔)이었다. 나이도 삼십 대 초반이고 어디선가 봤던, 또한 만났던 인물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이동영 -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만나러 출발했다. 꽃동네라는 명칭 때문에 충북 음성군 어딘가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학교는 훨씬 더 내려간 청원군 현도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부고속도로의 음성IC가 아닌, 음성-진천-증평-오창-서청주IC를 지나고 경부고속국도와 만나는 남이분기점을 지나 청원분기점 다음의 청원IC가 학교로 향하는 진입로였다. 십여 분만 더 달리면 대전광역시의 대덕구와 유성구가 등장할 만한 위치였다.
청원IC에서 나와 국도를 달리며 얼마간 들어가니, 아담하고 예쁜 건물들이 모여 있는 캠퍼스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하다고 해야 할까? 첫 인상과 첫 느낌이 좋으면, 그 다음의 모든 건 전부 다 즐거운 마음으로 진행되는 법이다. 차를 세우고 인근 건물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던 학생들한테 여기가 연구동이 맞는지 물었다. 맞다는 대답에 이동영 교수님을 만나러 왔다 하니까, “아, 이 교수님이요?” 하며 아주 반갑게 길안내를 했다.
교수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서 직접 마주대하고 나니, 분명히 어디선가 봤던 얼굴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더 밀려들었다. 글쎄, 도대체 어디서 만났을까…?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하는 과정에서 궁금증은 단번에 풀렸다. 이동영 교수는 지난 시절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직업재활수행업무를 담당하며 활동했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분명 아는 얼굴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이 맞았다. 초면(初面)이 구면(舊面)이 되면, 그 다음부터의 진행은 꼬불꼬불 국도가 아닌 시원한 고속도로가 되는 법이다. 천천히 서행하던 대화는 순식간에 시속 100km로 내달렸다.
“시력이 나빠진 거는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인데요. 등급 판정은 한참 이후인 거의 스무 살 가까이 돼서 받았죠. 그때 당시에는 제가 신체장애의 단계라는 걸 생각조차 못했었습니다. 조금 눈이 나쁜 것이라는, 그 이상과 이하의 의미부여를 안 했었기 때문이죠. 좀 불편할 뿐이지 장애등급까지 받을 그런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정확한 장애명칭이 무엇이냐 물으니까 시각장애 4급이란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보이는지를 다시 물으니까,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참 애매한 대목이라고 한다. 마침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함께걸음>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의 표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무엇이 어디까지 보이는지를 확인해 달라 했다. 책 표지에 아주 가까이 눈을 대며 살피던 그는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맨 위의 함께걸음이라는 글씨는 보이고요. 표지 인물의 얼굴도 누구인지 보이네요.”
시각장애를 가진 교수님을 만나고 있는데, 뭔가가 보인다는 말이 오해로 다가설지도 모르겠다. 이동영 교수가 손에 들고 마주본 <함께걸음> 표지는, 말 그대로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집중하며 관찰한 결과이다. 일반적인 시력검사라는 게 시각장애 입장에서도 통용되는지를 물었더니, 자신은 0.05에서 0.1 정도의 시력은 나온다고 한다. 어지간한 형체나 색깔 정도는 거의 다 보이는데, 작은 글씨만 대하면 힘들어진단다.
이 대목에서 확인 차원의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시각장애인데 형체나 색깔은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눈이 안 좋아서 안경을 쓰는 사람들과 시각장애의 구분점은 어느 선인지, 그 점이 궁금해졌다.
“안경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교정이 가능한 눈에 맞추는 안경과는 관계가 없고요. 교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이 눈 자체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봐야 하는 대상을 키워야 하는 것이죠. 즉, 제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크기만큼 제가 봐야 할 대상을 돋보기를 통해 키우는 거지, 제 눈을 교정시킬 방법은 없는 겁니다.”
장애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만큼, 그의 시력은 아주 천천히 나빠졌다고 했다. 그럼 어릴 때 봤던 기억 같은 건 간직하고 있을까? 당연히 모두 다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주 꼬마 시절의 동네 모습까지도 생생한 영상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꼬마 시절과 성장기의 인간 이동영은 어떤 아이였냐고 되물었다.
그는 잠시 동안 껄껄하며 웃었다. “글쎄요, 성장기라….” 본인 스스로도 이런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떠올리는 게 아닐까 싶은 장면이었다.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여서 병원에 갔을 때 저의 증상을 처음 알게 됐죠. 외부적으로 상처를 입거나 한 건 전혀 아니었고요. 병원에서도 저의 장애에 대해 어떤 병명(病名)이나 병인(病因)을 정확하게 밝혀 주진 못했어요. 성장기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똘똘한 아이였습니다. 학급 반장도 줄곧 했었고요. 체육 활동을 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어요. 축구와 달리기를 특히 잘했었죠. 공부 잘하고 운동도 좋아하고, 반장의 입장에서 주도적으로 앞장서는 아이였고, 시력을 제외하곤 다른 학생들과 별다른 차이 없이 지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눈이 안 좋아지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는지 물었다. 본격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시기가 바로 사춘기 시절과 맞물리기에, 남모르는 힘겨움을 겪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사춘기…. 참 마음이 아프죠.”
한마디 짧은 대답과 허탈한 미소를 남기며, 그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대답을 듣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가 중3과 고1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떤 고비였는지 밝힐 수 있는 수위까지만 얘기해 달라 했다.
“중학교 때는 전교 5등 안에 들 정도로 나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중3 때부터 외국어고 진학을 본격적으로 준비했었어요. 그런데… 저의 시력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진학을 못하게 됐죠. 거기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때까지는 학교의 틀 안에 따라가기만 하면 큰 문제없이 학교생활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었는데, 난생 처음 저의 불편함을 이유로 좌절을 겪게 되니까…, 사회로부터 그걸 경험하게 되니까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한창 공부해야 할 때 겪었던 일이라서, 고교에 간 이후에도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나름 자신 있게 원하고 준비했던 외고 진학이 시력장애를 이유로 무산됐다는 거, 가장 민감한 감수성의 시기에 그가 받은 상처가 그 무엇보다 컸을 거라는 공감대가 느껴졌다. ‘사회’라는 벽에 최초로 부딪치는 건 청소년기에 맞이하는 통과의례와도 같다. 하지만 그것이 장애를 이유로 한 좌절과 연결됐다는 건, 인간 이동영의 가슴에 커다란 균열로 남겨졌을 게 분명한 일이었다.
대화의 내용을 살짝 바꿨다. 학교 시절의 친구 관계는 어땠냐고 물으니까, 괜찮았다는 한마디로 긍정을 한다. 같은 동네에서 계속 진학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친구들이 중학교로, 중학교 친구들이 고교를 같이 다니다 보니까 교우관계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제 사정을 뻔히 아는 것이죠.” 하는 부연설명이 덧붙었다.
공부하겠다는 결심 같은 걸 하게 된 계기가 있었냐고 질문했다. 그런데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공부는 죽 해왔던 것이기에, 어떤 다짐에 의해 새롭게 시작했던 건 아니었단다. 그냥 하던 공부를 꾸준히 이어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안 보이게 되니까 공부 방법이 바뀌었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계속했는지가 궁금했다.
“아무래도 책을 가까이 보다 보니까, 일반적인 시력 또한 조금씩 저하가 됐겠죠. 어릴 때는 맨눈으로 책을 봤어요. 초등학교 교과서는 글자가 컸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죠. 특별한 보조기구 없이도 가능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돋보기를 대고 책을 본 것 같아요. 그렇게 공부를 했죠. 방법이 급격하게 변하거나 했던 건 없습니다. 아예 안 보였다면 점자를 배운다거나 음성을 통해 익힌다거나 했을 텐데, 꾸준히 봐오던 것들이 점점 흐릿하게 안 보이는 과정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갑자기 지장을 받는다거나 새롭게 결심하는 등의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자신의 주변에 CPA(공인회계사) 공부를 한 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이 계셔서, 그 또한 CPA를 꿈꾸며 대학 전공을 경영학으로 정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장애하고 별다른 연관 없이 선택했던 분야란다. 그렇게 경영학도의 학부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부터 사회복지학을 자신의 새로운 전공과 인생의 도전으로 결정하게 됐단다.
아무리 장애를 천천히 체득하게 됐다 해도, 그것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까놓고 묻겠다며 질문을 던졌다. 인간적으로 자신의 장애를 후회했던 시점이 있었는지, 인간적인 좌절이라 해야 할 만큼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지를. - 이 질문은 앞서 언급했던 고교 진학 전후의 갈등에 국한된 사항이 아닌,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를 놓고 회고해 달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른 것이었다.
“좌절이라…, 글쎄요. 장애 때문에 인생 차원의 좌절을 경험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이 한마디 대답이 던져진 뒤, 허공 어딘가를 잠시 응시하던 그의 입에서 새로운 답변이 흘러나왔다. 뜻밖에 아주 강한 어조로 또 다른 내용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랄까? 그것 중 하나가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항상 더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는… 그런 게 많이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토익(TOEIC)시험을 볼 때의 일이었죠. 시각장애인이 시험을 보는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3개월 정도를 싸웠어요. 인권위에 진정까지 했을 정도였죠. 그때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그 쪽의 논리와, 제가 말하는 논리가 너무나 틀린 거예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장애 학생들이나 장애를 가진 모든 분들을 위해서 동등하게 시험에 참가하고 경쟁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집행부 쪽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비장애인들한테 역차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이동영 교수가 요구했던 건 가장 기본적인 아니, 기초적인 사항이었다. 수능시험을 보는 것처럼 글씨를 확대해 주고, 시간을 1.5배 더 달라는 것. 덧붙여서 자신의 장애 특성에 맞게 답안지(OMR카드) 작성을 위한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거. 그런데 그런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시종일관 안 된다는 대답만 들었단다. 시험지 안에 답을 올바르게 표시했다 해도 답안지에 옮겨 적으면서 실수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 정도의 기초적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전례가 없다는 답변만 계속 들어야 했다는 거.
“그때 굉장히 난감했고, 사회적인 시스템을 잘 모르던 상태에서 혼자 싸우려니까 참 많이…, 좌절이라면 그런 게 좌절이리라는 느낌도 체험적으로 받았습니다.”
직접적인 해결이 안 되었기에 결국엔 인권위에 제소를 했고,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나와서 시험을 치르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같은 학교 안의 장애학생들한테 물어 보니까, 이젠 그것이 완전하게 관례화 되어 아주 편하게, 굳이 별도의 신청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해주는 제도가 완성됐다고 하기에 참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 선례를 만들었던 것처럼, 사회와 직접 부딪치면서 어려웠던 부분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또한 좀 더 본질적인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했던 것 같단다. 혼자만의 좌절과 절망으로 머물렀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갈림길로 어긋났을까 싶은 혼자만의 염려와 추측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다시 한 번 분위기를 바꿨다. 이젠 현실적인 직업으로 교수님이 되셨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교수가 되셨는지가 궁금했다. 교수 임용은 바로 이번 학기에 된 것이라 한다. “저도 아직 낯섭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던 3년 정도의 시간강사 생활 뒤에 우연히 교수 임용공고가 난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한다. ‘기회가 아주 좋아서 됐다.’는 한마디가 뒤따랐다.
“처음부터 교수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던 거는 사실 아니에요.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직접적인 건 아니지만, 다양한 정책수립과정에 제가 간접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많았었죠. 그러면서 정말 그런 정책과정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적 선택이 어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교수라는 직업이 그런 활동을 하는 데 상당히 좋고 유리한 걸로 다가왔기 때문이지, 직업 자체로써 교수를 목표로 하며 공부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강단에 처음 섰을 때의 기분은 어땠냐고 물으니까, “아, 많이 떨렸습니다.”라고 두 차례나 같은 대답을 반복하며 웃었다. 시간강사 생활을 3년 했다지만, 정식 교수로 강단에 선 것은 이번 학기가 처음이니까 불과 얼마 전의 일인 셈이다. 게다가 교수로서의 첫 수업은 대학원 수업이었단다.
“시각장애를 갖고 계신 분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항상 처음에 대한 두려움이 비장애인 분들보다 좀 커요. 소위 초행길 같은 데도 낯서니까, 많이 헤매면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처음이라는 것에 물론 설렘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에 비해서 두려움이라는 것도 상당히 크거든요. 익숙해지면 잘 보이는 분들보다 더 익숙하게 잘하지만, 항상 처음에는 일정한 실수가 제법 많이 생겨나요. 하다못해 강단에 오를 때도 교단의 높이라든지, 마이크 위치라든지, 학생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나 상태라든지, 위에 달린 조그만 푯말을 보며 강의실을 찾아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런 모든 사항들이 낯선 것과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갖게 만들곤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학교에서 안내와 인도를 잘 해주셔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며 안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첫 수업 시간이 행정론이었는데, 처음부터 자신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교수가 됐으며, 장애와 관련한 자신의 상황도 첫 시간에 다 얘기했단다. 학생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그 낯섦에 대한 두려움만큼의 실수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단다. 그렇다면 학교 차원에서는 시각장애 교수를 위한 배려랄까? 특별히 어떤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아직 제도화 되어 있는 것은 없어요. 선례가 없기 때문이죠. 대신 학교 당국에서는 적극적으로 저한테 필요한 것을 편안하게 얘기해 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기존의 어떤 편의시설이나 세팅을 가지고 저를 맞이한 건 아니었어요. 다만 학교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배려해 주시겠다고, 임용 당시 과정부터 지금까지 늘 말씀해 주시죠. 그래서 현재까지는 큰 불편함 없이 지낸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새로 오신 젊은 교수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뜨겁죠!” 하며 자신이 먼저 껄껄 웃는다. 같이 웃다가 ‘얼마나 뜨거운데요?’라는 질문을 곧장 이었다. 일단 학부 친구들은 젊은 교수가 왔다는 점을 좋아하는 것 같고, 대학원 과정에서도 특수대학원이기에 장애인 관련기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편했단다.
“어떤 생각에 대한 공감과 공유라는 게 참 중요하죠. 수업 외적인 인간적인 부분에서도 참 중요한데, 그런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이 학생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선 것 같아요. 또한 저의 학교에 장애인복지 분야를 전공한 교수님이 그동안 없었다는 점도 빼놓을 순 없겠죠. 그런 부분에서도 학생들의 갈증이라면 갈증 같은 게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이 채워졌다는 면도 있을 거예요.”
그렇게 답한 뒤 옆에 앉아 있던 조교한테 혼잣말처럼 한마디 했다. “그게 나만의 느낌인가?” 또다시 환한 웃음꽃이 연구실 안에 피어났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좌우명으로 삼으며 살아간다는 이동영 교수, 그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 이후에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왔단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줄곧 강조하는 것도 ‘성실함’이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지금 막 교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지만, 현재의 직책에 한정짓는 게 아니라, 이동영이라는 사람의 10년 후와 20년 후의 개인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바대로 교수 자체가 자신의 최종 목표는 아니었기에, 거기에 큰 의미부여는 하지 않는다며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 나라의 장애인 복지를 이끌며 가고 싶죠. 제가 경험했던 것, 또한 제가 고민했던 부분들을 정책화해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이끌어나가는 게 저의 가장 큰 계획이고요. 그런 계획에 있어서의 어떤 평가기준이라고 할까? 그런 기준점을 밝혀야 한다면 제가 간직한 기준점은 이거예요. 장애아동을 둔 부모님들의 가장 큰 소망이 뭔지 아시나요? 하루라도 일찍, 내 자식이 본인보다 하루라도 일찍 죽었으면 한다는 거, 본인은 하루라도 늦게 죽었으면 하는 게 장애아동을 둔 부모님들의 똑같은 가장 큰 소망입니다. 아시다시피 부모의 보호가 없으면, 그래서 이 사회에서 방치된다면 인간적인 삶을 거의 살 수가 없다는 제도적 시스템이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상황을 가장 염두에 두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건 남 얘기가 아니기도 하죠. 바로 저의 부모님의 삶이 그러했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생각하고 설계하는 기준점은 장애인복지를 이끌고 가서, 부모님들이 진짜 편하게 눈 감고 세상을 떠날 수 있을 수준으로 우리나라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한다. 그 정도까지 장애인복지 수준을 높이면,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늘 든단다. 그렇다면 학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운동적인 차원과 국가정책적인 차원까지 아우를 것이냐 물으니까 그렇다는 대답이 명확하게 이어졌다.
“그 모든 걸 다 함께 아우르면서 가야겠죠. 우리나라의 장애인복지 분야가 학문적으로도 너무나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도 젊은 학자로서 꾸준히 노력할 겁니다. 또한 학교 안에만 머무르면 실천학문으로써, 실천하는 교수로서의 참의미가 없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는 그런 계획을 위해 실천 활동을 열심히 해나가면서 제 목표에 다가갈 겁니다. 지금도 그런 목표를 바라보며 최선을 다 하고 있는데, 제가 정말 열심히 하면 십 년 이후에는 분명히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 모든 걸 희망적으로 바라봅니다.”
취재를 위한 대화와 생활 속의 잔잔한 에피소드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됐다. ‘사람사는 이야기’를 진행할 때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던지는 질문을 마지막 순서로 이었다. 같은 상황, 같은 장애, 같은 입장의 후배들에게 전해 줄 조언이나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면 얘기해 달라 했다. 항상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되는 질문이었기에, 이동영 교수의 입에서는 어떤 내용이 전해질까 기대가 됐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의 인생철학이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묻어나왔다.
“일단 이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꿈을 크게 가졌으면 한다는 거예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장애에 끼워 맞춰서 꿈을 설계하는 경우가 정말 많이 있죠. 물론 현실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부터 본인들의 특기나 취미나 능력과는 동떨어진 끼워 맞추기식의 인생설계를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장애에 꿈을 끼워 맞추지 말고, 본인의 꿈을 먼저 설계한 뒤에 장애를 활용해 보세요. 그렇게 활용해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못하는 부분도 솔직히 있겠지만, 사실 남들이 못하는 걸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충분히 있다는 걸 절대 잊으시면 안 돼요. 그런 부분들을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다 보면, 본인이 하고 싶은 일들과 꿈들에 대해서 제한되지 않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히 발견하게 될 테니까, 스스로 너무 한정하지 말고 너무 작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시력이 반만 보인다고 해서, 제가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할 그런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 이상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이기에, 인생 설계에 있어서는 항상 꿈을 크게 가지시기를 진심으로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특히 차량으로 이동하며 고속국도 위를 달리다 보면, 그 날의 취재 내용이 대강의 원고 형태로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돌아오는 길 내내 ‘사람사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희미하게나마 자리를 잡는다는 의미이다. 이번에는 두 개의 영어 단어가 끊임없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differently abled’라는 말, 그 용어만큼 정확하게 맞는 표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되새김질됐다.
장애는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증상이다. 지금 당장 눈에 띄는 신체장애가 없다 해도, 누구나 나이가 들면 하나둘씩의 장애를 예외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법이다. 돋보기안경 없이는 책을 읽을 수 없는 시각장애가 찾아오고,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 어려운 지체장애가 뒤따른다.
보청기 없이는 듣지도 못할 청각장애가 찾아들 수 있고, 모든 이들이 허리와 무릎의 통증을 호소하며 생활의 반경을 점점 더 줄여가는 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는 장애(disability)의 범주 안에 노인(老人)을 포함시키지 않았던가.
장애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할 사항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시스템을 굳건히 만들어서 하나씩 풀어야 할 모두의 과제인 것이다. 장애인이 장애를 느낄 수 없도록 사회가 운영되면, 그 사회는 장애와 비장애를 구별할 필요도 없는 진정한 복지의 세상으로 승화된다. 사회구조 전반에 장애가 있기 때문에, 정작 사람 스스로가 생활하기 힘들어진다는 것 - 개인에게 장애를 극복하라는 식의 단순한 행정논리와 사고방식으로는 단 한 걸음의 발전도 이룰 수가 없는 일이다.
자신의 안에 있는 또 다른 능력과 가능성, 즉 ‘differently abled’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찾아낸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장애의 틀 안에 꿈을 끼워 맞추기보다는, 커다란 꿈을 먼저 설계한 뒤 그 꿈 안에 장애를 활용하라는 이동영 교수의 조언은 장애·비장애를 떠나 모두가 새겨들을 만한 인생의 무게를 담고 있다.
비록 시력이 남들보다 좋지 않다고 했지만, 그의 가슴 안에는 그만의 능력과 가능성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을 확고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꿈을 꿈만으로 간직한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당연하다. 가능성을 실제의 현실로 만든다는 건, 그 노력의 어려움만큼이나 성취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법이 아닌가.
실천하는 교수로서의 10년 후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기를 기대하며, 그의 마음속 눈이 더욱 밝게 빛나게 될 내일을 그려 본다. 지금은 학생들의 반응이 뜨겁다지만, 몇 년 후에는 ‘differently abled’를 실천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10년 후에는 이 땅의 장애인복지 분야 전체를 뜨겁게 만들어야 할 일이다. 그는 해내리라 믿는다. 남들이 지나치며 놓쳐버리는 또 다른 세상을,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뜨거운 가슴으로 응시하며 나아갈 테니까 말이다.
중구난방의 토론과 함께 예비후보(?)를 복수로 압축하고, 그 다음에 섭외 작업을 시작한다. 이번 11월호는 시각장애를 가진 입장으로 최근에 교수 임용이 됐다는 ‘그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결정됐다. 교수라는 단어가 남기는 선입관에 따라 중후한 연령대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해당 자료를 통해 확인한 얼굴은 뜻밖에도 동안(童顔)이었다. 나이도 삼십 대 초반이고 어디선가 봤던, 또한 만났던 인물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이동영 -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만나러 출발했다. 꽃동네라는 명칭 때문에 충북 음성군 어딘가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학교는 훨씬 더 내려간 청원군 현도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부고속도로의 음성IC가 아닌, 음성-진천-증평-오창-서청주IC를 지나고 경부고속국도와 만나는 남이분기점을 지나 청원분기점 다음의 청원IC가 학교로 향하는 진입로였다. 십여 분만 더 달리면 대전광역시의 대덕구와 유성구가 등장할 만한 위치였다.
청원IC에서 나와 국도를 달리며 얼마간 들어가니, 아담하고 예쁜 건물들이 모여 있는 캠퍼스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하다고 해야 할까? 첫 인상과 첫 느낌이 좋으면, 그 다음의 모든 건 전부 다 즐거운 마음으로 진행되는 법이다. 차를 세우고 인근 건물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던 학생들한테 여기가 연구동이 맞는지 물었다. 맞다는 대답에 이동영 교수님을 만나러 왔다 하니까, “아, 이 교수님이요?” 하며 아주 반갑게 길안내를 했다.
교수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서 직접 마주대하고 나니, 분명히 어디선가 봤던 얼굴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더 밀려들었다. 글쎄, 도대체 어디서 만났을까…?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하는 과정에서 궁금증은 단번에 풀렸다. 이동영 교수는 지난 시절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직업재활수행업무를 담당하며 활동했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분명 아는 얼굴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이 맞았다. 초면(初面)이 구면(舊面)이 되면, 그 다음부터의 진행은 꼬불꼬불 국도가 아닌 시원한 고속도로가 되는 법이다. 천천히 서행하던 대화는 순식간에 시속 100km로 내달렸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정확한 장애명칭이 무엇이냐 물으니까 시각장애 4급이란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보이는지를 다시 물으니까,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참 애매한 대목이라고 한다. 마침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함께걸음>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의 표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무엇이 어디까지 보이는지를 확인해 달라 했다. 책 표지에 아주 가까이 눈을 대며 살피던 그는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맨 위의 함께걸음이라는 글씨는 보이고요. 표지 인물의 얼굴도 누구인지 보이네요.”
시각장애를 가진 교수님을 만나고 있는데, 뭔가가 보인다는 말이 오해로 다가설지도 모르겠다. 이동영 교수가 손에 들고 마주본 <함께걸음> 표지는, 말 그대로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집중하며 관찰한 결과이다. 일반적인 시력검사라는 게 시각장애 입장에서도 통용되는지를 물었더니, 자신은 0.05에서 0.1 정도의 시력은 나온다고 한다. 어지간한 형체나 색깔 정도는 거의 다 보이는데, 작은 글씨만 대하면 힘들어진단다.
이 대목에서 확인 차원의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시각장애인데 형체나 색깔은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눈이 안 좋아서 안경을 쓰는 사람들과 시각장애의 구분점은 어느 선인지, 그 점이 궁금해졌다.
“안경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교정이 가능한 눈에 맞추는 안경과는 관계가 없고요. 교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이 눈 자체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봐야 하는 대상을 키워야 하는 것이죠. 즉, 제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크기만큼 제가 봐야 할 대상을 돋보기를 통해 키우는 거지, 제 눈을 교정시킬 방법은 없는 겁니다.”
장애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만큼, 그의 시력은 아주 천천히 나빠졌다고 했다. 그럼 어릴 때 봤던 기억 같은 건 간직하고 있을까? 당연히 모두 다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주 꼬마 시절의 동네 모습까지도 생생한 영상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꼬마 시절과 성장기의 인간 이동영은 어떤 아이였냐고 되물었다.
그는 잠시 동안 껄껄하며 웃었다. “글쎄요, 성장기라….” 본인 스스로도 이런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떠올리는 게 아닐까 싶은 장면이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
그렇다면 눈이 안 좋아지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는지 물었다. 본격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시기가 바로 사춘기 시절과 맞물리기에, 남모르는 힘겨움을 겪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사춘기…. 참 마음이 아프죠.”
한마디 짧은 대답과 허탈한 미소를 남기며, 그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대답을 듣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가 중3과 고1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떤 고비였는지 밝힐 수 있는 수위까지만 얘기해 달라 했다.
“중학교 때는 전교 5등 안에 들 정도로 나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중3 때부터 외국어고 진학을 본격적으로 준비했었어요. 그런데… 저의 시력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진학을 못하게 됐죠. 거기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때까지는 학교의 틀 안에 따라가기만 하면 큰 문제없이 학교생활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었는데, 난생 처음 저의 불편함을 이유로 좌절을 겪게 되니까…, 사회로부터 그걸 경험하게 되니까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한창 공부해야 할 때 겪었던 일이라서, 고교에 간 이후에도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나름 자신 있게 원하고 준비했던 외고 진학이 시력장애를 이유로 무산됐다는 거, 가장 민감한 감수성의 시기에 그가 받은 상처가 그 무엇보다 컸을 거라는 공감대가 느껴졌다. ‘사회’라는 벽에 최초로 부딪치는 건 청소년기에 맞이하는 통과의례와도 같다. 하지만 그것이 장애를 이유로 한 좌절과 연결됐다는 건, 인간 이동영의 가슴에 커다란 균열로 남겨졌을 게 분명한 일이었다.
대화의 내용을 살짝 바꿨다. 학교 시절의 친구 관계는 어땠냐고 물으니까, 괜찮았다는 한마디로 긍정을 한다. 같은 동네에서 계속 진학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친구들이 중학교로, 중학교 친구들이 고교를 같이 다니다 보니까 교우관계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제 사정을 뻔히 아는 것이죠.” 하는 부연설명이 덧붙었다.
공부하겠다는 결심 같은 걸 하게 된 계기가 있었냐고 질문했다. 그런데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공부는 죽 해왔던 것이기에, 어떤 다짐에 의해 새롭게 시작했던 건 아니었단다. 그냥 하던 공부를 꾸준히 이어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안 보이게 되니까 공부 방법이 바뀌었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계속했는지가 궁금했다.
“아무래도 책을 가까이 보다 보니까, 일반적인 시력 또한 조금씩 저하가 됐겠죠. 어릴 때는 맨눈으로 책을 봤어요. 초등학교 교과서는 글자가 컸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죠. 특별한 보조기구 없이도 가능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돋보기를 대고 책을 본 것 같아요. 그렇게 공부를 했죠. 방법이 급격하게 변하거나 했던 건 없습니다. 아예 안 보였다면 점자를 배운다거나 음성을 통해 익힌다거나 했을 텐데, 꾸준히 봐오던 것들이 점점 흐릿하게 안 보이는 과정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갑자기 지장을 받는다거나 새롭게 결심하는 등의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자신의 주변에 CPA(공인회계사) 공부를 한 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이 계셔서, 그 또한 CPA를 꿈꾸며 대학 전공을 경영학으로 정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장애하고 별다른 연관 없이 선택했던 분야란다. 그렇게 경영학도의 학부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부터 사회복지학을 자신의 새로운 전공과 인생의 도전으로 결정하게 됐단다.
아무리 장애를 천천히 체득하게 됐다 해도, 그것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까놓고 묻겠다며 질문을 던졌다. 인간적으로 자신의 장애를 후회했던 시점이 있었는지, 인간적인 좌절이라 해야 할 만큼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지를. - 이 질문은 앞서 언급했던 고교 진학 전후의 갈등에 국한된 사항이 아닌,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를 놓고 회고해 달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른 것이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이 한마디 대답이 던져진 뒤, 허공 어딘가를 잠시 응시하던 그의 입에서 새로운 답변이 흘러나왔다. 뜻밖에 아주 강한 어조로 또 다른 내용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랄까? 그것 중 하나가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항상 더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는… 그런 게 많이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토익(TOEIC)시험을 볼 때의 일이었죠. 시각장애인이 시험을 보는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3개월 정도를 싸웠어요. 인권위에 진정까지 했을 정도였죠. 그때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그 쪽의 논리와, 제가 말하는 논리가 너무나 틀린 거예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장애 학생들이나 장애를 가진 모든 분들을 위해서 동등하게 시험에 참가하고 경쟁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집행부 쪽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비장애인들한테 역차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이동영 교수가 요구했던 건 가장 기본적인 아니, 기초적인 사항이었다. 수능시험을 보는 것처럼 글씨를 확대해 주고, 시간을 1.5배 더 달라는 것. 덧붙여서 자신의 장애 특성에 맞게 답안지(OMR카드) 작성을 위한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거. 그런데 그런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시종일관 안 된다는 대답만 들었단다. 시험지 안에 답을 올바르게 표시했다 해도 답안지에 옮겨 적으면서 실수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 정도의 기초적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전례가 없다는 답변만 계속 들어야 했다는 거.
“그때 굉장히 난감했고, 사회적인 시스템을 잘 모르던 상태에서 혼자 싸우려니까 참 많이…, 좌절이라면 그런 게 좌절이리라는 느낌도 체험적으로 받았습니다.”
직접적인 해결이 안 되었기에 결국엔 인권위에 제소를 했고,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나와서 시험을 치르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같은 학교 안의 장애학생들한테 물어 보니까, 이젠 그것이 완전하게 관례화 되어 아주 편하게, 굳이 별도의 신청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해주는 제도가 완성됐다고 하기에 참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 선례를 만들었던 것처럼, 사회와 직접 부딪치면서 어려웠던 부분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또한 좀 더 본질적인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했던 것 같단다. 혼자만의 좌절과 절망으로 머물렀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갈림길로 어긋났을까 싶은 혼자만의 염려와 추측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다시 한 번 분위기를 바꿨다. 이젠 현실적인 직업으로 교수님이 되셨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교수가 되셨는지가 궁금했다. 교수 임용은 바로 이번 학기에 된 것이라 한다. “저도 아직 낯섭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던 3년 정도의 시간강사 생활 뒤에 우연히 교수 임용공고가 난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한다. ‘기회가 아주 좋아서 됐다.’는 한마디가 뒤따랐다.
▲ ⓒ채지민 객원기자 |
강단에 처음 섰을 때의 기분은 어땠냐고 물으니까, “아, 많이 떨렸습니다.”라고 두 차례나 같은 대답을 반복하며 웃었다. 시간강사 생활을 3년 했다지만, 정식 교수로 강단에 선 것은 이번 학기가 처음이니까 불과 얼마 전의 일인 셈이다. 게다가 교수로서의 첫 수업은 대학원 수업이었단다.
“시각장애를 갖고 계신 분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항상 처음에 대한 두려움이 비장애인 분들보다 좀 커요. 소위 초행길 같은 데도 낯서니까, 많이 헤매면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처음이라는 것에 물론 설렘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에 비해서 두려움이라는 것도 상당히 크거든요. 익숙해지면 잘 보이는 분들보다 더 익숙하게 잘하지만, 항상 처음에는 일정한 실수가 제법 많이 생겨나요. 하다못해 강단에 오를 때도 교단의 높이라든지, 마이크 위치라든지, 학생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나 상태라든지, 위에 달린 조그만 푯말을 보며 강의실을 찾아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런 모든 사항들이 낯선 것과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갖게 만들곤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학교에서 안내와 인도를 잘 해주셔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며 안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첫 수업 시간이 행정론이었는데, 처음부터 자신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교수가 됐으며, 장애와 관련한 자신의 상황도 첫 시간에 다 얘기했단다. 학생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그 낯섦에 대한 두려움만큼의 실수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단다. 그렇다면 학교 차원에서는 시각장애 교수를 위한 배려랄까? 특별히 어떤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아직 제도화 되어 있는 것은 없어요. 선례가 없기 때문이죠. 대신 학교 당국에서는 적극적으로 저한테 필요한 것을 편안하게 얘기해 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기존의 어떤 편의시설이나 세팅을 가지고 저를 맞이한 건 아니었어요. 다만 학교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배려해 주시겠다고, 임용 당시 과정부터 지금까지 늘 말씀해 주시죠. 그래서 현재까지는 큰 불편함 없이 지낸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새로 오신 젊은 교수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뜨겁죠!” 하며 자신이 먼저 껄껄 웃는다. 같이 웃다가 ‘얼마나 뜨거운데요?’라는 질문을 곧장 이었다. 일단 학부 친구들은 젊은 교수가 왔다는 점을 좋아하는 것 같고, 대학원 과정에서도 특수대학원이기에 장애인 관련기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편했단다.
“어떤 생각에 대한 공감과 공유라는 게 참 중요하죠. 수업 외적인 인간적인 부분에서도 참 중요한데, 그런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이 학생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선 것 같아요. 또한 저의 학교에 장애인복지 분야를 전공한 교수님이 그동안 없었다는 점도 빼놓을 순 없겠죠. 그런 부분에서도 학생들의 갈증이라면 갈증 같은 게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이 채워졌다는 면도 있을 거예요.”
그렇게 답한 뒤 옆에 앉아 있던 조교한테 혼잣말처럼 한마디 했다. “그게 나만의 느낌인가?” 또다시 환한 웃음꽃이 연구실 안에 피어났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좌우명으로 삼으며 살아간다는 이동영 교수, 그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 이후에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왔단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줄곧 강조하는 것도 ‘성실함’이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지금 막 교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지만, 현재의 직책에 한정짓는 게 아니라, 이동영이라는 사람의 10년 후와 20년 후의 개인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바대로 교수 자체가 자신의 최종 목표는 아니었기에, 거기에 큰 의미부여는 하지 않는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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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가 생각하고 설계하는 기준점은 장애인복지를 이끌고 가서, 부모님들이 진짜 편하게 눈 감고 세상을 떠날 수 있을 수준으로 우리나라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한다. 그 정도까지 장애인복지 수준을 높이면,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늘 든단다. 그렇다면 학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운동적인 차원과 국가정책적인 차원까지 아우를 것이냐 물으니까 그렇다는 대답이 명확하게 이어졌다.
“그 모든 걸 다 함께 아우르면서 가야겠죠. 우리나라의 장애인복지 분야가 학문적으로도 너무나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도 젊은 학자로서 꾸준히 노력할 겁니다. 또한 학교 안에만 머무르면 실천학문으로써, 실천하는 교수로서의 참의미가 없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는 그런 계획을 위해 실천 활동을 열심히 해나가면서 제 목표에 다가갈 겁니다. 지금도 그런 목표를 바라보며 최선을 다 하고 있는데, 제가 정말 열심히 하면 십 년 이후에는 분명히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 모든 걸 희망적으로 바라봅니다.”
취재를 위한 대화와 생활 속의 잔잔한 에피소드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됐다. ‘사람사는 이야기’를 진행할 때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던지는 질문을 마지막 순서로 이었다. 같은 상황, 같은 장애, 같은 입장의 후배들에게 전해 줄 조언이나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면 얘기해 달라 했다. 항상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되는 질문이었기에, 이동영 교수의 입에서는 어떤 내용이 전해질까 기대가 됐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의 인생철학이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묻어나왔다.
“일단 이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꿈을 크게 가졌으면 한다는 거예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장애에 끼워 맞춰서 꿈을 설계하는 경우가 정말 많이 있죠. 물론 현실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부터 본인들의 특기나 취미나 능력과는 동떨어진 끼워 맞추기식의 인생설계를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장애에 꿈을 끼워 맞추지 말고, 본인의 꿈을 먼저 설계한 뒤에 장애를 활용해 보세요. 그렇게 활용해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못하는 부분도 솔직히 있겠지만, 사실 남들이 못하는 걸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충분히 있다는 걸 절대 잊으시면 안 돼요. 그런 부분들을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다 보면, 본인이 하고 싶은 일들과 꿈들에 대해서 제한되지 않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히 발견하게 될 테니까, 스스로 너무 한정하지 말고 너무 작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시력이 반만 보인다고 해서, 제가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할 그런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 이상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이기에, 인생 설계에 있어서는 항상 꿈을 크게 가지시기를 진심으로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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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증상이다. 지금 당장 눈에 띄는 신체장애가 없다 해도, 누구나 나이가 들면 하나둘씩의 장애를 예외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법이다. 돋보기안경 없이는 책을 읽을 수 없는 시각장애가 찾아오고,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 어려운 지체장애가 뒤따른다.
보청기 없이는 듣지도 못할 청각장애가 찾아들 수 있고, 모든 이들이 허리와 무릎의 통증을 호소하며 생활의 반경을 점점 더 줄여가는 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는 장애(disability)의 범주 안에 노인(老人)을 포함시키지 않았던가.
장애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할 사항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시스템을 굳건히 만들어서 하나씩 풀어야 할 모두의 과제인 것이다. 장애인이 장애를 느낄 수 없도록 사회가 운영되면, 그 사회는 장애와 비장애를 구별할 필요도 없는 진정한 복지의 세상으로 승화된다. 사회구조 전반에 장애가 있기 때문에, 정작 사람 스스로가 생활하기 힘들어진다는 것 - 개인에게 장애를 극복하라는 식의 단순한 행정논리와 사고방식으로는 단 한 걸음의 발전도 이룰 수가 없는 일이다.
자신의 안에 있는 또 다른 능력과 가능성, 즉 ‘differently abled’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찾아낸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장애의 틀 안에 꿈을 끼워 맞추기보다는, 커다란 꿈을 먼저 설계한 뒤 그 꿈 안에 장애를 활용하라는 이동영 교수의 조언은 장애·비장애를 떠나 모두가 새겨들을 만한 인생의 무게를 담고 있다.
비록 시력이 남들보다 좋지 않다고 했지만, 그의 가슴 안에는 그만의 능력과 가능성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을 확고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꿈을 꿈만으로 간직한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당연하다. 가능성을 실제의 현실로 만든다는 건, 그 노력의 어려움만큼이나 성취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법이 아닌가.
실천하는 교수로서의 10년 후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기를 기대하며, 그의 마음속 눈이 더욱 밝게 빛나게 될 내일을 그려 본다. 지금은 학생들의 반응이 뜨겁다지만, 몇 년 후에는 ‘differently abled’를 실천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10년 후에는 이 땅의 장애인복지 분야 전체를 뜨겁게 만들어야 할 일이다. 그는 해내리라 믿는다. 남들이 지나치며 놓쳐버리는 또 다른 세상을,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뜨거운 가슴으로 응시하며 나아갈 테니까 말이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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