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일어날까? 기적은 이미 일어났다 > 함께 사는 세상


기적이 일어날까? 기적은 이미 일어났다

사람사는 이야기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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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혼자만의 생각을 먼저 언급해야겠다. 거창한 인생의 화두(話頭) 같은 게 아닌, 개인적으로 간직하는 영원한 질문 하나 - 바로 ‘역사에 만약(if)이라는 게 있다면?’이라는 한마디가 그것이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던 1980년대 중반과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읽었던 모든 사회과학서적들 중에서 언제나 그 한마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보니, 그건 개인적인 질문이 아니라 인생의 화두라 정정해도 될 듯하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후천적으로 갖게 된·태생부터 가지고 살아온 분들을 만날 때마다, 취재하는 입장에서 항상 떠올리는 주제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if’ 즉,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갖게 됐다면·처음부터 가지고 살아왔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 인생을 꿈꾸게 될까? 물론 이건 당사자인 모든 분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 어떤 말이나 표현으로도 추측할 수 없는 민감한 내용일 게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궁금하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스치며 지나는 식의 가벼운 질문과 대답은 원치 않는다. 지금까지 장애 없이 살아왔다면, 앞으로 생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비장애의 인생 아닌가. 이미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그 틀을 벗어날 새로운 전환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게,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화두임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번 2월호의 ‘사람 사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인물을 만나게 되어, 솔직히 취재 이전부터 기대감이 앞섰다. 드넓은 대학 캠퍼스에 들어서서 약속된 건물을 찾고자 두리번거릴 때도, 그 건물을 찾아 실내로 들어섰을 때도, 더불어 약속장소인 연구실 문 앞에 섰을 때도 기대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상묵 -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미국 MIT 공과대학원 해양학 박사, 한국해양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공로상 수상, 저서 <0.1그램의 희망> 출간 등, 그의 이력에는 감탄사가 내질러질 만한 내용밖에 없다. 그런데… 거기에서 빠졌으면(if) 하는 내용 하나가 추가된다. 2006년 7월 2일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진행하던 야외지질조사 연구 도중, 차량전복사고로 인해 네 번째 척추가 완전히 손상되어 목 아래의 전신이 마비됐다는 것….

교수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일반적인 교수실보다 훨씬 넓은 공간 한쪽 책상 앞에 앉은 이상묵 교수의 모습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조교 또는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이한테 무언가를 계속 받아 적도록 구술(口述)하는 장면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사진 촬영 준비를 하고, 녹취를 위한 마이크 설치를 마친 뒤 정식 인사를 나눴다.

    ▲ ⓒ채지민 객원기자 “저의 책은 읽어보셨나요? 그럼 거기에서 발췌하셔도 되는데, 이렇게 힘들게 직접 찾아오셔서….”

대강의 자료를 모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일이야 아주 쉽지만, 직접 뵙고 말씀을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깊이를 갖게 된다. 더욱이 <함께걸음>의 문법은 다르다. 취재원의 ‘보여지는’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라, ‘생생히 살아있는’ 그 사람의 내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이 지면의 본질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상묵 교수는 <함께걸음>의 역사와 취지, 활동 및 본문 내용에 관해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인터넷 화면까지 직접 확인하며 적지 않은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취재하러 갔다가 취재부터 당한 셈이랄까? 물론 마음은 가벼웠다. 누군가의 관심이 호의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눈빛으로 확인되기에, 오늘 대화가 진솔하게 이어질 거라는 예감이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대학 시절 전공은 해양학이었고, 지금은 모교에서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어떻게 해양학이라는 전공을 택하게 됐는지가 우선 궁금했다. 특히 아버지와 처음으로 가졌던 ‘남자 대 남자’의 대화에서 해양학이 미래의 전공으로 정해졌다는 글을 읽었던 게 잊어지지 않았다. 이 땅에선 불모지와 다름없었을 해양학이 왜 그의 인생에 찾아들어왔을까.

“고등학교에 들어가니까 문과와 이과라는 게 있더라고요. 문과를 가면 다 법대에 가려하고, 이과에 가면 다 의대에 가겠다던 시절이었죠. 그러던 당시에 사람들이 저보고 이과 쪽이 어울릴 것 같다고, 의사가 되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사실 그때는 영어를 훨씬 더 잘했었는데, 남들처럼 다 똑같은 걸 하겠거니 하며 이과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제가 한국에 와서 적응을 잘하고 공부도 제법 하니까, 아버지 입장에선 과학자를 한번 시켜보겠다는 생각이 드셨나 봐요. 그런데 과학을 하더라도 남들이 다 하는 물리나 화학 같은 것보다는,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냐. 그런 제안이 저한테 던져졌죠.”

해양학이 정확하게 뭔지는 몰랐지만, 남들이 잘 안 하는 분야를 선택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단다. 그때부터 인생의 틀도 변화됐다 한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남들이 모두 하는 건 절대로 안 한다는 것이다. 항상 길도, 세부전공이나 무엇이든 간에, 꼭 인기 없고 아무도 안 하려는 것만 찾아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성격이 그렇게 됐고, 사람 많은 데도 잘 안 가게 됐단다.

“지금이야 해외에서 공부하고 외국을 여행하는 게 모두 다 자유롭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아버님을 따라 우리 가족은 인도네시아로 갔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게 된 거죠. 그 시절의 우리나라 학생들은 몇몇 명문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가려고,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를 하며 살았거든요. 저는 외국 땅에서 매일 놀았어요. 그때도 토요일은 학교를 안 가서, 주말은 전부 노는 시간이었습니다. 학교는 8시 반에 가서 1시 반이면 끝났고요.”

그 곳의 학교를 다닌 건지 물으니까, 현지에 있던 외국인용 국제학교를 다녔단다. 한국에선 또래의 연령층들이 다 입시공부에 몰두하고 있을 텐데, 그는 거기서 신나게 놀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또렷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실감을 강하게 받았단다. ‘아, 정말 세상이 참 넓구나!’ ‘구경할 데도 많고 다닐 데도 참 많구나!’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나는 이런 것을 해보고 싶다.’라는 목표의식이 생겨났다 한다. 탐사나 탐험, 또한 오지(奧地)를 찾아가는 일에 진지한 흥미를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국제학교이다 보니까 지리와 역사 같은 걸 잘 가르쳤어요.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으로 와 있는 전 세계의 가족들이 다 모여 있으니까, 선생님들은 각 나라의 풍습이 어떻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가르쳤죠. 그래서 저 또한 그런 분야에 큰 관심을 두고 재미있어 하던 차였는데, 아버님이 해양학을 해보라 하시는 순간 ‘맞아, 그러면 많이 돌아다닐 수 있겠구나.’ 싶어 선뜻 받아들이게 됐던 겁니다.”

그래도 ‘해양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권유받고 거부감 같은 건 없었는지를 다시 물었다.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 어떤 면에서는 난데없는 제안이 아니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어졌다. 고교 시절에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이런 대화를 나눴단다. ‘너 걔 아니?’ ‘몰라.’ ‘그 해양학과 가겠다는 애 있잖아.’ ‘아, 맞다. 맞아!’ 그럴 정도로 그는 해양학이라는 게 특이해서 좋아했단다.

“전공을 정하고 대학에 대해 알아보니까 자연대라는 게 있더라고요. ‘자연대가 뭐지? 난 공대하고 의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럴 정도로 구체적인 지식이나 체계를 모르다가, 전공을 통해 거꾸로 대학 시스템을 알게 된 셈이죠. 웃긴 건 저처럼 해양학과를 소신 지원한 애가 없거든요. 자연대에 430명이 들어왔는데, 1차에서 해양학과를 지원한 학생이 딱 두 명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저는 저 말고 도대체 어떤 녀석이 더 지원했는지 궁금해서 알아볼 정도였어요.”

학과의 정원은 25명인데, 1차 희망학과로 해양학과를 택한 학생이 두 명뿐이었다는 거. 그리고 혼자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누가 있다는 게 희한했을 정도라는 게, 당시의 대학과 사회 분위기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긴 됐는데,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한다. 직접 강의실에 앉아 공부를 해보니까, 자신이 생각하던 기대와 전공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단다.

“그러니 몰라서 소신지원을 했다는 거죠. 이게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내 학과를 소신지원해서 오늘날 이렇게 잘 됐다.’ 이런 소리를 어디 가서도 못해요. 괜히 특이해서 결정을 했던 것뿐이죠. 왜 그런 결정을 내렸었나 하면, 사실은 아버님이 저를 인간취급(?)해 준 게 그 대화를 나눌 때가 생전 처음이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이상묵 교수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같은 자리에서 후학을 육성하는 교수가 됐는데, 요즘 학생들은 어떻게 지원하고 성향은 어떤지가 궁금해졌다. 예전에 비해 사전에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훨씬 많아졌는데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전히 전공에 대해 잘 모르고 지원을 한단다. 그러니 자신이 몸담은 전공 학과에 소신지원을 하라는 얘기도 못 꺼낸단다. 더불어 자신이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입시생 시절에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도 이 전공을 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며 잠시 시선을 옮겼다.

“우리 때는 거의 다 원서였죠. 저는 원서였기 때문에 참 좋았어요. 요즘 강의를 하다 보면, 책들이 하도 많이 번역돼서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많이 떨어져요. 제가 대학교 4년을 다니면서 원서 아니었던 책은 ‘대학국어’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도대체 해양학을 공부하는 건지 영어공부를 하는 건지 모를 정도였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오히려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영어 실력을 키우고 전문용어와 이론을 확실하게 익히게 됐으니까요.”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탐사와 탐험, 더불어 오지(奧地)를 찾아가는 일이 실제 직업과 인생으로 실현됐다는 건 커다란 성취를 의미한다. 미국 MIT에서 9년 6개월의 치열한 경쟁을 치른 뒤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에서 연구원 활동을 하던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던 건 정부가 새로 구입했던 200억 규모의 첨단 탐사선 ‘온누리호’였다. 첨단의 탐사선이 갖춰졌지만, 그 배는 건조된 목적대로 쓰이지 못했단다. 그 첨단 장비를 활용할 전문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대목에선, ‘아이러니컬’이라는 단어가 다시 한 번 반복될 만했다.

“안 가본 곳이요? 아주 많죠.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행과 제가 생각하는 여행은 관점이 아주 달라요. 사람들은 어디를 안 가봤기 때문에 가는 거고요. 저는 거기를 가야 되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제가 여행을 물론 좋아하지만, 여행이 좋아서 연구하는 건 아니거든요. 지도를 펼쳐놓고 ‘내가 여기를 안 가봤으니까, 다음엔 여기도 연구를 해봐야지.’ 하는 게 아니라, 연구를 하는 과정 중에 필요한 곳을 답사하고 탐사하기 위해 떠나가는 겁니다.”

인도네시아 북쪽 해역에는 전 세계의 지구과학계에서 ‘이상묵의 부동산’이라 부르는 지역이 있다고 한다. 최근까지 거의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지역을 그가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학계에 발표를 했고, 남부 필리핀해와 캐럴라인판에 관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됐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온누리호가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셈이기도 하다. 배 사용료가 하루 2천만원에 달하기에, 탐사라는 건 보통의 준비와 계획으로는 추진될 수 없는 거대한 작업이라 한다.

“우리가 어렵게 탐사를 따서, 이 연구를 통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지역이 어디일까. 남들이 안 가본 데가 어딜까. 그걸 찾고 연구하다 보니 그 지역으로 결정됐던 겁니다. 바다가 넓은데 남들이 안 한 데를 가서, 빨리 내 땅과 같이 깃발을 꽂아야 하거든요. 과학이라는 건 뭔가 새로운 걸 자꾸 찾아내야 하는 것이기에, 또한 새로운 인류의 지식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빨리 안 가본 데를 가서 연구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지금도 전 세계 과학자들한테 연락이 온다고 한다. 외국 학자들이 그 지역에 대해 뭔가 문제점이 있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글쎄, 이상묵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잘 알 걸?” “그 사람한테 전화를 해봐. 이메일을 보내든지.” 이런 대화가 해양을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반화됐다는 것이다. 바다에도 남들보다 먼저 깃발을 꽂아야 한다는 거, 새로운 인류의 지식을 찾기 위해 남들이 안 갔던 곳을 연구해야 한다는 대목이 귓가를 맴돌았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상묵 교수는 물을 자주 마셨다. 말을 하면 금방 목이 마른다고 했다. 그의 옆에는 빨대가 부착된 플라스틱 물병 두 개가 주인을 기다리듯 놓여 있었다. 대화의 분위기를 바꿔서, 가장 궁금했고 꼭 질문하고 싶었던 대목을 언급하기로 했다. 미국의 사막에서 차량전복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장애의 직접원인이 됐던 그 상황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중요한 건 6개월만에 스스로 재기의 틀을 갖췄다는 사실이었다.

일반적으로 큰 사고를 당하거나 인생의 좌절 같은 걸 겪게 되면, 그 수습기간이 길게 이어진다는 게 우리의 상식 아닌 상식 아니었던가. 그런데 6개월만에 본래의 자리로 복귀했다는 그 의지가 어떻게 생겨난 건지, 그 속내를 직접 전해 듣고 싶었다. 그런데 질문을 전하자마자 돌아온 그의 첫 대답은 “그게 의지가 아니거든요.” 한마디였다. 그게 의지가 아니라니, 그게 잘못된 거라니…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제가 사고 난 뒤 미국에서 3개월 있다가 한국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돌아오고 나니까 학교도 시설이 안 되어 있고 집도 역시 시설이랄 게 없어서, 할 수 없이 서울대학교 분당병원에 3개월 더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던 3개월이었죠. 그런데 그 사실이 미국에 알려졌어요. 미국에서 저를 치료했던 의사한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왜 3개월을 더 있었냐고. 이 의사는 미국에선 금지된 줄기세포치료라도 혹시 받은 게 아닌가 하며 강한 의구심을 제기했던 겁니다.”

미국의 병원에 있을 때는 ‘분명히 너는 3개월 내에 다 끝나고, 너의 본래 직장에 복귀할 수 있다.’라고 했단다. 그런데 한국에 가서 3개월을 더 누워 있었던 이유가 뭐냐고 의문을 던진 거란다. 그래서 ‘아, 나는 치료를 받은 거 아무것도 없다.’고 하니까 ‘솔직하게 말을 해라. 같이 좀 알자.’는 질문이 계속 이어졌단다.

혹시 한국에서 행해지는 다른 과정이 있는지를 확인하려 든 것이다. 미국에서는 환자들에게 뭔가를 더 하고 싶어도, 그게 의료법과 윤리상의 규정으로 금지된 것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3개월을 더 입원해 있었다는 건, 분명히 한국의 병원에서 ‘무언가’를 진행했다는 확신 같은 의심을 품게 만드는 단서를 제공한 셈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미국에서는 저처럼 다치면 1개월에서 3개월 이내에 치료를 마친 뒤 직장으로 복귀를 시킵니다. ”

“미국의 병원비는 우리나라에 비해 15배 비쌉니다. 제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중환자실 하루 사용료가 2천5백만원이 나왔어요. 3개월 있고 나니까 병원비만 10억 가까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한테 농담으로 늘 말하는 게 이거예요. ‘내가 이렇게 빨리 사회로 복귀한 건 병원비가 너무 비싼 미국의 병원에서 빨리 내보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3개월로 다 끝난 일이고 직장 복귀가 가능하도록 보조공학기구까지 다 갖춰 보냈는데, 그 사람이 한국에 가서 굳이 3개월을 더 누워 있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고 발생·치료 과정·장애 유무·재기 작업·사회 복귀 등의 사회적 시스템이 한국과 미국은 전혀 다른 관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경우라면 어땠을까. 일단 장애를 갖게 됐다면 ‘아주 긴 기간’의 입원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3년이라고 얘기하는 게 보통이지 않은가. 그 다음에 들리는 소리는 정해진 틀과도 같다. - ‘쯧쯧, 밖에 나가면 고생이야.’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차라리 낫지, 무엇하러 나가?’ 그러는 동안 환자의 진은 다 빼놓고,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 나가고 싶었는데도 나갈 수 없게 만들어서, 결국엔 나갈 생각마저 호사스러운 희망인 듯 포기하게 이끈다는 것이다.

“저한테도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다치면 산재에선 기본 2년이라고. 2년은 그냥 병원에서 꼼짝 않고 누워 있으라고. 사회에 나가면 어차피 시설이 안 되어 있고 고생만 하니까 그냥 병원에 있으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제 몸의 경우는 1년이나 10년이나 차도가 없어요. 똑같아요. 저의 의지 같은 것도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병원비가 비싼 덕분에 제가 빨리 나온 게 맞아요. 미국은 환자를 빨리 사회로 복귀시키는 걸 주안점으로 하고, 우리는 다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장애인이다.’라는 인식과 시선으로 바뀌니까요. 게다가 복귀할 자리도 없어지고 필요도 없고, 시설도 없어서 그냥 병원에 수용되듯 요양소로 가는 식이 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을 받았던 장면은 이상묵 교수가 다시 강단으로 돌아오던 순간이었다. 장애의 몸으로 다시 강단에 서리라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강단으로 돌아왔던 당시의 심정이 어땠는지를 물어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모든 언론에서 초점으로 다루는 게 복귀한 이후 첫 강의의 기쁨은 어땠냐는 식인데, 그건 요즘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모르며 하는 얘기라는 것이다.

“요즘 교수들은 연구하고 논문 쓰는 것 때문에, 학생 가르치는 일은 마음의 10% 정도밖에 차지를 안 합니다. 학생 잘 가르친다고 학교에서 승진시키고 칭찬하지 않아요. 학생을 가르치는 건 당연히 기본이고, 거기에 연구와 논문이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강의 중심이 아니라 연구 중심의 대학이 되어버린 바람에, 이젠 학교에서도 선생님들한테 교육에도 제발 신경 좀 써달라고 할 정도가 됐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서울대학교가 세계 몇 위니 뭐니 하며 언론에서 계속 떠들지 않습니까. 그건 교육 잘해서 그 등수를 올릴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논문과 연구비 등의 종합적 수치로 측정하다 보니까, 강의는 솔직히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오늘날 대학의 현실입니다.”

그는 심지어 미국의 병원에 누워 있을 때도, 진행 중이던 논문을 어떻게 완성해야 할지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논문에 지치는 게 지금 대학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이면적 실체를 언급하는 민감한 부분인 것 같아서 말을 아끼다가, 마찬가지로 민감한 대목이라서 질문하지 못했던 사항을 끄집어내기로 했다. 바로 ‘만약에(if)’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이상묵 교수를 만나면 꼭 묻고 싶었던 가정법의 ‘if’를 꺼내들었다. 이런 가정을 여러 번 상상해 봤다는 거. 같은 사고가 만약에 한국에서 났었다면, 이렇게 다시 자신의 인생으로 복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을까? 거기에 대한 진솔한 의견을 듣고 싶다는 거. 인터뷰를 준비하며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았다는 거….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그의 입에서는 ‘못했을 것 같다.’라는 한마디부터 흘러나왔다.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것 같다는 게… 첫 번째로 저도 처음에는 저의 병이 뭔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내 증상이 어떤지를 알아야지 ‘이걸 하겠다 안 하겠다.’ 결정하거나 거부를 하죠. 그런데 그걸 몰랐기 때문에 미국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사회로 빨리 복귀시키는 제도에 영향을 입은 것이겠죠. 두 번째로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침을 맞거나 한약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미국에서 존스 홉킨스 의대를 나온 세계적 권위의 신경외과 전문의가 저한테 ‘너는 안 되겠다’고 했는데, 저한테 어느 점쟁이나 돌팔이가 와서 낫겠다고 하면 제가 누구 말을 믿겠습니까.”

만약에 한국에서 똑같은 사고를 당하고 한국의 병원에 있었다면, 그는 지금쯤 가족들의 등쌀에 어느 절에 누워 있거나 굿판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를 거라 했다. 가족과 친지, 지인들 모두가 와서 ‘누구는 이렇게 하니까 낫다더라.’ ‘뭐를 어떻게 생식으로 먹으면 좋다더라.’ ‘뭐를 갈아서 어떻게 마시면 된다더라.’ 하며, 괜히 허튼 곳에다가 돈 쓰며 헛된 노력만 반복했을 것 같단다. 그런데 자신은 솔직히 말해서, 다쳤던 그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몸의 상태가 1%도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 ⓒ채지민 객원기자 “미국에서의 3개월은 다친 부위가 부어올랐기에, 신경이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를 기다려야 하는 기간이었어요. ”

“다친 부위의 부기가 빠져야 완전손상인지 부분손상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저는 3개월만에 완전손상으로 결론이 난 겁니다. 그래서 그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미 죽은 것은 다시 살아날 수가 없잖아요. 의학적으로 불가능이라고 결론이 났으니까요. 그런데도 한국에서 사고를 당한 채로 있었다면… 아마도 주변에서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공이나 연구 같은 건 전부 다 손을 놓고 있었을 거란 의미냐고 물으니까, “당연하죠.” 하며 곧장 말을 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손가락이 좀 움직인다든지 몸 어딘가에서 감각이 느껴진다든지, 그런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걸어서 뛰어다녀야 의미가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5%나 10% 정도 낫기 위해서,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거기에 걸며 살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장애가 아닌 부분을 갖고도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가 있지 않습니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못하다 보면, 지나친 민간의술이나 종교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가족 중에 목소리 센 사람 누가 하나만 있어도, 나머지는 거기에 따라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이랬을 것 같다며 몇 가지 예가 이어졌다. ‘너는 나을 수 있는데 왜 안 하냐?’ ‘이번에는 확실하다’ 등등. 더군다나 지금쯤이면 헛돈을 엄청 쓰고 있을 것 같단다. 장애를 갖게 되면 3년은 기본적으로 누워 지내라는 시스템인데, 자신은 장애를 입게 된 지 2년 반밖에 안 된 ‘초짜’라는 것이다. 3년을 누워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3년 동안 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교직에 복귀할 수 없었을 게 확실하단다.

그렇다면 지금 이상묵 교수가 사용하는 보조기구 전체가 미국에서 갖춰서 가지고 온 건지가 궁금해졌다. 그가 사용하는 ‘인테그라 마우스’, 즉 입술로 컴퓨터를 제어하는 마우스는 이상묵 교수를 통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을 만큼 첨단의 신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전부 다 미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란다. 그런데 정말 많은 제품을 비교하며, 일일이 테스트 과정을 거쳤다는 게 새삼 부러운 대목이었다. 특히 갖가지 제품들을 직접 해보면서, 정말 별의별 기구들을 다 다루어 봤다는 언급에서는 우리의 현실을 씁쓸하게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병원에서는 작업치료라는 과정을 거쳐요. 무엇이 사회복귀를 위한 적절한 제품인지를 치밀하게 따지며, 환자에게 가장 맞는 제품을 찾게 만드는 것이죠. 그들은 저한테 이 한마디를 했습니다. ‘너는 다쳤고 너는 더 이상 낫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증상의 누군가가 줄기세포시술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효과가 나타났냐 했더니, 안 움직이던 손가락 끝이 약간 움직이게 됐다고 다들 대단하다며 환호성을 지르더군요. 저는 딱 한마디만 했습니다. “So what?”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었어요.”

이상묵 교수는 사고를 당한 뒤 그 사막 한복판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동네병원으로 옮겨진 다음, 그 병원에서 딱 한 차례의 수술을 거친 이후로 지금까지 칼자국 한 번 낸 적이 없다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동네병원이 잘하면 얼마나 잘했겠나 싶지만, 전문적인 의료 수준은 미국이나 우리나 똑같이 최고로 좋은 거란다. 그런데 가장 큰 차이점이라는 건 바로 재활제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우리 같은 경우는 사회적으로 준비가 안 되어 있기에, 누가 다치면 다친 사람이 어느 병원이나 시설로 가느냐가 중요한 거고, 미국은 그가 언제 어떻게 직장이나 자기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겠느냐가 주된 관심사라는 것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보조공학장비들을, 미국의 일반시민들도 많이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미국에서도 가장 선진화가 된 캘리포니아 같은 지역은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중부지역이나 다른 데를 보면 이런 걸 모르는 지역이 적지 않다 한다. 그런데 이런 보조공학을 미국 전체에 아니, 전 세계로 퍼뜨리며 널리 알린 사람이 바로 크리스토퍼 리브라 한다. 이름만으로 연상이 안 되면, ‘지구를 구하던’ 멋진 슈퍼맨 모습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승마 도중 떨어져서 전신을 못 쓰게 된 그의 신체적 변화는, 이상묵 교수의 증세와 비슷하다고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예정된 대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장애와 관련된 테마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학교 내에서 이동할 때 어떤 부분이 불편하신지, 또한 장애학생들을 위해서는 어떤 게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하신 게 있는지를 물었다. ‘장애학생’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그 범위가 너무 넓다는 전제를 놓으며, 2003년부터 장애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는 서울대의 예를 먼저 언급했다. 그마저도 1급과 2급만 받는다고 했는데, 맨 처음으로 서울대에 들어왔던 학생들은 정말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지금은 학생들을 위한 시설이 비교적 잘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대학이 아무래도 산중턱에 있다 보니까, 평지에 있다면 누릴 수 있는 부분들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편의시설은 갖추려고 노력은 하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대학당국에서도 교수가 다칠 거라고는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교수를 위한 시설은 안 되어 있어요.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공간은 뭔가가 되어 있는데, 교수를 위한 강단에는 갖춰진 게 없거든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학생들 뒤에서 강의를 해야 할 때가 있죠. 그나마 대학 중에는 서울대학교가 잘 되어 있다고들 해요. 그런데 전국적으로 잘 되어 있는 게 이 정도라고 하네요.”

‘인간 이상묵’과 같은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장애를 가졌든 아니든 간에 전달할 조언이나 메시지 같은 게 있는지를 물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틀 안에서는 뭔가를 의지하려는 경향과, 제도권 안에 머물려고 하는 습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분들한테 ‘나는 이렇게 했으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 이런 걸 진솔하게 말씀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답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 약간 길어졌다.

“제가 남들하고 조금 달랐다고 한다면, 그건 직업의 차이였던 것 같아요. 저는 과학이라는 걸 알게 되고 저하고 잘 맞는다는 걸 계속 확인하면서 지냈죠.”

“다치고 나서도 ‘빨리 돌아가서 일을 해야지.’ 그런 생각만 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는데, 저는 오히려 직업에 대한 애착 때문에 빨리 돌아올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빨리 돌아가서 밀린 일을 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랬기에 젊은 학생들한테는 이렇게 말을 하고 싶어진단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꼭 해라. 엄마 아빠가 의사되고 법조인 되라고 하는 걸 듣지 말고,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장애를 가진 입장이라 해도,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직업을 가져야 한다. 일과 성취욕이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뭔가 목표를 가지고 그건 내가 꼭 하겠다며 악착같이 집착하라고, 그런 마음은 절대 비우지 말라고 하고 싶단다.

“제가 장애를 갖고 돌아와 분당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치료사들은 늘 이런 말을 저한테 했습니다. ‘교수님, 하루가 지루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저는 ‘아휴, 너무 바빠 죽겠어요.’라고 대답을 했죠. 다시 말해서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에게도 직업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의 중요성, 그 다음에 직업 대한 소명의식, 이런 것들은 절대로 잊지 말라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정말 굉장히 큰 도움이 됐거든요.”

과학이 좋은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까, 과학의 좋은 점은 재미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단점은 무진장 잘해야 한다는 거란다. 경쟁이 워낙 심해서 힘들지만, 자신은 정말 다행스러운 입장이라고 했다. 자신한테 두 가지의 행복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하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고, 또 하나는 이 모든 걸 포기하기엔 복귀해서 일하고픈 생각이 너무나 강했다는 것이다.

“과학은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저는 과학을 짝사랑하고 있어요. 제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또 두 번째로 운이 좋았던 건 제가 미국이라는 곳에서 다치게 됐다는 게 역설 그 자체인 것 같아요. 어느 분의 말씀이 떠오르는데, 환자는 인권이 없대요. 대신 장애인한테는 인권이 있답니다. 환자는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 의사가 고통을 줄 수도 있지만, 장애인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애를 갖고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지 말고, 사회에 나와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죠. 또한 우리 사회는 그 다음의 시스템을 시급히 갖춰야 할 의무와 책임감에 충실해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함께걸음>을 통해 만났던 어느 교수님의 예가 떠올랐다. 그 분도 휠체어에 앉아야만 활동이 가능한 장애가 있었는데, 북유럽 어느 나라에서 3년간의 연구를 모두 마치고 당시 국제공항이었던 김포공항에 도착했단다. 공항에 내려 입국수속을 밟는 동안, 그 분은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한다. ‘아, 내가 장애인이었구나….’ 북유럽의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장애마저 잊고 지냈었는데, 이 땅의 첫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장애뿐인 현실을 깨닫게 됐다는 의미였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다친 이후 처음으로 지난 연말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다시 갔어요. 무슨 상을 받기 위해 갔었는데, ‘아…, 내가 왜 바보같이 한국으로 돌아갔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애인들이 다니기에 너무나 편하게 되어 있는 그 나라의 시스템을 새롭게 실감했던 것이었죠. 저는 미국에서의 작업보다는 한국에 직업이 있기 때문에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까 정말 바보 같았다고 통감할 만큼…. 그래서 조금 전 북유럽에서 연구하셨다는 그 교수님의 심정을 저도 충분히 동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정하고 받아들인단다. 그가 사고를 당하고 학교로 돌아온 뒤에, 어느 동료 교수한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기적이 일어날까?’ 그런데 그 동료 교수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아주 짧게 던졌단다. ‘기적은 이미 일어났다.’

그건 맞는 말이다. 긍정의 힘은 외치고 떠들어야 생겨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느껴야 하고, 스스로가 절감하며 깨닫기 이전에는 모든 게 공염불이기 때문이다. 신념 - 의지 - 확신 - 의욕 - 도전 - 성취 등, 이런 단어들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단어들의 뜻을 ‘머리로’ 알고 있는 사람과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의 두 종류로 나뉜다는 현실뿐이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 그 사람의 인생 모습’이라 했다. 하루가 무료한 사람, 하루하루가 따분하기만 한 사람, 소일거리를 찾아 매일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사람,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인생 그 자체가 무료하고 따분하며 무의미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하루가 충만하고, 하루가 확신과 신념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루하루가 도전과 성취를 위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 답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 그건 그 하루하루가 인생의 무게로 가득 채워지고 있음을 뜻한다. 새로운 탐사와 연구로 자신의 금자탑을 보다 굳건히 쌓고 있는 이상묵 교수를 더 가까이 알고 싶다면, 작년 가을에 출간된 그의 저서 <0.1그램의 희망>을 읽어보시도록 권해드리고 싶다.

이런 권유가 이 지면을 통한 간접광고가 아니냐는 항의가 들어올지 몰라, 마무리 차원에서 부연설명을 덧붙여야겠다. 그 책의 판매로 발생하는 저자의 인세 수입은 ‘서울대학교 이혜정 장학금’에 전액 기부된다고 한다. ‘이혜정’은 2006년 7월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발생했던 차량전복사고 당시 정말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던…, 이상묵 교수의 사랑하는 제자 이름이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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