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후회 없는 나의 삶을 살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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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한쪽 문을 열어놓는다’는 구절은 종교적 의미 이전에, 인생의 금언으로 더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게 되고, 상실의 아픔 뒤엔 새로운 희망이 찾아든다는 식의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해진다.
그건 맞는 말이다. 아무리 어두운 절망의 늪일지라도, 완전한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대안은 분명히 어딘가에 있고 찾으면 구하게 되며, 두드리면 열리면서 새로운 빛을 발견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굳이 장애 비장애를 나누며 구분 지을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마음이고 정신이며, 굳은 의지와 함께하는 실천이 해답을 내놓게 됨은 분명한 진실이다.
이번 호에서 만나기로 한 이의 학력과 경력을 미리 읽어보았다.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관현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인데, 세계 최고의 권위인 Peabody Conservatory of Music of The 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단다. 이 정도라면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실력과 능력의 소유자임이 분명해진다. 수많은 초청연주와 협연 내용이 가득하게 적혀 있고, 여러 음반 발표와 함께 그가 받았다는 상의 종류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그가 받은 여러 상들 중에서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음악상(2006)’이라는 한 대목이 유독 눈에 띈다. 음대를 수석졸업하고 그 유명한 대학에 유학 가서 석사와 박사를 받은 이한테 신체적 장애가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각종 언론매체와 방송 화면을 통해 가끔씩 그의 클라리넷 연주를 접하기는 했지만, 그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건 적지 않은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 클라리넷 연주자 이상재 교수.ⓒ채지민기자 |
이상재 - 나사렛대학교 음악목회학과 주임교수.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양천구의 한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마침 방학 기간이라서 인터뷰 장소는 학교가 아닌 그의 자택으로 정해졌다. 그를 떠올리면 항상 연상되는 게, 클래식 전문 연주자다운 수려한 복장의 깔끔한 신사 이미지가 아니었던가. 집 안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내심 궁금했었다. 눈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예상대로 넉넉한 인심의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과 편안한 복장 차림이었다.
그에게는 시각장애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그 대학에서 해당년도 최우수 졸업생에게 수여하는 ‘1997 PEABODY LYNN TAYLOR HEBDEN PRIZE IN PERFORMANCE’를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고 중의 최고’임이 입증된 셈인데, 솔직히 그의 눈이 얼마나 안 보이는 건지를 먼저 알고 싶었다. 그에게 던져졌던 첫 질문에 이어진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도 열 살이던 초등학교 3학년 여름부터 완전하게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아주 희미한 빛조차도 그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상태로 그동안 살아왔다는 의미였다.
“제가 일곱 살 때 일입니다. 아버지가 해군이셨기에 벚꽃으로 유명한 경남 진해에 살 때였죠. 당시에 같이 놀던 동네 형 이름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그 형하고 동네 친구 한두 명이 같이 숨바꼭질 놀이를 했어요. 숨을 데도 많았기에 동네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는데, 숨어있던 형을 발견하곤 잡겠다고 전력을 다해 뛰어갔죠. 그 형을 탁 치면서 ‘잡았다!’ 해야 술래가 바뀌잖아요.”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집 앞의 2차선 도로를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질러 뛰었다는 것도 까맣게 몰랐던 모양이다. 형의 뒷모습만 응시하며 뛰어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뒤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던 차에 그만 치고 말았단다. 몸이 몇 미터는 날아가고, 머리와 몸이 바닥에 완전히 내팽개쳐지면서 아주 심하게 다치게 됐다는 것이다. 발목뼈는 완전히 가루가 될 정도의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회고를 한다.
“나이 들어 그런 사고가 났다면, 훨씬 더 큰 일이 났을지도 모르겠죠. 여름에 석고붕대를 하고 겨울이 돼서야 풀었으니까, 엄청나게 오래 깁스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해 겨울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집에서 저한테 사탕을 주셨는데, 제가 너무 가까이 보며 사탕 껍질을 까더라는 거예요. 어머니 말씀이 잘 안 보이냐고 물으니까, 제가 눈이 너무 침침하고 이상하다고 했대요. 그래서 걱정이 된 나머지, 어머니가 곧장 병원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다고 해요.”
병원에서 확인한 결과, 교통사고 때문에 망막 뒤의 시신경에 문제가 생겼음이 밝혀졌단다.
그래서 그 해 겨울부터 열 살이 되던 해까지 3년 동안 모두 아홉 번의 수술을 했다고 한다. 오로지 눈 수술만 반복하며 지냈던 셈이다. 그런데 열 살 시절의 2월이었다고 기억되는 시기에 마지막 수술에 들어갔는데, 그 수술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단다. 점점 더 안 보이던 과정이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 열 살이던 해 7월에 최종적으로 불빛마저 안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여요. 집 안에 불이 켜졌는지 아닌지도 모르니까요. 해가 떴는지 여부도 아예 모르거든요. 장애등급으로는 1급인데, 1급 중에서도 조금이나마 불빛이 느껴진다는 분들이 계시죠. 그런데 저는 광각, 그러니까 일체의 빛이라는 것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된 셈입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기까지,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노란색이란다. 자신의 머릿속에 끝까지 남아있던 색깔이 노란색이었다는 것이다. 왜 노란색이냐 물으니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다만 그 색깔의 채도나 명도 따위의 특성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노란색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서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될 때까지 자신이 선호하며 입던 옷들의 색상은 거의 대부분 노란색이었다고 한다.
“부산의 맹학교를 3학년 때까지 다녔어요. 일곱 살 때 사고를 당하고 눈이 나빠진 이후로 맹학교에 등록을 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눈은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보였죠. 그랬기에 형들 양말 색깔도 맞춰 주고, 물건 떨어뜨리면 동전이나 연필 같은, 작기 때문에 형들이 못 찾는 걸 제가 항상 찾아주고 그랬어요. 그나마 저는 조금이라도 보였으니까요.”
그 정도의 시력은 됐었는데, 눈이 점점 더 나빠진다는 걸 실감하던 무렵에 결국 마지막 답이 나왔다고 한다. 3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저녁의 일이었다고 그는 기억을 한다. 어머니가 기숙사에 오셔서 옷과 책 등의 짐을 다 챙기고 나니까 저녁이 됐고, 집에 가기 위해 직행버스를 탔는데 좌석 위마다 달려 있던 조그만 등의 불빛이 보이지 않더란다. 그래서 ‘엄마, 오늘은 왜 차 좌석에 불을 안 켰어?’ 그랬더니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단다. 이젠 완전히 안 보이게 된 모양이라고….
그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처음 맹학교에 갔을 때 전혀 안 보이는 형들 사이에서 조금이나마 보이는 것에 대해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단다. 그러다가 점점 안 보이면서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자, 이젠 다른 형들 친구들과 같아졌다는 생각 정도만 떠올렸단다.
그렇게 심한 충격이라 할지, 끝장났구나 하는 좌절이라든지, 이젠 평생 시각장애로 살아가겠구나 하는 절망감 같은 것도 그때는 그리 크게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을 때 부모님께서 어떤 교육적인 생각이셨는지, 아니면 집안의 기둥이라던 큰아들이 완전 실명을 하기 전에 뭔가를 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는 몰라도, 서울의 창경원을 간 적이 있었어요. 서울에 사는 것도 아닌데, 서울까지 와서 창경원과 대공원 같은 곳을 둘러본다는 건 사실 힘든 일이었거든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커다란 유리벽 안에 들어 있던 박제된 비단구렁이의 모습. 정확한 모양은 떠오르지 않지만, 막 번들거리면서 굉장히 징그러웠다는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죠. 햇살이 아주 좋았던 날 오후였는데, 코끼리가 코로 공을 툭툭 치며 넓은 흙바닥 공간에서 놀던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예 안 보이는 것과 무언가를 봤던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더 힘들 것 같으냐고 물으니까, 그런 질문을 자주 받아봤다는 대답부터 돌아왔다. 각각 다를 것 같단다. 아주 친한 친구 중 하나가 이십 대가 넘어서 시각장애인이 되자, 몇 차례나 자살기도를 하며 너무 힘들어 하던 일을 곁에서 경험한 바 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안 보이는 것과 중도실명으로 인생길이 바뀌는 것, 어느 쪽도 정답이라는 건 없겠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보며 살았던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다.
“코끼리의 정확한 모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적한 오후의 동물원에 가서 느꼈던 기억들, 또한 진해의 바닷가에서 아버지랑 낚시를 배우면서 물고기가 막 파닥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좋아했던 시간들…, 이런 것들이 기억 속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건 좀 다르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비장애가 당연히 가장 좋겠지만, 시각장애인이 됐다 해도 무언가 봤던 기억이 남아 있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린 시절의 장래희망 같은 게 있었냐고 물으니까, 그는 대뜸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한테 가장 먼저 요구했던 게 바로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는 것이었단다. 왜 피아노였냐고 다시 물었다.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 얘기로 화제가 돌아갔다. 당시 월남전 파병을 다녀온 이들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갖가지 물건들을 구입해서 귀국하는 게 그 시절의 시대상과 같은 흐름이었다. 남들은 재봉틀이라든지 시계나 보석류 같은 걸 주로 사들고 돌아오는데, 그의 아버지는 독특하게도 클래식 레코드와 오디오 시스템만 들고 귀환하셨단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섯 살 여섯 살 무렵부터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베토벤과 같은 이름과 선율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굉장히 음악적인 환경이랄까, 성장할 때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던 것이죠. 그 당시로는 아주 고급 음향 시스템이었어요. 일본 제품이었는데 아주 유명한 브랜드였다고 기억이 나요. 그래서 음악을 자주 들었어요. 음악을 들으니까 음악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초등학생이 되자마자 피아노 레슨을 받고 싶다고 졸랐지만, 당시까지는 피아노를 가르칠 선생님도 없고 학원 같은 것도 찾을 수 없던 시절이었기에, 3학년 때까지는 조르기만 하고 실제로는 음악 근처에도 못 가봤습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갑자기 찾아든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서울로 바뀌면서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왔고, 편입해서 들어간 서울맹학교에서 현악합주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4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바이올린을 배웠단다. 가끔씩 행사 같은 데 가서 익숙한 곡들을 연주하곤 했는데, 그는 그게 정말 너무 좋았단다. 타이즈 신고 조끼 입고 제복 같은 유니폼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연주한다는 게 정말 기쁜 일이었다는 것이다. 바이올린이 적성에 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할 무렵, 그러니까 중학교에 갈 무렵에 그는 어릴 때부터 계속 듣던 심포니 같은 데서 나오던 하나의 악기 소리에 굉장한 매력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바로 클라리넷이다.
▲ ⓒ채지민기자 |
“합주부 형들과 음악을 듣다가, ‘저 악기가 뭐냐?’ 하고 물었어요.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소리가 예쁘고 맑은 악기가 있다는 데 감탄을 했고 푹 빠져들었죠. 물론 직접 해볼 기회는 없었는데, 중학교에 올라가서 밴드부에 들어가자, 선생님은 저한테 색소폰을 해보라고 권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클라리넷을 하면 안 되겠냐고 얘기했죠. 선생님이 승낙을 하셨고, 제 인생에서 클라리넷과의 만남은 그때 처음 이루어졌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서울맹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그에게는 클라리넷이 인생의 동반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됐단다. 그렇다면 음대를 들어가는 데는 어려움 같은 게 없었을까? 그는 자신이 86학번이라며 손사래부터 쳤다. 입시 역사상 시험과목이 가장 많았던 시절에 입시를 준비했다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정원 외로 뽑는 특례입학 같은 건 상상조차 안 되던 시절이었기에, 비장애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해서 입시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더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력으로 관현악에 대학입시를 시도한 건 그가 처음이란다.
“그런데 여러 대학을 알아봤는데, 아예 원서를 안 받아주는 거예요. 시각장애가 있다고 원서 접수 자체가 불가능했던 거죠. 우애곡절 끝에 마감 한 시간 전에 중앙대에 가까스로 원서를 넣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접수를 받던 교직원이 원서를 받으면서 딱 한마디를 하더라고요. ‘시각장애라서 아주 어려울 거다.’ 시험을 보고 실기를 치르고… 결국 합격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죠. 선생님들도 너무 놀라며 기뻐하시고, 저도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가 학교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첫 번째로 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각서를 쓰는 일이었단다. 학교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거, 편의시설이든 도우미든 뭐든 간에 요구하지 말라는 거, 일체의 책임은 너한테 있으니까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는 걸 ‘교학부장님 귀하’ 같은 제목 아래에 각서로 적어 제출하라는 것이다. 다치든 말든 모든 건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라는 거…. 지금 같은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모든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날 만한 일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그렇게라도 받아준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한다. 하긴 맞는 말이다. 그때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게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문제는 음대의 수업을 듣는 것이었단다. 칠판에 적기만 하는 교수님들께 설명도 같이 좀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묵묵히 필기만 하는 분들의 오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목소리가 들려도 내용이 없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화성법을 강의할 때, 교수님들은 칠판에 그려진 음표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고 한다. “야, 여기 봐봐. (칠판에 적은 내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하고 여기하고 여기가 이렇게 움직이니까 얘들도 같이 이렇게 움직이지? 이거하고 이거하고 움직이니까 이렇게 병행이 생기지?”
그래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내가 왜 이 대학에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떠올릴 만큼, 얼마간 무척이나 힘든 기간을 보내기도 했단다. 맨 앞자리에 앉아 녹음기로 강의 내용을 녹음하고 있다 보면 왜 녹음을 하냐고, 녹음하지 말라며 굉장히 불쾌해하는 분들도 계셨다고 한다. 물론 다 그럴 리는 없는 일이다. 정말 친절한 교수님들도 계셔서, 시험을 칠 때 마다 직접 문제를 불러주고 답안을 대신 받아 적어주시는 분들도 여럿 계셨다고 한다.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혼자 지팡이를 짚고 왔다갔다 하니까, 수업시간에 질문도 물론 받지 못했지만 대답도 잘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스스로의 자격지심 같은 것도 있었겠지만, 사실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어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늘 최고의 성적을 유지하고 선생님들이 참 공부 열심히 한다고, 나중에 특수교육 공부를 해서 다시 이 학교에 선생님으로 와야 된다는 말까지 들을 만큼 열심히 하던 나였는데….
이렇게 비장애 중심의 사회에 들어와서 나의 참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속 불만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 ⓒ채지민기자 |
그래서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했단다. 악기 연습을 하루 9시간 가까이 했고, 집에 오면 말도 안 되는 강의 테이프를 들으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생각하며 책을 읽고, 문제도 직접 풀어보는 하루하루를 보냈단다. 그렇게 해서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얻는 결과는 4.5 만점에서 4.42라는 학점! 학과 차원이 아니라, 관현악과·작곡과·피아노과 등 총 800명의 음대 전체에서 수석이 된 것이란다. 그래서 학비 전액 면제와 총장 장학금을 받게 돼서, 2학기가 시작될 때 학교를 갔더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놀라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시는 게 가장 기뻤음은 물론 당연한 일이다. 학비를 안 내도 된다는 현실적 부분을 떠나서, 안 보이는 아들이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서 이렇게 훌륭한 성적을 냈다는 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다고 한다. 꾀를 부리거나 태만해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의 대학 4년 결과가 음대 수석졸업이었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수석졸업에 이어지는 유학의 결정은 어떻게 연결이 됐던 걸까. 궁금증은 그 대목으로 이어졌다.
“4학년 2학기 때는 잠을 거의 못 잤어요. 미래와 진로 문제 때문에 불안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교직과목을 이수한 것도 아니고, 지휘자를 못 보기 때문에 연주자로 활동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현실이었고…. 그래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까 모두들 미쳤다고 했어요. 저 사람이 안 보이는 몸으로 음대 4년을 보내다 보니까, 이젠 아예 미쳐버린 게 아니냐는 식의 반응이 많더라고요. 어머니도 여기저기 알아보셨는데, 대답은 하나같이 똑같았죠.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거예요.’
그래서 유학이 굉장히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됐지만, 실상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단다. 그래서 미국 뉴욕에 먼저 유학 가 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에서 좋은 대학 다섯 곳 정도를 골라 그 곳의 원서를 좀 보내달라 했다고 한다. 친구가 보내준 원서들을 붙잡고 대학에 다니던 동생과 함께 사전을 펼쳐놓고 입학원서를 다 적기는 적었는데, 문제는 실제 연주를 담아 보내는 일이었다. 요즘이야 전문 스튜디오가 있고 정교하게 편집해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방법은 하나,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하고 캠코더로 연주하는 모습을 찍어서, 그걸 여러 학교에 각각 보내는 것이었단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렸던 날이라고 기억해요. 동생하고 어디 조그만 공간에 가서 녹음기로 녹음하고 캠코더로 찍고 또 찍었어요. 하루 종일 그걸 했어요. 편집이 불가능하니까 틀리면 다시 처음부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정말 이런 식으로 해서 유학을 갈 수 있을까 싶은 마음까지 들더군요.”
그렇게 다섯 군데 보낸 원서들은 합격통지서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세 군데에서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모두 다 세계 최고의 대학들이었기에,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새로운 과제가 된 셈이다. 뉴욕에 있는 어느 음대는 그 지역의 생활비가 너무 비싸 살기가 어렵다는 의견이 많아 일단 제외가 됐고, 그의 가슴에는 미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음대로 결정되기 시작했단다. 전통의 명문 존스 홉킨스 대학에 속한 음대인 피바디(Peabody)에서 온 제안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데, 세계적으로 너무 유명한 선생님 네 분이 모두 그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많지는 않지만 장학금도 주겠다는 의견까지 첨부되어 있었단다.
그의 결론은 피바디로 내려졌다. 어머니와 함께 출국해서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공항에 내렸고, 대학 주소를 적은 쪽지를 내밀며 택시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 그가 생활하게 될 방의 열쇠를 받아서 커다란 트렁크 몇 개를 끌며 건물 엘리베이터에 올랐는데, 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모든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누군가와 만남을 갖게 된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이 대목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놀랐던 것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언가를 붙이고 있던 사람을 만났을 때였어요. 버튼 판에다가 뭔가를 열심히 붙이고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저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에요. ‘아, 네가 한국에서 온다던 그 시각장애 학생이냐? 나는 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람인데, 네가 온다고 해서 학교 전체 모든 엘리베이터와 강의실에 점자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중이다. 어제부터 붙이고 있는데, 네가 정말 그 학생이 맞나? 그럼 이것 좀 만져 봐라. 내가 정확하게 잘 붙인 건지 확인 좀 해야겠다.’ 제가 미국에서, 피바디에서 받은 첫 인상이 바로 그날의 그 만남이었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학에서 처음 마주친 이가 자신을 위해 점자스티커를 부착하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감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현실이 묘하게 뒤섞이며 겹쳐졌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의 대학 입학 거부가 일상적으로 저질러지던 바로 그 시절이 아니었던가. 특례입학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머나먼 나라의 제도였고, 대학들은 반(半)공개적으로 장애인의 교육권을 거부하며 박탈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 나라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을 간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위해, 대학 전체가 점자스티커를 붙이고 편의시설을 점검하고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은 800명 정도 됐다는데, 당시는 전교생이 650명 수준이었단다. 그 중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은 이상재 한 명뿐이다. 그것도 한국이라는 아시아 어딘가에서 온 학생인데, 그 학생 하나를 위해 대학 전체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부터 너무나 놀라웠는데, 다음날 학장님 면담에 들어가니까, 학장님이 저의 대학 성적표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의 성적표에 오케스트라 수업을 받은 학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학장님 생각에는 제가 왜 오케스트라 수업을 들어야 했는지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었죠.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느냐고 하시더군요. 우리 학교(피바디)도 물론 오케스트라가 필수이긴 한데, 너는 오케스트라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걸 듣고자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옳지 않대요. 대신 실내악은 지휘를 보며 하는 게 아니니까, 오케스트라 대신 실내악을 하나 더 신청하는 게 효율적이라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저의 상태에 맞게 커리큘럼 자체를 아예 다르게 적용한 것이죠.”
학장님 판단으로는 시각장애를 가진 이상재라는 유학생이 체득할 필요가 전혀 없는 오케스트라 학점을 받으려고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를 불필요한 시간적 낭비라고 결론내린 것이다. 그런 학점을 받으려고 학교 여기저기를 불편하게 옮겨 다닌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케스트라 대신 실내악를 더욱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됐단다. 게다가 학교 당국에서는 그의 수업 편의를 위해, 그와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한테 공지를 해서, 도우미 희망학생을 선발한 뒤 모든 학업의 도움을 제공했다 한다. 그 도우미 비용이 적지 않은데, 대학 측은 이 유학생이 공부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6년 내내 그 비용을 대신 지불하며 모든 편의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대학이라는 곳이 상업적 이익 추구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이었다면, 과연 나한테 그런 투자를 했을까?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편의를 제공하며 학업에 전념하도록 만들었을까. 저는 피바디에 있는 동안 저의 장애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생활했거든요. 정말 제대로 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학 시스템에 저는 큰 혜택을 받은 셈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피바디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걸 이루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금의환향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현실은 역시 ‘한국적’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할 상황뿐이었다. 이 땅에 돌아온 이후로 모든 취업 관련 원서를 퇴짜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룩한 경력으로 볼 때는 국내에서 지명도 있는 대학에서 교수 생활이 가능할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어렵사리 일자리를 얻은 게 모 대학의 시간강사, 그나마 월급이 20만원도 채 안 되는 자리였단다. 그는 지금까지 첫 월급의 구체적인 액수를 마지막 숫자까지 기억한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모든 시선이 차갑게 전해졌단다. 게다가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반응만 흘러나오기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을 만큼 그를 대하는 이 땅의 대학 시스템은 극도로 냉담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달랐다고 한다. 열심히 한 만큼 호응이 뒤따랐고, 그의 수업을 듣고자 기다리는 학생들까지 적지 않았단다. 강사 생활의 자조적인 표현이지만, ‘보따리장사’ 10년만에 그는 작년 3월 나사렛대학교 음악목회학과의 전임교수로 자리를 잡게 됐다. 드디어 4대 보험을 자기 수입으로 내게 됐다며 그는 껄껄 웃었다.
난데없는 질문 하나를 던졌다. 자신의 인생을 점수로 매길 수 있다면, 100점 만점에 몇 점이라고 평가내릴 수 있겠는가. 학점이라면 4.5 만점에 얼마의 학점을 받을 것 같은가. 그는 질문 내용이 재미있었는지 웃음을 이어가다가, 자신 스스로 점수를 정한다면 100점 만점에서는 95점, 학점으로는 A+가 될 거라고 자신 있게 평가내렸다.
“마음으로는 100점을 주고 싶지만 왜 95점인가 하면, 저의 의지로 해결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많이 있잖아요. 가정 환경이라든지 장애라든지, 또는 무심코 소비했던 청소년기의 일정한 시간들이라든지, 그런 것들 때문에 5점 정도는 감점이 될 거예요. 하지만 저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왔던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는 100점 그 이상을 주고 싶습니다. 그만큼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았고, 열심히 노력하며 지금까지의 삶을 이뤄왔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예쁜 두 아이의 아빠, 늘 곁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 전임교수로서의 삶, 남들이 이루지 못한 대학과 대학원의 성과, 그리고 최고의 연주자로 바쁜 일정을 보낸다는 것, 그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소유한 사람으로 탈바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이 낳은 결과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무엇을 얼마만큼 가질 수 있었고, 얼마나 많은 부분을 상실 속에 내놓아야 했을까. 거저 얻고 저절로 생기는 건 아무것도 없음이 눈앞에서 확인되는 듯했다.
그의 자택이지만 그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는 사항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그의 클라리넷을 보고 싶다는 것, 더불어 짧은 몇 마디 몇 소절이라도 그의 연주를 듣고 싶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는 지체 없이 ‘OK!’라고 답하며 그의 보물 1호(?)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리고 한 곡의 연주가 평화롭게 실내 전체를 감돌았다. 뭐랄까. 시간이 잠시 멈춰진 느낌이라고 할까? 감동은 거대한 콘서트홀 안에서만 경험하는 게 아니다. 그의 연주가 흐르는 이 공간이 바로 최고의 공연장이고, 듣는 이가 한두 명이라도 그 여운은 세상 속으로 얼마든지 퍼져나갈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 ⓒ채지민기자 |
“조금 전 인생의 점수에 대해 질문하셨는데, 저는 이 클라리넷을 손에 잡을 때마다 이런 걸 느끼며 떠올립니다. 자기 직업이 늘 기쁨이 되는 인생을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이 악기를 불 때마다 ‘아,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해하는 것을 직업 삼아서 살 수 있다는 거, 내가 그래도 눈은 안 보이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부분이 바로 이게 아닌가. 내가 행복해하는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가!’ 저는 그런 생각을 늘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이상재 교수와 대화를 나눴던 당시에도, 돌아와서 녹음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화 내용을 정리할 때도,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만약에 월남에서 돌아오셨던 그의 아버지가 오디오 시스템이 아닌, 다른 이들처럼 재봉틀이나 시계 보석 같은 걸 가지고 귀환하셨다면,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이 음악 선율 자체가 배제된 상태로 진행됐다면 그의 오늘날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왜 이런 생각을 떠올렸는가 하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요인은 거창하고 커다란 구호가 아닌, 자기 자신도 모르게 접하던 어린 시절의 ‘무언가로부터’ 이미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청소년기 이후에 본격적인 설계를 진행한다 하지만, 그 삶을 결정하는 계기는 아주 사사로운 어린 시절의 ‘무언가로부터’ 잉태되는 법이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 요인이든 간에, 인생의 뿌리가 되는 첫 번째 키워드는 유년시절에 이미 그 싹을 키운다는 게 바로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지금의 모습으로 이끌었던 건, 물론 수많은 계기와 요인과 인연들이 복합적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취재를 진행하고 이 글을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하나의 가정법으로 혼자만의 추리를 펼쳐보고 싶어진다. 만약에 어린 시절 그의 집에서 턴테이블이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그 스피커에서 아무런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의 가슴속에 선율이라는 게 존재했을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희망이 생겨났을까? 현악합주부가 마음속 눈에 들어왔을까? 그리고 밴드 반에 들어갈 생각을 떠올렸을까? 마지막으로 클라리넷이라는 악기 소리가 너무 아름답다는 사실을 귀로 확인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시력으로 이룩한 그의 성과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더욱 값진 성취로 느껴지게 된다. 그런데 그런 원동력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 해답은 그가 학교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꼭 강조한다는 조언 안에 다 들어 있는 것 같다. 이상재 교수는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아래와 같은 조언과 지적과 덕담을 자주 건넨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도 잠시 그 강의실에 앉아 귀를 기울여도 괜찮을 듯하다.
“제가 학교에서 수업하면서 항상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건 꼭 공부가 아니어도 열심히 해라. 놀고자 하면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르고 다리가 아플 정도로 춤을 추며 놀아라. 사랑을 하려면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을 만큼 사랑을 하고, 공부를 해도 눈이 빨개지고 정말 코피가 터지도록 그렇게 공부를 해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채로 먹는 것도 재미없고, 자는 것도 푹 못 자고, 노는 것도 제대로 못 놀고, 공부도 안 하고, 그렇게 어정쩡하게 흘려보내는 인생이 저는 제일 불쌍한 것 같아요.”
“장애가 있든 없든, 집이 잘 살든 못 살든, 얼굴이 못 생기고 키가 작고 어떻고 이런 건 다 필요 없는 일입니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얼마만큼 가졌고 뭘 못 가졌고 어떻게 생겼고 어떤 환경 속에 있든 간에, 사람 마음속에 무언가 정말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 자기가 정말 열정적으로 끝까지 몸이 부서질 정도로 해보는 인생, 그런 인생을 살면 후회 자체가 없는 겁니다.”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제가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드러납니다. 뭔가를 한번 해보겠다는 것, 그리고 결심한 것을 끝까지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리라는 두려움과 절박함 마음, 그것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설령 그 부분에서 성취를 얻지 못하더라도 후회는 안 한다는 거죠. 최선을 다하지 않고 어떻게 운이 좋아서 뭔가를 얻는다면 얻은 것에 대해서도 항상 불안할 거예요.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니까, 또한 그렇게 쉽게 온 것처럼 쉽게 사라질까 봐 두려울 게 아닙니까.”
“자신이 노력하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 얻은 것은 정말 자기 것이기 때문에, 두렵지도 않고 부끄럽지가 않은 것이죠. 남들이 볼 때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스스로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모든 분야를 얼마만큼 의미 있게 보냈나를 항상 반성하고 지켜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을 대할 때도, 누군가와 전화를 나눌 때도, 자기 분야를 연습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심지어 친구들과 삼겹살 구워먹으며 소주 한잔을 할 때도 그 순간순간을 의미 있게 열심히 보냈는가로 판단하고 평가를 내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면 장애가 있든, 가진 게 없어 가난하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정말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완성하게 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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