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불편할 뿐이지 불가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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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월호의 글은 개인적인 음식 경험 두 가지를 언급하며 시작해야겠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서울 어딘가에 인공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 그대로의 냉면을 만들어, 입소문으로 유명세를 타는 식당이 있다고 했다. 너무 맛있다는 어르신과 선배 들의 찬사를 연이어 듣다 보니 마음이 기울어서, 수소문하며 그 공간을 직접 찾아간 적이 있었다.
식당 내부는 어르신 손님들로 가득했고, 구석 한 자리를 잡고 앉아 기대했던 냉면을 주문해서 첫 번째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런데… 두 번째 젓가락질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도대체 무슨 맛인지, 이런 냉면이 왜 맛있다고 소문났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먹으려는 시도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결국 절반 이상 남겨놓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그 맛을 추천했던 선배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당시의 내가 왜 젓가락질을 더 이상 못했는지의 답이 그제야 떠올랐다. 문제는 ‘길들여짐’이었다. 내가 얼마나 인공조미료에 적응된 삶을 살고 있는 건지, 가공된 양념의 자극에 얼마만큼이나 익숙해져 있다는 건지가 비로소 확인됐던 것이다. 진정한 맛과 순수한 맛을 잃어버리고, ‘주어지는’ 음식의 틀에 맞춰진 채로 지낸다는 게 밝혀진 셈이기도 했다.
또 다른 한 가지의 음식 경험은 가장 맛있게 먹었던, 말 그대로 기억의 한계 내에서 최고였다고 항상 떠오르는 식사를 했던 일이다. 그 식사를 했던 장소는 경상북도 깊은 산속에 위치한 고운사(孤雲寺)였고, 음식은 그 절에서 후원소임을 맡은 분들이 마련해 준 밥과 야채들이었다. 사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한쪽에는 밥, 한쪽에는 직접 재배한 듯한 야채 몇 가지 그리고 옆에 놓인 고추장이 준비된 전부였다. 개인 취향에 따라 비빔밥처럼 알아서 비벼 먹으라는 의미 같았다.
고춧가루가 사용된 음식(고추장)은 절과 맞지 않는 게 아니냐고 물으니까, 음식을 준비하던 한 분이 넉넉한 미소로 “대중공양을 할 때만 사용합니다.”라고 답을 했다. 커다란 사기그릇에 그 재료들을 대강 집어넣고 비벼서 먹기 시작했는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두 그릇이나 가득 비벼먹고 나서 식사를 끝냈다. 평소에 먹던 하루 세끼를 모두 한데 담는다 해도 그 한 그릇 분량이 될까 싶었는데, 그걸 두 그릇이나 먹고도 포만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남겨지다니, 그건 두고두고 기억에 새겨져 다시 떠오를 만한 사건(?)이 분명했다.
왜 그 식사가 그렇게도 맛있었을까? 오히려 빈약한 재료 때문에 입맛만 다시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왜 그 식사가 최고 중의 최고였다고 지금껏 또렷이 상기되는 걸까. 깊은 산속 대자연의 환경이었기에? 인공조미료가 없었기 때문에? 유명 사찰이라는 분위기에 지배되어서? 물론 다 옳은 말이기도 하겠지만, 가만히 되돌아보면 사람의 몸에 가장 맞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자문자답을 반복하곤 한다. ‘왜 그 음식이 최고였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그 장소에서 먹은 그 음식이었기 때문’이라는 한마디가 전부라는 의미이다.
장애를 갖게 된 것 자체가 상처였다는 것
사찰음식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분이 계신다. 종종 언론을 통해서도 만날 수가 있고, 그 분이 계신 곳을 직접 찾아가면 언제든지 마주할 만한 환경도 마련되어 있다. 대신 그 분이 어디에 계시는지는 이 글에선 논외로 하겠다. 필요 이상의 간접홍보로 받아들일 독자들도 분명 계실 테니까, 여기서는 ‘그 분’한테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중요한 건 ‘누구’를 만났는가의 여부이지, ‘어디서’ 만났는가는 부차적인 사항이기 때문이다.
사찰음식 전문가 정산스님이 장애의 몸이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접한 소식이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적도 없고 실제로 장애로 보일 만한 어떤 여운도 접한 적이 없었던 탓에, 취재를 준비하면서도 사실여부가 오히려 더 궁금해지는 상황이 된 셈이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확인하려는 눈길을 ‘일부러’ 움직인 뒤에야 불편한 부분이 실제 있음을 감지하게 됐지만, 그걸로 인해 그 사람을 새로운 듯이 다르게 볼 일은 아니다. 그는 그동안의 모습 그대로의 그일 뿐이니까.
‘사람사는 이야기’ 취재가 항상 그렇게 시작되었듯이, 무슨 장애를 어떻게 가지고 계신지 그것부터 질문을 던졌다. 정산스님은 대뜸 아버지가 굉장히 호랑이였다는 말부터 꺼냈다. 술을 잡수시고 귀가하면서 “OO야!”라고 부르면, 그 말씀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른 나가서 문을 열어드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한테는 세컨드(second)와 써드(third)가 있으셨단다. 정산스님의 아주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셋이나 존재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기 낳고 3주가 가장 중요할 때잖아요. 제 생일이 음력으로 12월인데, 어느 날 아버지의 호출에 어머니가 조금 늦게 움직이셨대요. 저를 낳은 지 얼마 안 됐기에, 버선부터 신느라고 조금 늦었다는 거죠. 그렇게 문을 여니까 ‘아들만 낳으면 남편을 안 챙기냐?’ 이런 시비를 하면서 아랫목에 있던 저를 차버렸대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저를… 아기가 윗목까지 튕겨져 나갈 정도로 차버렸다는 거예요.”
사실 정산스님과의 인터뷰를 하고 열흘이나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심각하다. 열흘 동안 나름대로의 고민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건, 바로 위의 대목을 어떻게 묘사하고 언급해야 하는가 - 하는 개인적 딜레마였다. 장애가 처음 생긴 원인을 물었는데, 그 답은 아버지의 발길질이었다는 것. 이런 답변이 나온 경우는 처음이라서, 어떻게 순화시키고 적정선을 유지하며 활자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리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맡기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버지가 신생아를 걷어찼다는 거…, 그 대목까지만 언급하며 그 뒤에 이어졌던 몇 가지 후일담은 생략하고자 한다.
“그 이후로 저녁때만 되면 아기가 자꾸 울더라는 거예요. 잠을 제대로 못 자면서 밤마다 우는데, 그때만 해도 너무 옛날이니까 병원에 가서 신경조직 같은 걸 검사하고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기어다닐 때 보니까 오른쪽 다리를 끌며 다니고, 뭔가를 집어보라고 어머니가 뭘 주시면 오른손이 가는 게 아니라 왼손만 가더라는 거예요. 아버지의 그 일 때문에 오른쪽 반신(半身)의 신경이 다쳤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때부터 할머니 손에 붙들려서 침을 맞으러 엄청 많이 다녔다고 한다. 지금처럼 119 긴급호출이 가능한 것도 아닌 시절, 더욱이 병원 한번 방문하는 일도 마음의 준비를 하며 먼 길을 왕복해야 했던 당시가 아니었던가. 침을 맞으러 계속 다니고, 계속 한약을 먹고 계속 치료를 하고…, 모든 게 ‘계속’일 수밖에 없던 나날이 이어졌던 모양이다.
“한약을 먹다 보니까 열이 많다는 음식은 못 먹게 하는 거예요. 닭고기와 돼지고기 같은 건데, 그게 저 어릴 때만 해도 어디 흔한 음식입니까? 명절 같은 날만 특별히 먹을 수 있는 건데, 그것마저도 못 먹게 하니까 어린 마음에 그게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미움이 미움을 낳게 되다
형제 관계를 물으니까, 위로 누나가 둘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 또한 둘이라 했다. 그런데 어린 가슴에 중대한 갈등과 갈림길을 느끼게 만든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왜 다쳤는지를 모르며 지냈고, 학교에서 당하는 친구들의 놀림 같은 걸 묵묵히 견디던 어린 소년한테 인생의 반전(反轉)은 아주 우연히 닥쳤던 것 같다. 우울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집에서 책만 읽던 그에게 상상도 못했던 대화가 귀에 들어온 것이다.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집에 왔는데, 큰어머니와 우리 어머니 두 분이 대화를 나누고 계신 거예요. 그 내용인 즉, 우리 집안에서 제일 잘 생긴 아들을 지 애비가 실수해가지고 저렇게 만들어버려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저는 다짜고짜 물었죠.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반복하며 해명하기 급급한 어르신들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서, 며칠을 굶으면서까지 확실한 대답을 해달라고 요구했단다. 얼마나 궁금했기에, 얼마나 절실하게 자신의 인생 전환점을 확인하고 싶었기에 그런 방법까지 감수했을까. 초등학생 저학년인 그 나이에 굶으면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내라고 눈물로 요구했다는 얘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
“아버지는 그때 술을 드시고 깜박 실수를 하신 거래요. 그런 거니까 ‘네가 이해해라.’ 하시면서, 어머니가 자초지종을 제게 말씀해 주신 거죠. 저는 그때부터 아버지를 미워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아버지 또한 저를 미워하게 되시더라고요.” 그런 모습과 과정을 내내 지켜보면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집을 나가겠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세 분이나 계셨던 어머니 이외에, ‘이모다!’ 하며 데리고 온 사람, ‘고모야!’ 하며 데려온 사람이 여럿이나 더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진지한 각오를 하게 됐단다. ‘나는 아버지한테 더 이상 배울 게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더 자라면 안 된다!’
저를 받아주실 수 있나요?
그런 굳은 생각으로 집을 나가기로 결심을 했고, 우연한 기회에 둘째(?)어머니 댁에 갈 일이 있었단다. 그래서 같은 지역 안에 있던 여수 흥국사의 영선암이라는 암자에 갔는데, 거기서 어떤 젊은 스님이 장독대에서 간장 같은 걸 만지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 스님은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학생한테, “아니, 절에 왔으면 부처님 앞에 절을 해야지. 왜 여기를 기웃거려?” 했던 모양이다. 절에 왔지만 절 내부의 모든 모습들이 그에게는 무섭게만 느껴질 때였기에, 얼른 절을 하고 다시 나와서 그 젊은 스님에게 다가갔단다.
그 젊은 스님에게 관심이 간 것은 그가 그때까지 봤던 스님들은 전부 어르신들뿐이었기에, 젊은 사람 중에서도 스님이 존재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스님은 왜 여기 와 계세요?” 물으니까 공부하러 왔다고 했단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 집을 나와 도망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였기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질문은 계속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럼 절에 있으면 학교 보내줘요?” “그럼, 보내주지.” 공부를 정말 잘하면 유학도 보내주고 다 지원해준다는 내용의 대답을 듣게 됐고, 그걸 계기로 해서 그는 집을 나온 다음에 절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히게 됐다고 한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어도 스님이 될 수 있는 건지가 궁금해졌다. 처음 출가를 하면 2년 정도 행자(行者) 생활을 하고, 승려가 될 자격이 일단 생기면 ‘사미계(沙彌戒)’를 받아 예비스님이 되며, 성년이 되어 ‘비구계(比丘戒)’를 받으면 정식 승려가 된다 한다. 스님이 되려면 ‘비구250계’라 하여 모든 걸 다 갖춰야 하는데, 장애가 있을 경우는 비구계를 못 받는 것이지 승려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란다. 예비 여자스님이 받는 건 ‘사미니계’이고, 남자스님을 비구스님이라 부르듯이, 우리가 단어로는 잘 알고 있는 비구니스님은 여자스님을 일컫는 말이 된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너무 내성적이었기에, 바깥 활동을 하는 대신 책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어른들이 읽는 책까지 무작위로 읽었던 거예요. 예를 들어 정비석 선생님의 작품들부터 시작해서 토스토예프스키, 괴테 같은 세계 명작들을 하루에 두세 권씩 읽을 만큼 탐독을 했죠. 절에 들어와서도 불을 꺼야 하는 저녁 시간에 담요로 불빛을 가리면서까지 계속 읽었어요. 그렇게 그때 읽었던 많은 책들이 저한테는 지금까지도 아주 큰 양식이 되어 남아 있는 겁니다.”
절에 들어와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의 성격이 완전하게 바뀐 것이란다. 폐쇄적이고 내성적이었던 성격이 쾌활하고 외향적이며 낙관적으로 전혀 다르게 변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했냐고 물으니까, 절에서 부처님 경전을 계속 읽는 동안에 그런 변화가 찾아들었다고 한다. 절에 들어가기까지의 중간 대목을 건너뛴 것 같아, 초등학교 졸업 이후의 상황으로 대화의 시점을 다시 되돌렸다.
절에 들어간 건 15살 때였고, 들어가는 데 별다른 문제없이 절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한다. 20살 미만의 나이였기에 ‘동진출가(童眞出家)’의 입장으로 시작했는데,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방 일이었단다. 어린 나이였기에 힘든 일을 많이 시키지 않았냐고 물으니까, 시키지 않더라도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 절의 규율이란다. 왜냐하면 절에는 부모님도 안 계시는 거고 자기가 다 알아서 해결해야 하며 윗사람들을 모셔야 하는 곳이기에, 불공과 음식과 옷 세탁 등 모든 분야를 익혀야 생활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절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냐고 물으니까, “몰래 도망간 거죠.”라는 한마디 대답부터 이어졌다. 부모님한테는 전혀 알리지 않고 인연을 끊었다는 얘기였다. 처음에는 어느 절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정하지 못해, 젊은 스님을 만난 이후로 고민을 많이 했단다. 그런데 그 해답은 책 속에서 길을 찾게 된 셈이라 했다. 마침 그 고민 속에 빠져 있을 때 읽었던 책이 화가 천경자 선생님의 첫 번째 수필집인 ‘유성이 흘러간 곳’이었단다.
“천경자 선생님이 고흥에 있는 여자중학교 미술선생님으로 계실 당시의 수필집인데, 그 책 내용에 보면 두 사찰이 나와요. 해남 대흥사와 제주도 정방폭포 위에 있는 정방사라는 절입니다. 동백숲 사이로 머리를 깎은 잿빛 복장의 승려들이 걸어가는 선생님 작품도 있는데, 그 색감대비가 너무 어울렸다고 말씀하셨죠. 선생님이 제주도에 가서 정방폭포를 그릴 때였대요. 그 폭포가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잖아요. 그 폭포 밑에는 빨간 칸나꽃이 가득 피어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동남아 같은 남국(南國) 어딘가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저녁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림을 그리다 만 채로 그 소리를 따라 계속 가보니까 폭포 뒤쪽에 정방사라는 조그만 절 하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육지에 있는 절과는 달리 종려나무가 가득하고 양철지붕으로 된 절이었는데, 그 종소리의 여운 때문에 거기까지 찾아갔다는 대목을 읽고선, 정산스님은 개인적인 인생의 결정을 내리게 됐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해남 대흥사를 가보고, 제주도 정방사를 가본 다음에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는 나름의 선택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집을 떠나서 해남 대흥사를 먼저 갔어요. 그 곳을 먼저 보고 나서 제주도로 가기 위해 목포로 갔는데, 폭풍이 불어서 배가 못 떠나는 거예요. 너무 원망스럽게 바다만 쳐다보며 ‘이제 난 어떻게 해야 되나?’ 하고 있었는데, 배가 떠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여관이 아주 큰 방으로 있다 하더라고요. 거기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가, 배를 타고 정방사를 결국 찾아가게 됐죠. 거기서 1년 동안 있게 됐습니다.”
운수납자(雲水衲者)의 생
정방사에 있을 때 육지에서 온 어느 객승과 함께 잠을 잘 일이 있었단다. 객승이 묻기를 왜 여기에 와 있느냐 해서 공부하러 왔다고 대답하니, 그 객승은 정산스님을 꾸짖듯이 대했다고 한다. 이곳은 공부하려는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니까 자신을 따라 육지로 가자고 해서, 예정에도 없이 따라 나선 도착지가 부산 범어사였단다. 그 이후로 정산스님의 본사(本寺)는 범어사가 된다. 승려의 호적이 있는 입산재적본사가 비로소 정해진 것이다.
“빠뜨린 얘기가 하나 있는데, 목포에서 제주도로 출발할 당시에 아버지한테 편지를 썼었어요. 제가 무엇 때문에, 왜 집을 나오게 됐는지를 아버지 앞에 글로 적어 보냈던 것이죠. 이러이러한 아버지 행동 때문에 집을 나왔다는 거, 이걸 계기로 해서 누나들과 동생들한테는 좋은 아버지가 됐으면 좋겠다는 거, 그리고 제가 원하는 바대로 성공한다면 그때는 아버지를 뵐 테니까 자신을 찾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떠날 때의 목표나 꿈은 훌륭한 스님이 되는 것이었다 한다. 나중에 전해들은 소식이지만, 어머니는 자신을 보내놓고 3년 동안 고기 같은 걸 일체 입에도 대지 않고 지내셨단다. 당신 자식이 어디 가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겠느냐고 하시면서 가슴 아파하셨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도 없는 장애를 갖게 된 큰 아들이 집을 떠났다는 거…, 듣는 입장이었지만 그 집안의 상처가 아득히 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격한 계율의 행자 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개인적으로 더 어려웠던 건 불편한 몸이었다 한다. 사지가 성한 이들 속에서 몸 한쪽이 불편한 입장을 극복하려는 건 힘겨웠기에, 남들보다 더 노력을 겸비해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본사가 된 범어사에 계속 계셨던 건지를 물었다. 그건 아니란다. 절의 스님들은 한 곳에 오래 있는 게 아니라, 이 절 저 절을 많이 옮겨다니며 지낸다고 한다.
“그걸 운수납자(雲水衲者)라고 해요. 물과 구름은 정해놓지 않고 계속 흐르잖아요. 가다가 굽이치다가 어디 가서 천천히 고이듯 있다가 또 다시 흘러가죠. 스님들도 어디 한 군데서 오래 못 살게 해요. 어느 절에 가서 오래 살게 되면 어떤 인간하고 정이 들게 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바위나 나무 한 그루에게도 관심을 가지며 집착을 하게 되죠. 집착이 생긴다는 건 그것이 번뇌가 되는 것이고, 그 번뇌로 인해 수행과 공부하는 데 지장을 받게 되는 거예요. 전국 어느 절이나 다 해당되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전국 어느 절이나 다 내 집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안거(安居), 그러니까 하(夏)안거와 동(冬)안거가 끝나면, 봄가을은 만행기간이라 해서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거란다. 이 절에서 저기 저 절로 발걸음을 옮기며 ‘운수납자’를 실천한다는 얘기였다. 그럼 스님으로 지내면서, 스님들 사이에서 장애로 인한 특별한 어려움을 겪은 경우는 없었는지를 물었다. 속세,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까지는 많이 놀림도 받고 우울하게 지냈지만, 스님들과의 생활에선 그런 게 전혀 없고 충실하게 배려해 주셨단다. 그런데 그 대목을 언급하다가, 마음에 남아 있던 한 가지 불만사항이 문득 떠올랐던 모양이다. 정산스님은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자신의 속내를 꺼냈다.
“장애를 가진 분들 대부분이 그럴 거예요. 순간순간 자신의 장애를 잊어버리잖아요. 자기가 어떤 핸디캡을 가졌다는 걸 일상에선 모르고 살아간다는 거예요.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면서, ‘내겐 뭐가 어떻게 됐다’는 식의 인식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맞아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뭐가 가장 기분 나빴는가 하면, 비장애로 사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말들입니다. 제발 좀 서로에게 이런 말은 안 해줬으면 좋겠어요. ‘어디가 좀 불편한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예요?’ ‘다리를 절고 계신 것 같은데….’ 그런 걸 왜 자꾸 묻는 겁니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답할 때도 있지만, 단순한 호기심 차원의 지나가는 질문이라면 ‘운동하다가 좀 다쳤어요. 곧 나을 거예요.’ 하는 식으로 넘겨버리곤 했단다. 그런데 그 정도가 심하고 경우에도 벗어나는 상황일 때는, 아예 대놓고 반론을 제기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눈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인다면 저 사람은 몸이 좀 불편한가 보다 생각하면 되지, 그걸 꼭 묻고 질문함으로써 스스로 잊고 지내던 장애를 다시 상기시키게끔 만드는 이유가 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예의에 벗어나는 겁니다. 절에서 지낼 때는 신도들과 그런 대화 비슷한 걸 한 적도 없는데, 이 사회 속에 있다 보니까 정말 남 얘기를 하듯 남의 장애를 농담처럼 거론하는 거예요. 제가 이 대목을 왜 지적하느냐 하면, 저한테는 외국인 친구들이 참 많이 있거든요. 형제처럼 지내는 이들도 많은데, 그들은 단 한 번도 네 몸이 왜 그런가, 어디가 불편한가를 묻는 경우를 못 봤어요. 그게 차이점입니다. 외국인 친구들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받아주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지적을 하며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만든다는 거예요.”
불교를 떠올리다 보면 ‘업보(業報)’라는 단어가 항상 상기되곤 한다. 업보는 전세(前世)의 악업(惡業)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 갚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이 세상에서는 그 단어를 자의적으로 비틀어 왜곡하며 활용하기도 한다.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업보나 업과(業果) 운운하며 비하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접하곤 했다는 게 그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다. 실제로 불교 안에서도 그렇게 비유하고 비하하는 현상이 존재하는지.
“전혀 아닙니다. 그럴 리 자체가 없는 일이죠. 다르게 표현해 볼까요? 장애라는 게 꼭 육체적으로, 표면적으로 보이는 뭔가가 있어야만 장애라는 건 아니거든요. 장애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요.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고, 내면적이든 심정적이든 간에 반드시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가지고 논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편협한 사회의 편견일 뿐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정산스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전문분야인 사찰음식에 대한 대화가 없었음이 뒤늦게 떠올랐기에, 이 시점에서 화제를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사람사는 이야기’에서 한 개인의 모든 인생을 100% 질문하고 대답 듣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시간은 항상 3,40분에서 1시간 이내로 제한되는 게 보통의 일이다. 하루 종일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진행하고 싶지만, 각자의 일상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이고 그 한 부분을 섭외하며 인터뷰가 진행되는 게 보통의 취재과정이다. 왜 사찰음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자신이 절 음식을 계속 연구했기 때문이란다.
“불교에서는 음식에 대한 관심도 욕심이라고 해요. 스님이 되려면 다섯 가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식욕, 색욕, 명예욕과 같은 다섯 가지 욕심을 버려야 도를 통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게 식욕이죠. 뭘 맛있게 먹는다는 생각마저도 버려야 하니까요. 그런 오(五)욕에 빠지면 안 되고 그런 상념마저 다 없애야 하는데, 저는 제 분야로써 식욕을 붙잡고 있는 거잖아요. 음식을 연구하는 걸 제 입장에선 하나의 문화라고 봤던 겁니다.”
그래서 1980년에 사찰음식매장을 차리고, 3년 동안 승려의 입장을 벗어나 지냈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개별적인 비즈니스, 다시 말해서 사적인 영업행위를 금지했기 때문이란다. 조계종 총무원에 직접 가서, 음식을 가르칠 교육의 장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일언지하의 거절’, 다시 말해서 승려가 무슨 음식을 얘기하느냐는 답변만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종적으로 ‘나는 나대로 살아보겠다!’라는 결심을 한 뒤, 28년째 사찰음식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음식을 배울 때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물으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였기에 어렵지는 않았단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다들 맛있다고 했던 스님들의 의견에 힘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절 음식을 하나의 문화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뭘까? 대답의 논리는 아주 단순한 부분에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궁중음식이나 민간음식들은 전부 다 기록으로 남아서 보존이 되는데, 왜 절 음식만 구전(口傳)으로 이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전으로만 전해지다 보니까 발생하는 폐단은 무엇일까?
“자꾸 없어진다는 거예요. 아예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재료 구입이 용이하지 않다거나, 만드는 방법이 복잡하다 할 경우에는 하나씩 사라지고 없어지는 과정이 지금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거죠. 그래서 ‘아, 이건 누군가 정리를 해서 후세에 남겨야 하는 거다!’ 하며, 제가 전국 24교구를 본사마다 찾아다녔던 겁니다. 24교구 본사마다 일일이 찾아가서 직접 살림을 했고, 거기에 있던 음식들을 모두 다 채록(採錄)하는 과정으로 10년을 보냈던 게 저의 지난 삶이었습니다.”
그의 표현 그대로, 전라도 음식이 다르고 경상도 음식 또한 다르다는 게 맞다. 절(사찰) 역시 높은 산에 있느냐, 아니면 들에 있는가, 강가나 바닷가에 있느냐에 따라서 모두 다 음식 내용이 다르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절 주변의 현지에서 나오고 사용하는 재료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 불교에서 사용을 금지하는 오신채(五辛菜)인 마늘, 부추, 파, 달래 등을 제외한 어느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전국 각지의 사찰음식 맛을 계승하며 승화하는 데는 무궁무진한 데이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음식들이 지금에 와서 굉장히 각광을 받고 있는데, 단순히 건강식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에요. 우리 스님들은 모든 생활을 고행으로 생각하며 지내지 않습니까. 육체적으로 편안하면 도를 닦지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니까 그저 생명을 연장한다는 의미에서 음식을 먹었던 거지, 맛을 추구하며 식사를 했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음식들이 장수(長壽)의 비결이었다는 게 현대 의학과 과학으로 밝혀지고 있잖아요. 사찰음식이라는 건 우리 몸을 보신하기 위해 먹었던 게 아니라, 도를 얻기 위해 몸을 학대하는 수단으로 먹었던 건데, 이제 와서야 그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는 건 역설적이기도 하죠. 저는 그런 음식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조금 불편할 뿐 불가능은 없다
지금은 후배 스님들이 사찰 음식을 많이 연구하면서 사회 곳곳에 많이 진출해 있지만, 자갈길 위에서 혼자 길을 만들며 걷던 시절에 비한다면 지금은 아스팔트길과 같다고 한다. 절 음식에 대한 관심은 정작 우리나라 내부보다는, 외국에서 더욱 조명을 비추고 있는 모양이다. 실내 여기저기에 앉은 이들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고, 지도를 펼쳐놓고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일본인 관광객이 분명한 이들도 여럿 보였다.
너털웃음과 함께 꾸밈없이 시원하게 대화를 이끌며 분위기를 주도한 정산스님 덕분에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인터뷰를 정리할 겸, ‘사람사는 이야기’의 마무리 질문인 장애에 대한 관점과 개인적 소감을 물었다. 생각하는 과정도 없이 그의 대답은 곧장 이어졌다. 이런 대목은 늘 간직하며 지내왔기에, 굳이 말을 정리하며 가다듬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는 저의 장애를 이렇게 생각하며 지냅니다. 조금 불편하다는 것뿐이지 절대로 불가능은 없다고 말이에요.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굳은 뜻이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열 손가락으로 해야 하는데 여섯 손가락밖에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래서 열 손가락으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면, 저는 여섯 손가락으로도 다 할 수 있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또한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하지 못하는 게 많은 것 같지만, 사실 도전을 하고 집중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정산스님은 환갑이 넘은 나이가 되도록 나이 자체를 떠올리지 않으며 살아간단다. 인생을 되돌아볼 때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건, 스스로 노력해서 안 되는 건 없더라는 사실이란다. 한 우물을 파든 파지 않든 간에, 무슨 일을 하든지 신체적 장애가 있기 때문에 안 됐다거나 할 수 없었던 건 없었다고 자부한다는 것이다. 노력하면 다 되고 또 이루어진다는 거, 그렇기에 그는 인생에서 불가능은 없다고 믿게 됐단다. 그것이 뭐든 간에 말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절 음식을 후세에 남기고, 이 사회의 제도권 안에 넣어서 교육기관 안까지 자리 잡게 되기를 바라며, 실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거라 한다. 그건 이미 그가 이루어놓은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일간지에 사찰음식에 대한 기고를 연재했고, 절 음식 공개강좌를 일반인들에게 해왔다 하지 않았던가. 전문적인 저서 3권을 남겼고, 그 중 하나는 이번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간됐단다. 이 봄에 새로 나올 책은 북한의 사찰음식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고 한다.
“제가 어렸을 때 이북을 드나들며 공부하시던 노스님들이 저한테 북한 사찰음식들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데 북한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제가 증명도 안 하고 책을 낸다는 게 무리가 있어서 그 자료들을 그대로 가지고만 있었는데, 3년 전에 북한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됐어요. 그래서 현지에 그 자료들을 가지고 가서 북한의 관계자들한테 일일이 확인을 했고, ‘현대불교’에 60회로 연재했던 그 내용들을 묶어 이번에 책으로 출간하게 됐습니다.”
그의 인생을 정리해 보면서, 외람된 질문이라는 전제를 달며 한마디를 덧붙여봤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이 사회(속세) 속에 계속 지내오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가출에 이은 구도자의 길이 스스로에게 훨씬 긍정적 요인으로 남게 된 건 아닌지, 그 대목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맞다고 했다. 집안이라는 틀을 그때 벗어나지 못했다면, 평생을 원망과 좌절 속에서 지내왔을지도 모른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같은 사회 안에서 장애를 가진 친구분들에게 아주 작은 빛이 되고 싶어요. 뭐든지 하면 된다는 걸 저의 인생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겁니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고, 한국의 사찰음식이라는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된 과정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죠. 자세히 밝힐 단계는 아직 아니지만…, 적은 재산이나마 제가 모은 얼마가 있는데 그걸 좋은 일에 쓰고 싶습니다. 장애를 입은 친구분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제 가족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겨야 되겠다는 차원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어떤 방식이 제일 좋은 건가를 찾기 위해 모색 중인데, 정말로 좋은 곳에 쓰일 수 있게 되기를 저도 기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찰음식의 특징을 대라고 한다면, 그 음식을 즐기는 애호가들 이외의 사람들에겐 특별한 대답을 얻기 힘들지도 모른다. 평소에 늘 먹던 ‘무언가’가 모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맛깔스레 화려함을 겸비한다거나, 입 안을 톡 쏘는 일정한 자극 같은 것도 없는 평균치 그대로의 음식들이기에 쉽게 접하려들기 어려운 점도 실제 존재한다.
그런데 그걸 뒤집어서 보면, 우리가 얼마나 획일적인 자극에 적응되고 익숙해져 있으며, 더 많은 자극을 추종하려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더 화려한 것, 더 눈에 띄는 것,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넓게 보이는 것, 더 편안하고 이리저리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들에 집중되는 이 사회의 문화적 현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본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모르는 세상이 되어버렸기에, 새로운 것만 추종하다 보면 결국 정작 중요했던 모든 걸 잃어버리는 과오를 뒤늦게 깨닫게 될 일이다.
마무리 차원에서 몇 줄만 덧붙이겠다. 오래 전 어느 사찰에 갔을 때 스님이 따라주시는 차 한 잔을 마시며, 그 차를 우려내고 따르고 마시는 데 걸리는 시간을 참기 어려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느낌이 깨달음처럼 솟아났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스스로의 생활이 기다림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 빨리 만들어 빨리 해결한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잊고 지낸다는 것, 더불어 인생 자체도 허튼 뜀박질의 반복으로 인해, 천천히 걸었으면 더 빨랐을 길을 오히려 헤맸던 게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는 것….
차 한 잔으로 얻게 되는 깨달음이 있다면, 자극을 추종하는 평소 습관을 잠시 접어두고 자연식의 식단을 한 번 마주하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그 자체만으로도 무언가를 버리고 얻게 되는 경험을 갖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종교와 상관없이, 평소의 취향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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