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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사람사는 이야기]충북장애인부모회 민용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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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장애를 갖게 되면 누가 가장 불편할까? 물론 이런 질문은 말도 안 되는 우문(愚問)일 뿐이다. 당연히 장애를 가진 당사자 ‘스스로’의 절망과, 인생의 낭떠러지 앞에 서야 했던 좌절의 체험이 우선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주 어린 시절부터, 더 깊게 표현한다면 태생부터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심정적인 십자가를 누가 더 크게 짊어지게 될까?

누가 더 많고 적다는 양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극히 무리하고 결례를 동반한 접근법이라는 건 안다. 당사자 본인의 가슴 안을 들여다볼 능력은 그 누구한테도 없기 때문에 단지 말로, 얘기로, 의견으로 대신 전해 듣게 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장애를 직접 가진 입장만큼, 오히려 더 가슴이 아픈 사람을 찾아보라면 우리는 부모님, 그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자신의 몸에서 잉태된 아이한테 원인을 알 수 없는, 의학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장애가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전학적으로도 아무런 전제가 없고, 임신기간 중 특별한 원인을 제공한 것마저 없는데도, 우리 곁에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을 적지 않게 마주하게 된다.

어머니들은 똑같이 말씀하신다. 임신기간 중 했던 모든 검사에서도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註 : 물론 임신 기간에 태아의 이상징후를 미리 알고도, 잉태된 생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어머니 또한 많으심을 진심의 격려에 담아 밝혀둔다.)

전체 장애 유형 중 대부분이 후천적 원인으로 발생하지만, 여전히 선천적 장애 또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학적 선조치가 따른다 하더라도, 선천적 장애의 발생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장애를 가진 당사자(아이)와 그 부모님은 출발점부터 같은 장애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하고, 당사자의 성장 이후에도 함께 호흡하며 생활하는 틀을 벗어나기는 어렵게 된다. 즉, 실질적 장애는 2세가 가지고 있지만 심정적 장애는 부모님, 특히 육아를 1차적으로 책임지는 어머니한테 똑같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는 어머니를 만나기로 했다. 물론 같이 만나는 것이지만, 어머니의 마음 안을 먼저 들여다보기로 했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자신의 심정을 제대로 밝힐 수 없는 상황이라 했기에, 그 아들의 생을 누구보다 가깝게 공유한 어머니의 심정을 생생한 음성을 통해 듣기로 한 것이다. <함께걸음> 편집부에서 섭외한 인물은 (사)충북장애인부모회 민용순 회장이다. 편집부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게 객원기자의 입장이기에, 민용순 회장이 어떤 분인가를 먼저 확인해 봤다.

의외로 아주 쉽고 빠르게 그 인물이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각종 집회와 행사에서 현 정부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고, 장애아동의 교육권 확보를 위해 카랑카랑한 육성을 내지르던 바로 그 분이었다.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쓴 그 분의 인상이 곧장 떠올랐다.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이미 여러 차례 그 분의 발언을 들었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지내왔기에 구면(舊面)이라 해도 될 분이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초면과 구면의 차이는 아주 크다. 더욱이 만남의 장소로 정해진 충북장애인가족지원센터는 개인적으로 익숙한 자리인 충북 청주시 예술의 전당 바로 인근이었기에, 지도책 한 번 펼치지도 않고 수월하게 현지에 도착했다. 아들은 지금 수영 강습을 받는 중이라 했고, 각종 회의 참석에 바쁜 그를 오후 2시에 마주할 수 있었다.

인사를 나누며 인터뷰의 전제조건을 먼저 말씀드렸다. 오늘의 대화는 충북장애인부모회 민용순 회장이 아닌, 장애가 있는 아들을 키워온 어머니의 입장으로 진행하겠다고 말이다. <함께걸음> 지면에는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글을 전개하겠다는 양해를 구한 뒤, 준비된 순서에 따라 첫 번째 질문을 드렸다. 아들의 장애가 무엇이고 어떤 상태인지를 물으니까, 이름은 전성국이고 지적장애 2급이라 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는지를 다시 물으니까 그건 좀 애매한 부분이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라는 대목에선 늘 전제를 달아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외견상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장애를 가졌다면 그 자체로 미리 인정했을 텐데, 제 아이는 그런 증상이나 짐작할 만한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백일이 됐는데도 목을 잘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다른 애들보다 머리가 좀 큰 게 이상해서 검사를 받게 됐죠.”

일면 불안한 마음에 뇌 검사 등의 검사를 다 해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와서 괜찮은가 보다 하며 지냈단다. 병원에서 이상이 없다 하니까, 당연히 장애 같은 건 떠올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발달시기가 좀 늦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검사를 했는데, 여전히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단다.

   
▲ ⓒ채지민 객원기자

“아이가 언어나 행동이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까 크게 걱정하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언어는 때가 되면 다 하게 되는 거잖아요. 크게 개의치 않고 지냈는데, 20개월이 지날 즈음에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에 유독 집착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바퀴를 돌리는 행동만 계속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게 생기고, 그것에 집중하는 일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경우이다. 하지만 어머니 머릿속에는 오래 전 기억 하나가 불안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단다. 결혼하기 전에 신부님이 운영하시는 어린이집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신부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가 생생하게 상기된 것이다. 아이가 한 가지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면 자폐증상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 신부님이 예로 들었던 게 바로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 바퀴를 돌리는 일에 집착하는 경우였다는 것이다.

순간 눈앞이 깜깜했죠. 그럼 내 아이가 자폐란 말인가? 그래서 아이를 신부님께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애한테 이상이 있는지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드렸죠. 아이의 증상을 테스트하는 검사를 받았는데, 자폐성 경향은 있지만 자폐는 아니라고 검사결과를 알려주셨어요. 자폐성 경향도 미미하게 나왔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무 생각을 그쪽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신부님이 말씀하셨죠.”

그런데도 문제는 연이어 발생했던 모양이다. 아이의 언어 발달이 너무 늦다고 느껴진 것이다. 주위의 모든 이들은 다들 ‘언어가 늦을 뿐이다, 조금 지나면 다 낫는다, 곧 하게 될 거다’ 하며 걱정 말라고 말을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병원에 가서 검사를 새로 했단다. 외관상으로도 특이한 점이 없고, 뇌 구조를 촬영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답만 예전과 같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불안과 의구심의 나날을 보내다 보니, 조금씩 ‘혹시 장애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갖게 될 일들이 늘어났단다. 36개월이 됐는데도 다른 애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태까지 진행됐다는 게 그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건 문제가 있는 거다 싶어서, 어린이집 선생님을 일주일에 한 번씩 오시게 했어요. 그때부터 집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늦더라고요. 그래도 당시까지는 장애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죠. 그냥 늦은가 보다. 친척들도 조카 누구는 세 돌을 넘길 때까지 말이 참 늦었었는데, 늦게라도 말이 트여서 지금 잘 살고 있지 않나 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어주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순간에 언어가 트였단다. 다섯 살 지나 여섯 살이 될 무렵이었는데, 기억 니은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책을 붙잡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도 특이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책을 항상 똑바로 들고 읽는 시늉을 하더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책을 뒤집어서도 읽는 척하고, 신발도 반대로 신으면서 좌우 개념이 희박해야 정상인데 아들은 그게 아니었단다.

“얘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바로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실험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다른 책과 신문과 잡지 같은 것들을 일부러 뒤집어 줘도, 항상 똑바로 바꿔 잡으면서 책장을 넘기며 읽는 시늉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 지능이 낮은가 보다…. 당시는 ‘정신지체’라고 표현을 했죠.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길거리 간판을 또박또박 잘 읽는 걸 보면 감탄을 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연산이 전혀 안 된다는 거, 그러니까 하나 더하기 하나 같은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서 점점 어두운 쪽으로 결론이 내려지게 됐어요.”

그러던 시기에 때마침 매주 수요일마다 어린이집에서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진행됐다고 한다. 장애와 관련해서 매주 두 시간씩 아이를 키우는 과정과 사회인식변화에 대해 외부강사의 강의가 이어졌는데, 아이 수준에 맞고 부모도 알아야 하는 일반 교양교육까지 알차게 배우게 됐단다. 직장 생활을 하던 와중이었기에 회사와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빠져나와서 그 교육을 꼬박꼬박 듣게 됐고, 결국에는 확실하게 인정하게 됐단다. ‘아들이, 우리 애가 진짜 장애인가 보다.’ 그렇다면 아들의 장애등록은 언제 시켰냐고 물으니까, 어머니의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마음속으로는 인정을 했는데, 사회 속에서 인정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어요. 장애등록은 중학교에 가기 전에 했어요. 그때 당시에는 뭔가 아이한테 커다란 짐을 짊어지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등록에 따른 혜택은 둘째 문제이고, 부모로서 아이한테 인생의 빨간 줄을 긋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이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거든요. 또 주위에서 들어보니까, 일단 장애등록을 하면 그걸 다시 지우기가 쉽지 않다더라고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등록을 해야만 애가 집과 가장 가까운 중학교에 배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등록을 하고… 사회 속에서 장애를 인정하고… 그렇게 결정하는 동안 정말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아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모든 게 힘겨운 과정이었지만, 더 크고 심각했던 건 치료비 문제였다고 한다. 치료비가 당시 비용으로 매달 150만원 정도 들어갔단다. 치료라는 게 단순히 병원에 갔다 오는 게 아니라, 언어치료·미술치료·심리치료 등 각 분야별로 꼭 해야 하는 과정이었기에, 어떻게든 비용을 감당하면서도 치료를 계속해야만 했단다. 숫자를 응용하는 연산은 전혀 안 되지만 그래도 국어나 사회 같은 이론적인 건 가르쳐야겠다 싶어서, 개인교사 선생님을 집으로 오시게 해서 가정학습도 놓치지 않게 했다고 한다.

“안 해 본 치료가 없어요. 어디가 좋다고 하면 수소문해가지고 치료를 받으러 전국 각지를 다녔거든요. 머리에 좋다고 하면 그 약재를 구해서 먹여보기도 했죠. 서울에 올라가서 종합적인 검사를 다시 받기도 했어요. 혹시 뇌에 다른 이상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 겸사 전신을 다 검사하기도 했죠. 200만원 가까운 치료비를 내면서까지 정밀검사를 다 했는데, 머리에 이상이 없다고 하니까 그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진짜로 아쉬웠던 점이 뭔지 아세요? 차라리 수술해도 된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솔직히 그런 기대감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데도 이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허탈한 거예요. 한쪽으로는 안심이 되고, 또 한쪽으로는 허탈하고…. 이렇게 마음 졸이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수술로 몇 개월 고생해서 완치가 된다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 ⓒ채지민 객원기자

자녀가 어떻게 되는지 물으니까, 큰아들이 성국 씨이고 두 살 아래로 남동생, 열 살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고 한다. 어머니의 입에서는 그 대목에서도 새로운 한숨이 이어졌다.
“잘 아시잖아요. 장애아가 있는 상태에서 둘째 낳기가 쉽지 않다는 거. 저의 가족 사돈의 팔촌까지 다 둘러봐도 장애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장애라는 걸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거잖아요. 그런데 첫 애가 그러니까 둘째를 낳아 장애가 있으면 어떡하나, 그런 갈등을 해야 한다는 게 가장 괴롭고 마음 아팠어요. 그래도 낳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게… 솔직히 말씀드려서, 부모가 죽은 다음에 우리 아들을 누가 돌봐야 하나요? 둘째 아들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우리 성국이를 세상에 혼자 남겨놓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천만다행으로 동생 둘은 둘 다 건강해요.”

그 대목을 언급하던 어머니한테 아주 기분 나쁜 사실이 문득 떠올랐던 모양이다.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아들은 물론 어머니도 검사를 한다고 한다. 똑같은 내용을 묻고 똑같은 사항을 적어야 하는데, 어느 병원에 가서 어떤 진료를 받는다 해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똑같은 검사가 반복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게 완전히 고문의 수준이란다. 첫 애한테 장애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엄마 마음에 대못이 박혀 있는데,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감기약조차 먹지 않았는데, 자신이 뭘 잘못해서 아이한테 장애가 생겼다는 말인가. 그걸 계속적으로 떠오르게 만들고, 다시 또 상처받게 만드는 게 바로 그런 검사라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 치료실에 가면 또 해요. 갈 때마다 해요. 치료실이 틀릴 때마다 영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검사를, 같은 질문을, 같은 고문을 갈 때마다 하는 거라고요.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그걸 일괄적으로 공유할 순 없나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가 있잖아요. 아이 때 검사했던 건 그렇다 쳐도,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 되어서 치료를 받는 지금까지도, 역시나 똑같이 무슨 증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그 이유가 뭐고 어쩌고 저쩌고…. 병원에 들를 때마다 같은 검사를 하다 보니 이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잠시 다른 화제로 대화를 돌렸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전혀 다른 내용으로 비껴가도 본론은 아들에 대한 얘기로 되돌아왔다. 충북장애인부모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장애아의 교육 환경에 대해 얼마나 많은 답답함과 괴리감을 겪어왔을까. 더욱이 스스로의 아들이 당사자가 아닌가. 이 사회, 이 나라가 장애아를 어떻게 바라보고 관리하는지, 관리가 아니라 얼마만큼 방치하는지에 대해서 어머니의 분노와 지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시(市) 차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한 군데도 없어요. 엄마들이 인원을 모아 그룹을 만들어서 찾아가면 그제야 해줄까. 프로그램을 먼저 만들어서 시행하는 데가 한 군데도 없다는 거예요. 또 복지관은 있는데 평생교육에 관련해서는 아예 전무한 상태죠. 말 그대로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어요. 졸업해서 갈 데도 없죠. 복지관을 가고 싶지만 대기하는 데만 3,4년이 걸려요. 그럼 그걸 기다리는 사이에 아이가 성장해서 갈 수도 없게 돼요. 게다가 경증만 받아요. 중증장애를 안 받는 이유는 단순하죠. 경증 위주로 생색내기 위주의 프로그램만 운영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업적 위주의 보여주기에만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이 갈 데가 없는데 어떡할 건가. 그 고민이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이어졌단다. 시설을 보낼 거냐? 시설은 절대 안 된다. 인권 자체가 없지 않은가. 아이한테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을 계속하지 않으면 퇴행이 된다는 점이었단다. 10년 20년 교육을 계속했다 해도, 그걸 지속적으로 이어주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게 순식간이라서 교육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지적장애아들을 부모가 거의 다 데리고 있는 이유는 이용을 많이 당하기 때문이에요. 뭘 시키면 대항, 저항을 못하잖아요. ‘나 이런 거 하기 싫어요!’ 이런 말을 못한다는 거예요. 성국이가 어릴 때 특수학교에 딸린 유치원을 다닌 적이 있어요. 같은 반에 일곱 명인가 있었는데, 그 애들은 완전 중증의 중복인 아이들이더라고요. 그 중에서는 성국이의 상태가 그나마 가장 좋았기 때문인지, 얘 혼자 청소하고 애들 시중을 다 들고 있더군요. 특수학교라서 전문 시스템이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까 그런 건 하나도 없었어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아들이 유치원 다니는 일을 친정어머니가 봐주고 계셨는데, 몇 가지 지적사항을 학교에 개선해달라고 요구해도 받아주지 않는다 해서 중간에 휴가를 내고 직접 가서 봤단다. 세상에,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게 하는데, 그 어린 아이가 고등학생 사이에 보이지도 않게 끼어서 땀을 줄줄 흘리며 시달리고 있는 걸 목격하게 됐다고 한다. 너무 기가 막혀서 특수학교유치원은 그 즉시 그만 두게 했단다. 죽으면 죽었지 특수학교는 절대 안 보내겠다고 다짐까지 해야 했다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아들의 교우관계는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어머니의 얼굴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교우관계는 좋은 편이었나 보다 - 하는 직감이 들 만큼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친정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로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만나면, 친정어머니는 주머니에서 사탕 몇 개를 꺼내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단다.

“우리 성국이가 (장애가 아니라) 사고가 나서 머리를 좀 다쳤거든. 그러니까 너희들이 성국이랑 잘 놀고 도와줄래?” 순수한 마음의 아이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함께 친하게 어울리며 잘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왕따 같은 건 거의 모르고 지낸 것 같다고 한다.

“3학년 때는 우리 성국이가 반장도 했어요!”
그 한마디와 함께 어머니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될 때의 일이란다. 담임선생님이 여름방학 동안 일본을 다녀오셔서, 일본의 장애아교육에 대해 나름 많은 걸 경험하고 돌아오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실에서 그 경험을 얘기했고, 이어 첫 번째 반장 투표를 했는데 아들, 그러니까 성국이한테 표가 가장 많이 나왔단다. 그래서 선생님이 다시 말씀하셨단다. 성국이가 반장이 된다면 너희들이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설명한 다음 다시 투표를 했는데, 또다시 최다득표로 성국이가 뽑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마지막 확인 차원에서 다시 한번 더 질문을 했더니, 교실의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성국이를 우리가 도와주면 되잖아요!”

“아이들의 그 한마디에 선생님이 큰 감동을 받으셨다고 하셨어요. 성국이가 반장으로 뽑힌 게 친구들한테도 대단한 감동으로 전해졌대요. 어려운 일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반장을 하면서 성국이가 했던 건 ‘차렷, 경례!’가 전부였는데, 그 반장 역할을 맡은 이후로 성국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세요?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긴 거예요.”

   
▲ ⓒ채지민 객원기자

그렇게 긍정적인 환경이 오래오래 지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4학년으로 올라가서 남자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얼마 후 그 담임한테서 너무 황당한 말을 듣게 됐단다. ‘아들을 자기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부모가 알아서 책임져라.’ - 그런 무책임한 발언이 담임선생이라는 사람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교육을 담당하고 전공했다는 인물한테서 그런 망언까지 듣게 된다는 게 너무 화가 나서 ‘그래, 내 아들은 내가 책임진다.’는 울분을 섞어 회사까지 그만두는 초강수를 두게 됐단다.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 두게 된 커다란 계기가 된 건 맞다고 한다.

공무원이었던 남편보다 연봉이 훨씬 높았던 금융계의 부장이었고 더욱이 상무로 승진하기 직전이었기에, 직장을 그만둔다는 게 어머니한테는 정말로 큰 갈등이었단다. 남편하고 대화를 하니까, 아이한테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친정어머니한테 툭 까놓고 있는 그대로를 문의하니까, 친정어머니의 의견 또한 이젠 너의 인생 살지 말고 자식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단다. 덧붙여서 친정어머니는 ‘내가 돌봐주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다. 이젠 엄마가 곁에 있을 때가 됐다.’는 조언이 인생의 무게로 전해졌다고 한다.

청소년기까지 이어지던 대화의 중심을 청소년기 이후인 최근으로 돌려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들이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까, 평생교육을 위해 그룹 형태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에 보낼 생각은 없었냐고 다시 질문하니까, 당연히 그 생각을 길게 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접어야 했다 한다. 아들의 지적 수준으로는 대학에 갈 수도 없고, 실업계 출신이기에 전문대도 꼼꼼하게 살펴봤지만, 지원센터가 있는 곳이 하나도 없어서 더 이상 추진하는 게 어려웠다는 얘기였다.

“우리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잖아요.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혼자 있을 순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또 도와줘야 하고…. 그래서 그럴 바에는 대학보다는 직업 쪽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죠.”
그럼 아들의 생각은 어땠느냐고 물으니까, 어머니는 연이어지는 한숨과 함께 대학을 꼭 가고 싶다 하던 아들 얘기를 꺼냈다. 아들은 밖에 나갔다 올 때마다 대학 홍보지를 손에 들고 들어왔단다. 그리고 나서 엄마 앞에 다가와서 “엄마, 이 대학이 이렇게 좋대.” “어느 시에 무슨 대학이 있대.” “누가 그러는데 어느 대학이 참 좋다고 하던데.” 하며 대학 얘기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대학모집요강 같은 팸플릿 용지를 들고 와서, 참 많은 관심을 보이곤 했다는 대목에선 가슴 묵직해지는 여운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보내고 싶지만… 이제 곧 성국이를 만나보면 아시겠지만, 손 기능이 많이 약해서 대학과 직업 모두 어려운 입장이었거든요. 젓가락질도 힘든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아들한테 설명을 했죠. ‘성국아, 대학 다니는 것도 참 좋은데, 엄마 생각은 직업 쪽이나 다른 걸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걸 설득시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줄은 정말 몰랐어요. 왜 안 되느냐, 나도 대학 가고 싶은데 가게 해달라 하는 애한테 ‘하지만 성국아, 대학교에서 너한테 맞는 게 없대.’ 그렇게 말했어요. 맞는 게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성국이가 가서 혼자 할 수 있는 능력이 됐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까 못가는 거죠. 그걸 설득하고 또 설득하는 과정이 얼마나 안쓰럽고 쓸쓸하고 눈물겨웠는지….”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는 길게 느껴지고 1년은 더 긴 기간처럼 여겨지지만, 아이의 성장이라는 걸 돌아보면 정말 순식간의 일이기도 하다. 어머니한테는 영원히 아기 같았던 아들이 이제 21살의 청년이 된 게 아닌가. 그런 시점에서 어머니는 성인이 된 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앞으로의 과정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듣고 싶어졌다. 이젠 성장기의 아들이 아니라, 결혼도 해야 하고 2세도 갖게 될 성인이기 때문이다.

“제가 평생교육을 설계하게 된 것은, 일단 지자체에서 지원되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고요. 그래서 엄마들이 조금씩 지원을 해서 지적장애를 가진 자식들이 평생교육을 해갈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야겠다 해서 장애인평생교육센터를 만들기로 한 것이죠. 기존의 비장애 중심의 틀 안에 들어가서 하나의 공간을 가져오면 좋겠지만, 그렇게 가기에는 전문화가 전혀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별도의 독립적으로 만들어 보자. 거기에서는 직업교육과 일상생활교육까지 전부 다 진행하자. 죽을 때까지 계속하자. 자기 의사, 자기 결정권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중증 전문의 보호사업장도 함께 만들 계획이에요. 대부분의 보호작업장이 지체장애 위주인데,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지적장애의 숫자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의 특성에 맞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찾아보니까,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하게 많더라고요.”

전국에 있는 센터와 보호작업장들을 일일이 다니면서 살펴보고 조사해 본 결과, 지적장애의 작업 특성과 가능성을 가시적으로 찾아낸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충청북도와 청주시하고 협의를 한 결과, 기존의 보호작업장이 기술을 이전해 주고 생산라인 설치를 담당해 주기로 결정이 됐단다. 그래서 늦어도 올해 안으로는 장애인평생교육센터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주도로 출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와 다르게 요즘의 엄마들을 만나 보면, 장애라는 걸 바로 인정하시더라고요. 저의 시대는 장애아를 낳으면 ‘누가 잘못해서 벌 받은 거야’라는 식으로 가슴이 아팠는데, 지금은 장애로 판명이 나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훨씬 더 많아진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장애 자체를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이 여전히 계시죠. 인정도 안 하시고 교육도 안 시키는 분들이 많으신데, 그 분들에게 조언을 드리고 싶은 건, 그래도 빨리 인정할수록 엄마한테 도움이 된다는 점이에요. 자식한테 도움이 되는 것보다, 엄마한테 도움이 되는 게 훨씬 더 많아요. 엄마가 힘을 내야, 엄마가 더 많은 걸 먼저 알아야 아이들한테 지원도 하고 가족도 제자리를 잡게 되는 거잖아요. 빨린 인정하는 게 중요해요. 장애라는 정보를 얻었으면, 심적인 갈등이야 당연히 크고 힘겹겠지만 바로 인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애라는 게 의료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자체 어디를 가도 체계적인 도움을 문의할 데가 없다는 게 큰 문제점이란다. 주민센터를 가더라도 장애등록절차만 설명해주지, 장애유형별 특성과 교육 같은 것에 대한 소개나 조언은 하나도 구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복지사들 역시 무언가를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도, 난감한 상태가 되기 일쑤라는 건 사실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정부와 지자체는 장애와 관련해서 전문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안내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래서 직접 방문을 하며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곳을 소개받아 가면 좋은 게 무엇인지 아세요? 나의 경우와 같은 선배들의 생생한 조언을 들을 수 있고, 같은 입장인 동년배로서 살아있는 정보를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거예요. 서로 비교가 되기 때문에 빨리 느낄 수 있는데, 혼자서 하다 보니까 아이 때부터 못나오는 분들은 끝까지 못나오게 되시더라고요. 또한 아이를 집에서만 키우는 분들은 설령 학교를 보낸다 해도,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항의하지도 못하고 감수하려는 경향이 커요. 학교를 다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건데, 지금 시대가 그런 건 절대 아니잖아요. 지금도 이런 엄마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하루빨리 생각을 바꿔서 열린 공간으로 나오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마땅한 데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우리 부모회에 연락하시는 것만으로도 모든 변화의 시작이 이뤄질 겁니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렇게 어머니와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출입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가 실내로 들어왔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나누던 대화였기에, 갑자기 등장한 인물은 실내 분위기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놀란 건 이 공간의 이방인인 한 사람뿐이었나 보다. 어머니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성국아!” 하는 음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아들의 등장, 다시 말해 성국 씨가 어머니 곁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 곁에 낯선 인물이 서 있다는 게 느껴졌는지, 일순간 조용히 자리에 앉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몇 번이나 질문을 해도, 어머니가 대신 질문을 해도 고개만 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일단 분위기를 전환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사진 촬영을 하자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밖으로 나가 공원으로 가자는 말에, 성국 씨는 벌떡 일어나 앞장서며 복도로 먼저 나가 섰다. 보기 드물게 쾌청한 하늘의 날씨였기에, 실내 공간을 벗어나 넓은 공원을 걷는 게 성국 씨와 대화를 나누기가 훨씬 편할 것 같았다.

“성국 씨는 뭐가 제일 좋아요?” 못 들은 척 한참 동안 입 다물며 딴청을 부리다가 “게임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게임하는 게 가장 좋고,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단다. 그러더니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옆에서 뭐라고 하면 돌아앉기를 반복하며, 잠시 동안 게임 하나에 몰두하기만 했다. 어머니가 간지럼을 피워도 아랑곳없이 몰두하기를 십여 분, 사진 촬영에 좋은 배경을 찾아 자리를 이동하자고 했다. 여러 장을 찍을 거니까 의자에 어머니가 먼저 앉으시고, 성국 씨가 뒤에 서 있으라고 하자마자 이건 또 무슨 장면인가. 뒤에서 어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연신 볼에다가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특정한 자세를 요청한 것도 아니었는데, 두 모자(母子)는 말 그대로 사랑 가득한 장면을 한참 동안 연출하며 함박웃음을 연달아 이어갔다. 사진 촬영에 있어서 가장 좋은 순간이 언제인가. 바로 지금처럼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이어질 때가 최고의 기록을 남기게 되는 법 아닌가. 위치를 바꿔 성국 씨한테 의자에 앉으라고 하니까, 이젠 갖가지 표정과 손동작으로 나름대로의 멋진 포즈를 한참 동안 연출했다. 어머니마저 놀랄 만큼 카메라 앞에서 여유로움이 넘쳐흐르는

   
▲ ⓒ채지민 객원기자
것, 그 장면을 놓치기 싫어서 셔터를 누르려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성국 씨는 아이처럼 깡총깡총 뛰며 공원을 내달렸다.

“우리가 보기에는 부족해 보이더라도, 그 아이들이 서로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는 게 엄마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그 한마디를 마지막 인사로 남겨주셨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이끌려 저 만치 어딘가로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몇 마디 제대로 나누지도 못했지만, 성국 씨한테 아주 많은 대답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어머니 아니, 엄마의 뺨에 입을 맞추는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성국 씨의 마음속을 깊숙하게 들여다본 것 같았다. 엄마의 마음을, 엄마를 향하는 마음을 무슨 단어로 어떻게 표현하는 게 가장 좋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건 빙그레 웃는 말줄임표로 대신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누구나 마음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즐거움 가득한 미소띤 얼굴 말이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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