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엔 두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 함께 사는 세상


내 인생엔 두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사람사는 이야기]영상문화 미디어교육 전문가 백수정

본문

   
젊은 시절 치열하게 외웠던 좌우명이나 생활신조 따위를 망각한 채 지낸 지도 이미 여러 해…. 한숨조차 호사스러운 아쉬움을 대신하며, 마음속에는 새로운 몇 가지 언어들이 남몰래 숨어들기도 한다. 개인적인 입장에선 그 중 하나가 ‘천천히 서두르라(Festina lente, 페스티나 렌테)’라는,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티고네(Antigone, 외디푸스의 딸)’에 나오는 한마디 문장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장난이다. 서두르기도 바쁜데 ‘천천히’라니! 그런데 우리 나이로 마흔을 넘기고 중반에 이르다 보니, 그런 말을 역설로만 치부했던 지난 삶 자체가 역설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곤 한다. 무조건 서두르다 아주 많은 것들을 놓쳐버렸다는 거, 그 모든 걸 ‘천천히’ 하라는 주변의 조언만 귀담아 들었더라면 훨씬 수월한 삶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그리고 인생의 진리는 항상 가장 단순하고 가까운 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런 실감들이 아득한 미련과 함께 버무려지며 뒤섞이곤 한다.

백수정, 서울 YMCA 어린이영상문화연구회 미디어교육팀장. - 이번 7월호의 표지와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 사람이라 했다. 이름을 듣자마자 정말 반가웠다. 그는 <함께걸음>에 ‘Culture - 장애코드로 문화읽기’를 연재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했던 이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재를 하려 준비하다 보니, 그의 얼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 더욱이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면서 그의 기고 글만 읽고 지냈다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맴돌았다. 물론 이름의 느낌으로 인해 여성일 거라는 전제는 늘 머릿속에 담고 지내긴 했지만 말이다.

선입견이 없던 어린 시절
서울 중심의 인사동 한복판에서 그를 만났다. 실례가 아니라 결례가 될 만큼 늦게 도착했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반가움의 미소가 가득했다. 그가 앉아 기다리던 자리는 실내가 아닌 야외의 테이블이었다. “햇빛이 드는 자리인데… 괜찮으세요?” 하며, 그는 늦게 온 사람한테 배려 한마디를 먼저 던졌다. “네, 괜찮아요. 저는 햇볕에 광합성 하는 걸 더 좋아하니까요.” 농담을 겸해 던진 대답이 이어지자마자, 그의 미소는 웃음으로 부풀어 올랐다.

마주대한 첫 인상은 어디선가 자주 봤던 얼굴이라는 느낌부터 다가왔다. 두서없이 편하게 묻겠다고 하니까, 다 괜찮고 좋다는 대답과 함께 또다시 얼굴 전체로 함박웃음이 번져났다. 자신의 장애는 뇌병변장애 3급이고,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갖게 된 거라 했다. 어디서 태어났냐고 물으니까, 뜻밖의 질문으로 받아들였는지 그 의미를 되물은 뒤에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어디서 많이 마주친 얼굴인 것 같아서 물었다고 답을 했다. 그런 마주침이 길거리에서의 스쳐감인지, 장애우 관련 특정 세미나 공간인지, 아니면 어느 모임 자리에서 몇 차례나 마주했는데도 통성명을 하지 못해 정식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건지…, 그런 여러 경우의 수를 나름 혼자의 머릿속으로 헤아리던 와중이었다. 그 순간 문득 ‘인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 바로 이런 게 인연이라는 거야. 맞아. 이게 바로 인연이라고.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이라 하는데, 그 5천만의 숫자 중에서 이렇게 하나의 탁자를 놓고 서로가 마주대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소중한 만남인가. 불교의 가르침을 굳이 앞세우지 않더라도, 이렇게 ‘초면인 듯한 낯익은 얼굴’을 만난다는 건 기쁜 일이 분명하다. 어린 시절부터 살아왔던 서로간의 ‘지리적 거리’는, 얘기를 나눠보니까 지금의 지하철 시간으로 헤아릴 때 15분 내외의 가까운 지역이었다. 그런 사실들이 대화의 친밀감을 더더욱 높게끔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하, 그런 거구나….” 백수정 씨는 초면이 아닌 게 분명한 것 같은 우리 만남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은 어땠느냐고 물으니까, 그리 특별하진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특별히 기억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겠냐고, 살짝 재촉하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백수정 씨의 얼굴은 다시 한 번 빙그레한 미소로 바뀌기 시작했다.

“저는요. 제가 참 좋은 부모님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지금도 해요. 지금 생각해 봐도… 저의 유년기는 그렇게 힘든 건 없었던 것 같거든요. 경제적으로 특별히 힘든 것도 아니었고, 제가 장애를 가졌다고 느껴본 적도 별로 없었고요. 저는 저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들을 알아서 하며 자랐던 것 같아요.”

그의 이 대답에 혹시라도 오해의 소지가 생길지 몰라 미리 언급해야겠다. 이 글의 뒷부분에 부연설명으로 등장할 내용이 따로 있지만, ‘장애를 가졌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의미는 본인 스스로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굳이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따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염두에 둘 이유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 된다.

“처음부터 그랬는데요, 뭘….” 이어진 그의 한마디가 가장 단순명료한 답이 아닐까? 또한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했다’는 건, 다음 장에 언급될 ‘TV는 내 친구’라는 한마디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다.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어디어디의 누구누구들처럼 ‘웰빙 어쩌고’의 삶을 살아왔다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수정 씨와의 대화가 의외로 단답식 진행이었기에, 기존의 ‘사람사는 이야기’ 틀을 잠시 벗어나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대화를 나눴던 그대로의 녹취 기록을 남기는 건 어떨까? 서로 나눴던 대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짧게 옮기기로 한다. <함께걸음>의 질문이 무엇이고, 그 대답이 무엇인지는 간단하게 구분될 것이다.

“그럼 교육은 어디에서 받으셨어요?”
“교육은 유치원 때부터 특수학교를 다녔고요.”
“그럼 초중고 전부 다 다니신 거예요?”
“네, 그런데 대학은 처음으로 일반대학에 갔어요.”
“그렇다면… 비장애 위주의 교육은 대학이 처음이신 건가요?”
“네, 처음으로 비장애 세상으로 나간 거죠.”
“그럼 전공은 무엇이었나요?”
“유아교육과예요.”
그때 그는 처음으로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두어 차례 되새겼다. “그게 제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 인생의 전환점)였어요.”

나이 스물일곱에 사회로 나오다
“유아교육을 전공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요. 어릴 때부터 아기들을 보면 그냥 좋았어요.”
“그럼 장래에 그런 공부를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셨던 건가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고요. 어릴 때의 꿈은 다른 거였어요. 저는 작가가 돼서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거든요.”
“그게 언제부터의 꿈인가요? 초중고? 아니면 사춘기 때?”
“아니오. 아주 어린 시절부터예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책을 아주 많이 읽었어요.”
“가장 좋았던 책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은 ‘모모(미하엘 엔데 지음)’였어요. ‘모모’하고 ‘어린 왕자(생텍쥐페리 지음)’.”
“언제 읽으신 거죠?”
“초등학교 때 처음 읽었는데, 중학교 때 또 읽고 느낌이 좀 달랐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또 읽었어요. 그때그때마다의 느낌이 조금씩 다 다르더라고요.”

문득 백수정 씨의 눈빛에서 모모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아주 긴 길 앞에 서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모의 이미지가, 영화 속 화면이 겹치듯 그의 모습 위에 투영됐던 것이다. 화제를 살짝 바꿔서 어린 시절의 교우관계가 어땠는지를 물었다. 친구관계가 편했는지 묻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아주 또렷한 발음의 “네!”였다.

   
“저는요. 제가 일반학교를 다녔어도 교우관계에선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어릴 때는 애들한테 선입견이 없잖아요. 유치원 때부터, 점점 더 세월을 겪어가면서 선입견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니까요. 학교제도 안에서 생기는 선입견도 많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애초부터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다녔더라면, 친구관계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학생 시절이 아닌, 사회생활로 화제를 돌렸다. 많은 활동을 하신 걸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가 궁금했다. 백수정 씨는 자신이 사회생활을 좀 늦게 시작한 편이라고 했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방송 모니터링을 처음 시작하게 됐단다. 시청자단체에서 하는 모니터링이었는데, 그게 방송사에서 1년에 한 번씩 뽑는 모니터요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MBC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이어 KBS에서도 1년간 활동을 한 뒤에 프리랜서로 뛰며 지금까지 오게 됐단다. 그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방송 관련 모니터링 일을 계속 하신 건지를 물으니까 그렇단다.

“지난 1999년에 YMCA 어린이영상문화연구회에서 모니터 교육을 받게 된 적이 있었어요. 그 교육을 마쳤는데 거기에 계속 회원으로 남아달라는 제의가 있어서, 연구회에 남게 됐고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그러다가 2004년인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어요. 장애우 관련 프로그램의 모니터링을 담당해달라는 요청이었죠. 그런데 저는 그 전까지 장애우 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거의 안 봤거든요.”
거기까지 얘기를 듣고 있는데, 백수정 씨는 몇 초의 침묵을 잇다가 불쑥 “그런데 왜 안 봤냐고 안 물어보시네요?”라는 역질문을 던지며 크게 웃었다. 자신이 방송에서 하는 장애 관련 프로그램들을 안 본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란다. 너무 뻔한 내용이었고, 드라마나 영화나 다른 프로그램 모두 비슷비슷한 패턴으로 진행하며 결론을 내리니까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구소에서 제안을 받은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모니터링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내려지는 결론은 역시나 똑같았단다.

“매번 새로운 시도인 양 포장을 바꿔도 여전히 변한 게 없었어요. 장애우의 현실과 실제를 바라보는 방송의 시선이라는 게 고정된 채 굳어 있다는 사실만 재확인했던 거죠. 그래서 ‘아, 이건 정말 문제가 있구나.’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연구소의 방송모니터단이 기존에 있기는 했지만, 제가 참여하고 난 이후부터 전문화가 이루어졌대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느끼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참여하고 난 뒤부터 보다 전문화되고 세분화됐다는 얘기는 계속 듣고 있어요.”

TV는 나의 친구
그럼 지금 하시는 일이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일인지를 물었다. 대답은 확실한 긍정으로 되돌아왔다. 스스로 재미가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란다.

“왜냐하면… 저는요. 어릴 때부터요. TV가 곧 저의 친구였거든요. 책도 저의 친구였지만, TV가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늘 보며 지냈죠. 어릴 때는 무조건 재미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점점 문제의식을 갖고 보기 시작한 게, 제가 미국에 가 있었을 때였어요. 여기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미국에 가서 대학을 다녔죠. 현지에서 유아교육을 새롭게 공부하면서 TV 또한 계속 관찰하며 지냈는데, 거기는 유아 프로그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굉장히 좋게 만들어지고 있더라고요. 방송에서 하는 유아 프로그램과 어린이 프로그램 말이에요. 저는 그게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구성작가를 해야겠다 다짐을 하게 됐죠.”

어떤 면이 좋았고 무엇이 마음에 들었냐고 물으니까, 백수정 씨는 전문가다운 분석으로 다양한 부분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유아기는 연령별 발달단계가 전부 다 다르다. 그래서 그 대상 연령에 맞는 구성이 필요한 건데, 미국에서는 그런 것들이 체계화된 오랜 연구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모니터링을 해보니까, 우리의 방송은 모든 프로그램들이 거의 엇비슷하게 기획 단계부터 ‘빨리빨리!’로 통일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 관련 프로그램 역시 예측이 가능한 내용으로 복사하듯 재생산되기만 한다는 것이다.

“오랜 연구를 해서 만들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아세요? 당사자 입장이 되면 할 수밖에 없는 사실과 진실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방송도 ‘빨리빨리’의 틀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눈높이로 충분한 시간을 가진 상태에서 진실을 들여다보며 만들어야 해요. 묵은지가 맛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잖아요. 오랜 기간 삭힌 것이 제대로 된 맛을 내는 것처럼, 장애 관련 프로그램들도 세밀한 기획과 대상에 관한 연구를 통해 완성도 높게 준비되고 제작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문제들을 아무리 지적해도 먹히지가 않는단다. 우리나라의 시청자 정서가 방송에 요구하는 일반적인 수준이 있고 그걸 맞춰야 하는 제작자의 측면이 있다고 해도, 장애우 당사자의 입장을 진솔하게 대변하지 못하는 결과만 매번 반복하는 건 잘못됐다는 것이다. 결국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게 하던 버릇대로 다시 준비되고, 고정관념화 되어 일정 수준만큼만 얘기하는 것이며, 매번 비슷한 패턴의 매너리즘 같은 게 연이어질 뿐이라는 지적은 상당히 정확한 견해이다. 

   
“저는 장애 문제나 어린이 문제나 노인 문제나 다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사회가 인간 중심으로 가야만 한다는 기본 전제이기도 해요. 인간 중심으로 갈 때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돼요. 당사자가 우선이잖아요. 눈높이를 당사자에게 맞춰야 하고, 방송 역시 그렇게 변할 필요가 있어요. 장애우는 장애우 나름대로의 눈높이가 다른 법인데, 그것들을 전부 다 존중해주는 방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제 사회정책 분야에서도 좀 더 당사자 쪽으로 다가가야만, 모든 정책들이 당사자들도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는 거예요.”

성인이 된 다음에야 깨달은 장애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열띤 대화를 한참 나누다 보니, 주고받은 의견 내용이 ‘사람사는 이야기’가 아닌 ‘만난 사람’의 수준으로 수직상승을 해버렸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꿀 겸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좋은 말씀을 잘 들었다는 인사와 함께, 개인적인 취미가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를 얘기해달라고 했다. 전문가다운 발언과 손짓을 이어가던 백수정 씨는 취미라는 말을 듣자마자 함박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 역시 걸작(?)이었다. “저요? 수다 떠는 게 취미인데요.” 함박웃음이 테이블 전체로 퍼져나갔음은 물론이다. 그럼 ‘수다’의 주된 소재와 주제가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고 캐물었다.

“그건 그때그때 다르죠. 제가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패션이 주제가 될 때가 많고, 방송 환경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눠요. 연애담도 많이 나누고, 남성상(像)에 대한 얘기도 즐겨하는 편이에요.”

개인적인 생활신조나 좌우명 같은 게 있는지를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글쎄요….”라는 한마디. 그래서 평소에 좋아하는 말이나, 꼭 지키고 싶은 사항들을 얘기해도 괜찮다고 했다. 백수정 씨는 시선을 잠시 허공에 던졌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흐르는 대로 그냥 살자.’라는 말을 자주 되새김질한다고 한다. 강물이 흐르듯이 말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맞는 거지, 개인적으로는 거창한 계획을 세워가며 거기에 맞춰가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삶 역시 계획대로 안 됐던 부분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대목에선 아주 작은 한숨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됐다 한 뒤, 사족(巳足) 같은 한마디가 그의 입을 통해 뒤따랐다. “그러다 보니까 돈벌이는 안 되고….” 그래서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후렴 같은 한마디를 곧장 덧붙여 주었다. “그건 저랑 비슷하시네요, 뭐.” 그 한마디가 약효를 발휘했을까? 한숨이 맴돌았던 그의 얼굴이 일순간 박장대소로 돌변했다. 즐거운 분위기를 만끽할 겸 인터뷰와 상관없는 사담(私談)을 얼마간 나눈 뒤, 약간 무거운 내용이라는 전제를 달며 다음 질문을 이었다. 태생부터 장애를 가졌다는 건 본인의 선택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장애라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것이 아픔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 의미를 허심탄회하게 말해줄 수 있는지를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굉장히 편안해요. 그 내용이 무거울 필요도 없고요. 일단 저에게 있어 장애라는 것은 어릴 때의 느낌과 중간의 느낌, 더불어 지금의 느낌이 조금씩 달라요. 어릴 때는 친구 사귈 때 불편한 점이 있었던 것 같고요. 그렇기 때문에 장애에 대해서 ‘내가 장애를 가졌구나’ 생각은 안 했지만, ‘좀 다르게 보는 시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초등학교 때나 중고등학교 때는 장애가 있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던 게 제가 특수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라는, 그런 영향이 있을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일반적인 학교, 다시 말해 비장애 위주의 학교를 다녔다면 어땠을 것 같은지,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는지를 물었다. 그 대목에 대해서는 이미 확고한 입장이 간직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에 자신이 일반학교를 다녔다면, 정말로 그랬다면 조금 더 당돌해지지 않았을까 싶단다. 장애가 선천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후천적인 장애하고는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장애라는 현실에 대해 불편함이 없었단다. 선천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아, 내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며, 자신의 장애와 친숙해질 수 있는 기간이 훨씬 더 많았다는 대목에선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인지 저는 장애에 대한 불편함은 오히려 성인이 된 다음에 느꼈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계단을 올라갈 때나 그런 면에서 불편할 뿐이지, 인생 차원에서는 별다르게 문제시하지 않았었거든요. 그 전환점이 됐던 게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을 때였어요. 대학에 갔더니 처음에는 학우들이 저한테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했어요. 그런데… 하나하나 떨어지더라고요. 제 곁에서 사라지는 애들을 바라보게 됐을 때…, 거기에서 당장의 불편함을 느꼈다기보다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그때 느꼈어요. ‘아, 이런 게 사회구나….’ 그걸 반복적으로 재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요. 유아교육을 전공한다는 애들마저 저 정도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는 건가, 그것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던 거죠.”

참으로 진솔하게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었다. 같은 학과 학우들의 심정적 변화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그 변화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던 스스로의 상처 같은 게 얼마나 깊었는지는 충분한 공감대를 만들면서도, 듣는 것만으로 제3자의 입장에 머물러야 함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역시 사회는 사회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조금 격하게 표현한다면, ‘더럽고 치사해도’ 앞으로 같은 길을 같이 가야만 할 상황일 때는 일부분 눈 감고 접으며 모른 척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게 사회라는 괴물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 학우들이라 해도 같이 지내야 할 상황이 연이어 지속됐을 텐데, 실망을 접어두더라도 그들과 친해져야겠다는 나름의 노력 같은 건 없었는지를 말이다. 대답은 천천히 이어졌다. “저는요…,” 오늘의 만남에서 백수정 씨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표현은 바로 ‘저는요’라는 한마디이기도 했다. 그 표현으로 언급이 시작되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 곧바로 연결됐기에, 이번 역시 가슴에 담겨 있던 언어들이 쏟아질 거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저는요. 눈에 띄기 위해서 한다기보다는, 그 사람들의 인생과 의식을 좀 겪어보고 싶었어요. 제가 도움을 받는 인생만 사는 게 아니라, 도움을 충분히 전해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제가 그들한테 뭔가를 하나라도 더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제가 아는 게 더 많아야 그들 앞에서 당당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이런 말을 이 자리에서 한다는 게 좀 그렇기는 하지만…, 시험을 볼 때도 저는 일부러 답안지를 보여줬어요. ‘컨닝’을 하라고요.”

두 번째 터닝 포인트 - 아버지의 부재(不在)
‘사람사는 이야기’의 인터뷰 만남을 진행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질문하는 내용이 두세 가지 있다. 그때그때마다 대화의 방식과 주위 환경이 매번 다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했던 질문조차 꺼내지 못한 채 넘어가버린 적도 몇 차례나 발생하곤 했다. 실수인지 실패인지, 그런 경험이 반복적으로 쌓이다 보니까, 마지막에 해야 할 질문을 아예 처음부터 묻고 시작하는 방식 또한 종종 사용하기도 한다.

꼭 질문하는 마지막 내용이라는 건 항상 동일하다. 이 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인생의 선배로서 같은 장애를 가진 후배들에게 전해줄 조언, 덕담, 희망의 메시지 등을 부탁드리는 것이다. ‘TV는 내 친구’였다는 백수정 씨의 고백이 커다랗게 가슴에 와 닿은 이유가 그것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현재 집에 있든, 학교를 다니든, 직장을 다니든, 아니면 시설 안에 있든 간에,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오고 실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 게 방송 모니터링 같은 업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일이 TV만 보고 있으면 무조건 다 해결되는 게 아님은 분명하기에, 그 나름의 노하우나 조언 같은 건 꼭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판단이 만남 이전부터 머릿속에 가득하기도 했다. 오늘의 주인공 백수정 씨는 어떤 소중한 의미를 전해줄까 싶어, 조언이나 희망의 메시지를 꼭 말씀해 달라고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제가 조언을 드릴 만한 그런 입장이나 인생은 아직 아닌 것 같고요. 메시지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제가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같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게 개별적인 개성이라고 본다면, 장애 문제도 개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사회를 달라지게 만들고 싶다면, 당사자들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직접 움직이면서 보다 더 능동적이 됐을 때, 이 사회의 변화도 이끌 수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자신의 꿈도 그런 과정을 통해 이뤄갈 수 있는 것이고요. 변화를 이끌려면 움직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아주 진지한 의견을 제시하던 도중에, 백수정 씨는 말줄임표와 같이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의미 같은 표정을 얼마간 지은 뒤 입을 열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라고 한다. 언제 떠나셨냐고 물으니까, 자신이 미국에서 한창 공부하고 있던 당시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국을 하게 됐고, 결과적으로는 미국에서의 학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대학은 여기에 와서 마무리를 짓게 된 셈이죠. 그래서 제가 대학 생활을 좀 오래한 편이라는 말씀을 계속 드렸던 거예요. 그런데 그 일이 왜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나 하면, 아버지의 부재(不在)라는 현실을 실감했을 때부터 저의 삶 전체가 뒤바뀌고 재정립이 됐거든요. 간단히 말해서, 이제부터는 저의 것을 제 스스로 찾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거예요. 그 이전까지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다고 굳게 믿으며 지냈거든요. 아버지라는 든든한 힘, 영원히 믿고 기댈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때론 세상에서 잠시 숨고 싶을 때 쉴 만한 자리를 만들어 주시는 분, 그런… 그러한 믿음 같은 게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존재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제 자신의 문제를 직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거죠.”

세상 누구나 ‘희(喜)노(怒)애(哀)락(樂)’의 관점으로, 또한 사랑과 욕망 같은 마음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 한 가지가 놓여 있다. 아버지라는 쉼터, 어머니라는 보금자리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기에 자유로운 삶의 영위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 쉼터와 보금자리가 단번에 빈자리로 변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빈자리의 크기와 의미가 얼마나 엄청나고 소중했던가를 뒤늦게, 아주 뒤늦게 깨달으며 가슴을 내리치게 된다.

백수정 씨한테 ‘아버지’라는 의미는 남다르게 컸던 모양이다. 선천적인 뇌병변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딸이 책을 좋아하고 나름 열심히 공부하며 지냈을 때, 아버지는 딸이 언제나 달려가 기댈 수 있는 보호막으로 존재하셨던 것 같다. 그랬기에 미국에 유학까지 간 딸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네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주 조그마한 규모라도 유치원 하나를 만들어 주겠다!’ 백수정 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그 유치원이 자신의 삶 전부의 목표였단다. 말 그대로 당시까지의 인생 최종 목표가 그것이었다는 얘기였다.

   
“네, 그때까지는 그게 제 인생의 최고이자 최종 목표였어요.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꿈이 바뀌게 됐죠. 꿈이 바뀐 게 아니라 현실이 바뀐 거예요. 훨씬 더 직접적으로 제 삶을 개척해야겠다는, 그런 현실의 벽을 갑자기 느끼게 된 거죠. 그게 제가 살아오면서 두 번째로 맞이했던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저의 전공을 살릴 방법이 뭘까 하며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죠.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한국의 현실적 상황은 제가 유아교육교사를 직접 할 수 없겠다는 답을 스스로 내리게끔 만들어 준… 저의 상처 같은 결론이 됐던 거예요.”

장애우가 등장하는 방송 화면마다, 왠지 슬프고 무거운 음악이 뒤로 흐르는 이유는 뭘까. 그런 장면에는 항상 장애우가 눈물을 짓고 한숨을 내쉬거나, 아니면 먼 하늘을 바라다보는 장면으로 처리하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신나고 희망이 넘치는, 그래서 보는 이들마저 덩달아 힘이 치솟는 영상으로 완성하면 안 될 만한 ‘뭔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일까?

백수정 씨의 모니터링 작업을 기대하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다. 장애에 대한 일그러진 선입관을 태연하게 방송하고 반복하는 이들한테, 가차 없는 비판과 수정 요구와 재발 방지를 발언할 수 있는 책임자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첨언의 형식으로, 한 가지 사항을 덧붙이고 싶다. 이 글의 시작 부분에 언급했던 ‘천천히 서두르라’ - 그건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가다가 보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네 인생의 의미가 그 한마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하다. 서두르다 보면 서두름 자체로 인해, 정작 중요한 걸 생각지도 못하는 채로 여기저기 놓치며 살아가게 되는 게 현실의 삶이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달리고 있을 때, 필요 이상의 과속으로 이리저리 끼어들며 내달리는 차들은 결국 몇 킬로미터 전방의 휴게소에서 나란히 주차하며 만나게 된다. 더 빨리 달리려고, 어떻게든 빈자리를 차지하려 애쓰며 교통법규까지 모조리 무시한다 해도, 결국 도착 시간과 도착 지점의 차이는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얼마나 서두르며 앞으로만 내달렸을까.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도 돌아볼 여유 없이, 뒤처지지 않으려는 조바심 하나로 얼마나 가슴 졸이며 살았던 걸까. 더 빠르게, 더더 빠르게, 더더더 빠르게…, 그렇게 ‘빨리빨리’를 추종하는 인생의 결론은 과연 무엇으로 남겨지게 될 것인가. 이탈리아의 속담 하나를 남겨두는 걸로, 마지막 ‘물음표’와 ‘느낌표’를 하나씩 새겨놓는 게 나을 것 같다. ‘천천히 가는 사람은 실수 없이 간다. 실수 없이 가는 사람이 멀리 간다. (Chi va piano, va sano ; chi va sano, va lontano)’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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